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석 씨는 반쯤 정계에 발을 들였지만, 본인과 친한 친구들은 비즈니스계에서 활동 중이잖아요. 안태현이든 한서준이든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어요?” 상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HL산업은행의 위기만 해결하면, 하민철도 여기저기 뛰어다닐 필요가 없고, 하선유 씨의 상처도 자연스럽게 치유될 시간이 생길 거예요.”운석은 상혁의 말을 듣고 두 손을 난간에 올린 채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 대표님, 자본시장에 대해 잘 알고 계세요?”운석의 말투는 뭔가 묘했고, 상혁은 운석의 쪽을 바라보았다.“안태현은 안씨 가문의 보호 아래 자라서 큰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없어요. 안태현이 도움을 줄 거란 기대는 현실적이지 않아요.” 운석은 안태현과 같은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은,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HT그룹의 인맥도 적지 않지 않잖아요.”상혁이 말을 던지자 운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건이 발생한 후, 그 역시 한서준을 찾아갔지만, 구동후로부터 한서준 대표가 요즘 손님을 만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거절당했다.운석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차를 몰아 서준의 집으로 갔다. 그때 서준의 집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그는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서준, 넌 날 친형제로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그러나 서준이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것은 서준이 서영과 실랑이를 벌이는 화면이었다. 서준은 놀라며 말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운석은 서영을 보자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이방규가 선유를 강간하려 했어. 너희 둘이 한패야, 그 나쁜 놈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넌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사실을 말해!”서영은 비명을 지르며 운석을 미친 듯이 때리며 외쳤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이거 놔!”운석은 그녀에게 이리저리 맞고 긁혔지만, 여전히 손을 놓지 않으며 큰소리로 물었다. “너희는 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야!”“하선유가 이방규를 다치게 했
“그래. 어렵지 않지만, 리스크가 있어. 우리 회사의 현재 상황으론 작은 소란 하나도 견디지 못할 거야.” 서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수년간 알고 지내온 친한 친구를 마주한 채, 운석은 다시 한번 부탁했다.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라면, 이번 한 번쯤은 도와주면 안 될까?”“운석아, 네가 예전에 최하연을 쫓을 때, 아무리 미쳐도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어.”그 말은 운석의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 냈다.회상에서 벗어난 운석은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말했다. “저는 상관없어요. 선유를 꼭 구할 거예요. 차라리 제가 지금의 자리에서 내려오면 돼요.”말을 마치자마자, 운석은 곧바로 일어나 깔끔하게 병실로 걸어갔다.“나운석 씨.” 상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운석을 불렀다.“이방규는 이씨 가문의 둘째로, 지난 몇 년간 큰형과 가문 계승권을 놓고 경쟁해 왔어요. 이방규가 스스로 B시에 온 걸 보면, 아마 이씨 가문은 아직 모를 거예요.”상혁은 말하며 운석의 앞에 다가섰다. “이방규의 큰형과 저는 조금의 인연이 있어요. 나운석 씨가 불편하지 않다면, 제 이름을 대면 이방규의 큰형이 나운석 씨를 만나줄 거예요.”이방규는 한때 이씨 가문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상혁이 주식시장에서 이방규를 공격한 후 추락했다. 그 일로 인해 이방규의 큰형은 겉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은밀히 상혁에게 예의를 다했다.운석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상혁이 도움을 주려는 의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부 대표님...”“여자를 괴롭히는 건 군자의 행동이 아니죠. 저도 하연이를 위해 도와주는 거니까, 나운석 씨도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상혁은 하연 회사의 송년회에서 이방규와 만난 그 일까지, 이번에 같이 정리하겠다는 뜻이었다.운석은 잠시 얼떨떨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선유는 지쳐 병상에서 잠에 들었다.하연은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오다가 상혁의 품에 부딪혔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빠, 담배 피웠어요
“하연아?” 강영숙은 지팡이에 의지해 방에서 나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너, 날 만나러 온 거니?”하연에게 한씨 가문은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두는 사람은 강영숙뿐이었다.“할머니, 곧 새해라서 찾아왔어요. 새해 선물도 가져왔고요.” 하연은 짐을 내려놓고 강영숙 곁으로 다가가 부축하며 물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할미는 지루해 죽겠구나. 이렇게 기쁜 일은 오랜만이야.”강영숙은 하연의 손을 꼭 잡으며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서준이처럼 바쁘니? 집에 돌아올 시간도 없고 말이야.”하연이 강영숙을 꼭 안으며 달래듯 말했다. “이제 왔잖아요. 한서준 씨도 바쁜 일이 끝나면 분명 돌아올 거예요.”강영숙은 더 이상 하연이 손주며느리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하연 아가씨, 점심을 여기서 드실 건가요?”가정부가 물었다.“네, 먹을래요. 이모님께서 해주신 약선 요리 너무 그리워요.”하연은 달콤한 말로 강영숙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바삐 움직였다. 선물들을 정리하면서도 강영숙과 장난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아, 강영숙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오래된 고택은 예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우연히 탁자 위에 놓인 흑백 사진을 보게 되었다. 이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사진이었고, 그때는 한서준인 줄 알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저 매력이 넘치는 남자.’하연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흑백 사진이라면, 한명준은 혹시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닐까?’강영숙은 하연이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하연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하연은 묻고 싶었지만,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몰랐다. 강영숙도 하연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모님께서 계속 바쁘셔서 많이 힘드실 것 같아서요.” 결국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하연은 가정부를 도와 상을 차리기
어두운 방 안, 강영숙은 역광을 받으며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죄를 지었어... 참으로 큰 죄를 지었지...”하연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속상한 이야기를 건드린 것 같아 정말 죄송해요.”강영숙은 다시 한숨을 쉬며 손을 휘저었다. “그저 우리 집안에서 일했던 사람일 뿐이야, 다 지나간 일이지. 그만두자꾸나.”하연이 강영숙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사람이 할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나요?”주름 가득한 강영숙의 눈가가 아래로 처지며 고뇌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그렇게 봐야겠지.”하연은 무엇을 캐내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강영숙을 걱정하고 있었고,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 강영숙 때문에 마음 아팠다.“할머니, 이 집안에서 다른 사람들은 저를 좋게 보지 않았지만, 할머니만큼은 저를 아껴주셨다는 걸 잘 알아요. 무슨 일이든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하연의 따뜻한 말과 친절한 태도에 강영숙은 하연을 더욱 좋아했다. 강영숙은 하연의 얼굴을 만지며 말하였다. “참 안타깝구나. 우리 서준이가 복이 없어서 이런 손자며느리를 두지 못하다니.”“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우리는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만약 한서준 씨가 나쁜 짓을 하면 제가 할머니를 모실게요.”하연의 말에 강영숙은 크게 웃으며 기분이 좋아졌지만, 잠시 후 다시 한숨을 쉬며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근심을 내비쳤다.“다 지난 일들이야... 할미는 후회만 남았지...”강영숙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하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혹시 그 일이 한명준 씨와 관련이 있었나요?”‘한명준’이라니 이름이 나오자 강영숙은 매우 놀라며 물었다. “네가 어떻게 그걸...”“한명준 씨를 어떻게 알았냐고요?” 하연은 담담하게 강영숙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분은 한서준 씨의 형이고, 할머니의
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런 상황이라면, 한명준 씨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돌아가신 것이나 다름없어. 그 불쌍한 어머니는 심지어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지 못했어.’ ‘이수애는 정말로 죄가 깊었네!’“왜 한서준 씨의 어머니를 법의 심판에 넘기지 않았나요?”“어떻게 넘기겠니? 모든 절차가 합법적이었거든. 임신 중에 먹은 보양식도 고의적인 살인으로 보지 않았지.”하연이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보양식을 준 사람이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그 아줌마였군요!”‘참 교묘하네. 모든 것을 흔적 없이 만들어버렸고...’강영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계집애의 이름이 바로 왕진이야.”‘연말 행사에서 우리 걸그룹 애들을 해친 그 청소부가 알고 보니 바로 이수애의 사람이었어!’‘그래서 한서영의 지시를 받았던 거야.’‘그러니까 할머니께서 그렇게 화를 낸 것도 이유가 있었던 거겠네.’“그렇다면, 할머니께서는 왜 나중에 왜 이수애 여사를 받아들인 건가요?” 하연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 강영숙은 하연의 질문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왜 이수애를 받아들였냐고 묻는 거구나?”“네.”“이수애가 임신했다고 했거든.”아이는 어머니의 지위에 따라 신분을 얻는다. 한씨 가문의 명성을 고려하여, 내연녀가 본처를 죽게 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강영숙은 모든 것을 덮어야만 했다.“하지만 이수애가 집에 들어온 후에야 우리는 알게 되었지. 이수애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2년이 지나서야 이수애가 진짜로 서준을 임신했지. 그 뒤로 서영을 낳았고.”모든 것은 다 이수애가 계획한 일련의 사건이었다. 이수애는 철저히 한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자리를 굳히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이수애는 영악했어. 그 후로는 왕진을 해고하고, 더 이상 고용인을 두지 않았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은 일을 꾸밀까 봐 두려워했거든.”하연의 마음은 무거웠다. 이런 압박 속에서 한명준이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그녀는
서준의 분노는 더 커졌다. “가식 떨지 마요. 부 대표가 탐내는 건 이미 본인 옆에 있잖아요!” 서준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하연이었다. “한서준! 입조심해. 난 사람이야, 물건이 아니라고! 더군다나 호가의 물건도 아니야!” 하연은 즉각 반박하며 상혁의 손을 잡고 차에 타려고 했다. 그러나 서준은 차 문 앞에 가로막고 섰다. “비켜!”서준의 시선은 하연과 상혁 사이를 오갔고, 상혁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의 손을 잡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서준은 길을 비켜주었고, 빠르게 몸을 돌려 고택으로 향했다. 30분 전, 강영숙이 서준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집으로 오라고 했기 때문에 서준은 서둘러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하연을 마주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으니 틀림없이 뭔가 일이 생긴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들어서자마자 강영숙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서준에게 따지듯 물었다. “서영이가 어떻게 돌아온 거냐?!” “하연이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왕진이 다시 나타난 건 누구의 명령이지? 서영이야? 아니면 이수애야? 그 둘은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서준은 순간 혼란에 빠졌지만, 자신이 놓치지 않은 단어가 있었다. “왕진이요?” ‘한명준의 어머니를 죽게 한 그 가정부, 그리고 이수애와 한통속이었던 사람. 그 아줌마가 다시 나타난 것인가?’ “시치미 떼지 마라. 명준이가 경찰이 된 후 실종된 것도 난 다 알고 있어. 네가 얼마나 관여했는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말아라.” 강영숙은 바로 핵심을 찔렀고, 말투도 거침이 없었다. 서준조차 강영숙의 기세에 눌려 잠시 움찔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 정말로 몰랐어요.” “서영이가 돌아왔으니 이수애도 찾아와라. 내가 하연에게 해코지하는 걸 절대 두고 보지 않을 거다. 내가 늙었어도 아직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까!” 강영숙은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서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
하연은 상혁의 품에 기대어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꼬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 둔 게 있는데, 오빠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오빠가 동의하지 않으면 나는 안 할게요.”이토록 진지한 모습을 본 상혁은 하연의 긴장과 불안을 느꼈고, 하연의 손을 잡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말해 봐.”“한서준 아버지 본처의 죽음을 조사하고 싶어요. 그 죄를 저지른 자가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겠어요.”하연의 말이 끝나자 상혁의 입술이 서서히 굳어갔다.“한서영과 이 사건이 큰 관계가 없다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오늘 할머니 말씀을 듣고 난 후로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요. 알면서도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하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설명을 마치고 상혁의 대답을 기다렸다.상혁은 눈을 내려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한씨 집안의 일을 파헤친다는 건 한서준과 한서준 쪽의 모든 사람과의 대립을 의미하는 거야. 그럴 각오가 돼 있어?”왜냐하면, 조사의 결과는 분명 한씨 집안에 큰 타격을 줄 것이고, 나아가 HT그룹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하연은 상혁이가 자신이 한서준과의 관계를 신경 쓰는 줄 알고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조사를 결심한 이상, 한서준이 무서워서 못 할 이유는 없어요. 우리 둘 사이엔 이미 그럴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요.”상혁은 소파에 반쯤 몸을 기대고 근육질의 가슴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럼 넌 어떤 신분으로 조사할 생각이야?”하연은 순간 얼어붙었다.사실 상혁의 말이 맞았다. 전처라는 신분도, 사장이라는 신분도 이 문제를 조사하는 데 있어선 모두 월권이었다.“조사할 이유는 뭐야? 단순히 동정심 때문이야?”상혁은 하연의 귀 옆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하연이 왜 이러는지 상혁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 드문 위기감이 일어났다. 하연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했고, 볼은 약간 부풀어 있었다.
상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연이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최하연, 진짜 날 사랑한다고?” “네, 사랑해요, 부상혁 씨, 날 믿을 수 있겠어요?” 하연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는데, 상혁이 정말 언젠가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상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고, 하연의 머리를 눌러 품에 꽉 껴안았다. “믿어, 네가 한 말은 다 믿을 수 있어.”지금, 상혁은 마음속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던 수많은 말들을 끝내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대신 하연을 믿기로 했다.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만족스러운 듯 잠시 안겨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아! 깜빡했어요! 진숙 이모의 비행이 당장 내일인데, 아직 아무것도 준비 안 했어요.”상혁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뭘 준비해야 하는데?”“모레가 설인데, 아무것도 안 샀잖아요.”“가사도우미가 다 알아서 살 거야.”“그건 달라요. 내가 직접 준비해야 분위기가 살죠.” 하연은 서둘러 상혁을 끌어당기며 마트에 가서 설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고급 마트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설을 앞두고 직접 장을 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특히 하연과 상혁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직접 장을 보러 나온 경우도 꽤 있었다.하연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 카트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상혁이 카트를 밀고 가는 동안, 그녀는 카트 안에 과자들을 안고 다리를 흔들며 물었다.“부상혁 씨, 우리 마지막으로 같이 설을 보낸 게 언제였죠?”“네가 대학교 3학년 때.” 상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컬럼비아 대학은 방학이 늦었잖아. 원래 수업을 빼먹고 D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10년에 한 번 있을 만한 폭설을 만나서 C나라에 갇혀서 그곳에서 설날을 보냈었지.”하연은 그때 일이 떠올라 깔깔 웃었다.“그때, 할아버지께서 전화를 거셔서 우리를 엄청나게 혼내셨죠.” “C나라에서 머물던 집에서 너는 만두를 만들려고 했지만, 끓는 물에 넣자마자 다 터져버렸지.” 상혁은
“남준 씨, 지금 당신 날 피한 거예요?” 다영은 손에 쥔 라이터를 꽉 쥐었다가 조용히 주머니에 넣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최근 들어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졌고, 남준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상황 역시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두 사람이, 이제는 마치 남이 된 것 같은 이 분위기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남준은 정면만을 응시한 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요.” 다영의 눈에 순간적으로 희미한 빛이 스쳤다. 망설임 없이 그녀는 차 뒤쪽을 돌아 조수석 문 앞에 섰고, 문을 열어 차에 탔다.차에 올라탄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놓인 정교한 포장 상자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영은 상자를 들고서 물었다. “남준 씨, 이거... 내 선물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멈추지 않고 상자를 열고 있었다.남준은 살짝 찌푸린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상자를 열어보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볼 뿐이었다.다영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섬세하게 디자인된 고급스러운 목걸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독특한 디자인의 목걸이는 푸른빛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조명에 반사되어 빛나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말 예쁘네요...” 다영은 감탄하며 목걸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환한 미소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이거 나한테 걸어줄 수 있어요?”남준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어졌고,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목걸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남아공에서 천연으로 채굴된 최고급 보석입니다. 순도와 투명도가 모두 최상급이고, 무엇보다도 희소성이 높아 전 세계에 단 하나뿐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하기에 가장 적합한 아이템이죠.’ 그때 들렸던 매장의 직원 설명이 귀에 맴돌았다.
“나... 나 술 안 취했어.” 남준은 말끝이 흐려졌고, 아까의 당당한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하연은 남준의 이상한 태도를 감지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거기에는 상혁이 어느새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혼자 있는 남자의 긴 그림자가 조명 아래 길게 드리워졌고, 묵직한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오빠...” 하연은 입을 열어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상혁은 모든 상황을 이미 이해한 듯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편안한 눈빛을 주었다. 단 한 번의 눈맞춤으로 하연은 마음속에 있던 불안함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신뢰가 있었다.상혁은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바람이 차니까 빨리 들어가자.”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응, 알았어요.”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서로 맞물리고,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서로에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장면은 남준의 가슴 깊은 곳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남준은 표정만큼은 최대한 담담하게 유지하며 시선을 애써 다른 곳으로 돌리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DS그룹 연말 행사가 있다고 해서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들렸어, 마침 형도 여기 있었네.”상혁은 하연의 손을 살며시 감싼 채 고개를 들고 남준을 바라보았다. 상혁의 눈빛은 깊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왜 이젠 DS그룹 일에도 신경이 쓰여? 모르는 사람은 보면 네가 DL그룹 버리고 DS그룹으로 옮기려는 줄 알겠어.” 남준은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상혁의 말에는 은근한 경계와 조롱이 담겨 있었다. 남준은 불리한 상황임을 깨닫고 억지로 웃으며 변명했다. “형,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분위기나 좀 보려고 들른 거야.”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이미 간파하고
“시간 없어.” 하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메시지를 확인했고, 내용을 본 후 손에 힘이 들어갔다. 10분 후.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남준의 눈에 띄는 빨간색 스포츠카가 비상등을 켠 채 호텔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번화한 호텔 입구에서 유독 도드라져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잠시 후, 차 문이 열리고 남준이 내렸다. 그는 오늘 블랙 패딩을 걸친 채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며 여유롭게 하연을 바라보았다. “역시 올 줄 알았어.” 남자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고, 말투에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찬바람이 부는 겨울밤, 차가운 바람이 하연의 얼굴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하연은 몇 걸음 옮긴 뒤 걸음을 멈췄고, 남준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손을 들어 흩날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말해. 문자에 적힌 상혁 씨하고 관련해서 중요한 일이 뭔데?”남준은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형이 걱정돼?”“그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하연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남준은 그녀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더니, 불과 반걸음 거리에 멈춰서 몸을 약간 숙였다. “너의 그 관심 나 한테도 좀 나눠 주면 안 돼?”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내뱉은 말에 은은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술 마셨어?”남준은 입가를 비틀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혹시 나 걱정하는 거야?”“착각하지 마.”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부남준,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여기서 시간 끌 여유 없어.”남준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어딘가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너 갈수록 성격이 우리 형이랑 닮아가네. 역시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하연
하연은 밝게 웃으며 상혁이 건넨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갓 짠 오렌지 주스는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부 대표님이 직접 짠 오렌지 주스라 그런가, 확실히 맛이 다르네요. 정말 맛있어요.”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맛있으면 자주 짜줄게.” 하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감사히 잘 마실게요, 부 대표님!” “아니, 한참을 찾았는데 여기서 둘이서만 꽁냥거리고 있었네?”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던 하성이 두 팔을 교차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혁, 너 요즘 이 녀석을 너무 애지중지하더라. 그러다 버릇 나빠지겠어.” “오빠!!” 하연은 볼이 부풀어올라 약간 투덜거렸지만, 옆에 있던 상혁은 태연하게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애지중지하든 말든 내 마음이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하성은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투항했다. “알았어, 알았어. 난 그냥 너희 둘이 잘 지내는 거 보니 마음이 놓여서 하는 소리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계속 이렇게 잘 지내줘, 아주 보기 좋아!”그때 하연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부남준’이라는 이름이 뜨자 그녀는 잠시 긴장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오빠들, 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하연이 자리를 비우고 복도로 나가자, 하성은 방금 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상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요즘 너희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있더라. 동건 삼촌 쪽에서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상혁은 하연이 마시다 남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시선을 복도 쪽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첩이 ‘본처’의 자리를 노리는 거야. 흔한 일이잖아.” 하성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동건 삼촌이 그 여자를 꽤 오랫동안 봐줬던 모양이던데. 이제는 꽤 많은 걸 쌓아둔 듯하고, 한번 크게 판을 벌일
“뭐 하는 거야? 빨리 이 주스를 연회장으로 가져가!” 홀 매니저가 다가와 살짝 꾸짖었다. 여자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질투로 번들거리던 눈빛을 감추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다영은 태어나서 가사일 한 번 손댄 적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매니저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너 신입이야?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슴 속에서 송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 친척 중 하나가 DS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엔 그 사람 신분을 쓰는 게 편할 거야.” 침착함을 되찾은 다영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고객지원부의 진미입니다. 연회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지원 나온 거예요.” 매니저는 그녀의 명찰을 한 번 흘깃 본 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신입이라면 전면에 나가면 실수하기 쉬워. 내실에서 돕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다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회장을 바라봤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하연과 상혁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2층 휴게실 안. 원신명은 한 손에 신선한 오렌지 한 봉지를, 다른 손에 포장을 뜯지 않은 녹즙기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오렌지와 녹즙기입니다.” 원신명은 궁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드시는 건가요?” 상혁은 짧게 대답했다. “원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 원신명은 얼른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대표님,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와이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와이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그 단어를 그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신명은 곧 깨달았다. ‘아, 대표님이 직접 최하연 씨를 위해 주스를 준비하시고 싶은 거구나!’ “원 비서, 연말인데도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