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재호는 여진숙의 모든 울부짖음을 무시했다.그에게 여진숙의 눈물은 전혀 가치가 없었다.한 여자로서 여진숙은 남편의 냉담한 태도에 점점 더 무너져 내렸고, 더욱 격하게 외치기 시작했다."말 좀 해봐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예요? 당신한테는 여희영이 더 중요한 거죠, 그렇죠? 난 당신과 정식으로 결혼한 아내예요, 나한테 이러시면 안 돼요!"여진숙은 두 눈이 벌게지도록 울면서, 남편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신경 써주길 바랐다.그가 단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더 봐준다면, 분노와 불안이 다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여재호는 아무 말 없이 침착하게 낯선 사람 대하듯 했다.여이현은 그들의 이러한 관계를 보며 익숙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의견도 없었다.여이현에게 그들은 이름뿐인 부모일 뿐이었다.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이 모든 것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여재호는 더 이상 여진숙을 견딜 수 없어 자리를 일어나며 여이현에게 말했다."이만 내려가마. 희영이 깨어나면 알려줘."여이현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여재호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그는 여이현에게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았다. 부자간의 정이 그리 깊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여이현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신경이 쓰이는 사람은 친여동생인 여희영뿐이었다.말을 끝낸 여재호는 자리를 떠났다.여진숙은 그가 자신을 무시하자, 급히 따라가며 말했다."이대로 가면 안 돼요. 나한테 설명은 하고 가야죠!"노승아는 여진숙의 감정이 매우 격해진 모습을 보고 속으로 놀라웠다. 여희영와 다툴 때도 여진숙은 이렇게 동요한 적은 없었다.이곳에서는 여진숙만이 자신의 편이었다.노승아는 당연히 그녀를 따라갔다.여진숙이 막 여재호의 소매를 잡았을 때, 그는 마치 세균이라도 있는 듯한 태도로 소매를 뿌리치며 냉담하게 말했다."난 할 만큼 했어. 더 이상 혐오감을 느끼게 하
여이현은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일까?예전에 여희영이 몇 번 말한 적이 있었지만, 온지유는 당시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아마도 여이현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저 속으로 묵인했을 뿐일지도 모른다."지유야."나민우가 그녀 옆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잠시 쉬는 게 어때? 이렇게 있으면 너도 지치잖아."온지유는 오랫동안 서 있어 허리가 아팠다. 하지만 여희영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서 옆에 앉으며 말했다."고모님이 깨어날 때까지는 여기서 기다릴래.""그럼 나도 같이 있을게."나민우가 다시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이현은 문틀에 기대어 나민우가 온지유를 걱정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민우의 눈길에서는 따뜻한 배려가 엿보였다.온지유도 그의 친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했다.그때, 한층 더 큰 불쾌감이 여이현의 온몸을 휘감았다.여이현은 일부러 옆에 있는 의자를 발로 차 소리를 냈다.그 의자는 나민우가 앉아 있던 의자였다.나민우가 고개를 들자, 여이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실례했습니다, 실수로 발이 닿았네요.""괜찮습니다."나민우도 유연하게 대답했다.하지만 여이현이 말했다."여기는 가족 대기 구역입니다. 나 대표님, 회사 일이 한가 하지는 않을 텐데, 여기서 뭘 하는 거죠?"나민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유와 함께 있어 주는 거죠. 임신 중인데 고모님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니, 혼자 두는 게 불안해서 옆에 있어 주는 거예요.""고모님?"그 말을 듣고 여이현은 더욱 불쾌해졌다."나민우씨, 제 고모가 언제 당신 고모가 됐는지요?"나민우는 여전히 웃음을 띤 채, 여이현의 차가운 태도와는 달리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모르셨나요? 저와 고모님도 이제 친구가 됐습니다. 고모님은 지유가 존경하는 분이니, 저도 당연히 존경해야죠."여이현은 주먹을 꽉 쥐며, 충동을 억누르려 애썼다."나 대표님이 이렇게 가벼운 분일 줄은 몰랐네요. 지유가 고모님이라고 부르는 건 나를 따라서인데, 당신은 무슨 자격
"아니요."온지유가 대답했다.여이현의 얼굴이 굳어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곧 전처가 될 사람이죠."의사는 그들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말했다."환자는 가벼운 뇌진탕과 손목 골절이 있습니다. 일정 기간 휴식을 취하면 회복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라는 생각에 온지유는 곧바로 대답했다."감사합니다, 선생님.""천만에요."두 사람은 여희영을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온지유는 여희영의 입술이 말라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따뜻한 물을 가져와 면봉으로 그녀의 입술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여이현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병실에는 환자의 휴식을 방해할 다른 사람은 없었다.온지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맞은편에 앉아 여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러다가 어느새 피곤해져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결국 잠에 빠지고 말았다.얼마 후 온지유는 놀라서 깨어났다.꿈에서 그녀는 온통 어둠에 싸인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그녀를 괴롭히는 듯, 자주 그런 악몽을 꾸곤 했다.온지유는 불쾌감을 느끼며 깨어났다.정신을 차린 온지유는 자신이 담요 대신 누군가의 외투를 덮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외투는 아직 따뜻했고, 익숙한 향기가 났다. 그녀는 그것이 여이현의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러나 병실에는 여이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들고 있던 정장을 내려놓았다. 여이현의 한 번의 따뜻함에 속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사실, 이것은 익숙한 일이었다.여이현이 자신에게 해준 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여희영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온지유는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생활용품을 사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나중에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병실을 나서자, 나민우은 여전히 그곳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여진숙과 노승아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민우야."온지유가 그를 불렀다.나민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나왔구나.""오래 기다렸지
온지유는 문득 소독약 냄새를 맡고 고개를 들었다.남자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안에는 스웨터와 슬랙스, 그리고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갈색 눈동자로 온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손보다도 더 창백했고, 금테 안경을 쓴 깨끗한 인상이었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마치 타고난 미소를 지닌 것처럼 친근한 인상을 주었으며, 왼쪽 눈가에는 작은 눈물점이 있었다.그러나 다정해 보이는 인상에도 불구하고 온지유는 그에게서 한기를 느꼈다.심장을 파고드는 차가움이었다."율아..."남자는 온지유를 응시하며, 몇 글자 흘려보냈다.온지유는 마음속의 두려움을 가라앉히려는 듯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누구를 부르는 거죠?"온지유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남자도 함께 일어서며 미소를 띤 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군요."온지유가 다시 말했다."이만 제 물건을 돌려주시겠어요?"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그녀에게 쇼핑백을 건넸다.온지유는 서둘러 그것을 받아서 들었다. 그의 손에 닿았을 때 여전히 그 차가운 한기를 느꼈다."비켜 주세요, 지나가고 싶어요."온지유가 덧붙였다.남자는 몸을 옆으로 돌렸고, 온지유는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을 지나갔다.온지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와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율아."그 목소리는 길고 여운이 있었지만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다.온지유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굴리며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약 10분 정도 걷고, 몇 개의 코너를 돌아가 한 건물 아래에 도착했다.그곳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이곳은 사무실로 사용되는 건물로, 평소에도 사람의 왕래가 적고 매우 은밀한 장소였다.그는 천천히 건물로 들어가 4층에 도착했다.그 층에는 오직 하나의 방만 있었다.문을 열고 첫 번째로 열쇠를 돌렸다가 두 번째로 돌리려는 순간
그 말에 노승아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지만, 곧바로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 난 더 이상 못 해. 난 노승아, 최상급 연예인이야. 어떻게 그런 일을 다시 할 수 있겠어!""노승아..."인명진은 그 이름을 천천히 읊조리더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노승아라는 이름도 그렇게 깨끗한 건 아니잖아. 그림자 속에서 살던 사람이 이제 와서 빛을 보겠다고?"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노승아에게 물었다.그들은 모두 수면 밑의 사람들이었기에, 누구도 완전히 깨끗할 수 없었다.노승아의 얼굴은 창백해지며 손을 꽉 쥐었다."이미 지나간 일이야. 우리 모두 되돌릴 수 있어!"그녀는 자신이 깨끗해질 수 있기를 바랐다.이전의 일들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남아있기를 바랐다. 비록 그녀의 손이 더러워졌을지라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인명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노승아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내겐 경력이 있고, 앞으로는 가정도 가질 거야.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어."인명진은 노승아의 눈을 응시하며, 그녀가 지금 말하는 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다.하지만...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천천히 말했다."아직 할 일은 끝나지 않았어."노승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다."그들은 다시 돌아올 거야."노승아는 몸에 힘이 풀리며 말했다."난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방법이 하나 있긴 해."노승아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어떤 방법?""죽음."인명진은 평온한 눈빛이었지만, 이 단어를 입에 올릴 때는 약간의 쓸쓸함이 있었다.오직 죽음만이 해방을 줄 수 있었다.이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어둠 속에 사는 사람은 결코 빛을 볼 수 없는 법이다.잠시 빛을 본 적이 있더라도, 그것은 그저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죽음이 그들의 결말이었다.그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하지만 분명히 고통스럽게 죽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인명진은 손에 쥐고
온지유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미 노승아에게 사람을 붙였었기에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노승아는 절대 자신의 청각에 문제 생기게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분명 누군가 뒤에서 노승아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노승아가 이런 곳에 왔다는 것부터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이곳에서 단서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따라왔다.문을 열자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당신이군요!”인명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온지유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차림새를 보았다. 누가 봐도 의사 같았기에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시선을 돌려 그의 등 뒤를 두리번거리며 노승아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노승아를 미행하던 사람이 노승아가 이곳에 들어온 뒤로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의사예요?”온지유가 묻자 인명진이 답했다.“네.”그녀는 떠보듯 물었다.“제 친구가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던데 혹시...”“노승아 씨요?”그의 말에 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딱히 뭘 숨기고 있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러면서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고 있다.온지유가 입을 열었다.“맞아요, 제 친구가 여기로 들어온 거 맞죠?”“전 그쪽이 원하는 대답을 해드릴 수 있어요.”인명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듣고 싶으면 들어오세요.”그는 문을 열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온지유는 뜸을 들이다가 먼저 성큼성큼 들어가는 남자의 모습에 용기를 내어 따라갔다.아주 큰 집이었다.이 한층 전부 남자의 집으로 보였다.주방, 안방, 서재 등 방으로 나누어져 있어야 할 구역들이 전부 한 공간에 있었다.이런 구조는 처음 보았다.공간이 아주 크면서 전부 방으로 나누지 않았다니. 그녀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침대, 메스, 그리고 의약용품이 있었다.남자는 의사일 거라는 그녀의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앉아요.”인명진의 발걸음에는 소리가 없었다. 갑자기 들려온 그
인명진은 입꼬리를 올린 채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눈가에 있는 점이 더 돋보였다.“그쪽이 알고 싶어 한 거잖아요. 전 그냥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죠.”온지유는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넓은 공간을 아무리 두리번거리며 노승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도 뜸을 들이며 물었다.“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그쪽을 속여서 저한테 뭐 좋은 점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겠어요.”인명진은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저한테 노승아 씨가 저에게서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는데 못 믿겠으면 직접 봐도 돼요.”온지유는 진료 기록을 가져와 보았다.역시나 노승아가 인명진을 찾아온 것이 맞았다.의사가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눈앞에 있는 남자가 치료해낸 것을 보아 의술 실력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닌 것 같았다.노승아의 귀를 먹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도 있다니.모든 것이 들어맞았다.“진실을 알게 되었는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해봤어요?”바로 이때, 인명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고개를 들어 그를 본 그녀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의 영역에 들어왔으니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용기를 내어 남자를 따라 들어왔다.책상 위에 있는 메스를 발견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말로 그에게 죽임을 당할 것 같아 바로 입을 열었다.“저한테 이 진료 기록을 넘겨주신다면 노승아 씨를 도와준 대가로 받은 이득의 두 배로 드릴게요. 절대 손해 보진 않을 텐데, 굳이 손에 피 묻힐 필요가 있을까요? 일단 대화로 협상을 해보자고요. 전 제 목숨을 아끼거든요. 그러니 지금 하는 생각은 잠시 멈추고 저한테 협상할 기회를 주세요.”인명진은 의자에 손을 올리며 몸을 구부렸다. 그의 입에선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사람이라면 신용을 지켜야죠.”온지유는 긴장해졌다. 길고 큰 그의 손을 빤히 보았다. 행여나 갑자기 메스를
“나야!”여이현은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았다.고개를 든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여이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현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여이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건 내가 할 말이야.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온지유는 방금 손에 넣은 진료 기록을 절대 그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알게 되면 증거를 없애버릴 수 있으니까.“아는 친구 만나러 왔어요.”“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여이현이 반박했다.“아니면요? 제가 여기에 왜 있었겠어요.”“너 방금 4층으로 들어갔잖아.”여이현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낯선 사람 집안까지 들어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라서 그래?”온지유가 말했다.“멀쩡히 나왔으면 됐잖아요!”경계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모습에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온지유, 만약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다면 넌 목숨을 잃게 되었을 수도 있었어. 대체 왜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거야!”온지유는 여이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현 씨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설마 나랑 같은 목적인 건가?'확신이 서지 않았던 온지유는 그가 자신과 목적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이미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던 그녀는 이내 잠정을 다스리고 말했다.“알았어요. 다음부턴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을게요.”여이현의 표정이 그제야 풀어졌다.“가자, 데려다줄게.”그가 여기에 나타난 이유도 노승아를 미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다만 온지유가 그보다 한발 빠르게 도착했다. 그녀를 발견한 여이현은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노승아의 상황은 아주 복잡했다. 노승아가 그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직 몰랐다.그랬기에 그는 행여나 일을 망치게 될까 봐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시계를 보던 그는 온지유가 20분 후에도 나오지 않으면 바로 쳐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행여나 그녀가 위험한 상황에 닥쳤을까 봐 말이다.다소 의외였던 것은 온지유는 들어간 지 몇 분 만에 다시 나왔
“괜찮아요. 기사 아저씨께서 한 번만 내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제 것만 낸 거로 하면 되죠. 돌려 주지 않으셔도 돼요.”최승현은 택시비를 내고 차에서 내려 여희영에게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서 여희영을 몸 뒤로 숨겼다.“두 사람이 왜 같은 차에서 내려요?”온지유는 질투 난 듯 잔뜩 뾰로통한 얼굴로 최승현을 바라보았다. 여희영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연기에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최승현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그쪽을 온지유 씨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그 말에 두 사람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최승현은 진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했다.여희영은 그런 최승현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무시하고 온지유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여희영 씨, 전 여희영 씨를 진심으로 좋아해요. 여희영 씨가 저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여희영 씨를 제 여자로 만들 거에요!”고래고래 소리치는 최승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이리로 주의를 기울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여희영은 최승현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온지유와 함께 여이현을 찾으러 올라갔다.연회가 열리는 곳은 교외에 있는 바캉스 호텔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호텔 전부를 연회장소로 정해서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도록 만들었다.홀로 연회장에 들어선 여희영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각양각색의 남녀들이 모여있는 연화장은 마치 소개팅을 하는 것 같았다.이때 그녀 눈이 들어온 간판이 그 추측을 실증해줬다. 그제야 여이현이 왜 온지유를 참가 못 하게 막으려 했는지 깨달았다.“아가씨, 저와 함께 춤을 추실 수 있나요?”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젠틀하게 초대를 보내왔다.여희영은 기분전환을 하려고 연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소개팅할 마음이 없었다.여희영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일부러 연회에 참가했다.“이분은 여희영 씨라고 여진그룹 여
“어머, 네가 마음 많이 썼네. 나도 깜박하고 있었는데. 맞아. 예전에는 파리에서 생활하고 싶었지 하지만 지금은 너도 알다시피...”여진숙이 더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원인을 알고 있었다.이때 온지유가 여진숙에게 선물 상자를 가져다주며 말했다.“이 얘긴 그만하는 게 어때요? 자 이건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한번 열어보세요. 맘에 드시는지.”여진숙이 상자를 열자 그 속에는 열쇠와 부동산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부동산 계약서에 쓰여있는 파리 주소를 보자 여진숙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온지유가 여진숙의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줬다.“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어머님께서 직접 고르시고 말씀하세요. 의료팀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현 씨가 모두 준비해뒀어요.”여희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이번 가정모임에서 여진숙이 수작을 부릴 것 같아서 여이현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파리에서 자리 잡고 살 기회를 얻은 여진숙은 그 자리에서 여씨 가문을 여이현에게 전부 넘겨주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지금부터 여진숙은 남은 세월을 편안히 누리고 재단의 일에 손을 뗄 것이다.세 사람이 모임 장소에서 나오자 여희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인제야 비로소 여진 그룹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이현아, 정말 대단해.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여진숙이 파리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거 말이야.”그녀는 여이현이 그처럼 세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온지유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여이현은 차에 시동을 걸고 어느 정도 주행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서찬이 찾아갔을 때부터 눈치챘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을 불러 간병인을 매수했죠. 서찬이 떠나자마자 간병인 쪽에서 정보를 입수했어요.”‘그렇구나.’두 사람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여진숙은 서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진 그룹의 일에 관심이 일도 없었다.서찬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당연히 사모님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죠.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소식 들어보셨나요? 글쎄 여이현이 여 대표님 편을 드는 사람들을 모두 해고했지 뭐에요. 지금 여진 그룹은 여이현의 천하에요.”여진숙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덤덤한 태도로 “그래요.”라고 대답한 뒤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서찬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설득했다.“사모님, 여진 그룹이 여 대표님 손으로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더는 요양원에 계시지 않아도 돼요. 들은 바에 의하면 사모님께서는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아직 외국으로 떠나지 못하신다면서요. 사실, 이 모든게 여이현 때문이잖아요.”“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겁니까?”여진숙이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서찬이 그녀 가까이 다가가서 뭐라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이 끝나자 여진숙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분부했다.“알겠어요. 서 부장님 뜻대로 하세요.”허락을 받은 서찬은 한껏 부풀어 올라 당장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그는 허리를 굽힌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담보했다.두 사람의 계획은 가정모임이었다. 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였기에 지금 이 모양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가정모임에서 그녀의 체면을 구기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물론 여의현은 아니였다.밝은 하늘에 어둠이 깃들 무렵 여이현이 온지유와 별이를 데리고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그는 여진숙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여진숙은 자상한 눈길로 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별아, 할머니께 인사해야지.”여이현의 말에 별이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별이 인사를 받은 여진숙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별이에게 미리 준비한 돈 봉투를 쥐여주었다.여이현과 온지유 두 사람은 확연히 달라진 여진숙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가정모임에 여희영이 빠질 리가 없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으려던
최승현은 여희영의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여희영 씨, 저는 진심으로 여희영 씨를 좋아해요.”여희영은 비록 여이현의 친고모는 아니었지만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긴 뒤로부터여이현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여이현은 현재 그녀를 친 고모로 여기며 존경스러운 태도로 모시고 있다. 그건 여희영이 여진 그룹의 다양한 광고 촬영에 참여했다는 소식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최승현이 악착스레 달라붙는 것도 뒷백이 센 여희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여희영은 그의 속셈을 모른 채 짜증 나기만 했다.그녀가 온지유를 바라보며 도와달라고 하려던 찰나 최승현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댔다.여희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최승현을 두 손으로 밀어 내팽개쳤다.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여희영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안돼요. 전 반대에요! 저와 약속하셨잖아요!”너무나도 가련한 온지유의 모습에 구경꾼들이 모여들더니 작은 소리로 두 사람을 의논하기 시작했다.여희영은 온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차가운 말투로 최승현에게 말했다.“최승현 씨, 제가 분명히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요. 더는 저에게 달라붙지 마세요.”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호텔을 나섰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최승현이 또 따라올까 봐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아직도 따라오고 있어?”여희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아니요. 하지만 아직도 저희를 보고 있어요. 어? 이현 씨가 내려왔는데요.”여희영은 여이현이 두 사람의 계획을 망칠까 봐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했다.“아니 근데 이현이가 최승현 쪽으로 다가가서 뭘 말하고 있는데.”이 말에 온지유는 여희영을 밀어내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이현이 입 모양으로 말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이현 씨가 최승현 씨에게 계속 달라붙으면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겠다고 말했어요.”온지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희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최승현 씨 연예인이에요?”“아니. 여
‘이게 끝이라고? 더 시도해 보지 않을 건가?’온지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여자가 여이현을 붙잡을까 봐 많이걱정하고 있었다. 바람기 많은 남자보다 진지한 여자가 더 위험하기 마련이다.자신의 마음을 과감히 고백하는 여자에게 유혹당하지 않을 남자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여이현, 운 좋은 줄 알아.”온지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 앞길을 막고 서있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여이현이 부드러운 눈길로 온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끝이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처럼 온지유를 빨아 들어갈 것으로 보였다.“어떤 여자분이 찾던 것 같던데 가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받아 주지. 그러면...”“그럼 나 간다.”그 대답에 온지유는 재빨리 여이현을 잡으며 소리쳤다.“가긴 어딜 가!”이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안 갈 거야. 내 곁에 지유 너와 별이만 있으면 행복한걸.”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온지유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금방 발생한 불쾌한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야시장 돌아다녔다. 허기진 배도 채우고 재밌게 놀고 나니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 어느덧 늦은 밤이 되었다.연이어 하품하는 온지유를 보고 여이현은 택시를 불러 호텔로 향했다. 힘들게 약속한 단둘만의 데이트라 여이현은 오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뜨거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왔다.비몽사몽 한 상태로 꿈나라에서 빠져나온 온지유의 머릿속은 온통 뜨거웠던 어젯밤 화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여러 번 흔들어 요동치는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시간을 보니 벌써 별이 등교 시간이었다.온지유는 아직 한창 꿈나라에서 여행 중인 여이현을 버려두고 옷을 바꾼 뒤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어머, 우리 자기 왜 그렇게 급해. 혹시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여희영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귀가에대고
두 사람은 야시장 입구에 왔다. 인파로 사람들 머리만 보이자 여이현은 바로 그녀를 끌어안고 나직하게 말했다.“옷이라도 갈아입고 올까? 인파들 속에서 기회를 틈타 널 만지려고 하면 어떡해.”온지유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흥, 드레스를 고를 땐 야시장을 구경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나 봐? 안 갈아입을래. 오랜만에 이쁘게 입었는데 왜 갈아입어. 게다가 여긴 사람도 많잖아. 그럼 더 신경 써야지.”여이현은 그녀를 설득할 수가 없었기에 속으로 어떻게든 지켜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실컷 놀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온지유는 더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맛있는 것을 보면 맛보고 배가 부르면 여이현에게 넘겨주었다. 알록달록한 칵테일에 맛만 본 후 바로 여이현에게 주기도 했고 재밌는 것이 있으면 체험해보기도 했으며 무서운 것이 있으면 바로 여이현의 품으로 안겨들었다.그녀는 밤하늘에 뜬 예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기에 사람들도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를 힐끗거리고 있었다.당연히 눈치 없는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했다.아이스크림을 사러 줄을 서고 있을 때 온지유는 누군가와 부딪치게 되었고 바로 표정이 일그러졌다.여이현은 바로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어.”온지유는 고개를 돌리며 인파 속에서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엉덩이를 만진 건 확실했다.여이현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얼른 그녀를 데리고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명령 어조로 말했다.“당장 갈아입어.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집으로 갈 거야.”“왜 화를 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알아. 네 잘못이 아닌 거. 하지만 난 짜증이 난다고. 그런 썩을 놈들이 네 엉덩이를 만졌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다 불쾌하고 화가 나.”여이현의 기분을 누가 알겠는가. 자신의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성희롱을 당했는데 상대가 누군지도 몰라 복수할 수도 없는 이 기분을.온지유는 억울했다. 그래서 아주 보수적인 옷을 골라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옷을 갈아입고도 나오지 않았
말을 하던 여이현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더니 파란 장미를 꺼내 온지유에게 건넸다.“온지유 씨,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평생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게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오직 당신만 사랑할 거예요. 그러니 내 마음을 받아줘요. 내가 평생 당신을 걱정하고 아끼며 사랑할 수 있게.”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그녀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온지유는 이미 눈물바다가 되었다. 파란 장미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대답했다.“그럴게요.”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여이현은 그녀를 안고 빙빙 돌았다.지금 이 순간 온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기분이었고 서로의 심장 소리가 확성기에 틀어놓은 것처럼 크게 들렸다.“내 고백을 받아줬으니까 다음 순서로 그 장미를 뜯어 봐.”여이현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그를 힐끗 보다가 조심스럽게 장미를 뜯었다.안에는 반지가 있었다.온지유는 깜짝 놀랐다.“이현 씨, 정말!”“마음에 들어?”여이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밸런타인데이에 얼마나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그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며 준비했다.다행히 온지유는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온지유가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여자라면 대부분 그의 이벤트를 좋아할 것이다.그녀는 발꿈치를 들더니 여이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짧은 입맞춤 후 입을 떼려던 순간 여이현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더니 이내 질척인 키스를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에 둘만 있는 기분이었다.온지유는 숨이 막혔다. 여이현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뭐야. 하지 마. 나 배고파. 얼른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해줘.”온지유는 배고프다는 핑계를 대며 야릇해진 분위기를 피해 보려고 했다.여이현이 준비한 저녁은 전부 밸런타인데이와 연관이 있는 음식이었다.데코레이션이든 음식의 의미이든 전부 마음에 들었다.이런 이벤트를 싫어할 여자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온지유는 하루 종일 자신을 방치해둔 것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