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연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그녀는 하얀색 잠옷을 입고, 화장을 하지 않은 채로도 아름답고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원에서 식물에 물 주고 있었는데, 물방울이 그녀의 팔에 떨어져 햇빛에 반짝였다.상혁은 이 장면을 바라보며, 마음속의 불안감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오빠 돌아왔네요!” 하연은 상혁이 차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물뿌리개를 던지고 달려갔다. “왜 나한테 말도 없이 나갔어요?”상혁은 그녀를 자연스럽게 안으며 말했다. “내가 일찍 일어나서, 너의 잠을 방해할까 봐 그랬지.”하연은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턱을 가볍게 건드리며 속삭였다. “오늘 밤에는 오빠랑 같이 잘 거예요.” 그녀의 솔직함에 상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그는 하연을 안고 실내로 들어가 문을 닫아 찬 바람을 막으며 말했다. “뭔가 보여줄 게 있어.”“뭔데요?” 하연은 상혁이 건네준 서류를 받았다. “이게 뭐예요?”서류를 열어보니, 하연에게 약을 탄 혐의자의 모든 상세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며 놀라워했다. “이걸...?”“경찰이 조사할 권한이 없어서 내가 대신 조사했어.”상혁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일이 원하는 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하연의 시선은 서류의 한 중간 부분에 머물렀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청소부가 한씨 고택에서 고용인으로 일한 적이 있다고요?”“응, 의도적으로 감추었기 때문에 이력서에는 적혀 있지 않았어.”“그걸 어떻게 알아냈어요?”“황 비서가 자신만의 능력이 있었지.”황연지는 오랜 세월 동안 상혁의 곁에서 일하며 작은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찾아내는 데 능숙했다. 그녀에게 이런 일은 어렵지 않았다.하연은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 “경찰이 제공한 이력서와 거의 비슷하지만, 한씨 가문과 관련 부분만 빠져
“언니, 전 이방규를 일부러 해친 게 아니에요.” 선유는 울먹이며 말했다. 하연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그녀가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음을 의미했다.“알고 있어, 네가 그럴 리 없지. 이방규가 나쁜 마음을 품은 거야.”하연은 서둘러 선유를 달래며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송년회 당일, 이방규는 나운석이 선유의 곁에 없을 때, 선유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가 불순한 의도를 드러냈다. 선유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근처에 있던 술병을 집어 이방규의 머리를 내리쳤다.그로 인해 이방규는 심각한 뇌진탕을 겪었고, 그는 그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선유를 고의적인 상해 혐의로 고소했다.사건이 발생한 장소에는 CCTV도 없었고, 두 집안의 대립이 얽혀 있어서 경찰도 사건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선유는 하연의 품에서 한참을 울고 나서야 하연이 물었다. “너희 아버지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셔?”“...”선유는 더욱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옆에 있던 운석이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 은행장님의 말씀으로는 사건이 크게 번지지 않았으니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셨어요.”하연은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딸을 끔찍이 아끼는 하민철이 이토록 이익을 따지는 사람이었다니 의외였다.“하 은행장님은 이방규의 집안을 무서워하셔서 그렇게 결정하셨어요!”운석은 분노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은행의 내부 위기를 해결하는 데 딸의 명예를 희생하려는 게 하 은행장님의 해결책이라니, 정말 누구한테 말해도 절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예요!”“무슨 위기?” 이 질문은 상혁이 던졌다.운석은 잠시 선유를 곁눈질하며 말문을 닫았고, 결국 밖으로 나갔다. 상혁도 그를 따라갔다.병실에는 하연과 선유만 남았다.선유의 말을 통해 하연은 그날 밤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언니, 한서영도 아직 있는데, 이방규가 감히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에요.”“한서영은 이방규에게 애초부터 여자
“나운석 씨는 반쯤 정계에 발을 들였지만, 본인과 친한 친구들은 비즈니스계에서 활동 중이잖아요. 안태현이든 한서준이든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어요?” 상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HL산업은행의 위기만 해결하면, 하민철도 여기저기 뛰어다닐 필요가 없고, 하선유 씨의 상처도 자연스럽게 치유될 시간이 생길 거예요.”운석은 상혁의 말을 듣고 두 손을 난간에 올린 채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 대표님, 자본시장에 대해 잘 알고 계세요?”운석의 말투는 뭔가 묘했고, 상혁은 운석의 쪽을 바라보았다.“안태현은 안씨 가문의 보호 아래 자라서 큰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없어요. 안태현이 도움을 줄 거란 기대는 현실적이지 않아요.” 운석은 안태현과 같은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은,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HT그룹의 인맥도 적지 않지 않잖아요.”상혁이 말을 던지자 운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건이 발생한 후, 그 역시 한서준을 찾아갔지만, 구동후로부터 한서준 대표가 요즘 손님을 만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거절당했다.운석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차를 몰아 서준의 집으로 갔다. 그때 서준의 집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그는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서준, 넌 날 친형제로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그러나 서준이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것은 서준이 서영과 실랑이를 벌이는 화면이었다. 서준은 놀라며 말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운석은 서영을 보자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이방규가 선유를 강간하려 했어. 너희 둘이 한패야, 그 나쁜 놈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넌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사실을 말해!”서영은 비명을 지르며 운석을 미친 듯이 때리며 외쳤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이거 놔!”운석은 그녀에게 이리저리 맞고 긁혔지만, 여전히 손을 놓지 않으며 큰소리로 물었다. “너희는 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야!”“하선유가 이방규를 다치게 했
“그래. 어렵지 않지만, 리스크가 있어. 우리 회사의 현재 상황으론 작은 소란 하나도 견디지 못할 거야.” 서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수년간 알고 지내온 친한 친구를 마주한 채, 운석은 다시 한번 부탁했다.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라면, 이번 한 번쯤은 도와주면 안 될까?”“운석아, 네가 예전에 최하연을 쫓을 때, 아무리 미쳐도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어.”그 말은 운석의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 냈다.회상에서 벗어난 운석은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말했다. “저는 상관없어요. 선유를 꼭 구할 거예요. 차라리 제가 지금의 자리에서 내려오면 돼요.”말을 마치자마자, 운석은 곧바로 일어나 깔끔하게 병실로 걸어갔다.“나운석 씨.” 상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운석을 불렀다.“이방규는 이씨 가문의 둘째로, 지난 몇 년간 큰형과 가문 계승권을 놓고 경쟁해 왔어요. 이방규가 스스로 B시에 온 걸 보면, 아마 이씨 가문은 아직 모를 거예요.”상혁은 말하며 운석의 앞에 다가섰다. “이방규의 큰형과 저는 조금의 인연이 있어요. 나운석 씨가 불편하지 않다면, 제 이름을 대면 이방규의 큰형이 나운석 씨를 만나줄 거예요.”이방규는 한때 이씨 가문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상혁이 주식시장에서 이방규를 공격한 후 추락했다. 그 일로 인해 이방규의 큰형은 겉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은밀히 상혁에게 예의를 다했다.운석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상혁이 도움을 주려는 의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부 대표님...”“여자를 괴롭히는 건 군자의 행동이 아니죠. 저도 하연이를 위해 도와주는 거니까, 나운석 씨도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상혁은 하연 회사의 송년회에서 이방규와 만난 그 일까지, 이번에 같이 정리하겠다는 뜻이었다.운석은 잠시 얼떨떨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선유는 지쳐 병상에서 잠에 들었다.하연은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오다가 상혁의 품에 부딪혔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빠, 담배 피웠어요
“하연아?” 강영숙은 지팡이에 의지해 방에서 나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너, 날 만나러 온 거니?”하연에게 한씨 가문은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두는 사람은 강영숙뿐이었다.“할머니, 곧 새해라서 찾아왔어요. 새해 선물도 가져왔고요.” 하연은 짐을 내려놓고 강영숙 곁으로 다가가 부축하며 물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할미는 지루해 죽겠구나. 이렇게 기쁜 일은 오랜만이야.”강영숙은 하연의 손을 꼭 잡으며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서준이처럼 바쁘니? 집에 돌아올 시간도 없고 말이야.”하연이 강영숙을 꼭 안으며 달래듯 말했다. “이제 왔잖아요. 한서준 씨도 바쁜 일이 끝나면 분명 돌아올 거예요.”강영숙은 더 이상 하연이 손주며느리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하연 아가씨, 점심을 여기서 드실 건가요?”가정부가 물었다.“네, 먹을래요. 이모님께서 해주신 약선 요리 너무 그리워요.”하연은 달콤한 말로 강영숙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바삐 움직였다. 선물들을 정리하면서도 강영숙과 장난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아, 강영숙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오래된 고택은 예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우연히 탁자 위에 놓인 흑백 사진을 보게 되었다. 이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사진이었고, 그때는 한서준인 줄 알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저 매력이 넘치는 남자.’하연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흑백 사진이라면, 한명준은 혹시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닐까?’강영숙은 하연이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하연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하연은 묻고 싶었지만,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몰랐다. 강영숙도 하연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모님께서 계속 바쁘셔서 많이 힘드실 것 같아서요.” 결국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하연은 가정부를 도와 상을 차리기
어두운 방 안, 강영숙은 역광을 받으며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죄를 지었어... 참으로 큰 죄를 지었지...”하연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속상한 이야기를 건드린 것 같아 정말 죄송해요.”강영숙은 다시 한숨을 쉬며 손을 휘저었다. “그저 우리 집안에서 일했던 사람일 뿐이야, 다 지나간 일이지. 그만두자꾸나.”하연이 강영숙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사람이 할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나요?”주름 가득한 강영숙의 눈가가 아래로 처지며 고뇌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그렇게 봐야겠지.”하연은 무엇을 캐내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강영숙을 걱정하고 있었고,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 강영숙 때문에 마음 아팠다.“할머니, 이 집안에서 다른 사람들은 저를 좋게 보지 않았지만, 할머니만큼은 저를 아껴주셨다는 걸 잘 알아요. 무슨 일이든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하연의 따뜻한 말과 친절한 태도에 강영숙은 하연을 더욱 좋아했다. 강영숙은 하연의 얼굴을 만지며 말하였다. “참 안타깝구나. 우리 서준이가 복이 없어서 이런 손자며느리를 두지 못하다니.”“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우리는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만약 한서준 씨가 나쁜 짓을 하면 제가 할머니를 모실게요.”하연의 말에 강영숙은 크게 웃으며 기분이 좋아졌지만, 잠시 후 다시 한숨을 쉬며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근심을 내비쳤다.“다 지난 일들이야... 할미는 후회만 남았지...”강영숙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하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혹시 그 일이 한명준 씨와 관련이 있었나요?”‘한명준’이라니 이름이 나오자 강영숙은 매우 놀라며 물었다. “네가 어떻게 그걸...”“한명준 씨를 어떻게 알았냐고요?” 하연은 담담하게 강영숙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분은 한서준 씨의 형이고, 할머니의
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런 상황이라면, 한명준 씨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돌아가신 것이나 다름없어. 그 불쌍한 어머니는 심지어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지 못했어.’ ‘이수애는 정말로 죄가 깊었네!’“왜 한서준 씨의 어머니를 법의 심판에 넘기지 않았나요?”“어떻게 넘기겠니? 모든 절차가 합법적이었거든. 임신 중에 먹은 보양식도 고의적인 살인으로 보지 않았지.”하연이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보양식을 준 사람이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그 아줌마였군요!”‘참 교묘하네. 모든 것을 흔적 없이 만들어버렸고...’강영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계집애의 이름이 바로 왕진이야.”‘연말 행사에서 우리 걸그룹 애들을 해친 그 청소부가 알고 보니 바로 이수애의 사람이었어!’‘그래서 한서영의 지시를 받았던 거야.’‘그러니까 할머니께서 그렇게 화를 낸 것도 이유가 있었던 거겠네.’“그렇다면, 할머니께서는 왜 나중에 왜 이수애 여사를 받아들인 건가요?” 하연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 강영숙은 하연의 질문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왜 이수애를 받아들였냐고 묻는 거구나?”“네.”“이수애가 임신했다고 했거든.”아이는 어머니의 지위에 따라 신분을 얻는다. 한씨 가문의 명성을 고려하여, 내연녀가 본처를 죽게 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강영숙은 모든 것을 덮어야만 했다.“하지만 이수애가 집에 들어온 후에야 우리는 알게 되었지. 이수애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2년이 지나서야 이수애가 진짜로 서준을 임신했지. 그 뒤로 서영을 낳았고.”모든 것은 다 이수애가 계획한 일련의 사건이었다. 이수애는 철저히 한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자리를 굳히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이수애는 영악했어. 그 후로는 왕진을 해고하고, 더 이상 고용인을 두지 않았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은 일을 꾸밀까 봐 두려워했거든.”하연의 마음은 무거웠다. 이런 압박 속에서 한명준이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그녀는
서준의 분노는 더 커졌다. “가식 떨지 마요. 부 대표가 탐내는 건 이미 본인 옆에 있잖아요!” 서준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하연이었다. “한서준! 입조심해. 난 사람이야, 물건이 아니라고! 더군다나 호가의 물건도 아니야!” 하연은 즉각 반박하며 상혁의 손을 잡고 차에 타려고 했다. 그러나 서준은 차 문 앞에 가로막고 섰다. “비켜!”서준의 시선은 하연과 상혁 사이를 오갔고, 상혁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의 손을 잡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서준은 길을 비켜주었고, 빠르게 몸을 돌려 고택으로 향했다. 30분 전, 강영숙이 서준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집으로 오라고 했기 때문에 서준은 서둘러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하연을 마주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으니 틀림없이 뭔가 일이 생긴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들어서자마자 강영숙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서준에게 따지듯 물었다. “서영이가 어떻게 돌아온 거냐?!” “하연이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왕진이 다시 나타난 건 누구의 명령이지? 서영이야? 아니면 이수애야? 그 둘은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서준은 순간 혼란에 빠졌지만, 자신이 놓치지 않은 단어가 있었다. “왕진이요?” ‘한명준의 어머니를 죽게 한 그 가정부, 그리고 이수애와 한통속이었던 사람. 그 아줌마가 다시 나타난 것인가?’ “시치미 떼지 마라. 명준이가 경찰이 된 후 실종된 것도 난 다 알고 있어. 네가 얼마나 관여했는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말아라.” 강영숙은 바로 핵심을 찔렀고, 말투도 거침이 없었다. 서준조차 강영숙의 기세에 눌려 잠시 움찔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 정말로 몰랐어요.” “서영이가 돌아왔으니 이수애도 찾아와라. 내가 하연에게 해코지하는 걸 절대 두고 보지 않을 거다. 내가 늙었어도 아직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까!” 강영숙은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서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