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제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왜 아무것도 안 들리는 거예요?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건가요?”“그런 거 아니에요.”옆에 있던 매니저가 위로했다.여이현은 노승아의 근처에 서서 그녀의 행동을 감시했다.모습을 보아하니 확실히 기억을 잃은 상태가 맞는 듯하였다.오랫동안 지켜보고 나서야 여이현은 노승아에게 타이핑 해 보였다.'밖에 많은 기자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 인터뷰는 받을 수 있겠어?'노승아는 당연히 거절했다.“싫어요.”하룻밤 사이에 노승아는 기억을 잃고 피해자의 입장으로 변해 버렸다.동영상에 관해서는 여이현도 이미 매니저인 김예진이 찍은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그 얘기에 매니저는 의기양양했다."제가 뿌린 게 맞아요. 언니가 괴롭힘 받고 있는데 제가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네티즌들에게 판단을 맡길 수밖에 없겠죠. 주위에 언니를 돕는 사람이 없더라도 팬들은 언니를 지켜줄 거니까요. 저도 그 팬 중 하나고요. 여 대표님, 처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아들일게요. 이미 엎지른 물이니 저도 돌이킬 생각은 없어요!”여이현은 단호했다.“좋아요, 그럼 당신은 이제부터 해고입니다.”용서를 구할 여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매니저는 눈물을 흘리며 노승아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아쉬운 마음이 역력했다.하지만 노승아의 시선 속에 김예진은 없었다.“언니, 전 이제 언니 곁에 있을 수 없게 됐어요. 꼭 잘 지내셔야 해요. 제가 필요할 땐 꼭 다시 돌아올게요.”노승아는 여이현의 등 뒤에 숨어 피해 있을 뿐이었다. 자기 매니저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김예진이 떠난 후 노승아는 또 여이현을 불렀다.“전 이젠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는데, 절 버리진 않을 거죠? 계속 같이 있어도 돼요?”그 말에는 약간의 간절함도 깃들어 있었다. 여이현의 회답이 필요했다.청력을 잃고, 몸도 상한 지금 여이현은 그래도 노승아의 곁에 있어 줄지.여이현은 노승아의 두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다 휴대
“설마 그 유괴 사건 말이야?”나도현이 말했다.“꽤 엄중한 형사 사건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것도 내가 변호사로 섰었잖아.”그 사건은 공개 심사로 진행되지 않았었다.연루된 수면 밑의 사건이 한둘이 아니었다.그랬기에 나도현의 기억에 아주 선명히 남아있었다.“맞아.”나도현은 이 사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이현도 입을 열었다.“바로 이 사건과 같은 시기에, 노승아도 아무 말 없이 출국 했었어.”나도현이 대답했다.“우연이겠지. 노승아도 평범한 여자애인데 설마 그렇게 큰 사건에 손을 댔겠어.”만일 노승아가 이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면, 엮여 있는 사람의 범위는 훨씬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노승아가 그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이 된다.나도현은 노승아를 잘 알지 못했다. 여이현과 여러 해를 같이 지내 왔지만, 노승 아를 직접 만난 적은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었다.노승아와 가까워지려고 한 적도 없고 말이다.“그러기를 바라야지.”여이현은 그리 말할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너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이 사건은 해결됐지만 배후 인물은 잡아 내지 못했었어.”“의문점은 많았지. 그리고 너도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잖아. 그것 때문에 지금도 술만 마시면 기억을 잘 못하고 말이야.”나도현이 말을 이어갔다.“그때 한 여자애를 구한 적이 있댔지? 너희 둘 다 거의 죽을 뻔했다며. 기억나?”여이현이 잠시 멈칫했다.“기억은 있는 것 같아.”여이현은 스파이 신분으로 적의 아지트에 잠입했었다. 유괴, 납치당한 여인들과 아동을 구하러 말이다.그곳은 방대한 조직이었다.납치뿐만 아니라 총기 매매, 약물 판매에도 손을 뻗어 있었다.형법에 씌어있는 일에는 거의 다 손을 댔고, 아주 악랄했다.그곳의 한 작고 어두운, 늘 누군가가 지키고 있었던 방에 한 여자애가 갇혀 있었다.다른 유괴 당한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대우였다.여이현은 눈빛이 어두워지며 생각에 잠겼다.하지만 나도현은 여이현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말
온지유는 잠시 멈칫했다.“고모님은 저 때문에 이상한 일에 휘말리신 거예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모른척해요. 승아 씨를 지키고 싶은 마음은 잘 알지만 고모님이 인터넷에서 욕을 먹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이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야.”여이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단순하지 않겠죠. 승아 씨는 쉬운 사람이 아니니까요. 승아 씨가 해냈다고 다른 사람이 못할 거야 없죠. 당신이 안 한다면 제가 방법을 생각해 내서 고모님을 도울 거예요.”“내가 안 돕겠다고 한 적은 없잖아.”여이현이 말했다.온지유는 미덥지 않다는 듯 여이현을 바라보았다.“승아 씨를 수려원에 데려간다면서요? 전 고모님이랑 함께 있을게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지킬 수 있게요.”방금 병실에서 여이현은 분명히 입장을 표시했다.고모님도 여이현과 연을 끊을 기세였다.온지유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이현이 사건을 더 이상 크게 만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아쉽지만 그 생각은 엇나갔다.노승아를 위해서라면 여이현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온지유가 고모님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여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기에 온지유에게 쉽사리 알려줄 수 없었다.“완전히 밝혀지기 전에 고모님과 너 모두 조심하고, 되도록 외출은 피하도록 해.”여이현은 다른 말 없이, 따로 해명조차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그에 마음이 울컥했다. 아무 대답도 하기 싫어 고개를 휙 돌리고 그곳을 떠났다.여이현은 풀이 죽어 돌아선 그 모습에 그저 전화를 걸어 사람을 보내 온지유를 지키도록 했다.이윽고 노승아의 짐도 다 챙겨두고 있었다.“이현 오빠, 이제 가도 돼요.”노승아가 그를 보며 말했다.노승아가 여이현의 손을 잡으려 하자 여이현은 바로 그 손을 피했다.“사람을 불러 너를 데려다줄게.”“오빠는 같이 안 가는 거예요?”노승아가 실망한 어투로 말했다.여이현이 휴대폰에 글을 써서 보여주었다.'너를 수려원에 보내는 건 안전을 위해서야.
온지유는 여희영과 손을 맞잡고 있었다.여희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미 여이현을 백번은 넘게 욕했을지도 모른다.온지유가 말했다.“고모님, 제가 있잖아요. 적적하지는 않을 거예요.”“아들을 낳아서 무슨 쓸모가 있다는 말이냐. 딸이 얼마나 좋으니. 딸은 옆에 꼭 붙어서 같이 있어 주고 말이야. 이현이를 봐, 우리 집안의 유일한 남자아이인데 화를 돋우는 일만 하잖아. 지금 와서는 나도 모르는 체하고.”여이현은 그 생각만 하면 혈압이 올랐다.온지유는 어떻게든 여희영을 위로하려 했다.“이현 씨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죠.”“말을 못 하긴 왜 못해? 이젠 입 밖에 내기도 싫다. 말할수록 심장에서 피가 떨어지는 것 같아. 빨리 가자, 멀리 가면 갈수록 속이 시원해.”여희영은 더 이상 병원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의사 선생님께 물어보니 청력이 인위적으로 손상을 입을 수도 있대요.”온지유가 걱정되는 건 그래도 여희영이었다.규율이 없는 인터넷상에서는 아무 말을 해도 무서울 게 없었다. 여희영이 노승아의 귀가 들리지 않게 만들었다는 루머가 벌써 돌고 있었다.네티즌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온지유는 진짜 원인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목소리에 진실이 묻혀버릴지도 모른다.여희영은 다시 온지유의 말에 집중했다.“노승아가 저절로 귀를 멀게 했을 수도 있단 말이야?”“아직 증거는 없지만 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승아 씨는 자기 몸에 손을 대면서까지 무얼 하고 싶었던 건지 잘 모르겠어요.”의사의 말로는 노승아의 청력이 회복할 가능성은 지극히 적다고 한다.온지유가 노승아 였다면 이렇게까지 큰 대가를 치르면서 이 길을 선택할 리가 없었다.게다가 노승아는 현재 기억도 잃은 상태이다.“동정심을 사고 싶었겠지.”온지유가 또 물었다.“동정을 받고 싶었다 해도 청력을 잃기보다야 다른 선택을 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요?”여희영도 생각에 잠겼다.“그렇긴 해. 나도 잘 모르겠네.”나민우가 마침
“기억 해둬야지. 그것도 기억 못 하면 인정사정도 없이 어떻게 이 길에서 살아남겠어!”여희영은 통이 큰 사람이었다.나민우도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그래요, 저도 새 친구를 사귄 거로 하죠.”그들에게는 거리낌이 없었다.나민우의 거처로 도착했다.한눈에 봐도 커다란 복층 아파트였다.24시간 보안 시스템도 있었다.“어떠세요?”나민우가 물었다.“괜찮은 것 같네. 민우야, 우린 아무 데라도 좋아.”“그럼 오늘 밤은 여기 묵으시죠. 저도 예전에 쓴 적이 있는 곳인지라 안에 물건들이 남아 있을 거예요. 마침 오늘 한 번에 처리하면 되겠네요.”“너무 신세 지는 거 아니야?”온지유가 물었다.“전혀. 언젠가는 치워야 했을 물건들이었으니까. 이미 내 매니저를 불렀어.”나민우는 그들의 소식을 듣고 두 사람에게 새로운 거처가 필요할 것으로 예측하고 미리 준비 해두고 있었다.“그럼 됐어.”온지유는 나민우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잠시 쉬고 있어.”나민우는 둘에게 물을 따라줬다.“우유 마실래?”나민우가 온지유에게 물었다.“괜찮아, 물이면 돼.”온지유가 대답했다.“임신 중이니까 우유를 마셔두면 좋아. 지금 필요 없다면 이따가 자기 전에라도 마셔. 그때 다시 귀띔할게.”나민우가 자상하게 말했다.온지유는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여희영은 두 사람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민우는 온지유에게 푹 빠져있는 게 분명하다.여희영이 아무리 여이현을 나무라고 꾸짖으며 온지유에게 여이현의 쓴소리했다고 해도, 온지유가 정작 다른 남자와 좋은 분위기이니 조바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한다.여이현이 아무리 모자라라고 해도 한 집안 사람이었다. 입으로는 나쁘다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내버려둘 수 없었다.여희영은 두 사람의 사이에 앉으며 말했다.“둘이 속닥속닥 무슨 말 하고 있는 거야? 나도 좀 끼워줘.”그리고 동시에 여이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사진을 한 장
그 말에 나민우가 말했다.“그럴 리가요. 지유 씨가 맞습니다.”그때부터 나민우는 온지유를 좋아했었다.걱정되어 참을 수 없어서, 밤낮없이 귀국했었다.차준현은 신문을 들고 이상한 것을 보고 있기라도 한 듯 한 글자 한 글자 눈여겨보았다.“들은 바로는 대표님과 온지유 씨는 같은 학년 친구라 하지 않으셨나요. 이 사람은 대표님보다 한 학년 어린데요?”소리를 들은 나민우의 얼굴에 적지 않은 당황한 기색이 여렸다.급히 다가가 신문을 들고 확인했다.오래된 신문이지만 보존 상태는 아주 좋았다.인쇄된 타이틀은 거의 바래지 않고 선명히 보였다. 중학교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몇 명이 죽었으며, 유일한 생존자는...나민우는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틀림이 없었다.마치 이 신문이 예전의 그가 읽었던 것이 아닌 듯했다.신문에 쓰인 생존자도 온지유라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한 학년 아래였다.그럼 이 사람은 온지유가 아니다.이럴 수가.나민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문이 잘못된 건가, 아니면 어딘가에서 틀어진 건가.온지유도 확실히 큰 사건을 겪었었다. 그들의 입에서 친히 들은 것이다. 온지유 자신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다른사람이 되다니.나민우는 한참을 생각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민우야.”마침 온지유가 찾아왔다. 아직 정리가 채 끝나지 않은 걸 보고 온지유가 물었다.“나도 도와줄까?”나민우는 정신이 돌아와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얼떨결에 손에 든 신문을 감추고 놀란 표정을 지웠다.“괜찮아, 거의 다 됐어. 이따가 비서에게 가져가라고 하면 돼.”온지유는 그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무슨 일 있어? 필요하면 나와 고모님이 자리를 피해줄게.”온지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나민우에게 방해가 될지 걱정했다.여희영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베풀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호의도 달갑게 받아들였다.호의를 받으면 그걸 기억하고 꼭 배로 돌려주는 사람이다.그러기에 별말 없이 동의했었다.“아니야, 이상한 생각 하지
나민우는 의문에 빠졌다.온지유의 이름에 정신이 팔려 잘못 봤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하지만 온지유에게도 사건의 기억이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단순히 신문 출판사의 실수였던 것일까?온지유는 생각에 잠긴 나민우를 보고 전부터 꾹 참아온 물음을 물었다.“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나민우는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어?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주문이나 하자.”“이미 다 시켰어. 고모님이 맥주 좀 마신다는데 너도 어때?”“그래.”둘은 서재를 떠났다.여희영은 소파에 앉아 조용히 티비를 보고 있었다.지금의 여희영에게 이는 유일한 오락이였다.티비에서는 여희영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온지유는 여희영의 곁에 앉아 함께 티비를 보기 시작했다.채미소가 병실에 있는 모습이 보였다.“여기 계시는 이분이 바로 피해자 노승아 씨입니다. 노승아 씨,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노승아는 카메라를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찍지 마세요, 전 아무 말도 할 생각 없어요.”“노승아 씨?”채미소가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다.“그만하세요! 안 들린다고요,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찍지 마세요. 전 지금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아요!”노승아는 창백한 얼굴과 초췌한 모습으로 병약한 미인의 분위기를 조성했다.채미소도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노승아씨는 확실히 청력을 잃으신 듯 합니다.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승아 씨의 커리어에도 큰 타격이 될 것 같은데요, 영상 속에 등장한 가해자 여성은 인터넷에서 많은 추측들이 난무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는 상황입니다. 혹시 본인께서 이 보도를 보신다면 부디 노승아씨에게 사과 한마디라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채미소의 인터뷰를 본 온지유는 바로 티비 전원을 꺼버렸다.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여희영이 불평했다.“아니 왜 끈 거야, 지유야.”온지유가 말했다.“채미소가 나오잖아요. 어떻게 노승아 병실에 들어 간건진 모르겠지만,
괜찮다.아직 시간은 많다.언젠가는 이 저택의 여주인이 될 것이다.지금도 한 걸음 가까워지지 않았는가.노승아는 함께 들어 온 배진호를 바라보았다.그는 여이현의 측근이다. 배진호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노승아에게도 유리했다.“배 비서님, 이현 오빠는 여기에 자주 묵나요?”배진호가 휴대폰에 타이핑 했다.'최근에는 자주 여기서 묵고 계십니다. 하지만 대표님도 이 며칠간은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저택에는 안 돌아가시는 건가요?”노승아도 오랜 시간 여진숙과 연락하지 않았다.일이 바빠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몇 번 여진숙에게서 메시지가 왔었지만 회신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대표님은 돌아가시죠. 사모님께서 저택에 돌아가시기를 꺼리셔서 대표님도 자주 돌아가지 않으실 뿐입니다.'노승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럼 최근에는 여기에 돌아오실까요?”'그건 잘 모르겠네요. 대표님도 일이 바쁘시니 사모님을 보러 가실지도 모르겠고요.'배진호의 말은 노승아에게 자기 주제를 알라는 의미가 있었다.노승아는 미소를 지었다.“지유 언니가 방송국으로 옮겨 간 건 저도 이미 알고 있어요. 이현 오빠를 떠난 걸 보니 이미 이혼했나 보죠?”'아직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배진호가 선을 그었다.“그럴 의향은 있으신지요?”노승아가 더 캐물었다.배진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건 두분 사이의 일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필요한 말은 하되, 말할 필요가 없는 말은 알리지 않는다.노승아도 배진호가 온지유를 감싸고 있다는 것에 눈치를 챘다.오랜 시간 함께 일을 해온 사이이니 온지유에게 정이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여이현과 결혼하면 이번에는 누구 쪽으로 갈지 잘 파악할 수 있으리라 노승아는 믿었다.그때가 오면 신경 거슬리게 하는 사람이 배진호라 하더라도 노승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을 거다.지금은 아직 그와 신경전을 벌일 때가 아니다.노승아는 수려원을 자신의 구역이라 여기고 주인 행세를 했다.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