온지유의 인생은 운이 좋다고 하면 참으로 운이 좋았다. 행복한 가정에서 많은 사람이 그녀를 아껴주었다.그녀의 불행은 대부분 감정적인 부분에서 온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이 너무 안정적이어서, 감정에서만큼은 파란을 겪어야 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온지유의 말을 들은 인명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곁에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 눈동자는 유난히 따뜻해 보였다.“그렇다기보다는... 지유 씨가 저한테 새 삶을 줬어요.”인명진은 더 이상 회피하지 않았다. 이제는 많은 일을 함께 마주해야 할 때였다.“기억이 돌아오면 알게 될 거예요.”그가 몇 번이나 구해준 걸로 봐서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 정도는 있었다. 그의 정체가 단순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의심은 여전했지만 말이다.이제 그녀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인명진뿐이었다. 온지유는 그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명진 씨 친구는 있어요?”“아뇨.”온지유가 다시 물었다.“왜요?”“저는 친구가 필요 없어요.”“부모님은요?”“누군지도 몰라요.”“많이 외롭겠어요. 친구도 가족도 없는 삶이라니... 상상이 안 가요.”온지유는 갑자기 그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신이 그를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신은 그에게 뛰어난 외모와 의술을 주었지만, 동시에 끝없는 고독도 안겨준 것이다. 기쁨을 나눌 사람조차 없다는 것은 분명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인명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만약 온지유가 묻지 않았다면 그는 외로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그런 감정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매일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찼기에, 그런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그래도 이렇게 잘살고 있잖아요.”인명진은 무심하게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요. 이제 제가 친구 되어줄게요. 슬프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 언제든 말해요. 제가 기꺼이 들어줄게요.”온지유는 그렇게 인명진에게 마음을 열었다.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그녀는 이별에 빠져서 소중한 인연을, 즉 새로운 만
인명진의 표정은 아주 복잡했다. 속으로는 만약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온지유의 손조차 감히 만지지 못하는 겁쟁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그래도 인명진은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온지유의 손목에 있던 염주의 붉은빛이 점점 짙어졌다. 그걸 발견한 온지유는 인명진에게 물었다.“이 염주 색이 변한 것 같지 않아요?”인명진은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했다.“그래요?”햇빛 아래로 자리를 옮기자 붉은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진작 색이 바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짙어졌어요. 이거 명진 씨 염주 맞죠? 명진 씨는 아무것도 못 느꼈어요?”인명진은 무심코 주먹을 꽉 쥐다가 웃으며 말했다.“그거 아마 가짜일 거예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딱히 확인해 본 적 없어서요.”“가짜라면 왜 지니고 다녔어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근데 피가 있는 염주라니, 살짝 이상하기는 해요.”그녀는 염주를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약초 향에, 약간의 피 냄새도 나요. 정말 이상해요. 명진 씨는 몰랐어요?”그녀는 또다시 물었다.인명진은 온지유의 통찰력이 이렇게 강할 줄 몰랐다. 그녀는 모르는 것이 많더라도 이상한 점은 빠르게 알아챘다. 어떻게 설명해도 납득시키기 어려워 보였다.“됐어요, 인제 그만 생각할래요. 명진 씨가 이 염주를 준 이후로, 저는 정말 보호받는 느낌이었어요. 몸도 한결 가벼워졌고요.”온지유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그렇게 지쳤던 몸이 벌써 기운을 차렸다. 어쩌면 이 염주의 효과일지도 몰랐다.온지유가 질문을 멈추자 인명진은 몰래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자고 일어나니 배고프지 않아요? 제가 밥 해줄게요.”“명진 씨 요리도 할 줄 알아요?”온지유는 인명진의 집에 가본 적 있었다. 심지어 그가 일하는 곳도 가본 적 있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생활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요리라는 것을
“처음이에요.”온지유는 눈썹을 꿈틀댔다.“처음인데 이 정도면 잘한 거예요. 본인 솜씨 좀 맛보세요. 인명진 씨는 요리에 재능이 있으니까.”반 시간 뒤, 인명진은 주방에서 나왔다.탄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을 보아 인명진이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의미였다.하지만 인명진이 음식을 테이블로 들고 왔을 때 온지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두 눈 휘둥그레 뜨며 인명진을 보았다.인명진은 행여나 어떤 음식인지 알아보지 못할까 봐 담담하게 설명도 해주었다.“이건 닭 염통, 이거는 닭 간... 전부 닭의 내장 부위에 속하죠. 이건 닭 몸통이에요. 다리 살이라 퍽퍽하지 않을 거예요...”인명진의 설명에 그녀는 꼭 해부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그녀는 심지어 인명진이 요리를 할 때 어떤 모습으로 닭을 해부했는지 상상이 가기도 했다. 보기만 해도 식욕이 뚝 떨어지는 그의 요리였다.오히려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온지유가 젓가락을 들지 않자 인명진이 물었다.“왜 그래요? 맛없어 보여요? 전 최선을 다해 만들었어요.”“그런 게 아니라...”온지유가 말을 이었다.“굳이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요. 혹시 다른 요리도 있어요?”“네, 감자 칩을 만들어 봤어요.”인명진은 주방에 남아 있는 감자를 보곤 낭비하지 말자는 생각에 감자를 으깬 후 오븐에 넣었다.온지유는 그제야 마음이 놓여 말했다.“그럼 감자 칩을 먹을게요. 한동안 안 먹었더니 감자 칩이 먹고 싶네요.”“알았어요.”인명진은 얼른 오븐으로 달려가 감자 칩을 꺼내왔다.그 순간 인명진은 우울해졌다. 온지유는 새까만 감자 칩을 보았다. 탄 것이 분명했기에 젓가락을 들 수 없었다.“미안해요. 레시피에 있는 시간대로 타이머를 설정해 두었는데 탈 줄은 몰랐네요.”인명진은 레시피를 엄격하게 지키며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새까맣게 타버렸다.그 말인즉 그가 본 레시피는 잘못된 레시피라는 말이었다.온지유는 아주 놀랐다. 이렇게나 요리를 못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이건 괜찮아요.”
인명진은 휙 피해버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길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온지유는 당연히 의심했다.“왜 피가 아직도 멈추지 않은 거예요?”상처가 생긴 지 오래되었다. 아무리 완전한 건강을 되찾지 못했다고 해도 지금도 계속 피를 흘릴 정도는 아니었다.그의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긴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인명진은 얼른 소매를 내리며 가렸다. 하지만 떨어지는 핏방울은 가릴 수 없었다.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핑계를 댔다.“아까 요리하면서 실수로 베었나 봐요. 괜찮아요.”온지유는 당연히 속지 않았다.“메스를 항상 손에 들고 있던 사람이 그런 실수를 했다고요? 날 속일 생각하지 말아요!”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변명을 믿지 않았다.“전혀 요리할 때 생긴 상처가 아닌 것 같네요. 대체 어쩌다가 다친 거예요?”인명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말하지 않으니 온지유는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인명진의 손을 잡으며 당긴 후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의 팔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임시로 치료한 것인지 제대로 감겨 있지 않았다.어쩌면 혼자 치료한 것이라 한 손으로 제대로 감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실수로 다친 거예요.”인명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전에도 봤다시피 어차피 제 몸엔 상처가 많잖아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닌 거죠.”말을 마친 그는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다.온지유도 더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하지만 온지유는 전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인명진 씨가 그런 거예요?”인명진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빼냈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온지유가 말했다.“실수로 베인 거라면 어떻게 마침 손목을 벨 수가 있겠어요? 게다가 붕대 감은 것도 깔끔하게 감았잖아요. 그러니 스스로 상처를 냈을 가능성이 아주 크죠. 게다가 원래는 이쪽에 상처가 있었잖아요. 의사가 이렇게 허술하게 상처를 치료해줄 리가 없잖아요. 그 말인즉슨 인명진 씨가 혼자 상처를 치료했다는 의미겠죠. 그것도 아주 급하게. 그래서 피가 뚝뚝
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인명진을 보았다. 인명진은 아주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그에겐 더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온지유도 알고 있었다. 인명진이 지내던 곳은 원래부터 남에게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그가 말했던 것처럼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랐다.그럼에도 온지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사람이면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자랐으니 말이다.“왜 저한테 피를 나눠준 거예요?”온지유는 속으로는 거부하고 있었다.“쓰러진 건 시간이 조금 지나면 깨어날 수 있었어요. 인명진 씨가 굳이 팔에 상처를 내가며 피를 저한테 먹일 필요가 없었다고요. 왜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거예요? 전 인명진 씨가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거 원치 않아요.”인명진은 가볍게 피식 웃었다. 아마도 그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괜찮아요. 피를 조금 나눠준 것뿐인데요, 뭘. 그 정도로 죽지 않아요.”“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리고 다음에 제가 쓰러져도 그러지 말아요!”온지유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저랑 같이 지내게 된 이상 인명진 씨는 존중받아야 마땅할 사람이라고요. 희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 누구의 희생도 원치 않아요. 인명진 씨에게도 자유가 있어요. 그러니 자신을 너무 속박하지 말아요.”온지유가 이런 말을 한 건 그저 그에게 앞으로 더는 그런 일 하지 말라고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길 바랐다.인명진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했다.“알았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제가 한 말 꼭 기억해요. 우리는 친구예요.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저한테 말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와줄 테니까요.”온지유는 계속 말을 이었다.“참, 인명진 씨랑 같이 있던 여자 말이에요. 그날 이후로 홍혜주 씨를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걱정돼요?”“불쌍하잖아요.”온지유는 비록 그때의 기억이 없지만 홍혜주가
백지희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여이현과 온지유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보았는데 왜 이렇듯 쉽게 이혼해 버린 것일까.“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여이현 그 쓰레기가 마음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거 아니야? 안 되겠어, 내가 찾아가서 따질 거야!”온지유는 이미 현실을 받아들였다.“그러지 마. 난 오히려 이혼 잘한 것 같아. 지금 돈도 있고 집도 있고 편하게 생활하고 있잖아. 난 앞으로 평생 일 안 하고 놀아도 문제없다고. 그러니까 그냥 축하해줘.”“그래도 그 여우한테 좋은 일만 했잖아!”백지희는 온지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좋은 일한 적 없어. 그러니까 이제 더는 신경 쓰지 마. 다 지나간 일이잖아.”“그래, 알았어. 난 그냥 네가 우울해하고 있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내가 곁에 있어 주려고 했더니 넌 전화도 안 받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백지희는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도 온지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적응 능력이 뛰어났던 온지유였기에 당연히 여이현의 곁에 오래 머물 수 있었던 것이다. 쓰러지지 않는 잡초처럼 무슨 일을 당해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만약 그녀였다면, 여이현 같은 남자와 한시도 버틸 수 없어 바로 이혼했을 것이다.“난 괜찮아. 조금 더 쉬고 출근할 생각이야.”온지유는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다.“너 임신했잖아. 태교에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니야?”“괜찮아. 난 아직 일할 수 있어. 어차피 힘쓰는 일도 아닌데 뭐.”백지희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온지유의 생활이었으니 말이다. 걱정되긴 했지만 온지유가 원한다면 어쩔 수가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온지유는 티브이를 켰다.백지희에게서 이미 소식을 들었던지라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노승아는 아주 거만했다. 대범하게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자신이 여이현의 여자친구라고 밝혔다.원래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보려고 애를 쓰던 사람이었으니 이번이
“알았어요.”인명진은 온지유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온지유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 중심으로 갔다.시내는 그녀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여이현이 위치까지 고려해 그녀에게 별장을 선물해 주었기 때문이다.사람이 많은 시간이었던지라 그녀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초록 불이 켜지지 그녀는 얼른 자전거를 밀며 가려고 했지만,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도와드릴게요.”온지유는 뒤돌아보았다. 젊은 남자가 그녀의 자전거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아마도 그녀가 임산부였던 탓에 자전거를 혼자 밀기엔 힘들어 보여서 도와주겠다고 한 것 같았다.그녀는 캐주얼한 옷차림에 머리는 곱게 땋은 뒤 짚 모자를 쓰고 있었다. 품이 좀 너른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배가 불룩 나왔다.옷차림만 임산부였을 뿐이지 다른 곳은 전혀 임산부로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직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정도로 힘들지 않았지만, 호의를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기에 입을 열었다.“고맙습니다.”그녀가 먼저 횡단보도를 건너자 남자는 그녀의 자전거를 밀며 따라왔다.그녀는 계속 자전거 도로로 걸어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난히 지나가는 자전거가 적었다.아니, 거의 없었다.고개를 돌려 건너편을 보았다. 그곳엔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쌩쌩 지나가고 있었다.그런데 그녀가 걷는 길엔 아무도 없었다.이상해도 너무 이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한 금은방으로 왔다.들어가자마자 앉아 있던 금은방 사장이 안경을 꼈다. 겉보기엔 50대 중반으로 보였고 키도 별로 크지 않았다. 온지유가 들어오자 사장이 물었다.“뭘 팔러 오셨어요?”“반지를 팔려고요.”온지유는 미리 빼둔 반지를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다.“이건 얼마에 팔 수 있을까요.”사장은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그동안 다이아몬드 반지를 꽤나 많이 받아봤지만 이렇게 큰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는 드물었다. 소장 가치가 엄청났기에 그는 바로 확대경으로 자세하게 관찰하며 말했다.“1
온지유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왔을 때 금은방 사장은 전전긍긍하며 문 앞에 서 있었다.그의 이마엔 식은땀이 가득했다. 꼭 두려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그녀가 나오자마자 사장이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아이고, 아가씨. 드디어 나왔네요. 이 반지는 그냥 팔지 말고 가지고 있어요. 나도 안 받을 테니까!”그는 얼른 반지를 온지유에게 돌려주었다.“네? 왜 갑자기 안 사시겠다는 거예요?”온지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1000만 원에 사시겠다면서요.”“안 사, 안 살 거예요!”사장은 그녀를 재촉했다.“이 반지를 살 돈이 없으니까 얼른 반지 들고 나가요. 차라리 다른 금은방에 가서 팔아요!”그렇게 온지유는 쫓겨났다.고개를 돌리자 사장이 급하게 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 셔터까지 내리는 것을 보아 오늘 장사는 그만둘 생각인 것 같았다.그런 사장의 모습에 온지유는 너무도 이상했다.그저 화장실에 갔을 뿐인데 왜 갑자기 저러는 것일까?온지유는 핸드폰을 꺼내 사장이 조금 전 그녀의 계좌로 입금한 1000만 원을 보았다.“아직 돈도 못 돌려 드렸는데...”가게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마치 1000만 원도 필요 없는 듯했다.너무도 수상했다.온지유는 남의 돈을 거저 가질 생각이 없었다. 사장이 사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녀는 돈을 돌려주었다.이내 다른 곳으로 갔다.근처의 금은방에 전부 다 들러보았지만, 그녀가 보여준 반지를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사지 않겠다고 했다.원래였다면 응당 처음 들어간 금은방 사장처럼 좋아하는 표정을 지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다들 거부하고 있었다.그렇다는 건 분명 뭔가 있다는 소리였다.온지유는 그냥 가지고 있기로 했다. 어차피 팔지도 못하니 말이다.자전거를 타고 이내 대형 마트로 갔다.퇴근 시간이었던지라 마트엔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를 주차해둔 뒤 평소에 즐겨 마시던 요구르트를 샀다.그리고 과일과 채소, 심심하면 먹을 간식도 샀다.어느새 한가득 사 버린 그녀였다.힘이 조금 셌던 그녀는
“아니에요. 저는 그냥... 그냥 적응이 안 된 것뿐이에요.”여희영은 어디에라도 숨고 싶었다. 광고부 직원인 그녀는 이태훈과 나눌 만한 얘기가 없었고 여이현이 왜 자신한테 이 일을 시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후 그룹과 어떤 광고 협력이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불안한 마음으로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여이현이 회사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희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여희영 씨, 아니... 여 본부장님, 차 한잔하실래요?”이태훈은 여희영이 여이현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이태훈이 무엇을 원하는지 여이현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도 자신의 의도를 숨길 필요 없었다.차 한 잔 마시자 이태훈은 술을 마신 듯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는 여이현이 이런 방법을 쓸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이태훈 씨, 무슨 프로젝트를 논의하시려고 오신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여희영은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만약 자신이 맡은 업무가 아니면 핑계를 대고 거절할 생각이었다.이태훈은 일어나서 물 한 잔을 마셨지만 어지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나서 실눈을 뜬 채로 몇 걸음 걸어가 여희영 앞에 섰다.“여희영 씨, 지금 뭐 하려는 겁니까? 제가 여진 그룹을 너무 높게 평가한 건가요?”“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여희영은 이태훈의 경멸스러운 말투를 듣고 그를 밀쳐내며 한쪽으로 물러섰다.“이태훈 씨, 계속 사적인 얘기를 하실 거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는 시간이 많지 않거든요.”“차에 약을 탄다는 건 저한테 뭐라도 해보겠다는 거 아닌가요?”이태훈은 비웃으며 두 걸음 다가가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까이 대며 말했다.“그런데 만약 저랑 희영 씨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면 저야 너무 좋죠. 하지만 그 대신 앞으로 희영 씨와 여진 그룹에 대한 생각이 바뀔 것 같네요.”그 말을 들은 여희영은
집에 돌아온 뒤, 온지유는 여이현과 간단히 통화하고 변호사를 시켜 박민정에게 연락을 보냈다.이 일은 이렇게 그녀의 손에서 완벽하게 끝을 맺었다.일을 끝낸 뒤에 온지유는 아이 방을 찾아가 애가 한창 꿈나라 여행 중인 걸 확인한 뒤 내려와서 저녁준비를 했다.방문이 닫히자마자 자고있던 별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속삭였다.“외할아버지, 아까 말한 거 할아버지는 다 들으셨어요?”“그럼, 다 들었지. 누가 너희를 괴롭힌다며?”“그래요,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꼭 우리를 도와주셔야 해요. 누구도 우리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요, 우리 엄마가 괴롭힘당하면 외할아버지가 괴롭힘 당하는 거랑 같아요.”법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별이가 말을 이었다.“외할아버지 돈 많아요? 엄청 엄청 아주 많이 있어요? 저 먼저 빌려줄 수 없어요?”“이 할아버지는 돈 좀 있으니 별이는 걱정하지 마. 돈 문제든 아니든 이 할아버지가 꼭 너를 도와주마. 넌 기다리고 있거라, 다 이 할아버지가 알아서 할 터이니”법로는 즉시 사람을 경성으로 보냈다.별이의 말이 맞았다. 온지유를 건드리는 건 그를 건드리는 거와 다름없었다.전화를 끊고 법로는 온지유에게 전화하려 했으나 별이의 당부가 생각나 결국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다.그는 홀연 일어나 결국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경성으로 가는 사람에게 시켜 어둠 속에서 일을 해결하기로 결저했다.한편 여진그룹 쪽, 여이현은 금방 장 사장을 접대해 보낸 뒤 건물 최고층에서 그가 떠나는걸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비서에게 지시했다.“이태훈에게 연락해. 장 사장이 우리를 찾아 협조하겠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줘.”네 하고 나간 비서가 몇 분 후 돌아와 보고했다.“대표님, 이태훈 씨 지금 오고 있답니다. 그리고 여희영 씨께서 회사에 계시는지 궁금해하십니다.”“알려줘, 고모님께서 지금 회사에 있다고. 그리고 고모님께 연락 넣어서 지금 당장 회사로 오라고 해. 내가 급한 일로 부른다고 하면 될 거야.”일을 간단히 처리한 후, 여이현
장 사장은 온지유의 눈길에 잔뜩 겁을 먹었다. 오랫동안의 판매 경험 덕분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겁을 먹고 줄행랑을 놓았을 것이 분명하다.한참 넋 놓고 있던 장 사장은 웃는 얼굴로 여이현에게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정말 부탁합니다. 저도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예전에 이씨 그룹과 일을 함께하지 않으셨나요? 왜 지금은 하지 않으시죠?”여이현은 돌려 물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대답을 기다렸다.장 사장은 안색이 많이 굳어지더니 오랜 고민 끝에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정상적인 관계라면 이리도 입을 열기 힘들 리가 없었기에 여이현은 무언가 눈치를 채고 눈빛으로 온지유에게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이때 온지유의 핸드폰이 울렸다. 별이 선생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실례합니다. 밖에서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온지유는 회의실을 떠나서 전화를 받고 물었다.“선생님, 저는 별이 엄만데요. 무슨 일이죠?”“별이 어머니, 학교에 한 번 와보셔야 될 거 같아요. 별이가 같은 반 친구와 싸워서 애가 다쳤어요. 지금 애 부모님께서 꼭 별이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하세요.”‘별이가 어떻게 애들이랑 싸울 수 있을까? 개학한 지 얼마 안 되는데. 아직 서먹서먹할 텐데 무슨 일로 싸웠지? ”온지유가 급히 학교에 도착하자 사무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사과 필요 없어요! 배상해요. 배상!”들어 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라 누군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온지유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만약 저희 별이 잘못이라면 얼마든지 배상해드릴게요. 하지만 별이 잘못이 없다면 저희는 배상할 생각 없어요.” “그쪽이 누군데요?”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은 기세등등하여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있었다.이 틈을 타 온지유는 그 여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붉은색 원피스에 흰 진주 목걸이, 펜던트 귀걸이 그리고 다이아몬드반지 부잣집 집안임이 분명했다.“성함이 어떻게 되시죠?”온지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방의
여희영은 원망의 눈길로 여이현을 바라보았다.온지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희영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줬다.“죄송해요. 이현 씨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어젯밤에 잘 못 잤죠? 돌아가서 푹 휴식하세요. 제가 점심을 맛있게 차려드릴게요.”“그래도 네가 젤 좋아.”여희영은 온지유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들뜬 마음으로 올라갔다.온지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는 여이현이 꼭 무슨 꿍꿍이가 있는 상인 같아 보였다.그녀는 여이현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껴안고 온몸을 기댔다.“대표님, 무슨 좋은 일이 있어요?”사랑하는 이가 품속에 있는데 남자로서 참을 수 없었던 여이현은 그녀를 꼭 껴안고 진한 키스를 했다.“말해, 도대체 무슨 일인데?” 키스할 때마다 산소 부족이 오는 온지유는 성난 말투로 물었다.여이현이 그녀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어제 고모를 구해준 사람은 이태훈이야.”이태훈? 온지유는 한참을 생각해서야 이태훈이 이씨 가문 도련님이라는 것이 생각났다.‘갠 좀 곤란한 성격인데. 이게 좋은 일이랑 뭔 상관이지?’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의 미소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고모님 젊은이들에게 인기 많네요? 근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죠?”최승현 하나로도 벅찬데 이씨가문까지 더해진다면 여이현과 온지유가 나선다고 해도 방법이 없다. 이씨 가문 지금의 지위로 그런 더러운 수단을 써서 돈을 끌어모을 리는 없었기 때문에 여이현은 이태훈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가령 진짜 음모가 있다면 여진그룹을 해치워버리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여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아닐 거야. 그냥 우연이야. 두 사람의 인연이라고 해야 적합하나?”“인연인지 아닌지 좀 있다가 알게 될 거잖아. 얼른 옷이나 바꿔. 오늘 만날분은 예전에 이씨 가문과 일을 같이 해봤던 분이야. 그분에게서 정보를 깨여낼 수도 있겠다.”여이현은 그 말을 듣고서야 이번 미팅이 생각나 고개를 끄덕이며 온지유에게 칭찬의 키스를 했다
이태훈은 집사로부터 아침밥을 받아쥐더니 하나하나 밥상 위에 올려놓았다. 집사는 이태훈의 이런 세심한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도련님, 제가 할게요.”집사는 여희영이 진짜 이태훈의 여자친군지 아니면 그냥 소개팅을 피하려고 찾아온 가짜인지 떠보기 시작했다.이태훈은 그런 집사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한껏 굳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왜요? 제가 제 여자친구를 돌봐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에요? 제가 몇 년 동안 집을 떠나있으니 규칙을 다 잊으셨나 보네요.”“아닙니다. 전 다만 도련님을 위해서 일을 해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도련님이 혼자 하실 수 있다니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이태훈은 집사를 향해 손짓하고 침대 옆에 앉아 여희영에게 죽을 먹여줬다.“조심해요. 죽이 뜨거워요. 이 죽은 몸이 좋은 죽이에요. 더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제가 다 가져다드릴게요.”“알겠어요. 그럼 약속한 거예요. 두말하기 없기인 거 아시죠?”‘어차피 연기하는데 더 실감이 나게 하면 좋지.’여희영은 애교 넘치는 눈빛으로 이태훈을 바라보았다. 이 장면을 목격한 집사는 이씨 가문 전체에 이 사실을 알렸다.집사가 떠난 한참 뒤에도 이태훈은 여전히 여희영에게 아침을 먹여주고 있었다. 여희영은 그의 손길을 뒤로 피했다.그녀의 거부에 이태훈은 동작을 멈추고 웃음기 찬 얼굴로 아침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그럼 혼자 드세요. 아 맞다. 제 이름은 이태훈이고 경성 이씨 가문 넷째예요.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신분은 어르신들이 주신 거니 자랑할 바는 아니죠.”“그러면 뭐가 자랑거리라고 생각해요?”여희영은 당연히 이씨 가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씨 가문은 후배들에게 아주 엄격하다고 많이 들어봤지만 직접 만나볼 기회는 없었다.이태훈이 처음 만나는 이씨 가문 사람이라 그녀는 호기심이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해낸 사업이야말로 진정한 자랑거리죠. 진정한 사나이가 되려면 가문의 힘을 빌면 안 되죠.”말을 하던 이태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근데 이씨 가문 도련님이 경성으로 돌아왔을 줄이야.”남자가 돌아설 때 여이현은 그가 이씨 가문 도련님 이태훈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태훈은 자유롭기를 좋아하고 규정에 구속되지 않으며 어렸을 때부터 세계 일주를 다닌 유명한 사람이었다.벌써 이렇게 컸을 줄이야.이씨 가문은 후배들의 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가문이라 유용한 인재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품은 꼭 합격 되어야 했다.여이현은 그런 이태훈이 여희영에게 해코지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고 설마 진짜 일이 벌어졌다면 이씨 가문 이태훈과 여희영이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일 것이다. 그는 여씨 가문과 연을 이을 생각을 하며 가볍게 웃었다.“하지만 대표님, 저놈들이 술잔에 탄 약이 효과가 강하다고 소문난 약이에요. 정말 괜찮을까요?”부하의 말에 여이현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정말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될 게 아닌가 생각했다.병원 안, 이태훈이 응급실 문어구에서 기다리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전화 너머에서 무슨 얘길 했는지 이태훈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그 말인즉 할머니께서 꼭 저에게 소개팅을 시켜주시겠다 하셨다고요? 하지만 전 다른 사람에게 정해지는 운명이 싫어요. 좀 도와주세요. 이번 일만 해결해 준다면 제가 호텔 본부장 자리를 내줄게요. 금방 개업한 그 호텔 있잖아요. 매출이 아주 좋대요.”상대방이 뭐라 했는지 이태훈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저에게 방법이 있었으면 지금 이러고 있겠어요?”이때 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 선생님들이 밖으로 나왔다. 이태훈은 전화를 끊고 급히 다가가서 물었다.“의사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약 때문인 거 같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악효과가 좀 강해서 이미 주사를 놓았으니 좀 기다려 보시면 될 거에요. 내일 아침까지 이상이 없으시다면 퇴원해도 좋습니다. 여전히 불편하시다면 약을 더 주사해야 합니다.”이태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사 선생님이 떠난 뒤 병실로 들어갔다.
술을 마신 여희영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주량으로 이 정도 술을 마시고 취할 리가 없을 텐데 술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 눈앞이 희미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최승현이 술잔에 약을 탓 것이 틀림없다.여희영은 아무 생각 없이 이현에게 물었다.“이현 씨, 오늘 차 갖고 오셨나요? 제가 갑자기 몸이 좀 불편해서 절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이현은 최승현과 아이컨택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었다.“당연하죠. 전 술을 마시지 않았잖아요.”그리고 여희영을 부축하여 연회장을 떠났다. 그는 여희영이 경계심을 늦춘 틈을 타서 최승현에게 은밀히 눈치를 줬다. 눈치를 받은 최승현은 다른 출구로 떠나 미리 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다.여희영은 이현 자동차 조수석이 앉아있는 최승현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최승현 씨가 왜 이곳에 있죠?”“아, 최승현 씨는 제 친구예요. 저와 함께 왔으니 같이 떠나는 거예요. 여희영 씨 걱정하지 마세요. 먼저 여희영 씨를 데려다주고 최승현 씨를 데려다줄 거에요.”남자의 말에 여희영은 무언가 깨달은 듯 남자가 부축하고 있는 손을 뿌리치고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 두 사람은 공범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같은 차를 타고 가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여희영은 신속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최승현이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낮은 목소리로 이현에게 말했다.“얼른 안으로 끌어오지 않고 뭐해?”그 말을 들은 이현이 여희영을 잡으러 다가오자 여희영은 큰소리로 외치며 도움을 청했다.“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때 호텔 안으로부터 구석에 남아있던 남자가 뛰쳐나왔는데 누군가 그보다 더 빨랐다.그 남자는 호텔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나와 이현을 제압하고 여희영을 등 뒤에 감춰 보호했다.최승현은 차에서 내려 차가운 눈길로 갑자기 뛰쳐나온 남자를 보며 말했다.“사람을 도와주기 전에 그쪽이 그만한 실력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해요.”말을 마
“괜찮아요. 기사 아저씨께서 한 번만 내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제 것만 낸 거로 하면 되죠. 돌려 주지 않으셔도 돼요.”최승현은 택시비를 내고 차에서 내려 여희영에게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서 여희영을 몸 뒤로 숨겼다.“두 사람이 왜 같은 차에서 내려요?”온지유는 질투 난 듯 잔뜩 뾰로통한 얼굴로 최승현을 바라보았다. 여희영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연기에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최승현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그쪽을 온지유 씨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그 말에 두 사람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최승현은 진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했다.여희영은 그런 최승현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무시하고 온지유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여희영 씨, 전 여희영 씨를 진심으로 좋아해요. 여희영 씨가 저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여희영 씨를 제 여자로 만들 거에요!”고래고래 소리치는 최승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이리로 주의를 기울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여희영은 최승현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온지유와 함께 여이현을 찾으러 올라갔다.연회가 열리는 곳은 교외에 있는 바캉스 호텔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호텔 전부를 연회장소로 정해서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도록 만들었다.홀로 연회장에 들어선 여희영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각양각색의 남녀들이 모여있는 연화장은 마치 소개팅을 하는 것 같았다.이때 그녀 눈이 들어온 간판이 그 추측을 실증해줬다. 그제야 여이현이 왜 온지유를 참가 못 하게 막으려 했는지 깨달았다.“아가씨, 저와 함께 춤을 추실 수 있나요?”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젠틀하게 초대를 보내왔다.여희영은 기분전환을 하려고 연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소개팅할 마음이 없었다.여희영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일부러 연회에 참가했다.“이분은 여희영 씨라고 여진그룹 여
“어머, 네가 마음 많이 썼네. 나도 깜박하고 있었는데. 맞아. 예전에는 파리에서 생활하고 싶었지 하지만 지금은 너도 알다시피...”여진숙이 더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원인을 알고 있었다.이때 온지유가 여진숙에게 선물 상자를 가져다주며 말했다.“이 얘긴 그만하는 게 어때요? 자 이건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한번 열어보세요. 맘에 드시는지.”여진숙이 상자를 열자 그 속에는 열쇠와 부동산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부동산 계약서에 쓰여있는 파리 주소를 보자 여진숙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온지유가 여진숙의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줬다.“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어머님께서 직접 고르시고 말씀하세요. 의료팀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현 씨가 모두 준비해뒀어요.”여희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이번 가정모임에서 여진숙이 수작을 부릴 것 같아서 여이현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파리에서 자리 잡고 살 기회를 얻은 여진숙은 그 자리에서 여씨 가문을 여이현에게 전부 넘겨주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지금부터 여진숙은 남은 세월을 편안히 누리고 재단의 일에 손을 뗄 것이다.세 사람이 모임 장소에서 나오자 여희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인제야 비로소 여진 그룹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이현아, 정말 대단해.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여진숙이 파리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거 말이야.”그녀는 여이현이 그처럼 세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온지유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여이현은 차에 시동을 걸고 어느 정도 주행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서찬이 찾아갔을 때부터 눈치챘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을 불러 간병인을 매수했죠. 서찬이 떠나자마자 간병인 쪽에서 정보를 입수했어요.”‘그렇구나.’두 사람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