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소리야, 정확한 거 맞아?”채미소의 말을 들은 기자들이 의심했다.“정말이에요. 전 여기서 밤새울 각오를 하고 나왔어요. 병원 앞뒤에 이미 다 사람을 불러두었으니 노승아씨가 나타나기만 하면 사진 한 장이라도 건질 수 있을 거예요.”채미소가 말했다.“그럼, 우리도 여기서 떠나지 않고 지킬 거야. 밖에 나오지 않을 리가 없어!”그들도 하루 종일 병원 앞을 지키고 있었다. 노승아의 소식을 쫓고 말이다.여길 지키고 있으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채미소의 부하가 말했다.“언니, 정말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실 거예요?”채미소도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노승아를 만날수 있을까. 노승아의 그림자 하나라도 좋았다.“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눈앞의 간호사를 보고 채미소는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짐들을 모두 부하에게 맡기고 말했다.“여기 지키고 있어. 내가 들어가서 보고 올게.”“다들 여길 지켜보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시게요?”채미소는 꺾이지 않았다. 꼭 첫 뉴스를 따내 KTBC에서의 지위를 되찾을 것이다.여이현의 독점 인터뷰가 성사되지 않았으니 적대하고 있던 동료들의 비웃음도 나날이 커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한다.채미소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에 간호사의 복장을 하고 병원으로 잠입했다.그때, 여이현도 노승아의 병실에 있었다.온지유와 여희영도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여이현과 온지유의 시선이 겹쳤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온지유였다.이윽고 여이현도 시선을 돌렸다.여희영은 여이현을 보고 물었다.“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렇게 노승아가 걱정돼? 지유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고모님, 전 괜찮아요.”온지유가 말했다.여희영은 또 온지유에게 물었다.“어떻게 괜찮아.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를 걱정해서 여기까지 와있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겠어?”온지유는 입을 닫았다.여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일이 있어서 들린 것뿐입니다.”“어떤 일이길래?”여희영은 비웃는 투였다.“밖은 이미 난리인데 걱정하는 꼴은
노승아는 옆에 있는 매니저를 보며 낯선 듯 물었다.“당신은... 누구예요? 전 모르는 사람인데. 오빠, 이 사람 누구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누구예요?”말이 끝나고 모두가 당황했다.매니저가 놀라며 말했다.“언니 저 기억 안 나요? 저 언니 매니저 예진이잖아요.”노승아는 그녀를 밀쳐내며 말했다.“저리 비켜! 오빠, 저 왜 이래요? 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빨리 이리 와요. 나 무서워요...”여희영은 그 반응에 어처구니가 없었다.“귀가 들리지 않는다더니 이번엔 기억도 안 난다는 거야? 아침 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욕먹겠네!”여이현이 다가갔다.노승아는 바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마치 그가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라도 된 듯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여이현 뒤의 모두를 보며 말했다.“오빠, 이 사람들 다 누구예요? 왜 다들 무서운 눈으로 절 보는 거예요? 무서우니까 다 내보내 줘요.”“다들 나가 계세요.”여이현이 말했다.여희영은 그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현이 너, 널 내가 어떻게 보살펴 키워줬는데 이렇게 대하는 거야. 후회하지 마. 아내를 잃고 이 고모도 잃을 테니까!”여이현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이토록 매정한 모습에 여희영도 더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온지유의 손을 잡고 말했다.“가자, 지유야.”밖으로 나와도 여이현은 미동이 없었다. 여희영은 그가 꼭 안에 남을 것이라고 이해했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여희영은 온지유가 속상할 것을 알고 말했다.“지유야, 이젠 나도 말리지 않겠어. 이혼하고 싶으면 하렴. 이런 조카는 없던 걸로 하겠다.”온지유가 대답했다.“이현 씨가 없어도 고모님은 제 고모님이세요.”채미소는 걸어 오던 도중 여희영과 온지유를 발견하고 그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재빨리 숨어 지켜보던 도중 그들의 관계도 알아챘다.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온지유가 정말로 여이현의 아내였단 말인가?게다가 이혼한다고 한다!노승아와 연관이 있을까?노승아와 여이현의 스캔들을 들은 적이 있었
노승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제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왜 아무것도 안 들리는 거예요?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건가요?”“그런 거 아니에요.”옆에 있던 매니저가 위로했다.여이현은 노승아의 근처에 서서 그녀의 행동을 감시했다.모습을 보아하니 확실히 기억을 잃은 상태가 맞는 듯하였다.오랫동안 지켜보고 나서야 여이현은 노승아에게 타이핑 해 보였다.'밖에 많은 기자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 인터뷰는 받을 수 있겠어?'노승아는 당연히 거절했다.“싫어요.”하룻밤 사이에 노승아는 기억을 잃고 피해자의 입장으로 변해 버렸다.동영상에 관해서는 여이현도 이미 매니저인 김예진이 찍은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그 얘기에 매니저는 의기양양했다."제가 뿌린 게 맞아요. 언니가 괴롭힘 받고 있는데 제가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네티즌들에게 판단을 맡길 수밖에 없겠죠. 주위에 언니를 돕는 사람이 없더라도 팬들은 언니를 지켜줄 거니까요. 저도 그 팬 중 하나고요. 여 대표님, 처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아들일게요. 이미 엎지른 물이니 저도 돌이킬 생각은 없어요!”여이현은 단호했다.“좋아요, 그럼 당신은 이제부터 해고입니다.”용서를 구할 여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매니저는 눈물을 흘리며 노승아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아쉬운 마음이 역력했다.하지만 노승아의 시선 속에 김예진은 없었다.“언니, 전 이제 언니 곁에 있을 수 없게 됐어요. 꼭 잘 지내셔야 해요. 제가 필요할 땐 꼭 다시 돌아올게요.”노승아는 여이현의 등 뒤에 숨어 피해 있을 뿐이었다. 자기 매니저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김예진이 떠난 후 노승아는 또 여이현을 불렀다.“전 이젠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는데, 절 버리진 않을 거죠? 계속 같이 있어도 돼요?”그 말에는 약간의 간절함도 깃들어 있었다. 여이현의 회답이 필요했다.청력을 잃고, 몸도 상한 지금 여이현은 그래도 노승아의 곁에 있어 줄지.여이현은 노승아의 두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다 휴대
“설마 그 유괴 사건 말이야?”나도현이 말했다.“꽤 엄중한 형사 사건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것도 내가 변호사로 섰었잖아.”그 사건은 공개 심사로 진행되지 않았었다.연루된 수면 밑의 사건이 한둘이 아니었다.그랬기에 나도현의 기억에 아주 선명히 남아있었다.“맞아.”나도현은 이 사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이현도 입을 열었다.“바로 이 사건과 같은 시기에, 노승아도 아무 말 없이 출국 했었어.”나도현이 대답했다.“우연이겠지. 노승아도 평범한 여자애인데 설마 그렇게 큰 사건에 손을 댔겠어.”만일 노승아가 이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면, 엮여 있는 사람의 범위는 훨씬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노승아가 그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이 된다.나도현은 노승아를 잘 알지 못했다. 여이현과 여러 해를 같이 지내 왔지만, 노승 아를 직접 만난 적은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었다.노승아와 가까워지려고 한 적도 없고 말이다.“그러기를 바라야지.”여이현은 그리 말할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너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이 사건은 해결됐지만 배후 인물은 잡아 내지 못했었어.”“의문점은 많았지. 그리고 너도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잖아. 그것 때문에 지금도 술만 마시면 기억을 잘 못하고 말이야.”나도현이 말을 이어갔다.“그때 한 여자애를 구한 적이 있댔지? 너희 둘 다 거의 죽을 뻔했다며. 기억나?”여이현이 잠시 멈칫했다.“기억은 있는 것 같아.”여이현은 스파이 신분으로 적의 아지트에 잠입했었다. 유괴, 납치당한 여인들과 아동을 구하러 말이다.그곳은 방대한 조직이었다.납치뿐만 아니라 총기 매매, 약물 판매에도 손을 뻗어 있었다.형법에 씌어있는 일에는 거의 다 손을 댔고, 아주 악랄했다.그곳의 한 작고 어두운, 늘 누군가가 지키고 있었던 방에 한 여자애가 갇혀 있었다.다른 유괴 당한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대우였다.여이현은 눈빛이 어두워지며 생각에 잠겼다.하지만 나도현은 여이현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말
온지유는 잠시 멈칫했다.“고모님은 저 때문에 이상한 일에 휘말리신 거예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모른척해요. 승아 씨를 지키고 싶은 마음은 잘 알지만 고모님이 인터넷에서 욕을 먹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이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야.”여이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단순하지 않겠죠. 승아 씨는 쉬운 사람이 아니니까요. 승아 씨가 해냈다고 다른 사람이 못할 거야 없죠. 당신이 안 한다면 제가 방법을 생각해 내서 고모님을 도울 거예요.”“내가 안 돕겠다고 한 적은 없잖아.”여이현이 말했다.온지유는 미덥지 않다는 듯 여이현을 바라보았다.“승아 씨를 수려원에 데려간다면서요? 전 고모님이랑 함께 있을게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지킬 수 있게요.”방금 병실에서 여이현은 분명히 입장을 표시했다.고모님도 여이현과 연을 끊을 기세였다.온지유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이현이 사건을 더 이상 크게 만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아쉽지만 그 생각은 엇나갔다.노승아를 위해서라면 여이현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온지유가 고모님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여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기에 온지유에게 쉽사리 알려줄 수 없었다.“완전히 밝혀지기 전에 고모님과 너 모두 조심하고, 되도록 외출은 피하도록 해.”여이현은 다른 말 없이, 따로 해명조차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그에 마음이 울컥했다. 아무 대답도 하기 싫어 고개를 휙 돌리고 그곳을 떠났다.여이현은 풀이 죽어 돌아선 그 모습에 그저 전화를 걸어 사람을 보내 온지유를 지키도록 했다.이윽고 노승아의 짐도 다 챙겨두고 있었다.“이현 오빠, 이제 가도 돼요.”노승아가 그를 보며 말했다.노승아가 여이현의 손을 잡으려 하자 여이현은 바로 그 손을 피했다.“사람을 불러 너를 데려다줄게.”“오빠는 같이 안 가는 거예요?”노승아가 실망한 어투로 말했다.여이현이 휴대폰에 글을 써서 보여주었다.'너를 수려원에 보내는 건 안전을 위해서야.
온지유는 여희영과 손을 맞잡고 있었다.여희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미 여이현을 백번은 넘게 욕했을지도 모른다.온지유가 말했다.“고모님, 제가 있잖아요. 적적하지는 않을 거예요.”“아들을 낳아서 무슨 쓸모가 있다는 말이냐. 딸이 얼마나 좋으니. 딸은 옆에 꼭 붙어서 같이 있어 주고 말이야. 이현이를 봐, 우리 집안의 유일한 남자아이인데 화를 돋우는 일만 하잖아. 지금 와서는 나도 모르는 체하고.”여이현은 그 생각만 하면 혈압이 올랐다.온지유는 어떻게든 여희영을 위로하려 했다.“이현 씨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죠.”“말을 못 하긴 왜 못해? 이젠 입 밖에 내기도 싫다. 말할수록 심장에서 피가 떨어지는 것 같아. 빨리 가자, 멀리 가면 갈수록 속이 시원해.”여희영은 더 이상 병원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의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청력이 인위적으로 손상을 입을 수도 있대요.”온지유가 걱정되는 건 그래도 여희영이었다.규율이 없는 인터넷상에서는 아무 말을 해도 무서울 게 없었다. 여희영이 노승아의 귀가 들리지 않게 만들었다는 루머가 벌써 돌고 있었다.네티즌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온지유는 진짜 원인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목소리에 진실이 묻혀버릴지도 모른다.여희영은 다시 온지유의 말에 집중했다.“노승아가 저절로 귀를 멀게 했을 수도 있단 말이야?”“아직 증거는 없지만 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승아 씨는 자기 몸에 손을 대면서까지 무얼 하고 싶었던 건지 잘 모르겠어요.”의사의 말로는 노승아의 청력이 회복할 가능성은 지극히 적다고 한다.온지유가 노승아 였다면 이렇게까지 큰 대가를 치르면서 이 길을 선택할 리가 없었다.게다가 노승아는 현재 기억도 잃은 상태이다.“동정심을 사고 싶었겠지.”온지유가 또 물었다.“동정을 받고 싶었다 해도 청력을 잃기보다야 다른 선택을 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요?”여희영도 생각에 잠겼다.“그렇긴 해. 나도 잘 모르겠네.”나민우가 마침
“기억 해둬야지. 그것도 기억 못 하면 인정사정도 없이 어떻게 이 길에서 살아남겠어!”여희영은 통이 큰 사람이었다.나민우도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그래요, 저도 새 친구를 사귄 거로 하죠.”그들에게는 거리낌이 없었다.나민우의 거처로 도착했다.한눈에 봐도 커다란 복층 아파트였다.24시간 보안 시스템도 있었다.“어떠세요?”나민우가 물었다.“괜찮은 것 같네. 민우야, 우린 아무 데라도 좋아.”“그럼 오늘 밤은 여기 묵으시죠. 저도 예전에 쓴 적이 있는 곳인지라 안에 물건들이 남아 있을 거예요. 마침 오늘 한 번에 처리하면 되겠네요.”“너무 신세 지는 거 아니야?”온지유가 물었다.“전혀. 언젠가는 치워야 했을 물건들이었으니까. 이미 내 매니저를 불렀어.”나민우는 그들의 소식을 듣고 두 사람에게 새로운 거처가 필요할 것으로 예측하고 미리 준비 해두고 있었다.“그럼 됐어.”온지유는 나민우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잠시 쉬고 있어.”나민우는 둘에게 물을 따라줬다.“우유 마실래?”나민우가 온지유에게 물었다.“괜찮아, 물이면 돼.”온지유가 대답했다.“임신 중이니까 우유를 마셔두면 좋아. 지금 필요 없다면 이따가 자기 전에라도 마셔. 그때 다시 귀띔할게.”나민우가 자상하게 말했다.온지유는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여희영은 두 사람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민우는 온지유에게 푹 빠져있는 게 분명하다.여희영이 아무리 여이현을 나무라고 꾸짖으며 온지유에게 여이현의 쓴소리했다고 해도, 온지유가 정작 다른 남자와 좋은 분위기이니 조바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한다.여이현이 아무리 모자라라고 해도 한 집안 사람이었다. 입으로는 나쁘다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내버려둘 수 없었다.여희영은 두 사람의 사이에 앉으며 말했다.“둘이 속닥속닥 무슨 말 하고 있는 거야? 나도 좀 끼워줘.”그리고 동시에 여이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사진을 한 장
그 말에 나민우가 말했다.“그럴 리가요. 지유 씨가 맞습니다.”그때부터 나민우는 온지유를 좋아했었다.걱정되어 참을 수 없어서, 밤낮없이 귀국했었다.차준현은 신문을 들고 이상한 것을 보고 있기라도 한 듯 한 글자 한 글자 눈여겨보았다.“들은 바로는 대표님과 온지유 씨는 같은 학년 친구라 하지 않으셨나요. 이 사람은 대표님보다 한 학년 어린데요?”소리를 들은 나민우의 얼굴에 적지 않은 당황한 기색이 여렸다.급히 다가가 신문을 들고 확인했다.오래된 신문이지만 보존 상태는 아주 좋았다.인쇄된 타이틀은 거의 바래지 않고 선명히 보였다. 중학교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몇 명이 죽었으며, 유일한 생존자는...나민우는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틀림이 없었다.마치 이 신문이 예전의 그가 읽었던 것이 아닌 듯했다.신문에 쓰인 생존자도 온지유라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한 학년 아래였다.그럼 이 사람은 온지유가 아니다.이럴 수가.나민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문이 잘못된 건가, 아니면 어딘가에서 틀어진 건가.온지유도 확실히 큰 사건을 겪었었다. 그들의 입에서 친히 들은 것이다. 온지유 자신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다른사람이 되다니.나민우는 한참을 생각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민우야.”마침 온지유가 찾아왔다. 아직 정리가 채 끝나지 않은 걸 보고 온지유가 물었다.“나도 도와줄까?”나민우는 정신이 돌아와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얼떨결에 손에 든 신문을 감추고 놀란 표정을 지웠다.“괜찮아, 거의 다 됐어. 이따가 비서에게 가져가라고 하면 돼.”온지유는 그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무슨 일 있어? 필요하면 나와 고모님이 자리를 피해줄게.”온지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나민우에게 방해가 될지 걱정했다.여희영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베풀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호의도 달갑게 받아들였다.호의를 받으면 그걸 기억하고 꼭 배로 돌려주는 사람이다.그러기에 별말 없이 동의했었다.“아니야, 이상한 생각 하지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
그렇다고 해서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대신해 앞장서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그는 양시은을 뒤로 끌어당기며 말을 시작한 무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그럼 경찰 불러서 조사해 보죠.”양시은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물론 잘못이 없으면 두려울 이유도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들은 애초에 시비를 걸 목적으로 왔을 게 뻔했다. 혹시 뒤에서 상대편이 사주한 걸 수도 있고,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여론몰이를 해서 나도현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도현 씨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려 하다니...’양시은은 감동스러우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손길이 양시은을 제지하는 듯했다.“왜 신고 안 해요? 이제 와서 겁내는 거예요?”나도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눈썹을 치켜떴다. 여유로우면서도 강압적인 기세가 느껴졌다.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던 이가 가장 먼저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치고, 곧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렸다.“무, 무서울 건 없지. 어차피 다 허세일 뿐이야. 그렇게 짧은 시간에 증거를 없앨 수 있었겠어...”그러면서 나도현을 노려보았다.“좋아요. 지금 바로 신고하죠. 다만 약속하세요.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뒤에 있는 저 여자는 준결승에서 사퇴해야 해요.”“당신들 같은 사람이 대회에 나오는 건 인정할 수 없어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조건을 바꾸죠. 이건 제 일이니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요.”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지만 양시은이 휘말리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이 대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그 말을 들은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겁난다면 그냥 겁난다고 하지 그래요?”“그렇게 하죠.”“시은아, 너...”나도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양시은이 괜찮다는 눈빛을 건넨 뒤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조건에 응할게요. 다만 저도 약속을 받아야겠어요
“위에 CCTV도 있어요. 임다혜 씨를 위해 화풀이하려는 거라면 이렇게 말씀드리죠. 나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임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외부인인 단미주 씨가 낄 자리는 없어요. 이 술 한 잔으로 경고하는 거예요. 제 한계를 시험하려 들지 마요.”나도현의 한계란 곧 양시은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롭히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여러분 다 들으셨죠? 술로 저를 경고하겠다네요. 여러분은 이게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몇 마디 했다고 이 지경을 만드는 게 말이나 돼요? 나도현 씨 같은 사람은 분명히 벌을 받게 돼 있어요! 다들 궁금하지 않나요? 변호사로 잘 나가던 사람이 왜 갑자기 회사를 운영하겠어요. 변호사가 상업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상식이에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나긴 억울했다. 그 억울함은 임다혜를 대신한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한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굴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현이 무슨 권리로 함부로 술을 끼얹느냐는 분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그 말이 떨어지자 장내가 일제히 술렁거렸다.“그러고 보니 나도현 씨 전에는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왜 갑자기 진로를 바꿨지? 설마 내막이 있는 거 아냐?”“그야 뻔하죠. 뒷배경 없이 어떻게 변호사 접고 곧장 대표 자리에 오르겠어요?”“변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인맥도 많고 나씨 가문의 오랜 기반도 있잖아요. 뭐든 상상 초월인 거죠.”“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원하는 걸 얻기 마련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세상 구경을 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어느새 나도현을 몰아세우는 비난의 장소로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 태도가 하나같이 막무가내였다.양시은은 나도현을 끌고 나가려 했으나, 그가 오히려 양시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나도현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제 직종 변경은 모두 절차에 따른 겁니다. 변호사 자격증도 이미 말소했고, 나
양시은은 자신과 나도현의 관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두 사람이 오래갈 것 같아요? 둘 사이에는 애초에 신분 격차가 있어요. 나도현 씨가 정말 신경을 안 썼다면 이렇게 자주 연회에 왔겠어요? 결국에는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죠.”말투에서 은근히 도발적인 기색이 풍겼다. 상대는 우아하고 고상해 보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양시은은 낮은 목소리로 비꼬듯 대꾸했다.“도현 씨가 신경 쓴다고 해도, 그건 저희 문제지 그쪽과는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말, 정말 당당하면 도현 씨 앞에서도 해봐요. 근데 저만 붙잡고 이러는 거 보니까 그럴 용기는 없나 보네요.”양시은은 이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낯선 여자가 모른다고 해도 그녀는 잘 알았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말이다.“나도현 씨 앞에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한 건 당신이 눈치 있는 사람인 줄 알아서였는데... 보다시피 아니네요.”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섰다.마침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도현은 곧장 움직였다. 양시은에게 시비를 건 여자가 임다혜의 친구인 단미주라는 걸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단미주가 양시은의 앞에 나타난 목적은 뻔했다.그렇게 생각한 나도현은 대화를 나누던 무리에서 벗어나 양시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는 잠시 망설이지도 않고 양시은과 함께 곧장 단미주를 찾아갔다. 단미주는 나도현이 나타난 걸 보자마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당신 고자질하는 취미도 있었네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자신의 앞에 온 이유가 양시은이 무언가 일러바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직접 찾아올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시은이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제가 직접 본 거거든요. 남 험담하는 게 그렇게 좋으면 재능 살릴 만한 직업이라도 구해줄까요, 단미주 씨?”나도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빙 트레이에 있던 술잔을 집어 들어 단미주의 얼굴에 그
나도현이 양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이현이네랑 만났어. 시은아, 내일 나랑 같이 연회에 가지 않을래?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양시은에게 상류층 행사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짜 중시하는 건 나도현의 곁에 함께 있는 일뿐이었다.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에게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싶었고, 가능한 모든 인맥과 자원을 총동원해 그녀의 앞길을 활짝 열어 주고자 했다. 양시은은 지금 이 작은 공간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 더 좋은데도 말이다.“난 지금으로 충분해. 연회 같은 거 별로 관심도 없어.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양시은은 차라리 하민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종종 별이도 만나서 둘이 친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당연히 네 의견이 우선이야. 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큰 자리에 나가야 하는 일이 많아질 텐데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알았어. 먼저 샤워부터 해. 내가 비타민C 챙겨둘게.”이미 나도현이 결정한 듯 보였기에 양시은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나도현이 푹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나도현은 그녀를 살짝 끌어안고 속삭였다.“난 네가 아이를 하나 더 낳아주면 좋겠지만 출산은 고통스럽지. 그리고 우리가 이현이네랑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꺼려지기도 해. 우선 네가 좀 더 편하게 이 생활을 누리면 좋겠어. 다른 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양시은이 예전에 겪었던 삶은 너무 힘겨웠다. 이제는 일단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혹시 나중에 정말 원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응, 다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나도현을 사랑했고, 당연히 그의 아이를 낳는 일도 기쁘게 여겼다. 예전에 둘이 떨어졌을 때도 아이를 기어코 낳은 건 그를 향한 마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다음 날, 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지석훈과 최주하가 동시에 나도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결혼까지 다 해놓고 그러냐.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여이현은 나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미 애도 있는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주면 되는 거야. 게다가 네 와이프 지유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괜찮던데?”나도현은 최근 양시은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하게 된 뒤로는 이전처럼 피곤해 보이지 않아 상태가 훨씬 낫기는 했다.지석훈이 끼어들었다.“나 다음 달 지방 출장 가야 해서 오늘이 아니었으면 못 올 뻔했어.”“나도 내일 해외 나가야 해.”최주하도 맞장구쳤다.그렇게 짬을 내서 다 같이 모인 것이다.여이현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도현이 놀리다가 너희도 똑같이 될 줄 알아. 너희는 언제쯤 가정 꾸리고 애 낳을 건데? 우리 애들 중학생 될 때까지도 결혼 안 하고 이러고 있을 거야?”그들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겼다.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안정을 선호하게 되었다.하지만 최주하는 달랐다.“좋아하는 사람이 없는데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지석훈도 거들었다.“여이현처럼 지유 씨랑 먼저 결혼해 놓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쪽도, 나도현처럼 재회한 뒤 오해로 얽히고설키는 쪽도, 내 취향은 아냐.”그는 결혼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태도였다.“결혼해서 뭐 해? 맨날 아내랑 애들만 신경 쓰게 되잖아. 난 지금 일하는 게 더 재밌어. 인생이 꼭 결혼이 전부는 아니지.”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결혼이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의문이었다.매일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일하는 게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나. 게다가 인생이 결혼만이 전부는 아니었다.최주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석훈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이 결혼했다고 우리까지 끌어들이려는 것 같아.”“뭐야, 네 명이 아니면 못 하는 거라도 있어?”최주하는 여
“훌륭합니다. 양시은 변호사는 법 조항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인상 깊네요. 주장도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서, 이번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줬어요.”다른 심사위원들도 잇달아 동의하며 양시은의 변론을 높이 평가했다.대회가 끝난 뒤, 양시은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탈락한 여성 변호사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외쳤다.“이건 불공평합니다.”조금 전 무대에서 사용했던 마이크가 꺼지지 않았던 터라, 그 소리는 대회장 안팎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이번 변론은 양시은 변호사 쪽이 훨씬 수월하게 짜여 있습니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는 데 왜 참가 자격을 박탈하지 않은 거죠?”그녀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양시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어떤 특혜도 받지 않았어요. 모든 절차는 대회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쳤고, 온라인상의 소문은 실력 있는 사람을 함부로 정의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여성 변호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그래도 지금 누리는 편의가 전부 다 나도현 변호사 덕분이잖아요. 이게 뒤를 봐주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양시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도현 변호사는 대회의 스폰서 중 한 명이고, 스폰서가 추가로 한 명을 뽑을 수 있다는 건 공개된 조항이에요. 그건 운영위원회의 결정이고, 저는 그 범위 안에서 경쟁했을 뿐이죠. 만약 이게 뒤를 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폰서의 추천을 받는 모든 참가자를 그렇게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요?”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양시은의 말은 많은 이들에게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게다가 대회 중 제가 보여 준 실력은 심사위원과 관중들이 다 지켜봤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양시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곧 오늘 대회가 시작되겠네요. 저는 제가 가진 전문성으로 끝까지 가볼 거예요. 설령 못 간다고 해도 떳떳하게 임할 거고요.”그 말을 남기고 양시은은 돌아섰다.곧이어 대회가 시작됐다. 유언비어 때문인지,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편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기색까지 드러냈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법 조항을 들고 무대에 올라 당당하게 변론을 펼쳤다.“이모 씨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여전히 행동 능력이 있었고 침해 행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모 씨의 생존을 위한 반항은 정당방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상대 변호사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반박했다.“법의학자가 부검한 결과, 피해자는 당시 이미 행동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이모 씨가 공격을 이어간 건 방어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죠.”양시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모 씨는 체구가 작아서 키가 160도 안 되는 반면 가해자는 180에 달합니다. 체격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가해자가 완전히 재공격 능력을 잃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손을 뗄 수 없었겠죠? 이모 씨에게 가해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양시은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법 조항 활용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전문성에 저절로 감탄하는 분위기였다.상대 변호사 역시 그녀의 논리에 흔들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반박했다.“그래도 이모 씨의 행동은 필요한 한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가상 판사가 기침을 하며 둘 사이의 공방을 제지했다.“핵심은 이모 씨의 행동에 주관적 고의가 있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양시은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실무에서 주관적 고의 판단은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였기 때문이다.“이모 씨는 가해자가 이미 행동 불능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양시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