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일까?예전에 여희영이 몇 번 말한 적이 있었지만, 온지유는 당시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아마도 여이현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저 속으로 묵인했을 뿐일지도 모른다."지유야."나민우가 그녀 옆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잠시 쉬는 게 어때? 이렇게 있으면 너도 지치잖아."온지유는 오랫동안 서 있어 허리가 아팠다. 하지만 여희영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서 옆에 앉으며 말했다."고모님이 깨어날 때까지는 여기서 기다릴래.""그럼 나도 같이 있을게."나민우가 다시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이현은 문틀에 기대어 나민우가 온지유를 걱정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민우의 눈길에서는 따뜻한 배려가 엿보였다.온지유도 그의 친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했다.그때, 한층 더 큰 불쾌감이 여이현의 온몸을 휘감았다.여이현은 일부러 옆에 있는 의자를 발로 차 소리를 냈다.그 의자는 나민우가 앉아 있던 의자였다.나민우가 고개를 들자, 여이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실례했습니다, 실수로 발이 닿았네요.""괜찮습니다."나민우도 유연하게 대답했다.하지만 여이현이 말했다."여기는 가족 대기 구역입니다. 나 대표님, 회사 일이 한가 하지는 않을 텐데, 여기서 뭘 하는 거죠?"나민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유와 함께 있어 주는 거죠. 임신 중인데 고모님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니, 혼자 두는 게 불안해서 옆에 있어 주는 거예요.""고모님?"그 말을 듣고 여이현은 더욱 불쾌해졌다."나민우씨, 제 고모가 언제 당신 고모가 됐는지요?"나민우는 여전히 웃음을 띤 채, 여이현의 차가운 태도와는 달리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모르셨나요? 저와 고모님도 이제 친구가 됐습니다. 고모님은 지유가 존경하는 분이니, 저도 당연히 존경해야죠."여이현은 주먹을 꽉 쥐며, 충동을 억누르려 애썼다."나 대표님이 이렇게 가벼운 분일 줄은 몰랐네요. 지유가 고모님이라고 부르는 건 나를 따라서인데, 당신은 무슨 자격
"아니요."온지유가 대답했다.여이현의 얼굴이 굳어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곧 전처가 될 사람이죠."의사는 그들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말했다."환자는 가벼운 뇌진탕과 손목 골절이 있습니다. 일정 기간 휴식을 취하면 회복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라는 생각에 온지유는 곧바로 대답했다."감사합니다, 선생님.""천만에요."두 사람은 여희영을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온지유는 여희영의 입술이 말라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따뜻한 물을 가져와 면봉으로 그녀의 입술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여이현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병실에는 환자의 휴식을 방해할 다른 사람은 없었다.온지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맞은편에 앉아 여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러다가 어느새 피곤해져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결국 잠에 빠지고 말았다.얼마 후 온지유는 놀라서 깨어났다.꿈에서 그녀는 온통 어둠에 싸인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그녀를 괴롭히는 듯, 자주 그런 악몽을 꾸곤 했다.온지유는 불쾌감을 느끼며 깨어났다.정신을 차린 온지유는 자신이 담요 대신 누군가의 외투를 덮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외투는 아직 따뜻했고, 익숙한 향기가 났다. 그녀는 그것이 여이현의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러나 병실에는 여이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들고 있던 정장을 내려놓았다. 여이현의 한 번의 따뜻함에 속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사실, 이것은 익숙한 일이었다.여이현이 자신에게 해준 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여희영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온지유는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생활용품을 사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나중에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병실을 나서자, 나민우은 여전히 그곳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여진숙과 노승아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민우야."온지유가 그를 불렀다.나민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나왔구나.""오래 기다렸지
온지유는 문득 소독약 냄새를 맡고 고개를 들었다.남자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안에는 스웨터와 슬랙스, 그리고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갈색 눈동자로 온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손보다도 더 창백했고, 금테 안경을 쓴 깨끗한 인상이었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마치 타고난 미소를 지닌 것처럼 친근한 인상을 주었으며, 왼쪽 눈가에는 작은 눈물점이 있었다.그러나 다정해 보이는 인상에도 불구하고 온지유는 그에게서 한기를 느꼈다.심장을 파고드는 차가움이었다."율아..."남자는 온지유를 응시하며, 몇 글자 흘려보냈다.온지유는 마음속의 두려움을 가라앉히려는 듯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누구를 부르는 거죠?"온지유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남자도 함께 일어서며 미소를 띤 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군요."온지유가 다시 말했다."이만 제 물건을 돌려주시겠어요?"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그녀에게 쇼핑백을 건넸다.온지유는 서둘러 그것을 받아서 들었다. 그의 손에 닿았을 때 여전히 그 차가운 한기를 느꼈다."비켜 주세요, 지나가고 싶어요."온지유가 덧붙였다.남자는 몸을 옆으로 돌렸고, 온지유는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을 지나갔다.온지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와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율아."그 목소리는 길고 여운이 있었지만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다.온지유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굴리며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약 10분 정도 걷고, 몇 개의 코너를 돌아가 한 건물 아래에 도착했다.그곳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이곳은 사무실로 사용되는 건물로, 평소에도 사람의 왕래가 적고 매우 은밀한 장소였다.그는 천천히 건물로 들어가 4층에 도착했다.그 층에는 오직 하나의 방만 있었다.문을 열고 첫 번째로 열쇠를 돌렸다가 두 번째로 돌리려는 순간
그 말에 노승아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지만, 곧바로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 난 더 이상 못 해. 난 노승아, 최상급 연예인이야. 어떻게 그런 일을 다시 할 수 있겠어!""노승아..."인명진은 그 이름을 천천히 읊조리더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노승아라는 이름도 그렇게 깨끗한 건 아니잖아. 그림자 속에서 살던 사람이 이제 와서 빛을 보겠다고?"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노승아에게 물었다.그들은 모두 수면 밑의 사람들이었기에, 누구도 완전히 깨끗할 수 없었다.노승아의 얼굴은 창백해지며 손을 꽉 쥐었다."이미 지나간 일이야. 우리 모두 되돌릴 수 있어!"그녀는 자신이 깨끗해질 수 있기를 바랐다.이전의 일들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남아있기를 바랐다. 비록 그녀의 손이 더러워졌을지라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인명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노승아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내겐 경력이 있고, 앞으로는 가정도 가질 거야.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어."인명진은 노승아의 눈을 응시하며, 그녀가 지금 말하는 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다.하지만...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천천히 말했다."아직 할 일은 끝나지 않았어."노승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다."그들은 다시 돌아올 거야."노승아는 몸에 힘이 풀리며 말했다."난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방법이 하나 있긴 해."노승아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어떤 방법?""죽음."인명진은 평온한 눈빛이었지만, 이 단어를 입에 올릴 때는 약간의 쓸쓸함이 있었다.오직 죽음만이 해방을 줄 수 있었다.이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어둠 속에 사는 사람은 결코 빛을 볼 수 없는 법이다.잠시 빛을 본 적이 있더라도, 그것은 그저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죽음이 그들의 결말이었다.그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하지만 분명히 고통스럽게 죽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인명진은 손에 쥐고
온지유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미 노승아에게 사람을 붙였었기에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노승아는 절대 자신의 청각에 문제 생기게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분명 누군가 뒤에서 노승아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노승아가 이런 곳에 왔다는 것부터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이곳에서 단서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따라왔다.문을 열자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당신이군요!”인명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온지유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차림새를 보았다. 누가 봐도 의사 같았기에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시선을 돌려 그의 등 뒤를 두리번거리며 노승아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노승아를 미행하던 사람이 노승아가 이곳에 들어온 뒤로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의사예요?”온지유가 묻자 인명진이 답했다.“네.”그녀는 떠보듯 물었다.“제 친구가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던데 혹시...”“노승아 씨요?”그의 말에 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딱히 뭘 숨기고 있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러면서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고 있다.온지유가 입을 열었다.“맞아요, 제 친구가 여기로 들어온 거 맞죠?”“전 그쪽이 원하는 대답을 해드릴 수 있어요.”인명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듣고 싶으면 들어오세요.”그는 문을 열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온지유는 뜸을 들이다가 먼저 성큼성큼 들어가는 남자의 모습에 용기를 내어 따라갔다.아주 큰 집이었다.이 한층 전부 남자의 집으로 보였다.주방, 안방, 서재 등 방으로 나누어져 있어야 할 구역들이 전부 한 공간에 있었다.이런 구조는 처음 보았다.공간이 아주 크면서 전부 방으로 나누지 않았다니. 그녀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침대, 메스, 그리고 의약용품이 있었다.남자는 의사일 거라는 그녀의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앉아요.”인명진의 발걸음에는 소리가 없었다. 갑자기 들려온 그
인명진은 입꼬리를 올린 채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눈가에 있는 점이 더 돋보였다.“그쪽이 알고 싶어 한 거잖아요. 전 그냥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죠.”온지유는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넓은 공간을 아무리 두리번거리며 노승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도 뜸을 들이며 물었다.“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그쪽을 속여서 저한테 뭐 좋은 점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겠어요.”인명진은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저한테 노승아 씨가 저에게서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는데 못 믿겠으면 직접 봐도 돼요.”온지유는 진료 기록을 가져와 보았다.역시나 노승아가 인명진을 찾아온 것이 맞았다.의사가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눈앞에 있는 남자가 치료해낸 것을 보아 의술 실력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닌 것 같았다.노승아의 귀를 먹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도 있다니.모든 것이 들어맞았다.“진실을 알게 되었는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해봤어요?”바로 이때, 인명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고개를 들어 그를 본 그녀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의 영역에 들어왔으니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용기를 내어 남자를 따라 들어왔다.책상 위에 있는 메스를 발견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말로 그에게 죽임을 당할 것 같아 바로 입을 열었다.“저한테 이 진료 기록을 넘겨주신다면 노승아 씨를 도와준 대가로 받은 이득의 두 배로 드릴게요. 절대 손해 보진 않을 텐데, 굳이 손에 피 묻힐 필요가 있을까요? 일단 대화로 협상을 해보자고요. 전 제 목숨을 아끼거든요. 그러니 지금 하는 생각은 잠시 멈추고 저한테 협상할 기회를 주세요.”인명진은 의자에 손을 올리며 몸을 구부렸다. 그의 입에선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사람이라면 신용을 지켜야죠.”온지유는 긴장해졌다. 길고 큰 그의 손을 빤히 보았다. 행여나 갑자기 메스를
“나야!”여이현은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았다.고개를 든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여이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현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여이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건 내가 할 말이야.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온지유는 방금 손에 넣은 진료 기록을 절대 그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알게 되면 증거를 없애버릴 수 있으니까.“아는 친구 만나러 왔어요.”“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여이현이 반박했다.“아니면요? 제가 여기에 왜 있었겠어요.”“너 방금 4층으로 들어갔잖아.”여이현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낯선 사람 집안까지 들어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라서 그래?”온지유가 말했다.“멀쩡히 나왔으면 됐잖아요!”경계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모습에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온지유, 만약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다면 넌 목숨을 잃게 되었을 수도 있었어. 대체 왜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거야!”온지유는 여이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현 씨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설마 나랑 같은 목적인 건가?'확신이 서지 않았던 온지유는 그가 자신과 목적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이미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던 그녀는 이내 잠정을 다스리고 말했다.“알았어요. 다음부턴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을게요.”여이현의 표정이 그제야 풀어졌다.“가자, 데려다줄게.”그가 여기에 나타난 이유도 노승아를 미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다만 온지유가 그보다 한발 빠르게 도착했다. 그녀를 발견한 여이현은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노승아의 상황은 아주 복잡했다. 노승아가 그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직 몰랐다.그랬기에 그는 행여나 일을 망치게 될까 봐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시계를 보던 그는 온지유가 20분 후에도 나오지 않으면 바로 쳐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행여나 그녀가 위험한 상황에 닥쳤을까 봐 말이다.다소 의외였던 것은 온지유는 들어간 지 몇 분 만에 다시 나왔
“하, 이현이는 당신 아들이 아니에요?”여진숙이 말했다.그러자 여재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너랑 결혼한 것도 미치게 싫은데, 내 아들로 받아들일 것 같아?”여진숙의 안색이 창백해졌다.“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내가 왜 당신이랑 결혼했는지, 정말 후회되네요.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애초에 당신 같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여재호는 아주 냉랭하게 말했다.“애초에 네가 더러운 수단을 쓴 게 아니었다면, 내가 너랑 결혼했겠어?”여진숙은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고 눈가가 촉촉해졌다.“그래요. 다 내가 더러운 수단을 써서, 억지로 나랑 결혼하게 해서, 그래서 지금 나한테 복수하는 거예요?”여재호는 매일 귀가하지 않을뿐더러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그녀와 결혼한 뒤 여재호는 그녀를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었다.이건 과부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복수하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여재호는 쌀쌀맞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애초에 넌 내 안중에도 없었으니까.”여진숙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대체 그에게 뭘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언젠가 여재호가 자신을 뒤돌아 봐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아니었다.그녀는 그저 그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도 이젠 다 큰 어른이 되었으니 그녀도 더는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나 여재호는 여전히 그녀에게 상처만 주었다.여재호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기 싫었다. 매번 집에 돌아오면 바쁘게 움직이며 챙길 것만 챙겨서 나갔고 가족에게 한 번도 관심을 준 적 없었다.그의 마음은 이미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기 때문이다.여진숙과 결혼한 뒤로 그는 없는 사람처럼 지냈다.여호산이 세상을 뜬 뒤로 그의 발길이 더 뜸해져 돌아오지 않았다.여재호는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지나쳐갔다. 그녀가 얼마나 속상한지, 얼마나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여전히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가버렸다. 그런 그가 그녀를 사랑할 리가 있겠는가.다만 마침 내려온 노승아가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