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용기에 담아온 것도 있고 보온병에 담아 온 것도 있었다.여이현이 사온 음식은 5성급 호텔 주방장이 만든 것이었지만 여희영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옆으로 밀어두며 자신이 포장해온 음식을 꺼냈다.“이건 농어탕이야. 임산부에게 아주 좋지. 그리고 이건 돼지 간으로 만든 죽이야. 돼지 간은 철분이 많아 빈혈에도 좋고 태아한테도 좋아. 또 이건 족발 찜이야...”그녀는 계속 음식을 꺼내며 말했다. 병실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내 여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넌 아빠가 되는 게 처음이니까 임산부를 어떻게 잘 보살펴야 하는지,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배워둬. 내가 가져온 음식은 전부 임산부의 영양 보충에 좋은 것들이야. 절대 산도가 있거나 카페인 같은 걸 먹게 하지 마. 그런 것들은 유산의 위험성이 있으니까...”여희영이 끊임없이 말하자 여이현이 말했다.“지유는 내 아내니까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어요.”“알긴 뭘 알아!”여희영은 전혀 믿지 않았다.“남편이라는 놈이 아내가 입원할 정도로 일하는데 말리지도 않고 말이야. 어딜 봐서 잘 챙겨준 거니? 지유는 임신했으니까 몸조리를 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태교에 집중해야 한다는 거 모르니? 정말이지 하나도 모르면서 뻔뻔하게 말은 잘하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배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연히 출근하면 안 되죠.”온지유는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고모님, 얼른 앉으세요. 저 배고파요. 뭘 좀 먹고 싶어요.”“그래.”그녀의 말에 여희영은 바로 잔소리를 멈추고 자신이 포장해온 음식을 내밀며 온화하게 말했다.“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이현은 여희영이 온 뒤 얼굴에 웃음기가 생긴 그녀를 보며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며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온지유는 죽을 먹었다.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이라곤 했지만, 여전히 메스꺼움은 사라지지
김예진은 여이현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대표님, 제가 드디어 찾았네요.”여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수심이 가득한 김예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김예진이 노승아의 매니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담배를 꺼버리곤 재떨이에 던졌다.“회사에 다른 직원이 없어요?”그가 기획사를 차리긴 했어도 따로 회사를 관리하는 경영자를 두었다.그러니 기획사의 일은 그 직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김예진이 말했다.“회사에 아무리 직원이 많다고 해도 승아 언니한테 필요한 사람은 대표님이세요. 대표님께선 계속 전화를 안 받으셔서...”여이현은 또 노승아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미간을 찌푸렸다.“다른 일은 없는 거예요?”김예진은 눈물을 닦았지만 계속 흘러냈다.“언니가 앓고 있던 병이 다시 재발했어요. 어제 검진 결과를 받고 알게 되셨는데, 귀가 안 들린다고 일정을 전부 취소했어요. 승아 언니 이대로 청력을 잃으면 어떻게 하죠? 앞으로 연기는 어떻게 해요? 가수 생활 겨우 포기하고 배우로 전향했는데 연기도 못하게 되면... 그럼 언니 인생은 여기서 끝나게 되는 거잖아요. 언니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예요.”그녀의 말에 여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심각해졌다.“아무것도 안 들린다고 하던가요?”김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최고의 의사를 그녀에게 붙여 귀를 치료하게 했다.의사는 그녀가 치료만 잘하면 다시 예전처럼 나아질 수 있다고 했다.예전에 이미 치료를 잘 받은 탓에 청력의 거의 회복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안 들릴 수 있겠는가.여이현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지금 어디에 있죠?”김예진은 서둘러 그를 노승아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온지유의 병실은 9층이었지만 여이현은 11층에 왔다.병실 밖에서부터 그는 병실에 누워있는 노승아를 발견했다. 머리를 헝클어진 채 안색은 창백했다. 그녀는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다른 남자가 그녀의 모습을 봤어도 마음 아파했을 정도였다.여이현이 병실 입구에 서 있자 김예진이 말했다.
노승아의 눈에 힘이 풀리면서 억지 미소를 지었다.“오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꼭 그렇게 차갑게 말을 해야겠어? 나 무서워, 난 지금 이미 귀가 안 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섭다고!”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여이현은 그녀의 팔을 놓아주며 차가운 시선으로 보았다.“네가 널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은 뭔데. 어떻게 귀가 안 들릴 수 있겠어. 네 직업을 사랑한다는 건 다 거짓말이었나 보군. 넌 어떻게 하면 네가 더 잘 될 수 있나 연구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네 건강이 나빠지는지만 연구하고 있었나 보네.”“연예계가 쉬운 줄 알았어? 누구나 다 네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줄 아느냐고. 네가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는데 나도 계속 널 그 자리에 앉혀둘 이유가 없지. 그 자리를 아끼면서 열심히 할 사람은 아주 많아!”여이현은 매정하게 말했다. 그녀가 들을 수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말이다. 여하간에 평생 그녀에게만 신경 쓰며 살아갈 수 없지 않겠는가.노승아는 그가 키운 연예인이었다.그러니 그가 끌어내릴 수 있었다.말을 마친 여이현은 단호하게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노승아는 예전이었다면 당장이라도 가슴 아픈 얼굴로 달래야 할 그가 차갑게 돌아서는 모습을 보곤 마음 급해져 얼른 그를 안았다.“오빠, 가지 마!”한편, 온지유와 여희영이 11층에 있었다.여희영은 휴지를 들고 코를 닦으면서 말했다.“내가 나 혼자 와도 된다고 했잖아. 내 말도 안 듣고 결국 침대에서 내려오다니.”“괜찮아요. 의사가 적당히 움직여도 된다고 했어요. 그냥 조금 걷는 것뿐인데요. 전 정말로 괜찮아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온지유는 여희영의 팔에 팔짱을 꼈다.“고모님을 보니까 너무 기뻐서 그래요.”그녀는 여희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전보다 더 여희영에게 찰싹 붙었다.“아, 비염은 언제 나으려나. 먼지가 코끝에 붙어도 코가 간지러워 못 살겠네. 그래서 내가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못 키우잖아. 에휴, 얼른 의사한테 진료받아야지.”여희
노승아의 고개가 돌아가고 그대로 침대에서 떨어졌다.여희영의 한방에 단단한 침대에 뼈가 부딪치는 소리마저 들려왔고 노승아는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떨어졌다.여이현은 원래 노승아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갑자기 등장한 여희영이 먼저 노승아의 뺨을 갈궜다.그는 여희영을 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고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동시에 김예진이 달려오며 노승아를 부축했다.“뭐 하냐니, 안 보이니? 여우를 잡고 있잖아.”여희영이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노승아는 눈물을 흘렸다. 꼭 더는 혼자의 힘으로 생활하기 어려운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노승아를 일으켰다.“승아는 지금 환자예요. 전 그냥 상태를 보러 온 거라고요.”“네가 뭔데 얘 상태를 확인하러 와?”여희영은 믿지 않았다.“얘는 지금 연기하고 있는 거야. 네가 얘를 불쌍하게 여겨 목적을 이루려고!”“전 승아 회사 대표예요. 설령 연기라고 해도 상사로서 상태 확인하러는 와야죠.”여이현은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희영의 행동은 다소 선을 넘은 것 같았다.“그걸 누가 믿어!”여희영이 말했다.“아픈 것도 시기가 있는 거니? 왜 많고 많은 시간 중에서 하필이면 네가 병원에 있을 때 아픈 건데. 이 여자는 연기로 대상도 받았으니 네 앞에서 아픈 환자 연기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말을 마친 여희영은 팔짱을 끼면서 노승아를 내려다보았다.김예진은 노승아를 위해 나섰다.“대체 왜 언니한테 이러시는 건데요. 언니는 이미 충분히 불쌍한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다들 언니한테 이럴 수가 있으세요!”김예진의 눈에는 노승아가 힘들게 노력해 정상의 자리에 앉은 것으로 보였다.예전에는 목을 다쳐 가수 생활을 포기하고 이젠 청력까지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제일 중요한 시기에 말이다.그런데 다른 사람이 노승아를 괴롭히는 모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김예진의 말에 여희영은 코웃음을 쳤다.“하, 불쌍하다고요? 대체 어디가 불쌍
몸싸움을 벌이는 세 사람을 보며 여이현은 얼른 여희영을 잡아당겼다. 그는 여희영이 충동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길 바랐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고모. 얼른 그 손 놓으세요!”여희영은 여이현의 팔을 뿌리쳤다.“안 놔, 못 놔! 내가 오늘 이 X 진상을 전부 까발릴 거야. 너희들도 똑똑히 봐야지. 입만 열면 거짓말인 여자니까 귀가 안 들린다는 것도 거짓말일 거야!”“아아아악!”노승아가 소리를 질렀다.“다들 제가 죽기를 바라네요. 그래요, 죽을게요. 지금 죽으면 되잖아요!”싸우고 있는 그들을 보며 노승아는 소리를 지르더니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노승아의 머리에선 피가 흘러나오더니 바닥에 쓰러졌다.온지유의 눈이 커졌다. 노승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충격을 받은 온지유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여희영도 놀랐다. 노승아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모든 사람들이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언니!”김예진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살인자들! 당신들이 우리 언니를 죽인 거야!”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승아를 안았다.“얼른 의사 불러요!”김예진은 그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얼른 병실 밖으로 나가 의사를 불렀다.의사는 서둘러 노승아를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혼란스러웠던 상황은 몇 분간 지속하였고 다시 평온해졌다.그들은 응급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김예진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여이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누군가와 연락하고 있었다.여희영은 그제야 진정되었다. 이상하리만큼 냉정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온지유를 보았다. 안색이 창백해진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지유야, 아까 많이 놀랐지?”온지유는 여희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고모님...”“그래, 임신했는데 피를 보았으니 많이 놀랐겠지. 얼른 가서 쉬어.”여희영은 이미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노승아는 그녀의 생각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방금은 내가 너무 충동적이어서 너한테 안 좋은 모습만 보여주었네. 미안해, 이 일은 내가 알아
“이현...”그녀가 다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던 여이현은 그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자리를 옮겼다.“소식이 새어나가지 않게 잘 관리하세요. 누구도 노승아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나쁜 영향을...”여이현은 온지유를 스쳐 지나갔다. 꼭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처럼 말이다.그 순간 온지유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여희영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여이현은 노승아를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행여나 연예인 앞길에 문제가 생길까 봐 말이다.물론 그녀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본 이상 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피어올랐다.여이현이 노승아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귀찮게 물어보지 말자며 속으로 생각하곤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의사라면 분명히 그녀에게 정확한 답을 줄 것이다.의사에게 노승아의 상태를 물어본 후에야 그녀는 노승아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전에는 목을 다쳐 노래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었다.게다가 분명 한쪽 귀만 문제가 있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왜 양쪽 모두 청력을 잃게 된 것일까.의사는 그녀에게 노승아의 청력은 원래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이현이 예전에 노승아에게 붙여준 의사는 세계 최고의 의사였으니까.100%의 확률로 나아질 수 있었다고 했다.설령 목소리는 예전과 달라져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해도 청력엔 문제가 없다고 했다.하지만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그들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만약 노승아의 귀가 계속 회복하지 못한다면 아마 영원히 청력을 잃고 살게 될 것이다.온지유는 다소 충격에 빠졌다.노승아에겐 질병이 많았기 때문이다.온지유가 또 물었다.“그러면 노승아 씨 상황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을까요?”어떤 사람들은 청각에 문제가 있어도 모르고 넘기는 경우가 있었다.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문제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의사는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후천적인 겁니다. 뇌에 손상을 입거나 귀를 세게 다친 환자만이 이런
게다가 나민우에게 빚진 것도 많았다.“난 괜찮아.”나민우가 들어왔다. 그는 웃으며 땀을 닦았다.“조금만 지나면 마를 거야. 네 소식을 듣고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달려왔거든.”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다.“얼른 앉아. 내가 물 한잔 따라줄게.”“아니야, 내가 따라서 마실게.”나민우가 물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는 온지유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아기는 괜찮대?”그의 말에 온지유는 다시 앉았다.“정민 씨가 그것도 얘기한 거야?”나민우는 물잔에 물을 따르며 웃었다.그러자 온지유가 말했다.“뭐든 다 알려주나 보네. 혹시 네가 심어둔 스파이는 아니야?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바로 너한테 보고를 하는 그런 스파이 말이야.”“에이, 아니야.”나민우는 물잔을 내려놓았다.“그냥 정민이랑 친해서 그런 거야. 게다가 학교도 같이 다녔었으니까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거지.”“아니면 됐어. 정말 그랬다면 내 프라이버시는 전부 털렸을 테니까.”온지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나민우는 시선을 돌려 그녀의 배를 보았다.“아이는 무사해. 그냥 피가 났을 뿐이야. 심각한 거 아니야. 의사 선생님도 그냥 몸조리 잘하라고만 하셨어.”온지유가 그의 시선을 눈치채며 말했다.나민우가 물었다.“몇 개월 됐어?”“두 달 됐어.”온지유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나도 사실 안 지 얼마 안 됐어. 그래서 말하지 않은 거야. 엄마가 되는 건 처음이라 뭐든 조심스러웠거든. 그래도 실수할 때가 더 많지만 말이야.”나민우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의 배를 보며 또 물었다.“아빠는 여이현 씨야?”그의 말에 온지유는 침묵했다.말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아이의 아빠가 여이현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행여나 여이현이 이 아이를 지우라고 할까 봐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밝히지 않기로 했다.나민우의 말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민우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나민우는 그녀에게 조금의 거짓말을 해도 죄책감이
그러자 온지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나민우는 할 말만 한 뒤 전화를 끊어버렸다.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번엔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영원히 온지유를 곁에 둘 기회가 차려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나민우,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온지유는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그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민우가 먼저 자신의 아이라고 누군가에게 말했다.나민우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미안해, 내가 상의도 없이 이런 말을 해서. 하지만 이렇게 해야 그 사람이 포기하지 않을까?”“그러면 넌 어쩌려고!”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이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닌데, 넌 네 아이라고 말했잖아. 이건 처음부터 너한테 불리한 거라고!”그녀는 자신이 지켜야 할 분수를 알고 있었다.나민우는 아직 젊었다. 그랬기에 앞날도 창창했다.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아이가 생겼다고 하면 그의 가족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녀는 나민우에게 책임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도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나민우가 말했다.“불리하든 말든 난 신경 쓰지 않아. 한번 사는 인생 난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거거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난 상관없어. 사람들의 시선만 신경 쓰면 세상 살기가 힘들어져. 너도 날 걱정할 필요 없어. 어찌 되었든 나도 네 덕을 보니까.”“안 돼. 네가 힘들어질 거야.”온지유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넌 신경 안 쓴다고 했지만 난 그럴 수 없어. 너한테 진 빚도 아직 못 갚았단 말이야.”“난 갚으라고 한 적 없어.”나민우가 웃으며 말했다.“난 내가 원해서 널 도와준 거야. 아쉬운 것 하나도 없었어. 그거 알고 있나 모르겠네. 너랑 조금이라도 연관된 거면 난 전부 기뻐. 널 도와줄수록 내가 너한테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널 도와주는 건 나한테 영광이나 마찬가지야. 오히려 엎드려 절하면서 날 이용해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
“훌륭합니다. 양시은 변호사는 법 조항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인상 깊네요. 주장도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서, 이번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줬어요.”다른 심사위원들도 잇달아 동의하며 양시은의 변론을 높이 평가했다.대회가 끝난 뒤, 양시은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탈락한 여성 변호사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외쳤다.“이건 불공평합니다.”조금 전 무대에서 사용했던 마이크가 꺼지지 않았던 터라, 그 소리는 대회장 안팎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이번 변론은 양시은 변호사 쪽이 훨씬 수월하게 짜여 있습니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는 데 왜 참가 자격을 박탈하지 않은 거죠?”그녀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양시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어떤 특혜도 받지 않았어요. 모든 절차는 대회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쳤고, 온라인상의 소문은 실력 있는 사람을 함부로 정의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여성 변호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그래도 지금 누리는 편의가 전부 다 나도현 변호사 덕분이잖아요. 이게 뒤를 봐주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양시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도현 변호사는 대회의 스폰서 중 한 명이고, 스폰서가 추가로 한 명을 뽑을 수 있다는 건 공개된 조항이에요. 그건 운영위원회의 결정이고, 저는 그 범위 안에서 경쟁했을 뿐이죠. 만약 이게 뒤를 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폰서의 추천을 받는 모든 참가자를 그렇게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요?”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양시은의 말은 많은 이들에게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게다가 대회 중 제가 보여 준 실력은 심사위원과 관중들이 다 지켜봤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양시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곧 오늘 대회가 시작되겠네요. 저는 제가 가진 전문성으로 끝까지 가볼 거예요. 설령 못 간다고 해도 떳떳하게 임할 거고요.”그 말을 남기고 양시은은 돌아섰다.곧이어 대회가 시작됐다. 유언비어 때문인지,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편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기색까지 드러냈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법 조항을 들고 무대에 올라 당당하게 변론을 펼쳤다.“이모 씨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여전히 행동 능력이 있었고 침해 행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모 씨의 생존을 위한 반항은 정당방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상대 변호사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반박했다.“법의학자가 부검한 결과, 피해자는 당시 이미 행동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이모 씨가 공격을 이어간 건 방어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죠.”양시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모 씨는 체구가 작아서 키가 160도 안 되는 반면 가해자는 180에 달합니다. 체격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가해자가 완전히 재공격 능력을 잃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손을 뗄 수 없었겠죠? 이모 씨에게 가해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양시은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법 조항 활용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전문성에 저절로 감탄하는 분위기였다.상대 변호사 역시 그녀의 논리에 흔들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반박했다.“그래도 이모 씨의 행동은 필요한 한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가상 판사가 기침을 하며 둘 사이의 공방을 제지했다.“핵심은 이모 씨의 행동에 주관적 고의가 있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양시은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실무에서 주관적 고의 판단은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였기 때문이다.“이모 씨는 가해자가 이미 행동 불능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양시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이
누군가 일부러 여론을 몰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유명한 계정이나 언론 매체들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양시은은 부정적인 댓글들을 보며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그녀는 알았다. 이런 때에는 근거 없는 비난이나 헛소문을 굳이 상대하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하다는 걸 말이다.더군다나 내일 대회가 있으니 지금은 준비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그녀는 뜬소문에 휘둘리지 않고 대회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음 날 현장에 도착하자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예선에 임했는데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꽤 힘이 들었다.이때 권 변호사가 다가왔다.“요즘은 뒤봐주는 사람만 있으면 뭐든 다 돼요. 뭐 하러 이기겠다고 애쓰겠어요?”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양시은은 고개를 들고 차가운 눈빛으로 권 변호사를 바라봤다.“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지만 권 변호사님은 변호사시잖아요. 근거 없는 소문을 함부로 떠드는 건 잘못 아닌가요?”양시은의 단호한 말에 주변의 수군거림이 잠시 잦아들었다.권 변호사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시은 씨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누가 알겠어요? 딱 봐도 뭔가 수상쩍잖아요.”“저는 한낱 신인일 뿐인데 왜 예민하게 구세요? 설마 저한테 지면 체면이 구겨질까 봐 걱정되시는 건가요? 소문이 뭐라고 하든 실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어요.”양시은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되받아쳤다.“그런 건 시은 씨가 지닌 오점을 다 털어낸 다음에 말씀해요.”권 변호사는 콧방귀를 뀌었다.양시은이 대답할 틈도 없이 나도현이 그녀 뒤에 나타나 어깨를 감싸안았다.“제가 제안한 자리는 맞습니다. 매년 대회 주최 측은 스폰서에게서 참가자를 추천받거든요. 권변이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을 텐데요.”나도현이 나타나자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그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기세를 뿜어냈다.주위 사람들은 호기심과 놀라움이 뒤섞인 시선을 보냈다.권 변호사는 나도현의 기에 눌린 듯 얼굴이 굳었지만 여전히 억지를 부렸다.“그렇다 해
나도현은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수건 하나만 두른 채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양시은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서재에 있을 거라고 짐작했고, 곧 문틈 아래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순간 그의 모습은 마치 날개를 활짝 펼친 공작새 같았다. 허리에 둘러맨 건 수건 한 장뿐이었고, 머리카락에는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탄탄한 가슴 근육을 따라 물방울 하나가 서서히 흘러내렸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너 먼저 자. 나 아직 판례 보고 있어.”“이거 몇 번이나 봤잖아?”나도현은 그녀의 앞에서 어슬렁거렸다.“그래도 부족해. 내가 제일 뒤떨어지는 건 경험이잖아. 그건 짧은 시간 안에 메우기 힘들어.”양시은이 한숨을 쉬었다.“다음 라운드까지 며칠 남았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나도현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거의 그녀의 손을 자기 가슴팍에 갖다 댈 뻔했다.하지만 양시은은 여전히 분위기를 몰랐다. 법 조항을 들여다보느라 고개도 들지 않고 다시 말했다.“며칠 안 남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례를 언제 다 보겠어!”나도현은 답답함을 느꼈다. 법 조항이나 판례가 자신보다 더 매력적인가 싶을 정도였다. 뭐가 됐든 그녀가 통나무인 탓이겠지만 말이다.그는 여러 번 시도했지만 결국 허탕이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방금 샤워를 마친 양시은의 머릿결에 남아 있는 습기를 보고 드라이어를 꺼냈다. 그러면서 말했다.“머리 젖은 채로 오래 두면 두통 생길 수도 있어.”그는 양시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말려 주고 빗으로 차분히 빗겨 주었다.한참 뒤에야 양시은이 반응하며 고개를 들었다.“고마워, 도현 씨.”이제야 나도현의 어깨가 훤히 드러난 모습을 본 그녀는 잠시 다정한 눈빛을 보이더니 시선이 저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허리에 수건 한 장만 두른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오래된 부부 같은 사이인데도 양시은은 얼굴이 빨개졌다.“안 추워?”“추워
“앞로 하민이를 자주 데리고 올게요.”양시은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그런데 그건 대회 끝나고 나서 얘기해요.”온지유는 그녀의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사려깊게 덧붙였다. 지금은 대회가 먼저이기 때문이다.날이 저물 무렵에서야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하민은 가는 길 내내 신이 나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별이랑 잘 놀았나 보구나. 앞으로 자주 놀러올까?”양시은이 그의 의견을 물었다.“좋아요! 저 이제 형아랑 친구예요. 더 자주 만날래요.”하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잘 통하는 친구가 생겨서 다행이구나. 엄마가 또 약속을 잡아볼게.”양시은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도했다. 별이가 슬픔에서 벗어나는 데 하민이가 도움이 되길 바라며 말이다.집 앞에 도착하자 나도현이 마중 나왔다.“왜 이렇게 늦었어? 오래 기다렸는데.”“기다릴 필요까지 있었어?”양시은은 그와 함께 현관문을 들어섰다.나도현은 담담하게 웃었다.“승리는 같이 축하해야지.”“예선 통과일 뿐인데 아직 기뻐하기엔 일러.”양시은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줄곧 독학 해왔다. 그래도 신인이라는 점은 변함 없었다. 실전 경험이 없는 그녀에게 본선은 더 험난한 길이 될 것이다.“작은 승리도 축하할 가치가 있어.”나도현이 미소를 지었다.하민을 도우미에게 맡기고 그는 양시은을 침실로 안내했다. 촛불이 어둠을 밝히는 공간에서 정성스러운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양시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도현 씨, 정말 고마워.”“앉아봐.”나도현은 신사답게 의자를 당겨줬다.와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스테이크를 조심스럽게 썰었다.“네가 직접 구운 거야?”“역시 요리사 수준은 따라가지 못하겠어. 금방 알아차리네.”“특별한 맛이야. 정성이 더 중요하지.”그녀는 한 입 더 먹고는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이것저것 먹고 왔더니 배가 고프지 않아서 아쉬워.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것도 안 먹고 올 걸 그랬어.”나도현은 레코드 플레이어에
시간을 정한 후, 양시은은 하민을 데리고 온지유의 집으로 갔다.최근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에 온지유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문을 열고 양시은을 맞이하며 그녀는 물 한 잔을 내주었다.“앉아요.”“미안해요,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지유 씨 곁에 있지 못해서.”양시은은 온지유의 모습을 보며 점점 속상해졌다.온지유는 살짝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양시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필요 없어요.”양시은은 흔한 말로 그녀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는 별다른 말 없이 하민과 놀기 시작했다. 하민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별이 형아가 기분이 안 좋다고 해서 제가 놀러 왔어요. 선물도 가져왔어요.”“별이는 위층에 있어.”온지유는 위쪽을 가리키며 한숨을 쉬었다.“별이는 외할아버지랑 많이 친했거든. 그래서...”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양시은은 다 알았다. 그래서 하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하민아, 가서 별이랑 놀래?”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계단을 올라갔다.양시은은 하민이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물었다.“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엉망진창인 일들부터 정리해야죠.”온지유는 이마를 문질렀다. 그녀는 매우 힘들어 보였다.“나머지 일들은 나중에 생각하려고요.”양시은은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묻지 않기로 했다.“알겠어요.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그럼 필요할 때 편하게 부탁할게요.”대답하고 난 온지유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들고 말했다.“근데 어쩌다 대회에 참가했어요?”“아, 봤어요?”양시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온지유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드디어 일을 다시 시작하기로 한 거예요?”“네, 늦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어요.”양시은은 감회가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히 늦지 않았죠. 결혼 후에는 오로지 가정에만 집중할 줄 알았는데, 점점 좋아지는 걸 보니 제가 다 기뻐요.”“이제는 특별히 신경 쓸 게 없어요.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야죠.”
나도현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자신 있으면 고소해요. 저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니까요. 공정하게 법정에서 승부를 보죠.”권 변호사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됐어요, 저도 그냥 구경꾼 입장이라서요. 그리고 그 유명한 나 변호사를 왜 건드리겠어요? 저는 의문을 표한 것이지 주장을 한 건 아니에요.”나도현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건 무대에서 확인하면 되겠네요.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 두고 봐요.”권 변호사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그렇게까지 양시은 씨를 믿어요?”나도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네.”무대에서 MC가 승리한 변호사의 명단을 발표했다. 양시은의 이름 또한 크게 불렸다. 양시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에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 찼다.곧, 양시은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나도현이 몸을 일으켜 비서에게서 꽃을 받아 들며 말했다.“축하해.”“이 꽃 미리 준비한 거지?”양시은은 꽃향기를 맡았다. 그녀는 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물론이지.”나도현은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었다.“내가 이길 거라고 어떻게 확신했어?”“넌 반드시 이길 거야.”나도현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네 실력으로는 끝까지 가는 것도 아무 문제 없어.”나도현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양시은은 마음속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지만 겸손하게 말했다.“최선을 다할게. 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나도현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결과가 어찌 되든 너는 이미 최고야.”양시은은 그의 품에서 안정감을 느꼈다.잠시 그렇게 있다가, 양시은이 먼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한 발짝 물러섰다.“왜 그래?”나도현은 그녀가 멀어진 걸 느끼며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우리 이제 좀 조심하자. 네가 스폰서라는 걸 알고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떡해.”나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너 정말...”그때, 전화가 울렸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양시은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때 나도현이 다가와 옆에 앉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는 격려의 표시였다.양시은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나 때문에 얼마나 투자했어?”“이건 스폰서의 권한이라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어. 시은아, 너만 마음먹으면 이건 정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나도현은 진지하게 말했다. 작은 일에 얽매여 괜한 고민하지 말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는 뜻이었다.양시은은 곧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알았어. 널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내가 아닌 너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해.”나도현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양시은의 마음속에서 감동이 여울처럼 퍼졌다.이튿날 바로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변호사의 토론 대회는 심플했다. 한 문제로 찬성팀과 반대팀이 나뉘어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었다.옳고 그름은 나뉘지 않는다. 주최 측은 일부러 애매한 문제를 선정해서 참가자의 언변을 시험했다.양시은은 운 좋게도 작은 로펌을 상대로 뽑았다. 무대로 올라간 다음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무대에 서 있으니, 자신감으로 넘쳐나던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그녀는 당당한 눈빛으로 무대에 서 있었다. 눈빛 속에는 법조인의 꿈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이 무대는 그녀의 전쟁터자, 그녀의 가치를 다시 증명하는 곳이다.“시작합니다!”MC의 말에 따라 토론이 시작되었다.상대는 경력이 풍부한 것이 분명했다. 논리 정연한 말은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마구 쏟아져나왔다.양시은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입장을 지켰고 실제 사례까지 들며 논리를 완성시켰다. 모든 말이 승리를 향한 발걸음이 되었다.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던 관객과 심사위원은 보잘것없는 줄 알았던 신입 변호사인 그녀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실력은 단순히 법에 대한 이해를 넘어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힘을 발산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갈망과 공정함
“네!”양시은은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그러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가 그녀의 앞에 놓인 명패를 힐끗 보더니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나진 그룹 로펌도 이제 영 시원찮네. 아무나 막 끌어들이는 모양이야.”양시은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자신이 이 업계에서 출신이나 지위가 마땅히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경멸에 기죽을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대형 로펌 변호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누구나 출발점이 있는 거잖아요. 중요한 건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느냐가 아니겠어요?”그 변호사는 그녀의 침착한 태도와 단호한 눈빛에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분수를 모르는 신참 변호사를 비웃는 표정이었다.“어찌 됐든 올해 상은 다른 로펌에 가겠네요.”“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다른 몇몇 변호사들이 다가와 말했다.“뭐요?”대형 로펌 변호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오랜만이네요, 권변.”무리 중 리더 격인 변호사가 손을 내밀어 자연스럽게 악수했다.권 변호사는 그들을 슥 훑어보더니 상황을 이해한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나진은 투자자로서 스폰서 자격으로 두 팀을 내보낼 수 있는 거였네요. 수상 확률을 높이려고 한 일인 것 같은데 왜 이름도 없는 신인 변호사한테 기회를 줬어요. 이렇게 큰 무대를 연습장으로 삼다니, 나변도 참 통이 커요.”“과찬이십니다. 근데 뭐가 됐든 나 변호사님의 계획이 아닐까요.”리더 변호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저는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나진이 스폰서가 돼서 은변도 좋았죠? 근데 이 좋은 기회를 신인한테 넘기다니...”권 변호사는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한번 크게 웃어넘긴 뒤 손을 내저었다.“그냥 헛소리였어요. 못 들은 걸로 해요.”은 변호사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나 변호사님도 다 생각이 있으십니다. 부러우면 따라 해보시죠.”권 변호사는 더 말해봤자 손해만 볼 것 같았는지 형식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