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가 눈을 떴을 땐 어둠이 내린 밤이었다.손가락을 움직이자 누군가 자신의 손을 깔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천천히 눈을 뜬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제대로 편히 자지 못한 것 같았다.항상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던 그의 얼굴엔 수염도 났다.그의 모습을 훑어보던 온지유는 멈칫했다.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가 들어왔다. 배진호는 양손 가득 뭔가를 들고 왔다.“사모님, 깨셨어요.”배진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배진호는 잠든 여이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대표님께서 사모님이 병원에 오신 뒤로 내내 곁을 지키고 계셨어요. 잠깐이라도 근처 호텔에서 편하게 주무시라니까 꼭 사모님의 곁에 계시겠다며 고집을 부리시더군요.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잠드셨어요.”온지유는 입을 벙긋거렸다.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힘겹게 말을 꺼냈다.“아이는...”배진호가 답했다.“무사해요. 하마터면 유산할 뻔했다고 했어요. 다행히 아이도 무사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사모님과 대표님의 사이는 돌일 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졌을 거예요. 사모님이 수술실로 들어간 순간부터 대표님께선 초조해하셨어요. 사모님과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될까 봐요. 대표님께선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사모님이 대표님을 원망하고 미워할까 봐 엄청 마음 졸이고 계셨거든요.”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여이현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배진호는 사온 물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전 사모님께 거짓말을 한 적 없어요. 설마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예요? 대표님께선 사모님을 엄청 걱정하고 계셨어요. 설령 그 아이가 대표님의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대표님껜 그 아이를 없애는 방법은 아주 많거든요. 사모님만 원하지 않는다면 대표님께선 강요할 생각도 없으셨어요. 대표님은 자신의 행동으로 나중에 영원히 사모님과 다시 잘
“이현 씨...”말을 마치기도 전에 병실 문이 열렸다.여희영이 다급하게 들어오며 온지유를 보더니 기뻐하는 얼굴로 말했다.“세상에, 지유야. 임신했으면서 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니? 이제야 알게 되었잖니. 만약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여행 가지 않았을 거야. 설마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알게 된 건 아니지?”여희영은 캐리어를 끌고 들어왔다. 머리엔 스카프를 쓰고 있었고 선글라스도 끼고 있는 것을 보아 금방 돌아온 것 같았다.그녀의 피부는 전보다 까맸다. 여행하면서 탄 것이 분명했다.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여희영의 등장에 그녀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얼른 일어나 앉아 여희영을 불렀다.“고모님!”여희영을 본 온지유는 아주 기뻐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다.여희영은 손에 든 물건과 캐리어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여이현을 밀어내고 온지유와 포옹했다.“아이고, 우리 지유, 고생했어. 우리 집안 핏줄을 품고 있느라 많이 힘들었겠네.”온지유도 그녀를 안았다. 너무 반가워서 그런지 아니면 최근 너무도 많은 일이 벌어져서 그런지 그녀는 훌쩍이며 말했다.“왜 귀국하셨으면서 저한테 말씀하지 않으신 거예요. 그동안 고모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여희영이 말했다.“서프라이즈로 짠 나타나려고 했지. 그리고 이현이가 널 괴롭히고 있으면 현장을 잡으려고 했어.”여이현은 여희영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여씨 가문에서 온지유를 가장 아껴주는 사람은 여희영이었다. 여희영은 고리타분한 집안사람들과 달랐고 젊은 사람과 잘 어울려 지냈을 뿐 아니라 온지유를 아주 예뻐했다.여희영은 온지유를 진짜 가족으로 대했다.“전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었어요.”온지유는 그간 여이현과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했으니까.“안 믿어.”여희영은 선글라스를 벗고 여이현을 보았다.“쟤가 널 괴롭힌 게 아니라면 네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임신도 했는데 널 괴롭혀? 내가 아주 따끔하게 혼내줄 거야!”온
음식 용기에 담아온 것도 있고 보온병에 담아 온 것도 있었다.여이현이 사온 음식은 5성급 호텔 주방장이 만든 것이었지만 여희영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옆으로 밀어두며 자신이 포장해온 음식을 꺼냈다.“이건 농어탕이야. 임산부에게 아주 좋지. 그리고 이건 돼지 간으로 만든 죽이야. 돼지 간은 철분이 많아 빈혈에도 좋고 태아한테도 좋아. 또 이건 족발 찜이야...”그녀는 계속 음식을 꺼내며 말했다. 병실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내 여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넌 아빠가 되는 게 처음이니까 임산부를 어떻게 잘 보살펴야 하는지,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배워둬. 내가 가져온 음식은 전부 임산부의 영양 보충에 좋은 것들이야. 절대 산도가 있거나 카페인 같은 걸 먹게 하지 마. 그런 것들은 유산의 위험성이 있으니까...”여희영이 끊임없이 말하자 여이현이 말했다.“지유는 내 아내니까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어요.”“알긴 뭘 알아!”여희영은 전혀 믿지 않았다.“남편이라는 놈이 아내가 입원할 정도로 일하는데 말리지도 않고 말이야. 어딜 봐서 잘 챙겨준 거니? 지유는 임신했으니까 몸조리를 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태교에 집중해야 한다는 거 모르니? 정말이지 하나도 모르면서 뻔뻔하게 말은 잘하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배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연히 출근하면 안 되죠.”온지유는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고모님, 얼른 앉으세요. 저 배고파요. 뭘 좀 먹고 싶어요.”“그래.”그녀의 말에 여희영은 바로 잔소리를 멈추고 자신이 포장해온 음식을 내밀며 온화하게 말했다.“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이현은 여희영이 온 뒤 얼굴에 웃음기가 생긴 그녀를 보며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며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온지유는 죽을 먹었다.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이라곤 했지만, 여전히 메스꺼움은 사라지지
김예진은 여이현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대표님, 제가 드디어 찾았네요.”여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수심이 가득한 김예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김예진이 노승아의 매니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담배를 꺼버리곤 재떨이에 던졌다.“회사에 다른 직원이 없어요?”그가 기획사를 차리긴 했어도 따로 회사를 관리하는 경영자를 두었다.그러니 기획사의 일은 그 직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김예진이 말했다.“회사에 아무리 직원이 많다고 해도 승아 언니한테 필요한 사람은 대표님이세요. 대표님께선 계속 전화를 안 받으셔서...”여이현은 또 노승아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미간을 찌푸렸다.“다른 일은 없는 거예요?”김예진은 눈물을 닦았지만 계속 흘러냈다.“언니가 앓고 있던 병이 다시 재발했어요. 어제 검진 결과를 받고 알게 되셨는데, 귀가 안 들린다고 일정을 전부 취소했어요. 승아 언니 이대로 청력을 잃으면 어떻게 하죠? 앞으로 연기는 어떻게 해요? 가수 생활 겨우 포기하고 배우로 전향했는데 연기도 못하게 되면... 그럼 언니 인생은 여기서 끝나게 되는 거잖아요. 언니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예요.”그녀의 말에 여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심각해졌다.“아무것도 안 들린다고 하던가요?”김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최고의 의사를 그녀에게 붙여 귀를 치료하게 했다.의사는 그녀가 치료만 잘하면 다시 예전처럼 나아질 수 있다고 했다.예전에 이미 치료를 잘 받은 탓에 청력의 거의 회복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안 들릴 수 있겠는가.여이현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지금 어디에 있죠?”김예진은 서둘러 그를 노승아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온지유의 병실은 9층이었지만 여이현은 11층에 왔다.병실 밖에서부터 그는 병실에 누워있는 노승아를 발견했다. 머리를 헝클어진 채 안색은 창백했다. 그녀는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다른 남자가 그녀의 모습을 봤어도 마음 아파했을 정도였다.여이현이 병실 입구에 서 있자 김예진이 말했다.
노승아의 눈에 힘이 풀리면서 억지 미소를 지었다.“오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꼭 그렇게 차갑게 말을 해야겠어? 나 무서워, 난 지금 이미 귀가 안 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섭다고!”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여이현은 그녀의 팔을 놓아주며 차가운 시선으로 보았다.“네가 널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은 뭔데. 어떻게 귀가 안 들릴 수 있겠어. 네 직업을 사랑한다는 건 다 거짓말이었나 보군. 넌 어떻게 하면 네가 더 잘 될 수 있나 연구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네 건강이 나빠지는지만 연구하고 있었나 보네.”“연예계가 쉬운 줄 알았어? 누구나 다 네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줄 아느냐고. 네가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는데 나도 계속 널 그 자리에 앉혀둘 이유가 없지. 그 자리를 아끼면서 열심히 할 사람은 아주 많아!”여이현은 매정하게 말했다. 그녀가 들을 수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말이다. 여하간에 평생 그녀에게만 신경 쓰며 살아갈 수 없지 않겠는가.노승아는 그가 키운 연예인이었다.그러니 그가 끌어내릴 수 있었다.말을 마친 여이현은 단호하게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노승아는 예전이었다면 당장이라도 가슴 아픈 얼굴로 달래야 할 그가 차갑게 돌아서는 모습을 보곤 마음 급해져 얼른 그를 안았다.“오빠, 가지 마!”한편, 온지유와 여희영이 11층에 있었다.여희영은 휴지를 들고 코를 닦으면서 말했다.“내가 나 혼자 와도 된다고 했잖아. 내 말도 안 듣고 결국 침대에서 내려오다니.”“괜찮아요. 의사가 적당히 움직여도 된다고 했어요. 그냥 조금 걷는 것뿐인데요. 전 정말로 괜찮아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온지유는 여희영의 팔에 팔짱을 꼈다.“고모님을 보니까 너무 기뻐서 그래요.”그녀는 여희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전보다 더 여희영에게 찰싹 붙었다.“아, 비염은 언제 나으려나. 먼지가 코끝에 붙어도 코가 간지러워 못 살겠네. 그래서 내가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못 키우잖아. 에휴, 얼른 의사한테 진료받아야지.”여희
노승아의 고개가 돌아가고 그대로 침대에서 떨어졌다.여희영의 한방에 단단한 침대에 뼈가 부딪치는 소리마저 들려왔고 노승아는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떨어졌다.여이현은 원래 노승아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갑자기 등장한 여희영이 먼저 노승아의 뺨을 갈궜다.그는 여희영을 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고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동시에 김예진이 달려오며 노승아를 부축했다.“뭐 하냐니, 안 보이니? 여우를 잡고 있잖아.”여희영이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노승아는 눈물을 흘렸다. 꼭 더는 혼자의 힘으로 생활하기 어려운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노승아를 일으켰다.“승아는 지금 환자예요. 전 그냥 상태를 보러 온 거라고요.”“네가 뭔데 얘 상태를 확인하러 와?”여희영은 믿지 않았다.“얘는 지금 연기하고 있는 거야. 네가 얘를 불쌍하게 여겨 목적을 이루려고!”“전 승아 회사 대표예요. 설령 연기라고 해도 상사로서 상태 확인하러는 와야죠.”여이현은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희영의 행동은 다소 선을 넘은 것 같았다.“그걸 누가 믿어!”여희영이 말했다.“아픈 것도 시기가 있는 거니? 왜 많고 많은 시간 중에서 하필이면 네가 병원에 있을 때 아픈 건데. 이 여자는 연기로 대상도 받았으니 네 앞에서 아픈 환자 연기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말을 마친 여희영은 팔짱을 끼면서 노승아를 내려다보았다.김예진은 노승아를 위해 나섰다.“대체 왜 언니한테 이러시는 건데요. 언니는 이미 충분히 불쌍한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다들 언니한테 이럴 수가 있으세요!”김예진의 눈에는 노승아가 힘들게 노력해 정상의 자리에 앉은 것으로 보였다.예전에는 목을 다쳐 가수 생활을 포기하고 이젠 청력까지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제일 중요한 시기에 말이다.그런데 다른 사람이 노승아를 괴롭히는 모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김예진의 말에 여희영은 코웃음을 쳤다.“하, 불쌍하다고요? 대체 어디가 불쌍
몸싸움을 벌이는 세 사람을 보며 여이현은 얼른 여희영을 잡아당겼다. 그는 여희영이 충동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길 바랐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고모. 얼른 그 손 놓으세요!”여희영은 여이현의 팔을 뿌리쳤다.“안 놔, 못 놔! 내가 오늘 이 X 진상을 전부 까발릴 거야. 너희들도 똑똑히 봐야지. 입만 열면 거짓말인 여자니까 귀가 안 들린다는 것도 거짓말일 거야!”“아아아악!”노승아가 소리를 질렀다.“다들 제가 죽기를 바라네요. 그래요, 죽을게요. 지금 죽으면 되잖아요!”싸우고 있는 그들을 보며 노승아는 소리를 지르더니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노승아의 머리에선 피가 흘러나오더니 바닥에 쓰러졌다.온지유의 눈이 커졌다. 노승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충격을 받은 온지유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여희영도 놀랐다. 노승아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모든 사람들이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언니!”김예진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살인자들! 당신들이 우리 언니를 죽인 거야!”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승아를 안았다.“얼른 의사 불러요!”김예진은 그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얼른 병실 밖으로 나가 의사를 불렀다.의사는 서둘러 노승아를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혼란스러웠던 상황은 몇 분간 지속하였고 다시 평온해졌다.그들은 응급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김예진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여이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누군가와 연락하고 있었다.여희영은 그제야 진정되었다. 이상하리만큼 냉정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온지유를 보았다. 안색이 창백해진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지유야, 아까 많이 놀랐지?”온지유는 여희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고모님...”“그래, 임신했는데 피를 보았으니 많이 놀랐겠지. 얼른 가서 쉬어.”여희영은 이미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노승아는 그녀의 생각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방금은 내가 너무 충동적이어서 너한테 안 좋은 모습만 보여주었네. 미안해, 이 일은 내가 알아
“이현...”그녀가 다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던 여이현은 그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자리를 옮겼다.“소식이 새어나가지 않게 잘 관리하세요. 누구도 노승아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나쁜 영향을...”여이현은 온지유를 스쳐 지나갔다. 꼭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처럼 말이다.그 순간 온지유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여희영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여이현은 노승아를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행여나 연예인 앞길에 문제가 생길까 봐 말이다.물론 그녀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본 이상 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피어올랐다.여이현이 노승아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귀찮게 물어보지 말자며 속으로 생각하곤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의사라면 분명히 그녀에게 정확한 답을 줄 것이다.의사에게 노승아의 상태를 물어본 후에야 그녀는 노승아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전에는 목을 다쳐 노래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었다.게다가 분명 한쪽 귀만 문제가 있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왜 양쪽 모두 청력을 잃게 된 것일까.의사는 그녀에게 노승아의 청력은 원래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이현이 예전에 노승아에게 붙여준 의사는 세계 최고의 의사였으니까.100%의 확률로 나아질 수 있었다고 했다.설령 목소리는 예전과 달라져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해도 청력엔 문제가 없다고 했다.하지만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그들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만약 노승아의 귀가 계속 회복하지 못한다면 아마 영원히 청력을 잃고 살게 될 것이다.온지유는 다소 충격에 빠졌다.노승아에겐 질병이 많았기 때문이다.온지유가 또 물었다.“그러면 노승아 씨 상황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을까요?”어떤 사람들은 청각에 문제가 있어도 모르고 넘기는 경우가 있었다.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문제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의사는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후천적인 겁니다. 뇌에 손상을 입거나 귀를 세게 다친 환자만이 이런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두 사람은 익숙하게 별장으로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희영을 부축하면서 나왔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입원한 병원으로 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여희영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여희영은 그런 온지유의 손등을 토닥이며 달랬다.“괜찮아. 정말이야.”“저희가 너무 소홀했어요.”“너희 탓이 아니야. 이것도 다 내 운명인 거지. 이런 오빠의 동생으로 태어난 게 잘못이지.”여희영은 말을 마친 후 여이현을 보았다.“여재호가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어. 얼른 다시 원상복구 해야 해. 절대 다른 사람이 빈틈을 노리게 해서는 안 돼. 그리고 여재호는 고민할 것 없어. 그냥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계획이 있었다. 이번 일을 겪은 후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회사 쪽은 여희영이 입원해 있는 동안 전부 깔끔하게 정리했다.속도는 빠르게 진행도이었다. 아무리 여재호가 업소녀에게 돈을 주며 입막음을 했다고 해도 늦었다. 경찰이 너무도 빠르게 도착했기 때문이다.여재호의 사람들을 전부 해고했다. 그리고 그가 매수한 거래처들과도 전부 거래를 끊어버렸다.여재호에게 처음으로 매수당한 고객은 차정혁이었다.그는 가짜를 진품처럼 팔고 품질이 안 좋은 물건을 대놓고 팔았다. 여재호에게 매수당하지 않았어도 여이현은 그와 거래를 끊을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차정혁은 바로 여재호에게 자료 한 부를 건넸다. 그 자료에는 여진 그룹 서류뿐만 아니라 온지유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시간도 적혀 있었다.여재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여이현의 여자를 건들라고? 죽고 싶어?”“대표님, 정말로 판을 뒤엎고 싶다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기횝니다. 아니면 정말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밟히고 싶은 겁니까. 잊지 마세요, 여진 그룹을 물려받아야 할 사람은 응당 대표님이십니다.”차정혁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이 일은 제가 다 준비를 해뒀으니 대표님께선 지시만 내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제 사람들이 바로
“날 조롱할 것 없어. 여이현, 네가 날 찾아왔다는 건 내가 여진을 조정하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왔다는 의미겠지. 그래, 여진은 내가 반드시 손에 넣을 거야. 여진뿐만 아니라 여씨 가문 모든 재산을 손에 넣을 거라고.”여재호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말했다. 꼭 반항기가 흘러넘치는 청소년처럼 말이다.여이현은 술을 한잔 마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모는 어디에 있어요.”그는 회사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여재호에게 고모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 찾아왔다.오는 길에 이미 여희영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여희영을 찾을 수 없었고 그의 추측이 거의 확신이 되어갔다.여재호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굳어지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을 멈추었다.“여희영을 데려가도 돼. 하지만 내일 회사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해. 여진의 모든 지분과 운영할 권리는 내게 넘긴다고.”“제가 싫다고 하면요?”“그럼 여희영을 만날 생각은 하지 마. 희영이가 걱정되지?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여희영한테 그렇게 네 편에 서지 말라고 말했는데 말이야. 오빠인 내 말을 안 듣더라고.”여재호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이현은 그와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차 키를 들고 일어나며 싸늘한 시선으로 여재호를 보았다.“그동안 꽤나 많은 돈을 빼돌리고 계셨나 봐요. 집까지 업소녀를 부르고 말이에요. 지금 신경 써야 할 게 명성이 아닌가요? 이미지 나락으로 빠지고 싶은 거 아니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여재호는 코웃음을 쳤다.“저의 일 처리 방식이 어떤지 그동안 봐서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고 자비도 베풀지 않는 사람이죠.”말을 마친 여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여재호는 여이현의 말에 순간 겁을 먹게 되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방으로 올라간 여자에게 화풀이했다.여재호에게서 단서를 알아내지 못한 여이현은 다시 회사로 돌아와 모든 CCTV를 돌려보았다.여희영이
“날 오빠 취급하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돈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니까.”여재호는 결국 여희영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폭행한 후 작은 다락방에 가둬버렸다.밤이 되니 온지유와 여이현이 탑승한 비행기도 도착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광고판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공항에 설치된 가장 큰 광고판에는 여진 그룹에서 출시하여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화장품 영상을 틀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음식 밀키트 광고로 바뀌었다.여이현의 동의도 없이 광고를 바꿨다는 건 너무도 이상했다.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다.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은 경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온지유가 입을 열려던 순간 여이현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기획부 부장이었고 여진 그룹의 원로라고 할 수도 있는 존재였고 여진을 향한 충성이 아주 높았다..“서 부장님, 마침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공항 광고판 광고가 왜 바뀐 거죠?”“대표님, 안 그래도 이 일로 연락드렸습니다. 얼른 저의 집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다들 대표님만 기다리고 계십니다.”서철민은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이현과 온지유는 더는 묻지 않고 바로 서철민의 집으로 출발했다.서철민의 집 서재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이현을 보자마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모든 사람들이 입을 열었다.여이현은 그들에게 앉으라는 제스처를 한 뒤 입을 열었다.“저를 찾으신 이유를 말해보세요.”그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나 증거가 없었기에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여재호가 저희 회사 재무부장과 구매부 부장, 그리고 일부 고객들을 매수했습니다. 현재 여진이 여재호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하...”서철민과 일부 사람들이 까발린 여재호의 만행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경성으로 돌아오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줄 알았으나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에게 연락하며 상황을 알렸다.하지만 그는 배진호와 함께 비행기에 있어 전화를 받지 못했다.여재호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돈과 지위를 얻는 것이었다.과거에 자신이 손에 넣지 못했던 재산을 이번에는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었다.그가 여진그룹에서 큰 소동을 일으키자 결국 여희영도 나서게 되었다.여희영은 직접 찾아와 그를 말렸다.“할 말은 이미 다 했어. 그날 결혼식에서 이현이의 태도가 얼마나 분명했는지 오빠도 직접 봤잖아. 그런데 왜 또 이러는 거야?”“이현이는 너를 홀대한 적이 없잖아?”여진 그룹이 위태로웠던 시절 여이현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그룹은 조금씩 번창하며 오늘날의 위치에 올랐다.하지만 지금...여재호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이현이 여진 그룹을 이 정도로 키운 건 맞아. 그런데 문제는 나도 빈손으로 남을 수는 없다는 거야.”“네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너를 불러들였을 때엔 왜 거절하지 않았대?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위선적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여희영는 직설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일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말하는 성격이었다.게다가 그녀의 오빠는 지금까지 제대로 한 일이 없었을뿐더러 지금은 더 악랄하게 굴고 있었다.“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어이가 없어서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할 말이 없으면 하지 마. 내가 하는 일이 네게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뭘 걱정하는 건데? 여희영, 너도 알잖아. 이현이는 가문의 사람이 아니야. 왜 네 팔은 밖으로만 굽는 거야?”여재호는 돈을 받지 못하고 여이현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것만으로도 이미 인내심이 폭발할 지경이었다.여기에 여희영의 말까지 더해지자 그는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여희영도 화가 치밀었다.“내 팔이 밖으로 굽는다고? 오빠가 가문을 내팽개쳤을 때 나는 가문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아버지와 이현이에게 일을 다 떠넘기고는 이제 와서
“전 무열 씨의 의지력을 믿어요. 당신이라면 분명히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는 제가 계속 상태를 관리할게요.”인명진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약물 금단 증상은 고통스러웠지만 신무열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김혜연은 늘 그의 주변에 함께 있어 주었다.덕분에 신무열은 일주일 만에 약물 의존을 끊어냈다.이는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었고, 특히 김혜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무열 씨, 우리 현장에도 내려가 봐요. 현장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김혜연의 생각은 간단했다. 함께 일에 몰두하면 그는 아린의 죽음을 떠올릴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동안 신무열은 막 결혼한 상태에서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껴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더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신무열은 김혜연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좋은 생각이야. 현장으로 가자. 이쪽의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 요한도 있으니까 걱정 마.”“좋아요.”그들의 결정을 들은 법로는 남아서 Y국의 상황을 관리하기로 했다.그는 별이를 떠나보내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경성에서 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은 매우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이번은 신무열과 김혜연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Y국에 온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져 버렸다.“별아, 이번에 엄마랑 아빠랑 같이 돌아가면 말 잘 들어야 한다. 외할아버지가 나중에 보러 갈게.”법로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외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아빠랑 엄마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돌아오시면 꼭 다시 만나요!”“그래.”법로는 그들을 공항까지 직접 배웅했다.업무적으로는 배진호가 있었지만 온지유와 관련된 부분은 온지유의 결정을 존중했다.배진호는 먼저 제안했다.“대표님, 아드님을 제가 먼저 데려가서 학교에 보내겠습니다. 두 분은 Y국에서 조금 더 머무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모님의 양부모님들과
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걱정 끼쳐서 미안해.”“무열 씨, 제발 꼭 좋아져야 해요. 이렇게 날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우리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 아쉬움으로 남았잖아요.”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끌어안으며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간절히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두려웠다.만약 신무열의 마음속에 모든 분야에 출중한 완벽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아린의 경우는 달랐다. 모든 조건을 떼어 놓고 보면 말이다.김혜연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선택을 하지 않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남은 생이 죄책감 속에서 허비되지 않기를 바랐다.신무열은 김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하려는 말 다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해 이전의 일들에서 벗어나려고 할게.”김혜연은 그런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이때, 인명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신무열의 약물 의존은 법로가 책임지고 있었고, 인명진은 그의 심리 치료를 맡게 되었다.신무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아린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다.인명진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는 최면을 통해 신무열의 내면을 하나씩 풀어가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신무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저 때문에 죽어가요. 죽음이 이렇게도 불공평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다가온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신무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나왔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모든 일에는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무열 씨는 최선을 다했고 아린을 방치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현실은 잔혹해요. 무열 씨에게는 방법이 없었고, 아린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해방이었을지도 모르죠.”“노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수천, 수만 명이었어요
신무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럽게 절규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본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졌다.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김혜연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온지유는 신무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하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힘겹게 말했다.“아니, 내 잘못이야. 만약 내가 더 잘했다면 아린은 희생하지 않았을 거야. 죽음을 많이 봐왔지만 이번처럼 고통스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지유야, 너도 알잖아? 난 아린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직접 봤어...”그의 목소리는 쉰 듯한 낮은 톤으로 하나하나 쏟아져 나왔고, 온지유는 처음으로 신무열이 이렇게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됐다.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신무열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해칠까 두려웠던 온지유는 급히 법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법로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신무열의 상태를 본 법로는 마음이 아팠다.신무열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다!상태를 점검한 법로는 신무열이 몰래 페노바르비탈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더욱 심각한 것은, 이 약물은 한때 법로거 개량했던 중독성을 유발하는 형태였다는 점이었다.신무열의 방금 전 감정 폭발은 약을 제때 복용하지 못해 나타난 금단 증상이었다.법로는 즉시 실험실의 약물 사용 규정을 엄격히 강화했다.앞으로는 모든 약물 사용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다.또한, 신무열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관리했다.신무열은 Y국의 수령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끌어내리고 새 인물을 세우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만약 그의 약물 복용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반드시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 분명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법로가 이를 막아섰다.“신무열이 자리를 비우는 건 공적인 이유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자리를 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