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절대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 했다.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능력 범위 내에서라면 될수록 혼자 해내려고 해왔었다.“네가 나민우를 어떻게 안다고 걸림돌이 될 거라고 말하는 거야? 그리고,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아이가 있다고 평생 연애를 안 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나민우도 신경 안 쓰는걸 왜 네가 먼저 신경 써. 넌 항상 너무 생각이 많아. 다른 사람을 걱정하기 전에 자기 행복을 먼저 생각해야지!”온지유는 백지희를 바라보았다. 둘의 연애관, 가치관은 다른 점이 많았다.백지희는 털털하고 뒤끝 없는 성격이라, 헤어져도 마음속에 쌓아두지 않았다.하지만 온지유는 달랐다.“난 그만큼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백지희는 더더욱 문제가 될 것 없다고 생각했다.“만나보지도 않았으면서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지내다 보면 사랑도 싹트기 마련이야.”“잘 안되면? 사람의 감정에 관한 일인데 신중히 해야 한다고 봐.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오늘 고마운 마음에 민우를 따라가면, 내일에도 고맙다고 다른 사람을 따라갈지도 모르잖아. 난 민우에게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없어. 그러니 처음부터 희망 고문은 하지 않는 게 맞아.”그 말에 백지희는 한숨을 쉬었다.“지금을 소중히 해.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되잖아. 한평생을 한 남자만 보고 살 거야?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거고, 중요한 건 함께 지내온 시간이야.”백지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다.온지유는 그런 사람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뒤의 미래를 끝도 없이 상상하게 된다.여이현을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려 했었던 것처럼.과정은 험난했고 결과도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건 사실이었다.백지희는 온지유의 손을 감싸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다.“지유야 생각해 봐. 여이현이 없는 너에게는 이젠 새로운 사랑을 쫓아갈 기회가 있어. 나민우가 아니더라도 다른 남자가 꼭 나타날 거야. 아
온지유는 그제야 눈치챘다.“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두나..."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었지만, 나민우는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백지희는 온지유를 보며 미소 지었다.“그래, 아무나 초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너도 이만 만족해.”온지유는 사색에 잠겼다.만족하지 못하게 뭐가 있을까.한참을 대화하고 백지희가 밖으로 나왔다.나민우는 아직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지유는 좀 괜찮아졌어?”“지유밖에 생각이 없구나? 안심해, 지유는 괜찮을 거니까. 여이현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결말을 알고 있었을 거야. 운이 좋으면 백년해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꿈은 언젠가는 깨어나야 하는 법이니까.”나민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이 몇 년 동안 온지유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백지희는 걸어가 창 앞의 난간을 잡았다.“헤어진 김에 지유한테 너도 좀 밀어줬어.”백지희는 크게 심호흡하고 창밖을 바라봤다.“난 지유가 행복해지길 바라. 네가 그렇게 지유를 좋아하는데,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지유도 봐줬으면 해서. 인생은 짧고,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은 얼마 안 되잖아? 두 사람이 잘되면 나도 좋고.”나민우가 백지희에게 웃어 보였다.“고마워.”그의 웃음에 백지희도 답했다.“네가 왜 고마워? 잊지 마, 나 온지유 절친이야. 난 지유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만 한다고.”그래도 나민우는 백지희가 고마웠다.“시간 나면 밥이라도 살게.”백지희가 손을 저었다.“날 실망하게 하지만 않으면 돼.”이윽고, 나민우가 병실로 들어갔다.왠지 모르게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백지희도 나민우도, 할 말 못 할 말 다 뱉어낸 후였다.진심을 까 보여준 이후인데 멋쩍은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온지유는 누워있었지만 잠들지는 않았다.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나민우를 바라보았다.온지유는 그저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먼저 적막을 깬 건 나민우였다.
“난 괜찮아.”“알아. 내 얘기야.”온지유가 대답했다.“하지만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난 아직 다른 사랑을 할 준비가 채 되지 않았어.”그 말에 나민우가 웃었다.“날 뭐로 보고. 사심이 섞였던 건 인정하지만, 널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야. 좋아하는 감정 외에도 넌 내 소중한 친구니까.”“나한테 소중할 게 뭐가 있어?”온지유는 나민우가 몇 년이나 놓지 못한 이유가 궁금했다.나민우는 잠시 멈칫하고는 달리 말하지 않았다.“넌 아주 좋은 사람이야.”온지유가 또 ‘풋’ 하고 웃었다.나민우는 지유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가까이에서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싶었다.하지만 잠에 들어서도 속은 풀리지 않는지 온지유는 늘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민우는 손을 뻗어 어루만져 주름을 펴주었다.그리고 가까이에 와 낮은 목소리로 지유의 귓가에 속삭였다.“지유야, 난 너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내 모든 건 네가 준 거니까.”말을 마치고 온지유에게 편히 잘 수 있도록 이불을 고쳐 덮어 주었다.더우기는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기를 빌며.--온지유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잠에서 깨고 나서도 정신이 몽롱했다.밖은 이미 깊은 저녁이었다.온지유는 시간을 확인하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었다. 아직 검색하지도 않았는데 팝업으로 노승아의 뉴스가 떴다.한순간에 온지유는 안색이 나빠졌다.노승아는 공인이다. 여기저기서 소식이 들려와도 이상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번 일은 온지유와 관련되어 있을 뿐이 아니었다.여희영과도 관계있는 일이었다.붉은색 폰트로 쓰인 타이틀은 아주 눈에 띄었다.{노승아, 심한 병을 앓고 있는데도 밀쳐져 벽에 쾅! 인성은 어디에?}아래에는 댓글이 수두룩했다.(이 사람 누구야? 눈빛 좀 보소. 병실에서 이러는데 승아 보디가드는 어디 감?)(역시 관상은 과학이다. 승아 소속사는 뭐하냐? 애 아픈데 혼자 두고, 이런 일까지 당하는 게 말이 돼?)(이 여자 뒷배가 있대. 회사 대표랑 무슨 사이라던
온지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옷을 입고 여희영을 찾으러 가려 했다.아직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밖에서 여희영이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 들어왔다.“지유야, 내가 뭘 가져왔게? 요즘 입덧 할까 봐 입맛 돋우는 장조림이랑, 이거 추어탕이야!”“고모님...”온지유는 긴장돼 있던 가슴을 쓸어내리고 바로 달려가 여희영을 끌어안았다.여희영은 급히 손에 든 물건들을 내려놓고 말했다.“어머나 얘 좀 봐, 다 큰 애가 왜 이런대?”온지유는 손을 풀고 여희영을 살펴보며 물었다.“어디 다친 데 없어요? 누가 돌 뿌리고 그러진 않으셨죠?”여의영은 온지유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뭐래 참. 내가 맞을 리가 있겠어? 이 고모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니? 누가 감히 내 몸에 손을 대!”여희영은 가소롭다는 듯 눈을 뒤집으며 말했다.“뉴스 안 보셨어요? 미용원에 큰일이 났는데 제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어요.”온지유는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여희영은 대수롭지 않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입에 껌을 넣고 씹으며 말했다.“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래. 다 끝나고 배상하는 것도 그놈들일 텐데 뭐. 돈을 못 내놓으면 감옥에 가는 거고. 난 돈 몇 푼 손해 보는 것 외엔 아무 일도 없어. 나 여희영이 그 돈 몇 푼이 없을까 봐? 넘쳐나는 게 돈인데. 미용원도 새 발의 피야.”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SNS에서의 일은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별것 없다.전 세계의 사람들이 욕해도 자기 손에 돈만 있다면 살아갈 수 있고, 그 외에는 전혀 신경 쓸 일 없었다.온지유는 여희영의 각오가 존경스러웠다.“그럼 사는 곳은요?”“그건 더 말할 것도 없지. 난 정해진 곳에 살지 않으니까.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내가 어디에서 묵을지 누가 알겠어? 나도 내가 오늘 어느 쪽 저택에서 잘지 모르겠는걸.”온지유는 자리에 앉아 말했다.“노승아에 손을 댄 일이 이미 SNS에 퍼져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고모님을 해치려 해요.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돼요.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걱정되는 일은 늘 이루어진다.이제는 여희영에게 피해를 줬을 뿐만 아니라 회사에도 큰 타격이었다.여이현은 동영상을 확인했다.동영상이 찍힌 각도는 입구 쪽이었다.나쁜 마음을 품은 자에게 도촬 당했거나, 그 자리에 있은 사람일것이다.당시 모두가 한자리에 있었으니, 동영상을 찍을 틈이 있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한 사람을 빠트렸다.그녀들에게는 유리한 사건이었을 것이다.“실시간 검색어에서 내려가게 하세요. 손실은 최소치로 합니다.”여희영은 굴레 밖의 사람으로서 너무 자유로웠다. 넷상에서 쉬쉬대는 것들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다.인터넷의 힘은 강력하다.여이현은 누구든지 여희영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를 원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그들도 회사에 남아 이 일을 처리해야 했다.여이현은 회의에서 엔터의 다른 업무들을 안배한 뒤 자리를 떴다.그는 쉴 새 없이 바로 병원으로 움직였다.여희영과 온지유가 아직 나가기도 전에 기자들이 병원 입구를 막고 있었다. 노승아의 생사를 확인하러 온 것이다.카메라와 기자들은 이미 다 준비되어 있었다.온지유는 노승아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지만, 생명에 지장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온지유는 바로 발길을 틀어 여희영을 안쪽으로 데려갔다.“고모님, 역시 이쪽으로 가는 게 낫겠어요.”여희영이 말했다.“쟤넨 못 들어올 거야.”“지금은 파도타기가 심한 때이니 고모님을 보면 바로 득달같이 달려들 거예요.”온지유도 나름 방송국에서 일을 했다. 그들의 본성은 잘 알고 있었다.기자들은 특종을 따내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여희영을 대중들 앞에 세워서라도 관중들의 분노와 관심을 사내려 할 게 뻔하다.“노승아가 깨어나면 거짓말이 싹 다 들통날 거야. 그 애가 한 일들을 다 까발려버리면 어떻게 연예계에서 살아남을지 두고 보자고!”노승아가 제 발로 정부를 하려 했다는 사실이 들키면 무조건 사람들의 화를 살 것이다.여태껏 만들어온 여린 소녀의 이미지도 폭락하게 된다.그러나 여희영에
“무슨 소리야, 정확한 거 맞아?”채미소의 말을 들은 기자들이 의심했다.“정말이에요. 전 여기서 밤새울 각오를 하고 나왔어요. 병원 앞뒤에 이미 다 사람을 불러두었으니 노승아씨가 나타나기만 하면 사진 한 장이라도 건질 수 있을 거예요.”채미소가 말했다.“그럼, 우리도 여기서 떠나지 않고 지킬 거야. 밖에 나오지 않을 리가 없어!”그들도 하루 종일 병원 앞을 지키고 있었다. 노승아의 소식을 쫓고 말이다.여길 지키고 있으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채미소의 부하가 말했다.“언니, 정말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실 거예요?”채미소도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노승아를 만날수 있을까. 노승아의 그림자 하나라도 좋았다.“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눈앞의 간호사를 보고 채미소는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짐들을 모두 부하에게 맡기고 말했다.“여기 지키고 있어. 내가 들어가서 보고 올게.”“다들 여길 지켜보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시게요?”채미소는 꺾이지 않았다. 꼭 첫 뉴스를 따내 KTBC에서의 지위를 되찾을 것이다.여이현의 독점 인터뷰가 성사되지 않았으니 적대하고 있던 동료들의 비웃음도 나날이 커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한다.채미소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에 간호사의 복장을 하고 병원으로 잠입했다.그때, 여이현도 노승아의 병실에 있었다.온지유와 여희영도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여이현과 온지유의 시선이 겹쳤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온지유였다.이윽고 여이현도 시선을 돌렸다.여희영은 여이현을 보고 물었다.“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렇게 노승아가 걱정돼? 지유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고모님, 전 괜찮아요.”온지유가 말했다.여희영은 또 온지유에게 물었다.“어떻게 괜찮아.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를 걱정해서 여기까지 와있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겠어?”온지유는 입을 닫았다.여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일이 있어서 들린 것뿐입니다.”“어떤 일이길래?”여희영은 비웃는 투였다.“밖은 이미 난리인데 걱정하는 꼴은
노승아는 옆에 있는 매니저를 보며 낯선 듯 물었다.“당신은... 누구예요? 전 모르는 사람인데. 오빠, 이 사람 누구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누구예요?”말이 끝나고 모두가 당황했다.매니저가 놀라며 말했다.“언니 저 기억 안 나요? 저 언니 매니저 예진이잖아요.”노승아는 그녀를 밀쳐내며 말했다.“저리 비켜! 오빠, 저 왜 이래요? 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빨리 이리 와요. 나 무서워요...”여희영은 그 반응에 어처구니가 없었다.“귀가 들리지 않는다더니 이번엔 기억도 안 난다는 거야? 아침 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욕먹겠네!”여이현이 다가갔다.노승아는 바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마치 그가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라도 된 듯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여이현 뒤의 모두를 보며 말했다.“오빠, 이 사람들 다 누구예요? 왜 다들 무서운 눈으로 절 보는 거예요? 무서우니까 다 내보내 줘요.”“다들 나가 계세요.”여이현이 말했다.여희영은 그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현이 너, 널 내가 어떻게 보살펴 키워줬는데 이렇게 대하는 거야. 후회하지 마. 아내를 잃고 이 고모도 잃을 테니까!”여이현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이토록 매정한 모습에 여희영도 더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온지유의 손을 잡고 말했다.“가자, 지유야.”밖으로 나와도 여이현은 미동이 없었다. 여희영은 그가 꼭 안에 남을 것이라고 이해했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여희영은 온지유가 속상할 것을 알고 말했다.“지유야, 이젠 나도 말리지 않겠어. 이혼하고 싶으면 하렴. 이런 조카는 없던 걸로 하겠다.”온지유가 대답했다.“이현 씨가 없어도 고모님은 제 고모님이세요.”채미소는 걸어 오던 도중 여희영과 온지유를 발견하고 그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재빨리 숨어 지켜보던 도중 그들의 관계도 알아챘다.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온지유가 정말로 여이현의 아내였단 말인가?게다가 이혼한다고 한다!노승아와 연관이 있을까?노승아와 여이현의 스캔들을 들은 적이 있었
노승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제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왜 아무것도 안 들리는 거예요?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건가요?”“그런 거 아니에요.”옆에 있던 매니저가 위로했다.여이현은 노승아의 근처에 서서 그녀의 행동을 감시했다.모습을 보아하니 확실히 기억을 잃은 상태가 맞는 듯하였다.오랫동안 지켜보고 나서야 여이현은 노승아에게 타이핑 해 보였다.'밖에 많은 기자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 인터뷰는 받을 수 있겠어?'노승아는 당연히 거절했다.“싫어요.”하룻밤 사이에 노승아는 기억을 잃고 피해자의 입장으로 변해 버렸다.동영상에 관해서는 여이현도 이미 매니저인 김예진이 찍은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그 얘기에 매니저는 의기양양했다."제가 뿌린 게 맞아요. 언니가 괴롭힘 받고 있는데 제가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네티즌들에게 판단을 맡길 수밖에 없겠죠. 주위에 언니를 돕는 사람이 없더라도 팬들은 언니를 지켜줄 거니까요. 저도 그 팬 중 하나고요. 여 대표님, 처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아들일게요. 이미 엎지른 물이니 저도 돌이킬 생각은 없어요!”여이현은 단호했다.“좋아요, 그럼 당신은 이제부터 해고입니다.”용서를 구할 여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매니저는 눈물을 흘리며 노승아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아쉬운 마음이 역력했다.하지만 노승아의 시선 속에 김예진은 없었다.“언니, 전 이제 언니 곁에 있을 수 없게 됐어요. 꼭 잘 지내셔야 해요. 제가 필요할 땐 꼭 다시 돌아올게요.”노승아는 여이현의 등 뒤에 숨어 피해 있을 뿐이었다. 자기 매니저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김예진이 떠난 후 노승아는 또 여이현을 불렀다.“전 이젠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는데, 절 버리진 않을 거죠? 계속 같이 있어도 돼요?”그 말에는 약간의 간절함도 깃들어 있었다. 여이현의 회답이 필요했다.청력을 잃고, 몸도 상한 지금 여이현은 그래도 노승아의 곁에 있어 줄지.여이현은 노승아의 두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다 휴대
“괜찮아요. 기사 아저씨께서 한 번만 내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제 것만 낸 거로 하면 되죠. 돌려 주지 않으셔도 돼요.”최승현은 택시비를 내고 차에서 내려 여희영에게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서 여희영을 몸 뒤로 숨겼다.“두 사람이 왜 같은 차에서 내려요?”온지유는 질투 난 듯 잔뜩 뾰로통한 얼굴로 최승현을 바라보았다. 여희영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연기에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최승현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그쪽을 온지유 씨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그 말에 두 사람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최승현은 진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했다.여희영은 그런 최승현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무시하고 온지유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여희영 씨, 전 여희영 씨를 진심으로 좋아해요. 여희영 씨가 저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여희영 씨를 제 여자로 만들 거에요!”고래고래 소리치는 최승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이리로 주의를 기울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여희영은 최승현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온지유와 함께 여이현을 찾으러 올라갔다.연회가 열리는 곳은 교외에 있는 바캉스 호텔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호텔 전부를 연회장소로 정해서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도록 만들었다.홀로 연회장에 들어선 여희영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각양각색의 남녀들이 모여있는 연화장은 마치 소개팅을 하는 것 같았다.이때 그녀 눈이 들어온 간판이 그 추측을 실증해줬다. 그제야 여이현이 왜 온지유를 참가 못 하게 막으려 했는지 깨달았다.“아가씨, 저와 함께 춤을 추실 수 있나요?”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젠틀하게 초대를 보내왔다.여희영은 기분전환을 하려고 연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소개팅할 마음이 없었다.여희영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일부러 연회에 참가했다.“이분은 여희영 씨라고 여진그룹 여
“어머, 네가 마음 많이 썼네. 나도 깜박하고 있었는데. 맞아. 예전에는 파리에서 생활하고 싶었지 하지만 지금은 너도 알다시피...”여진숙이 더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원인을 알고 있었다.이때 온지유가 여진숙에게 선물 상자를 가져다주며 말했다.“이 얘긴 그만하는 게 어때요? 자 이건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한번 열어보세요. 맘에 드시는지.”여진숙이 상자를 열자 그 속에는 열쇠와 부동산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부동산 계약서에 쓰여있는 파리 주소를 보자 여진숙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온지유가 여진숙의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줬다.“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어머님께서 직접 고르시고 말씀하세요. 의료팀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현 씨가 모두 준비해뒀어요.”여희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이번 가정모임에서 여진숙이 수작을 부릴 것 같아서 여이현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파리에서 자리 잡고 살 기회를 얻은 여진숙은 그 자리에서 여씨 가문을 여이현에게 전부 넘겨주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지금부터 여진숙은 남은 세월을 편안히 누리고 재단의 일에 손을 뗄 것이다.세 사람이 모임 장소에서 나오자 여희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인제야 비로소 여진 그룹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이현아, 정말 대단해.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여진숙이 파리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거 말이야.”그녀는 여이현이 그처럼 세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온지유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여이현은 차에 시동을 걸고 어느 정도 주행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서찬이 찾아갔을 때부터 눈치챘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을 불러 간병인을 매수했죠. 서찬이 떠나자마자 간병인 쪽에서 정보를 입수했어요.”‘그렇구나.’두 사람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여진숙은 서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진 그룹의 일에 관심이 일도 없었다.서찬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당연히 사모님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죠.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소식 들어보셨나요? 글쎄 여이현이 여 대표님 편을 드는 사람들을 모두 해고했지 뭐에요. 지금 여진 그룹은 여이현의 천하에요.”여진숙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덤덤한 태도로 “그래요.”라고 대답한 뒤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서찬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설득했다.“사모님, 여진 그룹이 여 대표님 손으로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더는 요양원에 계시지 않아도 돼요. 들은 바에 의하면 사모님께서는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아직 외국으로 떠나지 못하신다면서요. 사실, 이 모든게 여이현 때문이잖아요.”“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겁니까?”여진숙이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서찬이 그녀 가까이 다가가서 뭐라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이 끝나자 여진숙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분부했다.“알겠어요. 서 부장님 뜻대로 하세요.”허락을 받은 서찬은 한껏 부풀어 올라 당장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그는 허리를 굽힌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담보했다.두 사람의 계획은 가정모임이었다. 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였기에 지금 이 모양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가정모임에서 그녀의 체면을 구기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물론 여의현은 아니였다.밝은 하늘에 어둠이 깃들 무렵 여이현이 온지유와 별이를 데리고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그는 여진숙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여진숙은 자상한 눈길로 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별아, 할머니께 인사해야지.”여이현의 말에 별이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별이 인사를 받은 여진숙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별이에게 미리 준비한 돈 봉투를 쥐여주었다.여이현과 온지유 두 사람은 확연히 달라진 여진숙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가정모임에 여희영이 빠질 리가 없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으려던
최승현은 여희영의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여희영 씨, 저는 진심으로 여희영 씨를 좋아해요.”여희영은 비록 여이현의 친고모는 아니었지만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긴 뒤로부터여이현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여이현은 현재 그녀를 친 고모로 여기며 존경스러운 태도로 모시고 있다. 그건 여희영이 여진 그룹의 다양한 광고 촬영에 참여했다는 소식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최승현이 악착스레 달라붙는 것도 뒷백이 센 여희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여희영은 그의 속셈을 모른 채 짜증 나기만 했다.그녀가 온지유를 바라보며 도와달라고 하려던 찰나 최승현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댔다.여희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최승현을 두 손으로 밀어 내팽개쳤다.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여희영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안돼요. 전 반대에요! 저와 약속하셨잖아요!”너무나도 가련한 온지유의 모습에 구경꾼들이 모여들더니 작은 소리로 두 사람을 의논하기 시작했다.여희영은 온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차가운 말투로 최승현에게 말했다.“최승현 씨, 제가 분명히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요. 더는 저에게 달라붙지 마세요.”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호텔을 나섰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최승현이 또 따라올까 봐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아직도 따라오고 있어?”여희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아니요. 하지만 아직도 저희를 보고 있어요. 어? 이현 씨가 내려왔는데요.”여희영은 여이현이 두 사람의 계획을 망칠까 봐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했다.“아니 근데 이현이가 최승현 쪽으로 다가가서 뭘 말하고 있는데.”이 말에 온지유는 여희영을 밀어내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이현이 입 모양으로 말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이현 씨가 최승현 씨에게 계속 달라붙으면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겠다고 말했어요.”온지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희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최승현 씨 연예인이에요?”“아니. 여
‘이게 끝이라고? 더 시도해 보지 않을 건가?’온지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여자가 여이현을 붙잡을까 봐 많이걱정하고 있었다. 바람기 많은 남자보다 진지한 여자가 더 위험하기 마련이다.자신의 마음을 과감히 고백하는 여자에게 유혹당하지 않을 남자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여이현, 운 좋은 줄 알아.”온지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 앞길을 막고 서있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여이현이 부드러운 눈길로 온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끝이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처럼 온지유를 빨아 들어갈 것으로 보였다.“어떤 여자분이 찾던 것 같던데 가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받아 주지. 그러면...”“그럼 나 간다.”그 대답에 온지유는 재빨리 여이현을 잡으며 소리쳤다.“가긴 어딜 가!”이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안 갈 거야. 내 곁에 지유 너와 별이만 있으면 행복한걸.”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온지유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금방 발생한 불쾌한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야시장 돌아다녔다. 허기진 배도 채우고 재밌게 놀고 나니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 어느덧 늦은 밤이 되었다.연이어 하품하는 온지유를 보고 여이현은 택시를 불러 호텔로 향했다. 힘들게 약속한 단둘만의 데이트라 여이현은 오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뜨거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왔다.비몽사몽 한 상태로 꿈나라에서 빠져나온 온지유의 머릿속은 온통 뜨거웠던 어젯밤 화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여러 번 흔들어 요동치는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시간을 보니 벌써 별이 등교 시간이었다.온지유는 아직 한창 꿈나라에서 여행 중인 여이현을 버려두고 옷을 바꾼 뒤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어머, 우리 자기 왜 그렇게 급해. 혹시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여희영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귀가에대고
두 사람은 야시장 입구에 왔다. 인파로 사람들 머리만 보이자 여이현은 바로 그녀를 끌어안고 나직하게 말했다.“옷이라도 갈아입고 올까? 인파들 속에서 기회를 틈타 널 만지려고 하면 어떡해.”온지유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흥, 드레스를 고를 땐 야시장을 구경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나 봐? 안 갈아입을래. 오랜만에 이쁘게 입었는데 왜 갈아입어. 게다가 여긴 사람도 많잖아. 그럼 더 신경 써야지.”여이현은 그녀를 설득할 수가 없었기에 속으로 어떻게든 지켜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실컷 놀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온지유는 더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맛있는 것을 보면 맛보고 배가 부르면 여이현에게 넘겨주었다. 알록달록한 칵테일에 맛만 본 후 바로 여이현에게 주기도 했고 재밌는 것이 있으면 체험해보기도 했으며 무서운 것이 있으면 바로 여이현의 품으로 안겨들었다.그녀는 밤하늘에 뜬 예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기에 사람들도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를 힐끗거리고 있었다.당연히 눈치 없는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했다.아이스크림을 사러 줄을 서고 있을 때 온지유는 누군가와 부딪치게 되었고 바로 표정이 일그러졌다.여이현은 바로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어.”온지유는 고개를 돌리며 인파 속에서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엉덩이를 만진 건 확실했다.여이현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얼른 그녀를 데리고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명령 어조로 말했다.“당장 갈아입어.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집으로 갈 거야.”“왜 화를 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알아. 네 잘못이 아닌 거. 하지만 난 짜증이 난다고. 그런 썩을 놈들이 네 엉덩이를 만졌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다 불쾌하고 화가 나.”여이현의 기분을 누가 알겠는가. 자신의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성희롱을 당했는데 상대가 누군지도 몰라 복수할 수도 없는 이 기분을.온지유는 억울했다. 그래서 아주 보수적인 옷을 골라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옷을 갈아입고도 나오지 않았
말을 하던 여이현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더니 파란 장미를 꺼내 온지유에게 건넸다.“온지유 씨,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평생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게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오직 당신만 사랑할 거예요. 그러니 내 마음을 받아줘요. 내가 평생 당신을 걱정하고 아끼며 사랑할 수 있게.”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그녀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온지유는 이미 눈물바다가 되었다. 파란 장미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대답했다.“그럴게요.”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여이현은 그녀를 안고 빙빙 돌았다.지금 이 순간 온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기분이었고 서로의 심장 소리가 확성기에 틀어놓은 것처럼 크게 들렸다.“내 고백을 받아줬으니까 다음 순서로 그 장미를 뜯어 봐.”여이현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그를 힐끗 보다가 조심스럽게 장미를 뜯었다.안에는 반지가 있었다.온지유는 깜짝 놀랐다.“이현 씨, 정말!”“마음에 들어?”여이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밸런타인데이에 얼마나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그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며 준비했다.다행히 온지유는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온지유가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여자라면 대부분 그의 이벤트를 좋아할 것이다.그녀는 발꿈치를 들더니 여이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짧은 입맞춤 후 입을 떼려던 순간 여이현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더니 이내 질척인 키스를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에 둘만 있는 기분이었다.온지유는 숨이 막혔다. 여이현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뭐야. 하지 마. 나 배고파. 얼른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해줘.”온지유는 배고프다는 핑계를 대며 야릇해진 분위기를 피해 보려고 했다.여이현이 준비한 저녁은 전부 밸런타인데이와 연관이 있는 음식이었다.데코레이션이든 음식의 의미이든 전부 마음에 들었다.이런 이벤트를 싫어할 여자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온지유는 하루 종일 자신을 방치해둔 것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