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싸움에 누구도 감히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여이현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온지유의 말에 이성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온지유는 이상하리만큼 냉정했다.그녀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슴 쪽에서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이혼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그와 이혼하게 되니 실망에 휩싸였다.어쩌면 그녀는 여이현이 자신에게 이렇듯 화를 낼 거라곤 예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또 어쩌면 오늘 너무도 많은 일이 벌어져 그녀가 아직 전부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그와 다투게 되어 그런 것일 수도 있다.여이현은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온지유는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네, 그럼 동사무소에서 봬요.”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헛웃음만 나왔다.“그래!”여이현은 몸을 틀어 떠나버렸다.떠나기 전에 바닥에 있는 임산부를 위한 비타민을 보곤 짜증이 났는지 발로 걷어찼다.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온지유는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감정 기복이 너무도 심했던지라 이번엔 어지럼증에서 그치지 않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온지유 씨!”보육원의 원장이 쓰러지는 그녀를 보며 바로 달려와 부축했다.“괜찮아요? 안 되겠어요. 쉬어요.”온지유는 원장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에 앉아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자, 물 좀 마셔요.”선생님이 그녀에게 물잔을 건넸다.“고마워요.”온지유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잔을 받았다.“온지유 씨, 세상에 싸우지 않고 사는 부부는 없어요. 그래도 싸우고 나면 한 침대에서 자면서 화해해야 한다고 했어요.”그녀에게 물잔을 건넨 선생님은 그녀를 위로했다.“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사실 예전의 그녀는 여이현과 다툰 적이 거의 없었다.그녀는 불만이 있어도 꾹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이현은 그녀를 무시하며
“괜찮아요. 제가 차를 끌고 왔거든요. 혹시 바쁘시면 먼저 가셔도 돼요. 나중에 제가 다시 정식으로 사과하러 찾아갈게요.”한정민이 말했다.“정말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전 오늘 거저 맞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온지유 씨의 능력을 믿으니 나중에 오늘 맞은 것에 대한 보상을 톡톡히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상처를 치료한 뒤 한정민은 온지유와 대화를 나누다가 먼저 보육원을 떠났다.한정민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민우에게 문자를 보냈다.[온지유 씨 임신한 거 알고 있었어?]같은 시각 나민우는 집에 있었다.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옷도 캐주얼하게 입고 있었다. 한정민의 문자를 읽자마자 그의 손이 멈칫했다.[몰랐어.]한정민의 의외라고 생각했다.[그럼 앞으로 온지유 씨랑 잘 되긴 글렀네. 지유 씨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배고, 오늘 보니까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던데 말이야. 네가 지유 씨랑 잘 되긴 아주 힘들겠어.]나민우의 안색이 변했다. 결국 포기한 듯한 문자를 보냈다.[지유가 행복하다면... 난 그거면 돼...]그는 이내 한 마디 더 전송했다.[지유가 직접 행복하다고 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을 거야.][지유 씨가 임신하긴 했어도 상황을 보니까 아기 아빠를 포기하려는 것 같았어. 혹시 아기 아빠라도 되어줄 생각은?]나민우가 답장했다.[그런 기회가 나한테도 차려진다면 그럴 생각이야.]한정민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와, 정말 순애 녀석이네. 우리 중에서 네가 제일 순애보일 거야. 10년 넘게 변함없이 지유 씨를 짝사랑하다니... 정말 대단해.]나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사실 짝사랑은 그에게 힘든 것이었다.하루하루 마음 편히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온지유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불안하면서도 자신에게 과분한 사람이라 어울리지 않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그가 바라는 것은 사실 아주 간단했다. 온지유가 행복한 것.그는 온지유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까지 바라지 않았다. 그저 의지할만한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모
송신영은 그릇을 들며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그의 입가까지 가져다 댔다.그러자 나민우는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유지했다.“알았어. 내가 알아서 먹을게.”“그래, 천천히 먹어. 아직 뜨거우니까.”송신영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가 먹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나민우는 숟가락을 들어 입에 넣었다.“어때?”송신영은 기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나민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맛있어.”송신영은 아주 기뻤다.“아직 내가 만들어온 반찬은 안 먹어봤지? 먹어본 사람들은 다들 요리에 재능이 있다면서 칭찬해줬어. 다음번에 만들어 줄게. 어머님과 아버님께 네가 어떤 반찬을 좋아하는지 이미 물어봤으니까 다음엔 재료를 사 와서 네 주방에서 만들어 줄게, 어때?”“괜찮아.”나민우는 바로 거절했다.“요즘 바빠서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시간이 날 때 와서 해줄게.”나민우는 열정적인 송신영을 보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거절했다.“신영아, 날 이렇게 챙겨줄 필요 없어. 우리 부모님 말씀도 열심히 듣지 않아도 돼. 나도 날 잘 챙길 수 있어. 남녀가 유별한 세상인데 네가 우리 집에 와서 밥을 차린다면 다른 사람들이 안 좋게 볼 거야. 너 그러다가 나중에 시집은 어떻게 가려고 그래.”그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은 송신영은 바로 굳어진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어제 술 잔뜩 먹고 나서 네가 다른 사람의 이름만 중얼거리는 거 들었어.”송신영이 물었다.“온지유,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거야?”나민우는 시선을 떨군 채 담담하게 답했다.“응.”솔직하게 말하자 송신영의 안색이 변했다. 열정이 팍 식어버린 그녀가 또 물었다.“왜? 얼굴이 예뻐서? 나보다 예뻐?”나민우는 그녀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나한테는 지유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송신영은 온지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비록 나민우는 원래부터 성격이 좋아 그녀를 대할 때도 부드럽게 대하며 심한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
온지유는 고개를 돌렸다.채미소는 씩씩대며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갈궜다.다행히 반응이 빨랐던 온지유는 그녀가 뺨을 때리려고 손을 든 것임을 눈치채고 바로 확 잡아버렸다.채미소는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애를 쓰며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X, 감히 날 물 먹여? 내가 방심한 사이에 든든한 뒷배를 찾은 것도 모자라 네 쓰레기 같은 기획안을 편집장님이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말이 돼? 왜, 네가 뭔데 자꾸만 내 것이어야 했을 것들을 빼앗아 가는데!”그녀가 만약 보육원에 찾아가 소란을 피운다면 그녀에게 안 좋을 것이 분명했고 회사에서도 해고될 가능성이 아주 컸다.게다가 누군가 온지유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었으니 행여나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그녀는 앞으로 이 바닥에서 일하기 어려워진다.초조해진 채미소와 달리 온지유는 그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채미소 씨가 절 계략으로 밀어 넣는 건 괜찮고, 전 채미소 씨가 꾸민 일에 방어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리고 전 채미소 씨가 원하는 대로 여이현 씨를 미소 씨 앞으로 데려와 줬잖아요. 여이현을 유혹하지 못했다는 건 채미소 씨의 능력이 부족해서죠.”“하, 지금 나한테 능력이 부족하다고 했어? 이 개 같은 X이! 죽여버릴 거야!”채미소는 커다란 눈을 부릅뜨더니 방송국인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온지유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행동은 회사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되었고 보안 요원이 달려와 급히 그녀를 막았다.온지유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도 놀란 기색 하나도 없었다.“각자 능력대로 일하자고요. 제가 채미소 씨 밥그릇에 손을 대지 않은 것처럼 제 밥그릇에도 손을 댈 생각하지 말아요!”“하, 여이현을 내 앞으로 데리고 오기 전에 분명 나에 대해 뭐라고 말했지? 안 그랬으면 왜 날 보자마자 화를 냈겠냐고! 사악한 X, 너만 아니었어도 난 지금 이미 여이현을 내 남자로 만들었을 거야!”채미소는 여전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 여이현을 꼬시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탓을 온지유에게
온지유는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다리를 보았다. 바지에 피가 묻어있었다.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어제부터 배가 살살 아팠지만 바빴던 탓에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신은 처음이었기에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그리고 지금, 배가 너무도 아팠다.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 안으며 몸을 굽혔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났다.여이현은 그녀가 피를 흘리는 순간부터 안색이 굳어져 있었다. 서둘러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부축하였다.“온지유!”온지유는 극심한 통증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아팠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 여이현의 팔을 잡으며 힘겹게 말했다.“아기...”여이현은 두말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괜찮아, 괜찮을 거야. 내가 지금 바로 병원에 데려다줄게.”“배 비서, 얼른 시동 걸어요!”배진호는 놀라 넋을 잃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던지라 정신을 차리며 얼른 두 사람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안고 차 안에 밀어 넣은 뒤 자신도 올라탔다. 온지유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눕혔다. 혈색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너무도 걱정되었다.“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그는 온지유가 이렇듯 피를 많이 흘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애초에 그녀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지금 그녀가 얼마나 아픈지 줄줄 흐르는 피만 봐도 알 수 있었다.운전대를 잡은 배진호는 속도를 올렸다.온지유는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혈색을 잃은 입술을 틀어 물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통증이 심해질수록 그녀는 불안해졌고 손톱이 그의 손등에 박힐 정도로 꽉 잡고 있었다.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으면서 힘겹게 말을 꺼냈다.“이현 씨, 꼭, 꼭 아기를 지켜야 해요. 아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안 돼요!”그녀가 여이현에게 한 말은 아기를 지켜달라는 말뿐이었다.그녀는 여이현이 아기를 지켜주지 않을까 봐
여이현도 간호사를 따라 수술실 앞으로 왔다. 온지유가 수술실로 들어가자 그는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아주 불안하고 초조했다. 꼭 하늘이 무너진 기분이었고 무언가 번뜩 생각난 듯 간호사에게 말했다.“꼭 살려야 해요. 아기도 살려주세요!”온지유는 수술실로 들어갔다.문이 닫히고 여이현의 세상에도 어둠이 드리워졌다.그는 수술실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한참 지나도 진정할 수 없었다.누군가 그의 심장을 움켜쥐는 듯 호흡이 가빠졌다.그는 너무도 두려웠다.아기를 살려내지 못하면 온지유가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것이 두려웠다.지금 이 순간 그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비록 아기를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온지유를 잃게 되는 것이 더 두렵고 무서웠다.여이현은 침묵했다. 수술실의 문이 열리기 전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초조한 모습으로 기다렸다.손바닥에도 어느새 식은땀이 가득 찼다.배진호가 다가오자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여이현이 온지유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전화 받을 기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부하직원으로서 보고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대표님, 전화 왔습니다.”여이현은 확인하지도 않고 답했다.“무시하세요.”같은 시각, 여이현에게 전화를 건 김예진이 끊겨버린 전화를 보며 노승아에게 말했다.“언니, 여 대표님 전화를 안 받으시는데요.”노승아는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그럴 리가. 오늘 영화 시사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 혹시 깜빡하고 있을까 봐 다시 알려주려고 전화를 한 건데 안 받을 리가 없잖아.”최근 그녀는 여이현을 자주 찾지 않았다.지난번에 그가 그렇게나 분명히 말했으니 그녀는 당연히 지금은 한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그렇지 않고 계속 그를 찾는다면 그의 반감을 살 것이 분명했으니까.그녀가 김예진을 시켜 여이현에게 연락하라고 한 것도 거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더
문자를 읽은 노승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눈빛이 놀라움에서 분노로 변하면서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버렸다.마침 들어온 김예진이 그녀의 모습을 보곤 물었다.“언니,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핸드폰은 여전히 진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승아는 온지유가 임신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누구 아이를 가진 거지?'‘어떻게 임신한 거지?!'‘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온지유가 어떻게 아이를 배!'노승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길고 하얀 그녀의 손등 위로 핏줄이 튀어나왔다. 김예진이 다가오자 김예진의 팔을 뿌리치며 소리를 질렀다.“손대지 마!”김예진은 깜짝 놀랐다.노승아는 그 손길이 김예진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곤 바로 울먹이는 얼굴로 바뀌었다. 아주 서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김예진은 바로 그녀를 달랬다.“언니, 괜찮아요. 울지 말아요.”노승아는 눈물을 흘리며 김예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내가 여이현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왜 날 봐주지 않는 걸까. 설마 이젠 나에게 은혜 갚아야 한다는 것도 잊은 걸까?”김예진은 그녀가 이렇듯 슬퍼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고 그녀의 감정에 옮아 같이 슬퍼하게 되었다....굳게 닫혔던 수술실 문이 드디어 열렸다. 여이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침대 곁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창백한 그녀의 안색에 너무도 걱정되어 물었다.“언제 깨어날 수 있는 거예요? 안색이 왜 아직도 안 좋죠? 아기는 무사해요?”우르르 쏟아지는 질문에 의사는 어느 것부터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럼에도 침착하게 말했다.“하마터면 유산할 뻔했지만, 운이 좋았죠. 저희가 최선을 다한 덕에 아기는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환자는 휴식이 필요한 상태에요. 과하게 일하면 안 되고 영양을 보충하면서 몸조리를 잘해야 할 거예요. 환자분은 너무 말랐어요. 몸에 필요한 영양분도 부족해서 아기한테도 좋지 않을 거예요.”여이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감사합니다. 제가 앞으로 잘 보살피겠습니다.”온지유는 병실로
온지유가 눈을 떴을 땐 어둠이 내린 밤이었다.손가락을 움직이자 누군가 자신의 손을 깔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천천히 눈을 뜬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제대로 편히 자지 못한 것 같았다.항상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던 그의 얼굴엔 수염도 났다.그의 모습을 훑어보던 온지유는 멈칫했다.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가 들어왔다. 배진호는 양손 가득 뭔가를 들고 왔다.“사모님, 깨셨어요.”배진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배진호는 잠든 여이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대표님께서 사모님이 병원에 오신 뒤로 내내 곁을 지키고 계셨어요. 잠깐이라도 근처 호텔에서 편하게 주무시라니까 꼭 사모님의 곁에 계시겠다며 고집을 부리시더군요.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잠드셨어요.”온지유는 입을 벙긋거렸다.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힘겹게 말을 꺼냈다.“아이는...”배진호가 답했다.“무사해요. 하마터면 유산할 뻔했다고 했어요. 다행히 아이도 무사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사모님과 대표님의 사이는 돌일 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졌을 거예요. 사모님이 수술실로 들어간 순간부터 대표님께선 초조해하셨어요. 사모님과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될까 봐요. 대표님께선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사모님이 대표님을 원망하고 미워할까 봐 엄청 마음 졸이고 계셨거든요.”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여이현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배진호는 사온 물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전 사모님께 거짓말을 한 적 없어요. 설마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예요? 대표님께선 사모님을 엄청 걱정하고 계셨어요. 설령 그 아이가 대표님의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대표님껜 그 아이를 없애는 방법은 아주 많거든요. 사모님만 원하지 않는다면 대표님께선 강요할 생각도 없으셨어요. 대표님은 자신의 행동으로 나중에 영원히 사모님과 다시 잘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두 사람은 익숙하게 별장으로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희영을 부축하면서 나왔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입원한 병원으로 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여희영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여희영은 그런 온지유의 손등을 토닥이며 달랬다.“괜찮아. 정말이야.”“저희가 너무 소홀했어요.”“너희 탓이 아니야. 이것도 다 내 운명인 거지. 이런 오빠의 동생으로 태어난 게 잘못이지.”여희영은 말을 마친 후 여이현을 보았다.“여재호가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어. 얼른 다시 원상복구 해야 해. 절대 다른 사람이 빈틈을 노리게 해서는 안 돼. 그리고 여재호는 고민할 것 없어. 그냥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계획이 있었다. 이번 일을 겪은 후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회사 쪽은 여희영이 입원해 있는 동안 전부 깔끔하게 정리했다.속도는 빠르게 진행도이었다. 아무리 여재호가 업소녀에게 돈을 주며 입막음을 했다고 해도 늦었다. 경찰이 너무도 빠르게 도착했기 때문이다.여재호의 사람들을 전부 해고했다. 그리고 그가 매수한 거래처들과도 전부 거래를 끊어버렸다.여재호에게 처음으로 매수당한 고객은 차정혁이었다.그는 가짜를 진품처럼 팔고 품질이 안 좋은 물건을 대놓고 팔았다. 여재호에게 매수당하지 않았어도 여이현은 그와 거래를 끊을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차정혁은 바로 여재호에게 자료 한 부를 건넸다. 그 자료에는 여진 그룹 서류뿐만 아니라 온지유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시간도 적혀 있었다.여재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여이현의 여자를 건들라고? 죽고 싶어?”“대표님, 정말로 판을 뒤엎고 싶다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기횝니다. 아니면 정말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밟히고 싶은 겁니까. 잊지 마세요, 여진 그룹을 물려받아야 할 사람은 응당 대표님이십니다.”차정혁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이 일은 제가 다 준비를 해뒀으니 대표님께선 지시만 내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제 사람들이 바로
“날 조롱할 것 없어. 여이현, 네가 날 찾아왔다는 건 내가 여진을 조정하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왔다는 의미겠지. 그래, 여진은 내가 반드시 손에 넣을 거야. 여진뿐만 아니라 여씨 가문 모든 재산을 손에 넣을 거라고.”여재호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말했다. 꼭 반항기가 흘러넘치는 청소년처럼 말이다.여이현은 술을 한잔 마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모는 어디에 있어요.”그는 회사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여재호에게 고모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 찾아왔다.오는 길에 이미 여희영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여희영을 찾을 수 없었고 그의 추측이 거의 확신이 되어갔다.여재호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굳어지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을 멈추었다.“여희영을 데려가도 돼. 하지만 내일 회사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해. 여진의 모든 지분과 운영할 권리는 내게 넘긴다고.”“제가 싫다고 하면요?”“그럼 여희영을 만날 생각은 하지 마. 희영이가 걱정되지?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여희영한테 그렇게 네 편에 서지 말라고 말했는데 말이야. 오빠인 내 말을 안 듣더라고.”여재호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이현은 그와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차 키를 들고 일어나며 싸늘한 시선으로 여재호를 보았다.“그동안 꽤나 많은 돈을 빼돌리고 계셨나 봐요. 집까지 업소녀를 부르고 말이에요. 지금 신경 써야 할 게 명성이 아닌가요? 이미지 나락으로 빠지고 싶은 거 아니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여재호는 코웃음을 쳤다.“저의 일 처리 방식이 어떤지 그동안 봐서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고 자비도 베풀지 않는 사람이죠.”말을 마친 여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여재호는 여이현의 말에 순간 겁을 먹게 되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방으로 올라간 여자에게 화풀이했다.여재호에게서 단서를 알아내지 못한 여이현은 다시 회사로 돌아와 모든 CCTV를 돌려보았다.여희영이
“날 오빠 취급하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돈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니까.”여재호는 결국 여희영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폭행한 후 작은 다락방에 가둬버렸다.밤이 되니 온지유와 여이현이 탑승한 비행기도 도착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광고판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공항에 설치된 가장 큰 광고판에는 여진 그룹에서 출시하여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화장품 영상을 틀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음식 밀키트 광고로 바뀌었다.여이현의 동의도 없이 광고를 바꿨다는 건 너무도 이상했다.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다.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은 경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온지유가 입을 열려던 순간 여이현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기획부 부장이었고 여진 그룹의 원로라고 할 수도 있는 존재였고 여진을 향한 충성이 아주 높았다..“서 부장님, 마침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공항 광고판 광고가 왜 바뀐 거죠?”“대표님, 안 그래도 이 일로 연락드렸습니다. 얼른 저의 집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다들 대표님만 기다리고 계십니다.”서철민은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이현과 온지유는 더는 묻지 않고 바로 서철민의 집으로 출발했다.서철민의 집 서재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이현을 보자마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모든 사람들이 입을 열었다.여이현은 그들에게 앉으라는 제스처를 한 뒤 입을 열었다.“저를 찾으신 이유를 말해보세요.”그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나 증거가 없었기에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여재호가 저희 회사 재무부장과 구매부 부장, 그리고 일부 고객들을 매수했습니다. 현재 여진이 여재호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하...”서철민과 일부 사람들이 까발린 여재호의 만행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경성으로 돌아오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줄 알았으나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에게 연락하며 상황을 알렸다.하지만 그는 배진호와 함께 비행기에 있어 전화를 받지 못했다.여재호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돈과 지위를 얻는 것이었다.과거에 자신이 손에 넣지 못했던 재산을 이번에는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었다.그가 여진그룹에서 큰 소동을 일으키자 결국 여희영도 나서게 되었다.여희영은 직접 찾아와 그를 말렸다.“할 말은 이미 다 했어. 그날 결혼식에서 이현이의 태도가 얼마나 분명했는지 오빠도 직접 봤잖아. 그런데 왜 또 이러는 거야?”“이현이는 너를 홀대한 적이 없잖아?”여진 그룹이 위태로웠던 시절 여이현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그룹은 조금씩 번창하며 오늘날의 위치에 올랐다.하지만 지금...여재호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이현이 여진 그룹을 이 정도로 키운 건 맞아. 그런데 문제는 나도 빈손으로 남을 수는 없다는 거야.”“네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너를 불러들였을 때엔 왜 거절하지 않았대?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위선적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여희영는 직설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일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말하는 성격이었다.게다가 그녀의 오빠는 지금까지 제대로 한 일이 없었을뿐더러 지금은 더 악랄하게 굴고 있었다.“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어이가 없어서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할 말이 없으면 하지 마. 내가 하는 일이 네게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뭘 걱정하는 건데? 여희영, 너도 알잖아. 이현이는 가문의 사람이 아니야. 왜 네 팔은 밖으로만 굽는 거야?”여재호는 돈을 받지 못하고 여이현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것만으로도 이미 인내심이 폭발할 지경이었다.여기에 여희영의 말까지 더해지자 그는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여희영도 화가 치밀었다.“내 팔이 밖으로 굽는다고? 오빠가 가문을 내팽개쳤을 때 나는 가문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아버지와 이현이에게 일을 다 떠넘기고는 이제 와서
“전 무열 씨의 의지력을 믿어요. 당신이라면 분명히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는 제가 계속 상태를 관리할게요.”인명진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약물 금단 증상은 고통스러웠지만 신무열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김혜연은 늘 그의 주변에 함께 있어 주었다.덕분에 신무열은 일주일 만에 약물 의존을 끊어냈다.이는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었고, 특히 김혜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무열 씨, 우리 현장에도 내려가 봐요. 현장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김혜연의 생각은 간단했다. 함께 일에 몰두하면 그는 아린의 죽음을 떠올릴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동안 신무열은 막 결혼한 상태에서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껴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더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신무열은 김혜연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좋은 생각이야. 현장으로 가자. 이쪽의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 요한도 있으니까 걱정 마.”“좋아요.”그들의 결정을 들은 법로는 남아서 Y국의 상황을 관리하기로 했다.그는 별이를 떠나보내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경성에서 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은 매우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이번은 신무열과 김혜연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Y국에 온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져 버렸다.“별아, 이번에 엄마랑 아빠랑 같이 돌아가면 말 잘 들어야 한다. 외할아버지가 나중에 보러 갈게.”법로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외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아빠랑 엄마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돌아오시면 꼭 다시 만나요!”“그래.”법로는 그들을 공항까지 직접 배웅했다.업무적으로는 배진호가 있었지만 온지유와 관련된 부분은 온지유의 결정을 존중했다.배진호는 먼저 제안했다.“대표님, 아드님을 제가 먼저 데려가서 학교에 보내겠습니다. 두 분은 Y국에서 조금 더 머무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모님의 양부모님들과
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걱정 끼쳐서 미안해.”“무열 씨, 제발 꼭 좋아져야 해요. 이렇게 날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우리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 아쉬움으로 남았잖아요.”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끌어안으며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간절히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두려웠다.만약 신무열의 마음속에 모든 분야에 출중한 완벽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아린의 경우는 달랐다. 모든 조건을 떼어 놓고 보면 말이다.김혜연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선택을 하지 않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남은 생이 죄책감 속에서 허비되지 않기를 바랐다.신무열은 김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하려는 말 다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해 이전의 일들에서 벗어나려고 할게.”김혜연은 그런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이때, 인명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신무열의 약물 의존은 법로가 책임지고 있었고, 인명진은 그의 심리 치료를 맡게 되었다.신무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아린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다.인명진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는 최면을 통해 신무열의 내면을 하나씩 풀어가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신무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저 때문에 죽어가요. 죽음이 이렇게도 불공평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다가온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신무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나왔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모든 일에는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무열 씨는 최선을 다했고 아린을 방치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현실은 잔혹해요. 무열 씨에게는 방법이 없었고, 아린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해방이었을지도 모르죠.”“노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수천, 수만 명이었어요
신무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럽게 절규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본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졌다.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김혜연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온지유는 신무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하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힘겹게 말했다.“아니, 내 잘못이야. 만약 내가 더 잘했다면 아린은 희생하지 않았을 거야. 죽음을 많이 봐왔지만 이번처럼 고통스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지유야, 너도 알잖아? 난 아린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직접 봤어...”그의 목소리는 쉰 듯한 낮은 톤으로 하나하나 쏟아져 나왔고, 온지유는 처음으로 신무열이 이렇게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됐다.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신무열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해칠까 두려웠던 온지유는 급히 법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법로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신무열의 상태를 본 법로는 마음이 아팠다.신무열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다!상태를 점검한 법로는 신무열이 몰래 페노바르비탈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더욱 심각한 것은, 이 약물은 한때 법로거 개량했던 중독성을 유발하는 형태였다는 점이었다.신무열의 방금 전 감정 폭발은 약을 제때 복용하지 못해 나타난 금단 증상이었다.법로는 즉시 실험실의 약물 사용 규정을 엄격히 강화했다.앞으로는 모든 약물 사용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다.또한, 신무열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관리했다.신무열은 Y국의 수령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끌어내리고 새 인물을 세우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만약 그의 약물 복용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반드시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 분명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법로가 이를 막아섰다.“신무열이 자리를 비우는 건 공적인 이유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자리를 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