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월요일, 조사팀이 HT그룹에 투입되어 일주일간의 조사 활동을 시작했다.전 직원들이 대기 상태에 들어갔고, 모두 팽팽한 긴장 속에서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일주일 후, 조사팀이 증거 수집을 완료하고 나서야 초대받은 나운석이 두 시간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운석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진 것은 심각하고 억압된 분위기였다. 그를 맞이한 사람은 처음 보는 직원이었다. “한 대표님이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운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때 성공을 자랑하던 이 고층 빌딩은 이제 위태롭게 보였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표실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 한서준의 목소리는 쉰 듯하고 피곤했다.서준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턱에는 푸른 수염이 자랐으며, 눈은 깊게 꺼져 얼굴빛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 분명 지난 일주일 동안 비상한 조사를 견뎌낸 흔적이었다.운석은 서준 앞에 서서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버텨낸 걸 보니, HT그룹에 큰 문제는 없나 보군. 네가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 거겠지.”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예전처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지 않았고, 운석의 말투는 진지하고 엄숙해졌다.서준은 운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난 네가 우리 회사가 무너지는 걸 바랐을 거라고 예상했어.”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겠어?”“하선유한테 문제가 생기고, HL산업은행이 위기에 빠졌을 때, 네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나는 도와주지 않았잖아.” 서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무력한 표정을 지었다. “난 네가 그 후에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겨우 수습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래서 나를 원망했을 거야. 오랜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널 외면한 거니까.”“잘 아네.” 운석은 비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방 안을 한 바퀴 돌며 말했다. “2년 전만 해도 나는 네 사무실에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네가 최하연의 전남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너를 형제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2년이라는 시간이
“말도 안 돼.” 운석은 다시 한번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탈세와 조세 회피 금액이 몇천 억대에 달했다. “최하연은 이런 일을 할 이유가 없어! 최하연 집안은 돈이 부족하지 않고, 본인도 역시 마찬가지잖아.”“운석아, 아직도 모르겠어? 중요한 건 돈이 아니야, 감정이야!” 서준이 깊은 목소리가 말했다.그는 여전히 무력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하연이 우리 집안에서 겪은 일들을 생각해 봐. 최하연은 나를 미워하고, 우리 집안을 미워해! 이건 최하연이 미리 계획해 둔 덫일 가능성이 커.”운석은 믿기 어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너도 봤잖아. 이혼 후 최하연이 사업에서 보여준 능력을. 이런 일을 하는 게 이 여자에게는 쉬운 일이었을 거야.”운석은 여전히 의심스러워했다. 오래된 친구인 서준과 그가 알던 최하연 중 누구를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이 금액을 채울 수는 있어?”“가능해.” 서준은 담배 한 갑을 꺼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이 돈만 메우면 HT그룹은 문제없어. 최하연도 무사할 거고. 하지만 HT그룹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야.”“뭐?”“놀이공원 사업 말이야.”운석도 이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건 이미 해결된 줄 알았는데? HT그룹은 손해를 보고, 놀이공원은 운영을 중단했잖아.”“원래는 문제가 없었지. 그런데 연초에 한명창이 갑자기 B시에 나타나서, 30여 개의 기업을 조사했어. 죄목을 덧씌우려는 듯 오래된 사건을 다시 들춰내서 본보기를 세우려 하고 있어.”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B시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건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운석은 서준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 듣긴 했지만, HT그룹도 연루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부상혁이야.”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운석은 그 충격에 손가락을 꽉 쥐었다. “그 사람?”“그래, 부상혁이 최하연을 위해서 날 완전히 파멸시키려 하고 있어.”이 사건이 조사되면 관련된
온 사무실은 만보롱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운석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게실 문이 열렸다. 그곳에 서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이방규였다. 그는 두 손을 교차하며 물었다. “그 사람, 믿을 수 있어요?”“나씨 가문 상회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투자은행의 부사장 중 하나예요. 그 정도면 이 대표나 부상혁의 분야에서 충분하죠.”서준은 술장 앞으로 다가가 술 한 병과 두 개의 잔을 꺼냈다.“그 사람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한 대표도 도와주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한 대표를 도와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죠?”진한 붉은 술이 잔을 따라 흘러내렸다. 서준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내 친구를 모를 리 없죠. 나운석은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HT그룹을 나서던 운석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아까 거울 앞에서 서준이 운석에게 다가와 USB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찾던 걸 구해왔어. DS그룹 송년회 때 계단에서 사라진 CCTV 기록이야. 이걸로 하선유는 이방규를 고소할 수 있을 거야.”가장 중요한 증거가 서준의 손에 있었다니.“이걸 어떻게 구했지?”“잊었어? 서영이가 이방규와 사귀고 있잖아. 서영이가 나에게 증거를 넘긴 거였어.” ...“내가 없던 일주일 동안, 밖은 어땠죠?”이 말을 듣자 이방규는 짜증을 참지 못하며 대답했다. “부상혁이 계속 움직이고 있어요. 내가 사람을 보내서 부상혁을 도청했는데, 어떤 귀찮은 놈이 알아채 버렸어요.”“누가 알아챘죠?” 서준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무심하게 물었다.이방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대답했다. “소울 칵테일의 주인 말이에요.”서준의 모든 동작이 순간 멈췄다. “손이현이요?”“한 대표도 그 사람을 알아요?”서준의 전신이 경계로 굳어졌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손이현은 절대로 참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된 것도 손이현과 관련 있을지도 모르죠.”“그 사람이 누구길래 한 대표까지 그렇게 경계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손님, 뭐 좀 드시겠습니까?”이현은 아무렇게나 커피 두 잔을 선택한 후, 직원에게 떠나라는 신호를 보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한 색상의 숄을 두른 우아한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그녀는 오랜 시간 관리를 잘한 덕분에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았고, 친절하면서도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그녀는 곧바로 하모란의 앞에 앉았다.“성과가 있었나?”“이수애는 굉장히 신중해요. 며칠 만에 마음을 털어놓진 않겠지만 저는 이수애에게 꽤 많은 돈을 건넸고, 조금씩 절 신뢰하고 있어요. 내가 일부러 손해 볼 수밖에 없는 사업에 투자하라고 부추겼는데, 이수애는 그걸로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고요.”하모란의 과장된 설명에 앉아 있던 여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네 목적은 아니잖아.”“아이고, 알아요. 진숙 언니, 언니가 B시에 돌아오는 건 드문 일인데, 날 도와달라고 한 거니 당연히 최선을 다하고 있죠. 다만 시간이 좀 걸릴 뿐이에요.” 하모란은 조진숙을 매우 신뢰하고 있었다. “언니가 왜 직접 나서지 않았는지 이제 알겠어. 이수애와 며칠 동안 지내다 보니 머리가 너무 아프더라고요.”조진숙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수애의 일정 좀 확인해 볼까?”하모란은 종이를 꺼내며 말하는 동시에 적기 시작했고, 이현도 그녀의 말을 따라 종이에 메모했다.하모란이 말을 마치자, 조진숙은 잠시 말이 없었고, 단지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결론이 나왔네.”“결론? 무슨 결론이요?” 하모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고마워, 난 먼저 가볼게.” 조진숙은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나며 말하면서 서둘러 카페를 나섰다.부하가 첫 모금을 마시자마자 쓴맛에 얼굴을 찌푸리며 불평하려던 찰나, 이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커피, 비싸게 주고 샀는데 안 드시게요?”이현은 황급히 밖으로 나갔지만, 조진숙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좌우를 살피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찾고 있었나요?”이현은 순간 굳
최근 DS그룹에서는 새로운 분기 업무가 시작되었고, 하연은 대략적인 방향을 확정한 후 신재생 에너지 사업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이사회에서는 투표율이 높지 않았다. 대부분은 관망 중이었다.“신재생 에너지 분야는 초기에 진입한 사람들이 이미 대부분의 이익을 가져갔습니다. 이제 들어가 봤자 이득을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인력과 자원을 낭비할 겁니다.”하연은 여성용 정장을 입고 주석 자리에 앉아 최근의 산업 정책을 인내심 있게 분석했다. “국내 환경이 개선됨에 따라, 앞으로 신재생 에너지가 주류를 차지할 겁니다. 우리가 이 분야를 주력으로 삼는 건 아니지만, 지금 들어가도 늦지 않을 겁니다.”한 이사가 반박했다. “신재생 에너지가 물론 매력적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미 인공지능 로봇, 인터넷, 그리고 문화 콘텐츠라는 세 개의 신흥 시장을 잡고 있습니다.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겁니까?”하연이 반문했다. “그 세 개의 시장은 누가 결정한 거였죠?”이사회의 이사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최 사장님이죠.”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DS그룹은 한 사람의 독단으로 운영되는 회사가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을 설득할 수 있는 데이터와 계획을 제시하겠습니다. 지금은 그저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일 뿐입니다. 구체적인 실행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하연은 이사들의 불안을 이해했다. 이 사업을 위해 며칠간 고군분투한 탓에 그녀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상혁은 그녀가 제대로 식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특별히 요리사를 시켜 음식을 준비해 직접 가져왔다....“신재생 에너지 중에서도 태양광 발전은 한때 HT그룹도 손을 댔었어. 하지만 비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실패했지. 하지만 한서준이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몰라.”상혁은 하연이 무심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슬며시 의견을 꺼냈다.“태양광 발전이라... 알죠, 그때 한서준이 나한테 사과할 때, 그 얘기를 꺼냈었어요
하연은 손을 멈추고 상혁의 변함없는 표정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만 계속 말하고 있잖아요, 오빠는 왜 일에 대해서 한 번도 나한테 말하지 않아요?”상혁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업무 기밀을 너한테 어떻게 말하겠어?”그건 하연이 예전에 했던 말이었다. 하연은 화가 나서 말했다. “누가 오빠 회사의 기밀을 알고 싶대요? 그냥 간단하게 말해봐요. 무슨 일 없었어요?”상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나 있긴 한데, 좀 이상한 일이야. 얘기해 줄까?” 하연이 호기심에 눈을 반짝였다. 상혁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전에 내 메일로 익명의 이메일이 하나 왔어. WA그룹의 사업에 결함이 있다는 내용이었지. 그리고 서태진이 비밀리에 사설 금융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더군. 경고하는 듯한 느낌이었어.”상혁이 이 말을 하는 동안 하연의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었다. 겉으로는 침착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긴장하고 있었다. “누가 그렇게 친절하게 오빠한테 알려줬을까요? IP 주소는 추적했어요?”상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암호화돼서 풀 수 없었어. 황 비서한테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라고 했는데, 서태진이 실제로 그런 일을 저지른 게 맞더군.”하연은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혁의 팀이 아무리 뛰어나도 최하경의 암호화는 아무나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발신자가 정말로 오빠를 도우려는 마음에서 보낸 것 같아요. 미리 알게 된 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상혁은 생각에 잠긴 듯 몸을 뒤로 젖히며 하연을 응시했다. “누가 보냈을까? 그리고, 왜 익명으로 보냈을까?”하연은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가 말했다. “찾을 수도 없는데, 그냥 좋은 사람이 선행을 베푼 거라고 생각하면 되죠.”상혁이 이메일을 받았고 이미 조치를 취한 걸 알게 되니, 하연은 완전히 안심했다. 이제 부남준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든 결국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좋은 사람이 선행을 베푼
하연은 조진숙의 과거를 몰랐기에, 상혁을 끌어당기며 속닥거렸다. “오빠, 이모랑 오빠의 선생님이 깊은 인연이 있으셨던 거예요?”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있었고, 하연의 머리카락 끝이 상혁의 단단하고 새하얀 팔 위로 떨어져 있었다.상혁의 앞에는 여전히 켜져 있는 노트북이 있었고, 그는 주식 시장의 그래프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대학교 시절에 만난 교수님이야. 원래는 내가 듣는 과목을 담당하지 않으셨는데, 내 신분을 알고 나서 직접 맡겠다고 나서셨지.”“이모를 위해서요?”“응.” 상혁은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 “우리 엄마는 원래 자유롭고 대담한 성격이야. 젊었을 때 집안을 떠나 해외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때 우연히 교수님과 알게 됐어. 하지만 교수님이 고백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친구로 지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난 거야.” 조진숙은 성격상 친구 관계에서 연애로 발전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하연이 놀라며 물었다. “왜 고백을 못 했을까요?”“교수님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큰 꿈을 품고 있었지. 결국 국내에서 경력을 쌓아야 했으니, 우리 엄마의 배경과는 맞지 않았어.” 상혁은 차분히 설명하며 팔을 내밀어 하연이 기대도록 했다. “사실 조씨 가문은 부씨 가문처럼 그렇게 보수적이지 않았어. 계층을 넘어선 사랑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지. 문제는 우리 엄마가 교수님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거야.”“엄마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빠와 마주쳤고,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어. 아빠는 매력적이고 유머러스했지. 진솔하고 솔직했기 때문에, 엄마에게 열렬하게 구애했고, 석 달도 안 돼 두 분은 결혼을 결정했어.”조진숙과 부동건은 정태산과의 관계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러운 발전이었다.“그때의 우리 부모님은 성격도 잘 맞았고, 집안 배경도 비슷했으니 두 사람의 관계는 두 가문 모두에게 완벽한 스토리였지. 전국적으로도 큰 화제가 됐었어.”상혁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기억했다. 비록 나중에 이혼했지만, 상혁은 자신이
다음 날.하연이 DS그룹에 도착하자마자, 정태훈이 다가와 보고했다. “최신 소식입니다. 서태진의 사설 금융 조직이 강제 시정 조치에 들어갔고, 폭력적인 추심 문제도 확인했습니다.”상혁이 그 익명의 이메일을 제대로 보고 행동을 취한 것임이 분명했다.이제 부남준도 더 이상 발을 들일 여지가 없어 보였다.하연은 안도했지만, 동시에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이 문제 때문이라면, 서태진이 그렇게 큰 손해를 본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그 생각을 더 깊이 할 틈도 없이 부하가 문을 두드리며 업무 보고를 하러 왔다. 하연은 잡념을 접고 말했다. “들어와요.”한편, FL 그룹에서는...황연지가 서태진과 관련된 소식을 들고 상혁의 사무실에 들어갔다.“알겠어.” 상혁은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연지의 시선이 책상 위의 아직 식지 않은 차에 머물렀다. “손님이 계셨던 건가요?”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할 말 있어?”연지는 자신이 실례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말했다. “오늘 대표님의 어머님께서 소울 칵테일에 가셔서 정태산과 만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주변에 경호를 배치해 사진이 찍히지 않도록 조치했습니다.”상혁은 그제야 고개를 들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 “왜 하필 소울 칵테일이지?”최근에 그곳을 자주 갔던 탓에, 연지는 한동안 그 이유를 생각하지 못했으나, 이내 깨달았다. ‘맞아, 왜 굳이 소울 칵테일일까?’“아마도 지난번에 대표님께서 거기서 정태산 교수님과 만났기 때문에, 신뢰감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상혁도 그 외에는 딱히 이유를 찾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요즘 어떻게 지내지?”“여전히 송혜선과 함께 계십니다. 만약 부 회장님이 이 일을 알게 되신다면...”연지가 말을 끝내기 전에, 상혁이 차분하게 말했다. “이혼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참견한단 말이야?”“저는 지금 DL그룹 내에서의 대표님의 입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