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사실이에요?”여이현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온지유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계속 침묵을 지켰다.기다리다 못해 온지유가 다시 물었다.“노승아 씨랑 만나기로 한 거예요? 말해줘요, 제가 생각하는 게 맞아요? 이현 씨 말만 믿을 수 있어요.”여이현은 여전히 침묵했다. 온지유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다. 아직도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었다.“이현 씨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걸로 알고 있을게요. 제 눈보다도 이현 씨 말을 더 믿어요. 사정이 있을 거로 생각해요. 제발 그렇다고 해줘요. 대체... 대체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건데요. 말 좀 해요, 뭐라도 다 되니까요.”온지유는 말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더 아팠다. 그의 프러포즈도 사랑도 전부 환상이었던 것 같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느꼈었다.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남자가 드디어 자신을 선택해 줬으니 말이다. 그동안 그녀가 했던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늘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말았다.온지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절망했고, 마음이 칼에 베인 듯이 아팠다.여이현은 자꾸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온지유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바늘이 되어 마음에 떨어졌기 때문이다.‘울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말로 다시는 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여이현은 시선을 돌리며 온지유에게 집중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전부 무시하고 차갑게 대답했다.“온지유, 우리 이혼하자.”이 말을 들은 노승아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이날이 왔네! 이젠 별 탈 없이 이혼할 수 있겠지?’온지유의 마음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마치 영혼이 몸을 떠나버린 듯,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하며 애써 침착한 미소를 지었다.“방금 뭐
노승아는 잠시 넋이 나갔다.‘설마 이현 오빠는 모르고 있었나? 말이 안 되는데?’이 말을 듣고도 여이현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냉기만 가득했다. 온지유와 관련된 모든 일이 더 이상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듯했다.온지유는 아이를 이용해서라도 그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선 여이현에게 아이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지도 몰랐다.마지막 희망의 끈까지 사라지자, 온지유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이현 오빠, 우리 이제 가요.”노승아는 여이현에게 기대면서 다툼을 끊었다.“지유 씨도 애쓰지 마요. 그러게 애를 일찍 지웠으면 좋았잖아요. 그러면 이런 망신도 겪을 필요 없었을 텐데.”여이현은 시선을 돌렸다. 숨결이 약간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차갑고 무정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가자. 이혼 안 하려고 못할 말이 없는 여자야.”두 사람은 그대로 온지유를 스쳐 지나갔다. 뒤돌아보지도 않고서 말이다.노승아는 지나가면서 일부러 온지유의 어깨를 툭 쳤다. 온지유는 살짝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강윤희가 그녀를 부축하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요? 저 여우 년이 분명히 이현 오빠를 꼬드겼을 거예요. 지유 씨, 저희...”“그만해요.”온지유는 강윤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녀는 너무 빨리 변해 버린 여이현의 태도에 의심을 품은 것이다. 그런데도 온지유는 쓴웃음만 지었다.“제가 무슨 말을 해도 이현 씨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이현 씨는 저한테 믿음이 없어요.”강윤희는 초조하게 말했다.“정말 이대로 끝낼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않는 건데... 그러면 운 나쁘게 마주치지도 않았을 거고...”온지유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울음보다 더 처절해 보이는 미소였다.“아니에요. 언젠가 마주해야 할 일이었어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빨리 끝내면 좋죠.”온지유는 동정을 사고 싶지 않았다
이 아이는 태어나도 달가워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온지유 혼자 애지중지 키우는 게 나았다.별장은 아주 조용하고 쓸쓸했다. 온지유는 몇 시간째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첫 직장부터 여이현과 함께 하다가 후에는 결혼하게 되었다. 비록 눈길조차 받지 못하던 혼인 생활이었지만, 그녀는 묵묵히 참아왔다.그러다가 포기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여이현이 첫사랑과 이뤄지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도 이 악연은 계속되었다.악연의 끝은 비극이었다. 당연한 것이다. 완벽한 결말은 주어지지 않았다.이제는 정말로 끝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희망을 포기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면 여이현이 말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혼하지 않도록 말이다.그녀는 계속 기다렸다. 마침내 늦은 밤, 여이현이 돌아왔다. 그는 얼굴만 비추려는 듯 급하게 돌아왔다. 소파 앞으로 가서 앉은 그의 곁에는 변호사가 있었다.온지유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냉담한 모습은 결혼 초기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여이현의 시선은 그녀에게 머무르지 않았다. 변호사는 서류 가방에서 서류 한 장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이혼 합의서입니다. 온지유 씨가 방송국에서 일할 때 지내던 아파트는 대표님 명의로 전환했습니다. 그 집은 이제 온지유 씨 앞으로 넘어갈 거고, 더불어 40억 원의 위자료도 지급될 겁니다. 합의서를 보시고, 추가 사항이 있으면 말씀하세요.”온지유는 이혼 합의서를 펼쳐서 확인했다. 여이현이 이미 서명한 것도 확인했다. 그가 직접 쓴 글씨였다.그녀는 자신이 참 우스워 보였다. 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이혼 합의서가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니 말이다.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온지유는 한참 후에야 평정심을 되찾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이럴 거면 프러포즈는 왜 했어요? 그냥 처음부터 이혼하지 그랬어요. 도대체 뭘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이혼도 결혼처럼 좋은 날짜를 받아야
“그 입 다물어요!”온지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네요.”여이현은 피하지 않고 있는 대로 맞아줬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냉소가 걸려 있었다.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냉기가 눈 속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난 원래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었어.”온지유는 너무나도 상처받았다. 그의 말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녀는 평생 이 정도로 나쁜 사람을 본 적 없었다.“사인을 받아내기 위해 저를 자극하는 거라면, 성공했어요. 이제 저도 이혼을 원하게 됐으니까.”온지유는 주저하지 않고 펜을 들어 이혼 합의서에 사인했다. 그리고 서류를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꺼져요. 당장 제 집에서 꺼져요!”여이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분노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변호사는 서둘러 이혼 합의서를 챙겼다.“대표님, 이제 준비는 끝났습니다.”여이현은 가볍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온지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별장을 나섰다.그들이 떠난 후, 온지유는 방전된 듯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여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답답한 기운은 가슴속에 맺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반대로 여이현은 별장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이제야 고개를 돌려서 별장을 바라보았으나, 그가 그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대표님, 서류 준비는 끝났으니 이제 이혼 절차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꺼져요!”여이현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변호사는 그의 돌변한 감정에 깜짝 놀라며 움찔했다.여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변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꺼져요.”변호사는 더 이상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서둘러 노승아의 집으로 돌아갔다.여이현은 극심한 불안과 분노로 인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
노승아는 벌써 상상하기 시작했다. 여이현과의 결혼식이 얼마나 성대할지를 말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될 것이다.바로 이때 어딘가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당연히 도우미인 줄 알고 차갑게 말했다.“혼자 있고 싶으니까 내려가요.”그러나 발걸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마스크팩을 뗐다.“내려가라고 했잖...”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노승아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녀는 급하게 마스크팩을 치우고 정중하게 인사했다.“아버지...”“그래, 승아야.”남자는 노승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이구나. 이제 정말 처녀가 다 됐어.”노승아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았다.“드디어 나오셨네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남자는 50대 중반으로, 노승아보다 조금 더 큰 키에 여전히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애정 어린 손길로 노승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아니에요. 아버지가 겪으신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게다가 전 이제 연예인이잖아요. 아버지도 편안하게 모실 수 있을 정도로 벌어요.”그러나 남자의 눈빛은 묘하게 의미심장했다.“네가 효녀인 건 잘 알지만, 난 네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우리 사업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급하게 돌아온 것도 그 일 때문이다.”노승아의 얼굴은 빠르게 어두워졌다.“아버지, 정말 괜찮겠어요? 그 일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경찰의 감시가 아직도 심할 텐데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넌 지금도 여이현을 좋아하니?” 노승아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그건...”남자는 계속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모를 줄 아니? 발칙하게도 법로의 독을 쓴 모양이더구나. 그 독은 법로가 개발한 거야. 네가 그 독을 손에 넣었다는 건 법로와 불가분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은혜를 갚아야 하는 법이란다, 승아야. 나는 평생 법로를 위해 일할 거
노승아에게는 이제 이 길밖에 남지 않았다....온지유는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길고 고통스러웠던 것만 기억났다.그녀는 소파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완전히 정신이 들었을 때 동쪽 하늘에는 이미 희미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피곤했다. 너무 피곤했다.온지유는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았다.눈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얼굴은 혈색 없이 초췌했다. 마치 병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온지유는 자기 얼굴을 만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사랑의 상처를 입었다고 이렇게 무너져야 할까?여이현 없이는 살 수 없는 걸까?답은 ‘아니’였다.그녀는 애초에 이 악연을 끊고 이혼할 생각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가 먼저 제안했을 뿐이다.이혼하더라도 그녀는 잘 살 것이다. 예전보다 백 배 더 멋지게 살 것이다. 힘들어하는 건 하룻밤으로 충분하다. 남은 날들은 반드시 멋지게 살아가야 한다.그녀는 세수를 하며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면 그렇게까지 연애에 매달리지 않으니까.세수를 마친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가 빈혈 때문인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 자리에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온지유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반쯤 죽은 것처럼 온몸이 지쳐 있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피폐해졌다.그녀는 스스로도 놀랐다. 여이현 때문에 이렇게까지 에너지를 소진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주위를 둘러보니, 곁에는 인명진이 서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온지유는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며... 명진 씨가... 어떻게 여기에...”그는 한 번도 그녀의 집에 온 적
온지유의 인생은 운이 좋다고 하면 참으로 운이 좋았다. 행복한 가정에서 많은 사람이 그녀를 아껴주었다.그녀의 불행은 대부분 감정적인 부분에서 온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이 너무 안정적이어서, 감정에서만큼은 파란을 겪어야 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온지유의 말을 들은 인명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곁에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 눈동자는 유난히 따뜻해 보였다.“그렇다기보다는... 지유 씨가 저한테 새 삶을 줬어요.”인명진은 더 이상 회피하지 않았다. 이제는 많은 일을 함께 마주해야 할 때였다.“기억이 돌아오면 알게 될 거예요.”그가 몇 번이나 구해준 걸로 봐서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 정도는 있었다. 그의 정체가 단순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의심은 여전했지만 말이다.이제 그녀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인명진뿐이었다. 온지유는 그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명진 씨 친구는 있어요?”“아뇨.”온지유가 다시 물었다.“왜요?”“저는 친구가 필요 없어요.”“부모님은요?”“누군지도 몰라요.”“많이 외롭겠어요. 친구도 가족도 없는 삶이라니... 상상이 안 가요.”온지유는 갑자기 그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신이 그를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신은 그에게 뛰어난 외모와 의술을 주었지만, 동시에 끝없는 고독도 안겨준 것이다. 기쁨을 나눌 사람조차 없다는 것은 분명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인명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만약 온지유가 묻지 않았다면 그는 외로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그런 감정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매일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찼기에, 그런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그래도 이렇게 잘살고 있잖아요.”인명진은 무심하게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요. 이제 제가 친구 되어줄게요. 슬프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 언제든 말해요. 제가 기꺼이 들어줄게요.”온지유는 그렇게 인명진에게 마음을 열었다.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그녀는 이별에 빠져서 소중한 인연을, 즉 새로운 만
인명진의 표정은 아주 복잡했다. 속으로는 만약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온지유의 손조차 감히 만지지 못하는 겁쟁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그래도 인명진은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온지유의 손목에 있던 염주의 붉은빛이 점점 짙어졌다. 그걸 발견한 온지유는 인명진에게 물었다.“이 염주 색이 변한 것 같지 않아요?”인명진은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했다.“그래요?”햇빛 아래로 자리를 옮기자 붉은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진작 색이 바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짙어졌어요. 이거 명진 씨 염주 맞죠? 명진 씨는 아무것도 못 느꼈어요?”인명진은 무심코 주먹을 꽉 쥐다가 웃으며 말했다.“그거 아마 가짜일 거예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딱히 확인해 본 적 없어서요.”“가짜라면 왜 지니고 다녔어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근데 피가 있는 염주라니, 살짝 이상하기는 해요.”그녀는 염주를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약초 향에, 약간의 피 냄새도 나요. 정말 이상해요. 명진 씨는 몰랐어요?”그녀는 또다시 물었다.인명진은 온지유의 통찰력이 이렇게 강할 줄 몰랐다. 그녀는 모르는 것이 많더라도 이상한 점은 빠르게 알아챘다. 어떻게 설명해도 납득시키기 어려워 보였다.“됐어요, 인제 그만 생각할래요. 명진 씨가 이 염주를 준 이후로, 저는 정말 보호받는 느낌이었어요. 몸도 한결 가벼워졌고요.”온지유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그렇게 지쳤던 몸이 벌써 기운을 차렸다. 어쩌면 이 염주의 효과일지도 몰랐다.온지유가 질문을 멈추자 인명진은 몰래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자고 일어나니 배고프지 않아요? 제가 밥 해줄게요.”“명진 씨 요리도 할 줄 알아요?”온지유는 인명진의 집에 가본 적 있었다. 심지어 그가 일하는 곳도 가본 적 있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생활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요리라는 것을
대신 일을 해줄 사람이 넘쳐나는데 뭐하러 본인이 고생하냐는 식으로 말하는 박은희에 나도현은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어머니, 시은이 몸 상태도 고려해주셔야죠. 시은이가 최근 4년간 하민이를 위해서 밤낮없이 일만 해온 거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저랑 같이 살게 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여유를 즐길 틈도 없이 또 덜컥 아이를 가져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도 여자니까 임신과 출산의 고생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거 아니에요.”나도현의 그 한마디에 박은희도 할 말이 없었다.나도현은 박은희가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아 냉큼 말을 이어갔다.“만약 하민이가 혼자라서 외롭다고 하면 당연히 둘째든 셋째든 낳을 테니까 그 점은 시름 놓으세요. 하지만 시은이와 저의 계획을 물으신다면 그건 그냥 순리에 맡기고 싶어요.”“알겠어, 그럼 너희 뜻대로 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 밀어붙였다간 양시은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일까 봐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그제야 박은희는 은근히 걱정됐다.“내가 이렇게 급해 했다고 시은이가 또 오해하진 않겠지?”“그럴리가요. 시은이는 어머니 마음을 이해할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나도현이 박은희의 어깨를 토닥이며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을 때 양시은이 박은희를 향해 걸어왔다.양시은이 자신에게 미소를 짓는 것을 보자 박은희는 그제야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박은희는 나도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넌 시은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서 바람을 좀 쐬고 들어와. 회사 일은 절대 걱정하지 말고 둘만의 시간을 좀 보내. 네가 그랬잖니, 그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고.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현재를 즐겨.”“알겠어요.”나도현은 대답과 함께 양시은에게 다가갔고 둘은 알게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함께 올라갔다.양시은이 단미주와 합작한 프로젝트로 인해 업계의 많은 사람은 양시은을 다시 볼 것이다.양시은은 그 결과에 대해
하민은 박은희와 함께 지낸 지 3년이나 되었고 이 집에서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하지만 하민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다.그래서 양시은과 나도현은 퇴근하는 대로 집으로 돌아와 하민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가끔 학부모의 참여가 필요한 활동은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하지만 너희들도 보다시피 하민이도 나를 잘 따르고 나도 시연이 널 도와서 아이를 잘 돌봐주잖니. 지금 너랑 도현이도 시간이 있고 하민이도 학교에 다니니까 내가 돌봐줄 수 있을 때 딱 둘만 더 낳는 건 어떠니? 그럼 우리 집안도 더 복작거리고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양시은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나도현이 말을 가로챘다.“싫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저랑 시은이는 아직은 하민이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아이 일은 나중에 더 말하는 거로 해요.”나도현은 하민이 한 명에게도 제대로 된 사랑을 못 주고 있는데 둘째까지 낳아버리면 하민이가 원래도 부족했던 사랑을 나눠줘야 할 것처럼 느낄까 봐 걱정됐다.“왜? 너희 둘 중에 누가 아프기라도 한 거야?”박은희는 말은 그렇게 해도 눈길은 이미 나도현에게 향해있었다.양시은은 이미 하민이를 낳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박은희의 시선을 느낀 나도현은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맞아요, 제 몸에 문제가 생겼어요. 최근 4년간 병원에 다니고 있었고 일도 바빠서 제 정자 생존율이 엄청나게 낮아졌어요.”그 말을 들은 박은희가 침착할 리 없었다.박은희는 당장 나용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당신이 기를 쓰고 도현이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부담을 주니까 도현이 몸이 망가졌잖아요. 지금 당장 회사 업무를 이어받아서 책임지고 도현이 좀 푹 쉬게 해줘요. 국가 정책도 개방된 마당에 애가 하나밖에 없는 게 말이 돼요?”박은희에게는 나도현이 유일했다. 애당초 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과 사귈까 봐 온갖 방법을 다 대며 노력을 했지만 결국 나도현은 그런 박은희의 노력을 무시하듯 박은희의 뜻대로
그 순간 양시은은 단미주를 흘겨보았다. 차디찬 양시은의 눈빛이 이미 모든 걸 설명하고 있었다.양시은이 설령 지금 나진 그룹의 비서가 아니라고 해도 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PPT 하나 만들 줄 모른다는 게 말이 될 리가 없었다.단미주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그냥 궁금해하는 것도 문제가 되나요?”양시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이윽고 양시은은 단미주를 회의실 안으로 안내했고 단미주가 그렇게나 기다리던 PPT를 그녀의 눈앞에 보란 듯이 전시해두었다.양시은은 미소를 띠며 단미주에게 물었다.“단미주 씨,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양시은은 단미주와의 합작이 절대 쉽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그녀가 제기할 모든 문제점을 예상해 아주 작은 방면들까지 철저히 준비했다.게다가 그날은 단미주도 나도현에 대한 은근한 마음을 드러냈었지만 나도현은 양시은 때문에 단미주에게 더는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단미주도 양시은이 자신을 통해 양시은이라는 사람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단미주는 양시은이 얼마나 문제를 전면적으로 바라보는지를 깨달았고 덩달아 양시은이 훌륭한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단미주는 양시은의 치밀함에 진심으로 탄복하였고 마침내 나도현이 왜 양시은을 선택했는지도 알게 되었다.“이 프로젝트에 서명할게요. 그리고 앞으로 더는 양시은 씨를 난감하게 하지도 않을게요.”“벗이 늘어나는 건 어떻게 보나 적이 늘어나는 것보단 이득이죠. 단미주 씨도 상당히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양시은도 그 순간에는 진심으로 단미주를 칭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미주는 자신이 결코 양시은의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은 씨, 그동안 제가 양시은 씨에게 했던 무례한 행동들에 대해 사과할게요.”말을 마친 단미주는 정말로 90도 인사를 하며 사과를 했다.회의실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미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미주 역시 업계에서 꽤 유명한 사람인데 그런 단미주가 양시은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나도현은 결코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 양시은은 작게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비장하게 찾아보라고 말한 것 치고는 그리 깊은 곳에 숨긴 것도 아니었다.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양시은은 침대 밑에서 나도현의 마지막 서프라이즈를 찾아냈다.그건 다름 아닌 사진 한 장이었다.사진 속 양채은과 엄마 문해미가 해외의 유명한 철탑 아래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잠시 얼어붙었던 양시은은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목멘 소리로 나도현에게 물었다.“채은이랑 엄마는 어떻게 찾은 거야?”나도현은 양시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양시은을 반쯤 안은 상태로 사진을 들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내가 찾은 게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이 사람들이 날 찾은 거지.”이윽고 나도현이 설명해주었다.그 사진은 바로 어제 받은 산 건너 물 건너온 우편이었다.지금처럼 인터넷이 발전한 시대에 우편을 사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미 해외에서 이곳까지 넘어오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테니 지금 당장 그곳에 가서 사람을 찾는다고 해도 찾지 못할 게 뻔했다.나도현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내 생각엔 그 사람들이 시은이 네 생일을 기억하고 일부러 시간을 철저히 계산해서 너한테 이 사진을 보낸 것 같아.”나도현의 말을 끝으로 양시은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세워두었다.양시은은 하루 만에 초안 수정을 마쳤다.철저하게 시간 계산을 마친 단미주가 때마침 하이힐을 도각거리며 나진 그룹에 들이닥쳤다.“어떻게 됐어요, 양시은 씨. 제가 준 프로젝트에 대한 방안이 생기긴 했어요?”양시은이 막 대답하려고 할 때 단미주는 새로 바꾼 네일아트를 자랑이라도 하듯 손을 휘저으며 멋대로 말을 가로챘다.“방안이 생기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저도 일부러 사람 난감하게 하는 악취미는 없어서요.”양시은은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단미주 씨는 정말 본인이 요구한 조건들이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당연하죠.”단미주는 비웃음과 함
양시은은 커다란 장미꽃 다발을 보고는 물었다.“도현 씨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그래서 꽃다발도 준비했는데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나도현은 자상하게 웃으며 양시은에게 말했다. 업무 중일 때는 그토록 차가운 사람에게 이렇게나 다정한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얼마 후 양시은은 나도현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받아 들고 말했다.“할 수 없지 뭐...”양시은이 아직 뽀로통한 걸 본 나도현은 고개를 돌려 또 살짝 웃어 보였다.하민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손가락 틈새로 둘을 훔쳐보았다.온지유는 일부러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두 사람 사이가 여전히 좋은 건 잘 알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저희까지 찬밥신세로 만들어야 하겠어요? 지금 먹지 않으면 음식도 다 식을 것 같으니까 빨리 앉아요.”양시은은 하민을 챙겼고 그제야 함께 서 있던 사람들도 모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가정부가 보이지 않자 양시은은 이 많은 음식을 누가 준비했는지 궁금해져 몇 번 더 두리번거리다가 온지유에게 물었다.“지유 씨가 이 음식들을 모두 준비한 거예요?”온지유는 별이에게 음식을 집어다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일부는 제가 했어요. 그리고 나머지 일부분은 시은 씨 남편이 준비한 거예요.”그러고는 손으로 나도현을 가리켰다.양시은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물었다.“오늘 온종일 회사에 있지 않았어?”나도현은 많이 해본 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양시은에게 국을 퍼주고는 대답했다.“일부는 사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들도 있어. 그래서 내가 특별히 세프님도 찾아가서 어떻게 하는지 배워왔단 말이야. 그리고 미리 해서 냉장고에 숨겨뒀지.”양시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감동이 밀려왔지만 그와 동시에 웃음이 터질 것 같기도 했다.양시은은 자칫 자신도 잊어버릴 뻔한 생일을 그들이 자기 몰래 이렇게나 정성 들여 준비해준 게 고마웠다.아무래도 양시은이 꽤 오랫동안 생일을 챙기지 않은 탓에 그 감동이 더 큰 것 같았다.그건 그렇
초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나도현은 뻐근한 눈을 비비고는 이내 눈을 뜨고 양시은을 향해 웃어 보였다.“작은 문제들이 있는 거 빼고는 전반적으로 참 괜찮은 초안이야.”양시은은 바로 고쳐야 할 점들을 물어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공부를 사랑하는 학생 같았다.그리고 양시은의 선생님이라고 봐도 무방한 나도현 역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학생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주었다.둘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오후 내내 초안을 토론했다.양시은은 만족스러운 피드백을 얻어내고 나서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안을 들고 곧장 수정하러 달려갔다.양시은은 그렇게 꼬박 저녁까지 초안을 수정했다.일을 마친 나도현은 아직도 컴퓨터 앞에서 고개를 박고 초안 수정하기에 여념이 없는 양시은을 발견하고는 난감한 듯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양시은을 자리에서 일으켰다.양시은은 갑자기 붕 뜬 상반신에 놀라 얼떨떨해했다.“뭐 하는 거야, 도현 씨. 난 아직 일이 남았단 말이야.”나도현은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지금이 몇 신지 직접 봐.”양시은은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탓에 하마터면 나도현과 부딪칠뻔했다.“하민아!”순간 놀라서 이마를 탁 친 양시은은 뒤늦게 이미 가정부에게 대신 하민이를 데리러 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생각났다.양시은의 기색을 확인한 나도현은 굳이 묻지 않아도 양시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나도현은 난감하단 듯이 말했다.“하민이를 데리러 가지 않아도 퇴근은 해야지. 무작정 야근한다고 내가 야근 수당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잖아.”말을 끝낸 나도현은 무 뽑듯 양시은을 의자에서 일으켰다.양시은은 회사를 떠나면서 이처럼 미련이 뚝뚝 떨어지기는 처음이었다.(그 사람의 초안이 거의 다 완성됐는데...)하지만 양시은을 퇴근시키려는 나도현의 태도는 굳건했다.출퇴근 시간이라 돌아가는 길에 차가 막혔다.양시은은 그다지 일에 집착하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미처 끝내지 못하고 퇴근한 일에 대한 미련은 진작에 없어진
나도현은 그저 한쪽에 두었던 기획서를 빼갈 뿐이었다.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은 단미주는 머쓱함을 숨기려 애써 진정하며 나도현이 움직임을 슬쩍 살피고는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원래부터 도현 씨에게 맡기려고 했던 거니까 프로젝트를 받아들일지 아닐지만 말해줘요!”양시은은 나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다만 양시은은 아침부터 찾아와 시비를 걸고 대놓고 불만을 드러낸 단미주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제멋대로인 사람에게 조금의 틈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나도현은 양시은을 한번 보고는 입꼬리가 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제 생각엔 가능할 것 같아요.”그 말은 양시은에게 하는 말이었다.하지만 단미주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아까의 울분은 금방 잊어버리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양시은 씨 들었죠? 도현 씨가 당신 직속 상사인 것도 맞죠? 직속 상사도 받아들인 마당에 당신이 더 할 말은 없겠죠?”단미주는 이미 자신이 양시은의 갑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비록 사실이기는 했으나 콧대 높은 모습이 퍽 얄미운 것만은 사실이었다.양시은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을 때 나도현은 단미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단미주 씨, 제가 이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다고 해서 단미주 씨가 나진 그룹에서 멋대로 행패를 부려도 된다는 뜻은 아닌데요. 그러니 제 비서에게도 예의를 갖춰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사람을 불러 단미주 씨를 이곳에서 끌어낼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주세요.”단미주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뻐끔거리더니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졌다.양시은은 나도현 덕분에 꽉 막힌 것 같던 가슴이 조금 전보다 매우 후련해졌고 이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까만큼 싫진 않았다.“알겠습니다, 승낙하겠습니다.”양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나도현의 손에서 기획안을 가져왔다.단미주는 양시은과 나도현을 번갈아 가며 보고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절 실망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예요, 양 비서님.”단미주가 나가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