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석 씨는 반쯤 정계에 발을 들였지만, 본인과 친한 친구들은 비즈니스계에서 활동 중이잖아요. 안태현이든 한서준이든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어요?” 상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HL산업은행의 위기만 해결하면, 하민철도 여기저기 뛰어다닐 필요가 없고, 하선유 씨의 상처도 자연스럽게 치유될 시간이 생길 거예요.”운석은 상혁의 말을 듣고 두 손을 난간에 올린 채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 대표님, 자본시장에 대해 잘 알고 계세요?”운석의 말투는 뭔가 묘했고, 상혁은 운석의 쪽을 바라보았다.“안태현은 안씨 가문의 보호 아래 자라서 큰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없어요. 안태현이 도움을 줄 거란 기대는 현실적이지 않아요.” 운석은 안태현과 같은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은,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HT그룹의 인맥도 적지 않지 않잖아요.”상혁이 말을 던지자 운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건이 발생한 후, 그 역시 한서준을 찾아갔지만, 구동후로부터 한서준 대표가 요즘 손님을 만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거절당했다.운석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차를 몰아 서준의 집으로 갔다. 그때 서준의 집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그는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서준, 넌 날 친형제로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그러나 서준이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것은 서준이 서영과 실랑이를 벌이는 화면이었다. 서준은 놀라며 말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운석은 서영을 보자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이방규가 선유를 강간하려 했어. 너희 둘이 한패야, 그 나쁜 놈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넌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사실을 말해!”서영은 비명을 지르며 운석을 미친 듯이 때리며 외쳤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이거 놔!”운석은 그녀에게 이리저리 맞고 긁혔지만, 여전히 손을 놓지 않으며 큰소리로 물었다. “너희는 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야!”“하선유가 이방규를 다치게 했
“그래. 어렵지 않지만, 리스크가 있어. 우리 회사의 현재 상황으론 작은 소란 하나도 견디지 못할 거야.” 서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수년간 알고 지내온 친한 친구를 마주한 채, 운석은 다시 한번 부탁했다.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라면, 이번 한 번쯤은 도와주면 안 될까?”“운석아, 네가 예전에 최하연을 쫓을 때, 아무리 미쳐도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어.”그 말은 운석의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 냈다.회상에서 벗어난 운석은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말했다. “저는 상관없어요. 선유를 꼭 구할 거예요. 차라리 제가 지금의 자리에서 내려오면 돼요.”말을 마치자마자, 운석은 곧바로 일어나 깔끔하게 병실로 걸어갔다.“나운석 씨.” 상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운석을 불렀다.“이방규는 이씨 가문의 둘째로, 지난 몇 년간 큰형과 가문 계승권을 놓고 경쟁해 왔어요. 이방규가 스스로 B시에 온 걸 보면, 아마 이씨 가문은 아직 모를 거예요.”상혁은 말하며 운석의 앞에 다가섰다. “이방규의 큰형과 저는 조금의 인연이 있어요. 나운석 씨가 불편하지 않다면, 제 이름을 대면 이방규의 큰형이 나운석 씨를 만나줄 거예요.”이방규는 한때 이씨 가문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상혁이 주식시장에서 이방규를 공격한 후 추락했다. 그 일로 인해 이방규의 큰형은 겉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은밀히 상혁에게 예의를 다했다.운석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상혁이 도움을 주려는 의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부 대표님...”“여자를 괴롭히는 건 군자의 행동이 아니죠. 저도 하연이를 위해 도와주는 거니까, 나운석 씨도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상혁은 하연 회사의 송년회에서 이방규와 만난 그 일까지, 이번에 같이 정리하겠다는 뜻이었다.운석은 잠시 얼떨떨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선유는 지쳐 병상에서 잠에 들었다.하연은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오다가 상혁의 품에 부딪혔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빠, 담배 피웠어요
“하연아?” 강영숙은 지팡이에 의지해 방에서 나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너, 날 만나러 온 거니?”하연에게 한씨 가문은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두는 사람은 강영숙뿐이었다.“할머니, 곧 새해라서 찾아왔어요. 새해 선물도 가져왔고요.” 하연은 짐을 내려놓고 강영숙 곁으로 다가가 부축하며 물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할미는 지루해 죽겠구나. 이렇게 기쁜 일은 오랜만이야.”강영숙은 하연의 손을 꼭 잡으며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서준이처럼 바쁘니? 집에 돌아올 시간도 없고 말이야.”하연이 강영숙을 꼭 안으며 달래듯 말했다. “이제 왔잖아요. 한서준 씨도 바쁜 일이 끝나면 분명 돌아올 거예요.”강영숙은 더 이상 하연이 손주며느리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하연 아가씨, 점심을 여기서 드실 건가요?”가정부가 물었다.“네, 먹을래요. 이모님께서 해주신 약선 요리 너무 그리워요.”하연은 달콤한 말로 강영숙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바삐 움직였다. 선물들을 정리하면서도 강영숙과 장난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아, 강영숙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오래된 고택은 예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우연히 탁자 위에 놓인 흑백 사진을 보게 되었다. 이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사진이었고, 그때는 한서준인 줄 알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저 매력이 넘치는 남자.’하연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흑백 사진이라면, 한명준은 혹시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닐까?’강영숙은 하연이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하연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하연은 묻고 싶었지만,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몰랐다. 강영숙도 하연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모님께서 계속 바쁘셔서 많이 힘드실 것 같아서요.” 결국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하연은 가정부를 도와 상을 차리기
어두운 방 안, 강영숙은 역광을 받으며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죄를 지었어... 참으로 큰 죄를 지었지...”하연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속상한 이야기를 건드린 것 같아 정말 죄송해요.”강영숙은 다시 한숨을 쉬며 손을 휘저었다. “그저 우리 집안에서 일했던 사람일 뿐이야, 다 지나간 일이지. 그만두자꾸나.”하연이 강영숙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사람이 할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나요?”주름 가득한 강영숙의 눈가가 아래로 처지며 고뇌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그렇게 봐야겠지.”하연은 무엇을 캐내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강영숙을 걱정하고 있었고,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 강영숙 때문에 마음 아팠다.“할머니, 이 집안에서 다른 사람들은 저를 좋게 보지 않았지만, 할머니만큼은 저를 아껴주셨다는 걸 잘 알아요. 무슨 일이든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하연의 따뜻한 말과 친절한 태도에 강영숙은 하연을 더욱 좋아했다. 강영숙은 하연의 얼굴을 만지며 말하였다. “참 안타깝구나. 우리 서준이가 복이 없어서 이런 손자며느리를 두지 못하다니.”“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우리는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만약 한서준 씨가 나쁜 짓을 하면 제가 할머니를 모실게요.”하연의 말에 강영숙은 크게 웃으며 기분이 좋아졌지만, 잠시 후 다시 한숨을 쉬며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근심을 내비쳤다.“다 지난 일들이야... 할미는 후회만 남았지...”강영숙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하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혹시 그 일이 한명준 씨와 관련이 있었나요?”‘한명준’이라니 이름이 나오자 강영숙은 매우 놀라며 물었다. “네가 어떻게 그걸...”“한명준 씨를 어떻게 알았냐고요?” 하연은 담담하게 강영숙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분은 한서준 씨의 형이고, 할머니의
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런 상황이라면, 한명준 씨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돌아가신 것이나 다름없어. 그 불쌍한 어머니는 심지어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지 못했어.’ ‘이수애는 정말로 죄가 깊었네!’“왜 한서준 씨의 어머니를 법의 심판에 넘기지 않았나요?”“어떻게 넘기겠니? 모든 절차가 합법적이었거든. 임신 중에 먹은 보양식도 고의적인 살인으로 보지 않았지.”하연이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보양식을 준 사람이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그 아줌마였군요!”‘참 교묘하네. 모든 것을 흔적 없이 만들어버렸고...’강영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계집애의 이름이 바로 왕진이야.”‘연말 행사에서 우리 걸그룹 애들을 해친 그 청소부가 알고 보니 바로 이수애의 사람이었어!’‘그래서 한서영의 지시를 받았던 거야.’‘그러니까 할머니께서 그렇게 화를 낸 것도 이유가 있었던 거겠네.’“그렇다면, 할머니께서는 왜 나중에 왜 이수애 여사를 받아들인 건가요?” 하연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 강영숙은 하연의 질문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왜 이수애를 받아들였냐고 묻는 거구나?”“네.”“이수애가 임신했다고 했거든.”아이는 어머니의 지위에 따라 신분을 얻는다. 한씨 가문의 명성을 고려하여, 내연녀가 본처를 죽게 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강영숙은 모든 것을 덮어야만 했다.“하지만 이수애가 집에 들어온 후에야 우리는 알게 되었지. 이수애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2년이 지나서야 이수애가 진짜로 서준을 임신했지. 그 뒤로 서영을 낳았고.”모든 것은 다 이수애가 계획한 일련의 사건이었다. 이수애는 철저히 한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자리를 굳히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이수애는 영악했어. 그 후로는 왕진을 해고하고, 더 이상 고용인을 두지 않았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은 일을 꾸밀까 봐 두려워했거든.”하연의 마음은 무거웠다. 이런 압박 속에서 한명준이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그녀는
서준의 분노는 더 커졌다. “가식 떨지 마요. 부 대표가 탐내는 건 이미 본인 옆에 있잖아요!” 서준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하연이었다. “한서준! 입조심해. 난 사람이야, 물건이 아니라고! 더군다나 호가의 물건도 아니야!” 하연은 즉각 반박하며 상혁의 손을 잡고 차에 타려고 했다. 그러나 서준은 차 문 앞에 가로막고 섰다. “비켜!”서준의 시선은 하연과 상혁 사이를 오갔고, 상혁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의 손을 잡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서준은 길을 비켜주었고, 빠르게 몸을 돌려 고택으로 향했다. 30분 전, 강영숙이 서준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집으로 오라고 했기 때문에 서준은 서둘러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하연을 마주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으니 틀림없이 뭔가 일이 생긴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들어서자마자 강영숙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서준에게 따지듯 물었다. “서영이가 어떻게 돌아온 거냐?!” “하연이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왕진이 다시 나타난 건 누구의 명령이지? 서영이야? 아니면 이수애야? 그 둘은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서준은 순간 혼란에 빠졌지만, 자신이 놓치지 않은 단어가 있었다. “왕진이요?” ‘한명준의 어머니를 죽게 한 그 가정부, 그리고 이수애와 한통속이었던 사람. 그 아줌마가 다시 나타난 것인가?’ “시치미 떼지 마라. 명준이가 경찰이 된 후 실종된 것도 난 다 알고 있어. 네가 얼마나 관여했는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말아라.” 강영숙은 바로 핵심을 찔렀고, 말투도 거침이 없었다. 서준조차 강영숙의 기세에 눌려 잠시 움찔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 정말로 몰랐어요.” “서영이가 돌아왔으니 이수애도 찾아와라. 내가 하연에게 해코지하는 걸 절대 두고 보지 않을 거다. 내가 늙었어도 아직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까!” 강영숙은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서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
하연은 상혁의 품에 기대어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꼬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 둔 게 있는데, 오빠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오빠가 동의하지 않으면 나는 안 할게요.”이토록 진지한 모습을 본 상혁은 하연의 긴장과 불안을 느꼈고, 하연의 손을 잡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말해 봐.”“한서준 아버지 본처의 죽음을 조사하고 싶어요. 그 죄를 저지른 자가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겠어요.”하연의 말이 끝나자 상혁의 입술이 서서히 굳어갔다.“한서영과 이 사건이 큰 관계가 없다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오늘 할머니 말씀을 듣고 난 후로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요. 알면서도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하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설명을 마치고 상혁의 대답을 기다렸다.상혁은 눈을 내려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한씨 집안의 일을 파헤친다는 건 한서준과 한서준 쪽의 모든 사람과의 대립을 의미하는 거야. 그럴 각오가 돼 있어?”왜냐하면, 조사의 결과는 분명 한씨 집안에 큰 타격을 줄 것이고, 나아가 HT그룹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하연은 상혁이가 자신이 한서준과의 관계를 신경 쓰는 줄 알고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조사를 결심한 이상, 한서준이 무서워서 못 할 이유는 없어요. 우리 둘 사이엔 이미 그럴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요.”상혁은 소파에 반쯤 몸을 기대고 근육질의 가슴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럼 넌 어떤 신분으로 조사할 생각이야?”하연은 순간 얼어붙었다.사실 상혁의 말이 맞았다. 전처라는 신분도, 사장이라는 신분도 이 문제를 조사하는 데 있어선 모두 월권이었다.“조사할 이유는 뭐야? 단순히 동정심 때문이야?”상혁은 하연의 귀 옆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하연이 왜 이러는지 상혁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 드문 위기감이 일어났다. 하연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했고, 볼은 약간 부풀어 있었다.
상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연이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최하연, 진짜 날 사랑한다고?” “네, 사랑해요, 부상혁 씨, 날 믿을 수 있겠어요?” 하연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는데, 상혁이 정말 언젠가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상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고, 하연의 머리를 눌러 품에 꽉 껴안았다. “믿어, 네가 한 말은 다 믿을 수 있어.”지금, 상혁은 마음속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던 수많은 말들을 끝내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대신 하연을 믿기로 했다.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만족스러운 듯 잠시 안겨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아! 깜빡했어요! 진숙 이모의 비행이 당장 내일인데, 아직 아무것도 준비 안 했어요.”상혁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뭘 준비해야 하는데?”“모레가 설인데, 아무것도 안 샀잖아요.”“가사도우미가 다 알아서 살 거야.”“그건 달라요. 내가 직접 준비해야 분위기가 살죠.” 하연은 서둘러 상혁을 끌어당기며 마트에 가서 설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고급 마트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설을 앞두고 직접 장을 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특히 하연과 상혁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직접 장을 보러 나온 경우도 꽤 있었다.하연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 카트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상혁이 카트를 밀고 가는 동안, 그녀는 카트 안에 과자들을 안고 다리를 흔들며 물었다.“부상혁 씨, 우리 마지막으로 같이 설을 보낸 게 언제였죠?”“네가 대학교 3학년 때.” 상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컬럼비아 대학은 방학이 늦었잖아. 원래 수업을 빼먹고 D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10년에 한 번 있을 만한 폭설을 만나서 C나라에 갇혀서 그곳에서 설날을 보냈었지.”하연은 그때 일이 떠올라 깔깔 웃었다.“그때, 할아버지께서 전화를 거셔서 우리를 엄청나게 혼내셨죠.” “C나라에서 머물던 집에서 너는 만두를 만들려고 했지만, 끓는 물에 넣자마자 다 터져버렸지.” 상혁은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