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그녀가 다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던 여이현은 그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자리를 옮겼다.“소식이 새어나가지 않게 잘 관리하세요. 누구도 노승아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나쁜 영향을...”여이현은 온지유를 스쳐 지나갔다. 꼭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처럼 말이다.그 순간 온지유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여희영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여이현은 노승아를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행여나 연예인 앞길에 문제가 생길까 봐 말이다.물론 그녀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본 이상 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피어올랐다.여이현이 노승아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귀찮게 물어보지 말자며 속으로 생각하곤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의사라면 분명히 그녀에게 정확한 답을 줄 것이다.의사에게 노승아의 상태를 물어본 후에야 그녀는 노승아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전에는 목을 다쳐 노래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었다.게다가 분명 한쪽 귀만 문제가 있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왜 양쪽 모두 청력을 잃게 된 것일까.의사는 그녀에게 노승아의 청력은 원래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이현이 예전에 노승아에게 붙여준 의사는 세계 최고의 의사였으니까.100%의 확률로 나아질 수 있었다고 했다.설령 목소리는 예전과 달라져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해도 청력엔 문제가 없다고 했다.하지만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그들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만약 노승아의 귀가 계속 회복하지 못한다면 아마 영원히 청력을 잃고 살게 될 것이다.온지유는 다소 충격에 빠졌다.노승아에겐 질병이 많았기 때문이다.온지유가 또 물었다.“그러면 노승아 씨 상황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을까요?”어떤 사람들은 청각에 문제가 있어도 모르고 넘기는 경우가 있었다.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문제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의사는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후천적인 겁니다. 뇌에 손상을 입거나 귀를 세게 다친 환자만이 이런
게다가 나민우에게 빚진 것도 많았다.“난 괜찮아.”나민우가 들어왔다. 그는 웃으며 땀을 닦았다.“조금만 지나면 마를 거야. 네 소식을 듣고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달려왔거든.”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다.“얼른 앉아. 내가 물 한잔 따라줄게.”“아니야, 내가 따라서 마실게.”나민우가 물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는 온지유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아기는 괜찮대?”그의 말에 온지유는 다시 앉았다.“정민 씨가 그것도 얘기한 거야?”나민우는 물잔에 물을 따르며 웃었다.그러자 온지유가 말했다.“뭐든 다 알려주나 보네. 혹시 네가 심어둔 스파이는 아니야?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바로 너한테 보고를 하는 그런 스파이 말이야.”“에이, 아니야.”나민우는 물잔을 내려놓았다.“그냥 정민이랑 친해서 그런 거야. 게다가 학교도 같이 다녔었으니까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거지.”“아니면 됐어. 정말 그랬다면 내 프라이버시는 전부 털렸을 테니까.”온지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나민우는 시선을 돌려 그녀의 배를 보았다.“아이는 무사해. 그냥 피가 났을 뿐이야. 심각한 거 아니야. 의사 선생님도 그냥 몸조리 잘하라고만 하셨어.”온지유가 그의 시선을 눈치채며 말했다.나민우가 물었다.“몇 개월 됐어?”“두 달 됐어.”온지유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나도 사실 안 지 얼마 안 됐어. 그래서 말하지 않은 거야. 엄마가 되는 건 처음이라 뭐든 조심스러웠거든. 그래도 실수할 때가 더 많지만 말이야.”나민우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의 배를 보며 또 물었다.“아빠는 여이현 씨야?”그의 말에 온지유는 침묵했다.말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아이의 아빠가 여이현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행여나 여이현이 이 아이를 지우라고 할까 봐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밝히지 않기로 했다.나민우의 말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민우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나민우는 그녀에게 조금의 거짓말을 해도 죄책감이
그러자 온지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나민우는 할 말만 한 뒤 전화를 끊어버렸다.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번엔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영원히 온지유를 곁에 둘 기회가 차려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나민우,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온지유는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그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민우가 먼저 자신의 아이라고 누군가에게 말했다.나민우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미안해, 내가 상의도 없이 이런 말을 해서. 하지만 이렇게 해야 그 사람이 포기하지 않을까?”“그러면 넌 어쩌려고!”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이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닌데, 넌 네 아이라고 말했잖아. 이건 처음부터 너한테 불리한 거라고!”그녀는 자신이 지켜야 할 분수를 알고 있었다.나민우는 아직 젊었다. 그랬기에 앞날도 창창했다.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아이가 생겼다고 하면 그의 가족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녀는 나민우에게 책임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도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나민우가 말했다.“불리하든 말든 난 신경 쓰지 않아. 한번 사는 인생 난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거거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난 상관없어. 사람들의 시선만 신경 쓰면 세상 살기가 힘들어져. 너도 날 걱정할 필요 없어. 어찌 되었든 나도 네 덕을 보니까.”“안 돼. 네가 힘들어질 거야.”온지유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넌 신경 안 쓴다고 했지만 난 그럴 수 없어. 너한테 진 빚도 아직 못 갚았단 말이야.”“난 갚으라고 한 적 없어.”나민우가 웃으며 말했다.“난 내가 원해서 널 도와준 거야. 아쉬운 것 하나도 없었어. 그거 알고 있나 모르겠네. 너랑 조금이라도 연관된 거면 난 전부 기뻐. 널 도와줄수록 내가 너한테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널 도와주는 건 나한테 영광이나 마찬가지야. 오히려 엎드려 절하면서 날 이용해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
“나민우...”덜컥 문이 열리고 그늘진 표정의 여이현이 치미는 화를 억누르지 못한 채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나민우!”그리고 나민우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뒤 그의 옷 깃을 움켜잡았다.“감히 입 밖으로 그런 말을 뱉는 걸 보니 간이 부어 눈에 뵈는 게 없나 보지?”예전부터 이 사람을 꼭 한 대 쥐어박고 싶다고 생각해 왔었다.귀신처럼 온지유의 뒤를 졸졸 붙어 다니는 꼴이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그런데에다 오늘은 이 따위 말을 입 밖에 내다니.제발 때려달라고 비는 게 아니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다.여이현은 서슴없이 주먹을 나민우의 얼굴에 내리꽂았다.“이현 씨!”온지유가 그 모습에 놀라 바로 외쳤다.“여기 병원이에요, 그만 하세요!”여이현은 온지유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만 못해!”나민우는 얼굴을 맞고도 웃음을 짓고 있었다.“화 풀릴 만큼 때리세요, 하지만 다 맞고 나면 온지유는 제가 돌려받아 가죠.”그의 가벼운 어투에 여이현은 주먹을 으드득 소리 나게 더욱 움켜쥐었다.“낯부끄러운 줄도 모르나!”“온지유만 돌려준다면 제 면목쯤이야 가볍죠, 목숨도 갖다 바칠 수 있습니다.”나민우는 입가의 피를 손으로 쓸었다. 몇 대 맞는 정도야 간단한 일이었다.“그 말 후회하지 마요.”여이현이 다시 한번 주먹을 날렸다. 힘 조절을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나민우의 얼굴에 정확히 들어간 타격에 큰 체구가 그대로 옆으로 넘어졌다.온지유는 하얗게 질려 소리 질렀다.“제발 그만해요 이현씨, 손 내리세요!”여이현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민우를 꼿꼿이 내려다봤다.“설마 당신이 진짜 석이라는 놈이야?”가장 신경 쓰이던 인물이 바로 온지유의 마음에 숨기고 있는 석이라는 남자였다.그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나민우가 석이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였다.온지유는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그를 지키기 위해 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한번을 속였는데, 두 번이 없을 리가 있을까.나민우는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말했다.“제
나민우는 온지유에 관해서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네.”여이현의 속은 검게 탔다. 온지유를 바라보며 헛웃음이 났다.“ ‘나와 나민우야 말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에요’,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거지?”이 순간부터, 온지유는 둘의 사이가 철저히 파탄 났음을 느꼈다.가슴이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그러나 여이현이 노승아를 사랑하는 이상, 온지유와의 혼인은 사라지지 않는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여이현은 절대 노승아를 놓아줄 수 없을 것이다.온지유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였다.“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전 할 말은 다 했으니까요.”“그래.”차갑게 얼어붙은 눈빛으로 여이현은 모두의 주시하에 지갑에서 결혼사진을 꺼내 반으로 찢었다.“네가 우리 사이에 혼인 관계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나도 이젠 필요 없어.”둘이 찍힌 사진이 반으로 찢기는 순간, 온지유의 마음도 함께 죽어버렸다.텅 빈 마음에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온지유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눈 돌릴 틈도 없이 꼿꼿이 바라보고만 있었다.사진은 갈기갈기 찢겨, 눈꽃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온지유, 지금부터 우리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이야.”여이현은 그 말만 던지고 병실에서 걸음을 돌려 사라졌다. 온지유에게 더 이상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온지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생각도 없이 고개를 숙여 바닥에 조각조각 널브러진 결혼사진을 바라보았다.여이현의 얼굴은 웃음 한 점 없었다. 사랑도 정도 보이지 않았다.반면 온지유는 처음 사랑에 눈뜬 여자아이처럼 행복에 잠겨 환히 웃고 있었다.그녀와 여이현 사이의 혼인은 늘 이래왔다. 온지유만이 그와의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했다.여이현은? 그는 한 번도 온지유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온지유는 웅크리고 앉아 조각난 사진을 한장 한장 소중히 집어 올렸다.나민우는 그 모습에서 온지유의 마음을 알아챘다.여의현을 두고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눈물이 한 방울 톡 하고 바
여이현도 모르는 사실을 나민우가 먼저 알아버렸다.온지유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나민우의 말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조금이라도 온지유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온지유의 마음속에 누가 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티끌만 한 관심도 없었기에 몰랐던것이다.여이현이 몰랐다는 것은 온지유에게 전혀 마음을 두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아무리 덤덤한 척, 강한 척 굴어도 마음은 검게 타들어 갔다.나민우는 가슴에 못이 박히듯 아팠다. 온지유가 이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여이현이 그깟 사진 한 장을 찢어버려서.얇은 한 장의 사진을 찢은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온지유의 마음에는 총알이 박혔다.나민우는 온지유에게 다가가 품에 끌어안았다. 가볍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네 마음 이해해. 나도 잘 알아. 넌 아무것도 틀리지 않았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나쁜 게 아니야.”“아니, 난 틀렸어.”온지유가 머리를 가로저었다.“처음부터 틀렸어.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될 줄만 알았어. 하지만 난 그저 지나가는 한 사람일 뿐이었어. 처음부터 다 잘못된 거야!”여이현이 그녀를 구해주었기에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무려 생명을 대가로 했었기에 온지유를 특별하게 대해줄 줄만 알았다.그러나 여이현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다. 온지유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똑같았다.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있어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여이현은 그녀를 기억하지도 않았다.온지유의 자격지심이 그녀를 해쳤다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렇게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그의 무심한 도움을 특별하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이 칼날로 만든 사랑의 덫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괜찮아, 다 괜찮아.”나민우도 눈시울을 붉혔다.“시간이 다 잊게 해줄 거야. 너도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온지유의 손에는 아직도 조각 난 사진들이 쥐어져 있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꼭.얼마
온지유는 절대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 했다.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능력 범위 내에서라면 될수록 혼자 해내려고 해왔었다.“네가 나민우를 어떻게 안다고 걸림돌이 될 거라고 말하는 거야? 그리고,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아이가 있다고 평생 연애를 안 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나민우도 신경 안 쓰는걸 왜 네가 먼저 신경 써. 넌 항상 너무 생각이 많아. 다른 사람을 걱정하기 전에 자기 행복을 먼저 생각해야지!”온지유는 백지희를 바라보았다. 둘의 연애관, 가치관은 다른 점이 많았다.백지희는 털털하고 뒤끝 없는 성격이라, 헤어져도 마음속에 쌓아두지 않았다.하지만 온지유는 달랐다.“난 그만큼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백지희는 더더욱 문제가 될 것 없다고 생각했다.“만나보지도 않았으면서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지내다 보면 사랑도 싹트기 마련이야.”“잘 안되면? 사람의 감정에 관한 일인데 신중히 해야 한다고 봐.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오늘 고마운 마음에 민우를 따라가면, 내일에도 고맙다고 다른 사람을 따라갈지도 모르잖아. 난 민우에게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없어. 그러니 처음부터 희망 고문은 하지 않는 게 맞아.”그 말에 백지희는 한숨을 쉬었다.“지금을 소중히 해.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되잖아. 한평생을 한 남자만 보고 살 거야?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거고, 중요한 건 함께 지내온 시간이야.”백지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다.온지유는 그런 사람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뒤의 미래를 끝도 없이 상상하게 된다.여이현을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려 했었던 것처럼.과정은 험난했고 결과도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건 사실이었다.백지희는 온지유의 손을 감싸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다.“지유야 생각해 봐. 여이현이 없는 너에게는 이젠 새로운 사랑을 쫓아갈 기회가 있어. 나민우가 아니더라도 다른 남자가 꼭 나타날 거야. 아
온지유는 그제야 눈치챘다.“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두나..."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었지만, 나민우는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백지희는 온지유를 보며 미소 지었다.“그래, 아무나 초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너도 이만 만족해.”온지유는 사색에 잠겼다.만족하지 못하게 뭐가 있을까.한참을 대화하고 백지희가 밖으로 나왔다.나민우는 아직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지유는 좀 괜찮아졌어?”“지유밖에 생각이 없구나? 안심해, 지유는 괜찮을 거니까. 여이현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결말을 알고 있었을 거야. 운이 좋으면 백년해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꿈은 언젠가는 깨어나야 하는 법이니까.”나민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이 몇 년 동안 온지유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백지희는 걸어가 창 앞의 난간을 잡았다.“헤어진 김에 지유한테 너도 좀 밀어줬어.”백지희는 크게 심호흡하고 창밖을 바라봤다.“난 지유가 행복해지길 바라. 네가 그렇게 지유를 좋아하는데,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지유도 봐줬으면 해서. 인생은 짧고,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은 얼마 안 되잖아? 두 사람이 잘되면 나도 좋고.”나민우가 백지희에게 웃어 보였다.“고마워.”그의 웃음에 백지희도 답했다.“네가 왜 고마워? 잊지 마, 나 온지유 절친이야. 난 지유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만 한다고.”그래도 나민우는 백지희가 고마웠다.“시간 나면 밥이라도 살게.”백지희가 손을 저었다.“날 실망하게 하지만 않으면 돼.”이윽고, 나민우가 병실로 들어갔다.왠지 모르게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백지희도 나민우도, 할 말 못 할 말 다 뱉어낸 후였다.진심을 까 보여준 이후인데 멋쩍은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온지유는 누워있었지만 잠들지는 않았다.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나민우를 바라보았다.온지유는 그저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먼저 적막을 깬 건 나민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