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전 이방규를 일부러 해친 게 아니에요.” 선유는 울먹이며 말했다. 하연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그녀가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음을 의미했다.“알고 있어, 네가 그럴 리 없지. 이방규가 나쁜 마음을 품은 거야.”하연은 서둘러 선유를 달래며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송년회 당일, 이방규는 나운석이 선유의 곁에 없을 때, 선유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가 불순한 의도를 드러냈다. 선유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근처에 있던 술병을 집어 이방규의 머리를 내리쳤다.그로 인해 이방규는 심각한 뇌진탕을 겪었고, 그는 그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선유를 고의적인 상해 혐의로 고소했다.사건이 발생한 장소에는 CCTV도 없었고, 두 집안의 대립이 얽혀 있어서 경찰도 사건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선유는 하연의 품에서 한참을 울고 나서야 하연이 물었다. “너희 아버지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셔?”“...”선유는 더욱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옆에 있던 운석이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 은행장님의 말씀으로는 사건이 크게 번지지 않았으니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셨어요.”하연은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딸을 끔찍이 아끼는 하민철이 이토록 이익을 따지는 사람이었다니 의외였다.“하 은행장님은 이방규의 집안을 무서워하셔서 그렇게 결정하셨어요!”운석은 분노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은행의 내부 위기를 해결하는 데 딸의 명예를 희생하려는 게 하 은행장님의 해결책이라니, 정말 누구한테 말해도 절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예요!”“무슨 위기?” 이 질문은 상혁이 던졌다.운석은 잠시 선유를 곁눈질하며 말문을 닫았고, 결국 밖으로 나갔다. 상혁도 그를 따라갔다.병실에는 하연과 선유만 남았다.선유의 말을 통해 하연은 그날 밤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언니, 한서영도 아직 있는데, 이방규가 감히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에요.”“한서영은 이방규에게 애초부터 여자
“나운석 씨는 반쯤 정계에 발을 들였지만, 본인과 친한 친구들은 비즈니스계에서 활동 중이잖아요. 안태현이든 한서준이든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어요?” 상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HL산업은행의 위기만 해결하면, 하민철도 여기저기 뛰어다닐 필요가 없고, 하선유 씨의 상처도 자연스럽게 치유될 시간이 생길 거예요.”운석은 상혁의 말을 듣고 두 손을 난간에 올린 채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 대표님, 자본시장에 대해 잘 알고 계세요?”운석의 말투는 뭔가 묘했고, 상혁은 운석의 쪽을 바라보았다.“안태현은 안씨 가문의 보호 아래 자라서 큰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없어요. 안태현이 도움을 줄 거란 기대는 현실적이지 않아요.” 운석은 안태현과 같은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은,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HT그룹의 인맥도 적지 않지 않잖아요.”상혁이 말을 던지자 운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건이 발생한 후, 그 역시 한서준을 찾아갔지만, 구동후로부터 한서준 대표가 요즘 손님을 만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거절당했다.운석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차를 몰아 서준의 집으로 갔다. 그때 서준의 집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그는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서준, 넌 날 친형제로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그러나 서준이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것은 서준이 서영과 실랑이를 벌이는 화면이었다. 서준은 놀라며 말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운석은 서영을 보자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이방규가 선유를 강간하려 했어. 너희 둘이 한패야, 그 나쁜 놈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넌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사실을 말해!”서영은 비명을 지르며 운석을 미친 듯이 때리며 외쳤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이거 놔!”운석은 그녀에게 이리저리 맞고 긁혔지만, 여전히 손을 놓지 않으며 큰소리로 물었다. “너희는 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야!”“하선유가 이방규를 다치게 했
“그래. 어렵지 않지만, 리스크가 있어. 우리 회사의 현재 상황으론 작은 소란 하나도 견디지 못할 거야.” 서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수년간 알고 지내온 친한 친구를 마주한 채, 운석은 다시 한번 부탁했다.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라면, 이번 한 번쯤은 도와주면 안 될까?”“운석아, 네가 예전에 최하연을 쫓을 때, 아무리 미쳐도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어.”그 말은 운석의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 냈다.회상에서 벗어난 운석은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말했다. “저는 상관없어요. 선유를 꼭 구할 거예요. 차라리 제가 지금의 자리에서 내려오면 돼요.”말을 마치자마자, 운석은 곧바로 일어나 깔끔하게 병실로 걸어갔다.“나운석 씨.” 상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운석을 불렀다.“이방규는 이씨 가문의 둘째로, 지난 몇 년간 큰형과 가문 계승권을 놓고 경쟁해 왔어요. 이방규가 스스로 B시에 온 걸 보면, 아마 이씨 가문은 아직 모를 거예요.”상혁은 말하며 운석의 앞에 다가섰다. “이방규의 큰형과 저는 조금의 인연이 있어요. 나운석 씨가 불편하지 않다면, 제 이름을 대면 이방규의 큰형이 나운석 씨를 만나줄 거예요.”이방규는 한때 이씨 가문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상혁이 주식시장에서 이방규를 공격한 후 추락했다. 그 일로 인해 이방규의 큰형은 겉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은밀히 상혁에게 예의를 다했다.운석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상혁이 도움을 주려는 의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부 대표님...”“여자를 괴롭히는 건 군자의 행동이 아니죠. 저도 하연이를 위해 도와주는 거니까, 나운석 씨도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상혁은 하연 회사의 송년회에서 이방규와 만난 그 일까지, 이번에 같이 정리하겠다는 뜻이었다.운석은 잠시 얼떨떨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선유는 지쳐 병상에서 잠에 들었다.하연은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오다가 상혁의 품에 부딪혔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빠, 담배 피웠어요
“하연아?” 강영숙은 지팡이에 의지해 방에서 나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너, 날 만나러 온 거니?”하연에게 한씨 가문은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두는 사람은 강영숙뿐이었다.“할머니, 곧 새해라서 찾아왔어요. 새해 선물도 가져왔고요.” 하연은 짐을 내려놓고 강영숙 곁으로 다가가 부축하며 물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할미는 지루해 죽겠구나. 이렇게 기쁜 일은 오랜만이야.”강영숙은 하연의 손을 꼭 잡으며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서준이처럼 바쁘니? 집에 돌아올 시간도 없고 말이야.”하연이 강영숙을 꼭 안으며 달래듯 말했다. “이제 왔잖아요. 한서준 씨도 바쁜 일이 끝나면 분명 돌아올 거예요.”강영숙은 더 이상 하연이 손주며느리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하연 아가씨, 점심을 여기서 드실 건가요?”가정부가 물었다.“네, 먹을래요. 이모님께서 해주신 약선 요리 너무 그리워요.”하연은 달콤한 말로 강영숙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바삐 움직였다. 선물들을 정리하면서도 강영숙과 장난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아, 강영숙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오래된 고택은 예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우연히 탁자 위에 놓인 흑백 사진을 보게 되었다. 이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사진이었고, 그때는 한서준인 줄 알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저 매력이 넘치는 남자.’하연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흑백 사진이라면, 한명준은 혹시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닐까?’강영숙은 하연이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하연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하연은 묻고 싶었지만,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몰랐다. 강영숙도 하연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모님께서 계속 바쁘셔서 많이 힘드실 것 같아서요.” 결국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하연은 가정부를 도와 상을 차리기
어두운 방 안, 강영숙은 역광을 받으며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죄를 지었어... 참으로 큰 죄를 지었지...”하연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속상한 이야기를 건드린 것 같아 정말 죄송해요.”강영숙은 다시 한숨을 쉬며 손을 휘저었다. “그저 우리 집안에서 일했던 사람일 뿐이야, 다 지나간 일이지. 그만두자꾸나.”하연이 강영숙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사람이 할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나요?”주름 가득한 강영숙의 눈가가 아래로 처지며 고뇌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그렇게 봐야겠지.”하연은 무엇을 캐내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강영숙을 걱정하고 있었고,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 강영숙 때문에 마음 아팠다.“할머니, 이 집안에서 다른 사람들은 저를 좋게 보지 않았지만, 할머니만큼은 저를 아껴주셨다는 걸 잘 알아요. 무슨 일이든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하연의 따뜻한 말과 친절한 태도에 강영숙은 하연을 더욱 좋아했다. 강영숙은 하연의 얼굴을 만지며 말하였다. “참 안타깝구나. 우리 서준이가 복이 없어서 이런 손자며느리를 두지 못하다니.”“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우리는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만약 한서준 씨가 나쁜 짓을 하면 제가 할머니를 모실게요.”하연의 말에 강영숙은 크게 웃으며 기분이 좋아졌지만, 잠시 후 다시 한숨을 쉬며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근심을 내비쳤다.“다 지난 일들이야... 할미는 후회만 남았지...”강영숙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하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혹시 그 일이 한명준 씨와 관련이 있었나요?”‘한명준’이라니 이름이 나오자 강영숙은 매우 놀라며 물었다. “네가 어떻게 그걸...”“한명준 씨를 어떻게 알았냐고요?” 하연은 담담하게 강영숙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분은 한서준 씨의 형이고, 할머니의
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런 상황이라면, 한명준 씨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돌아가신 것이나 다름없어. 그 불쌍한 어머니는 심지어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지 못했어.’ ‘이수애는 정말로 죄가 깊었네!’“왜 한서준 씨의 어머니를 법의 심판에 넘기지 않았나요?”“어떻게 넘기겠니? 모든 절차가 합법적이었거든. 임신 중에 먹은 보양식도 고의적인 살인으로 보지 않았지.”하연이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보양식을 준 사람이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그 아줌마였군요!”‘참 교묘하네. 모든 것을 흔적 없이 만들어버렸고...’강영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계집애의 이름이 바로 왕진이야.”‘연말 행사에서 우리 걸그룹 애들을 해친 그 청소부가 알고 보니 바로 이수애의 사람이었어!’‘그래서 한서영의 지시를 받았던 거야.’‘그러니까 할머니께서 그렇게 화를 낸 것도 이유가 있었던 거겠네.’“그렇다면, 할머니께서는 왜 나중에 왜 이수애 여사를 받아들인 건가요?” 하연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 강영숙은 하연의 질문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왜 이수애를 받아들였냐고 묻는 거구나?”“네.”“이수애가 임신했다고 했거든.”아이는 어머니의 지위에 따라 신분을 얻는다. 한씨 가문의 명성을 고려하여, 내연녀가 본처를 죽게 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강영숙은 모든 것을 덮어야만 했다.“하지만 이수애가 집에 들어온 후에야 우리는 알게 되었지. 이수애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2년이 지나서야 이수애가 진짜로 서준을 임신했지. 그 뒤로 서영을 낳았고.”모든 것은 다 이수애가 계획한 일련의 사건이었다. 이수애는 철저히 한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자리를 굳히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이수애는 영악했어. 그 후로는 왕진을 해고하고, 더 이상 고용인을 두지 않았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은 일을 꾸밀까 봐 두려워했거든.”하연의 마음은 무거웠다. 이런 압박 속에서 한명준이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그녀는
서준의 분노는 더 커졌다. “가식 떨지 마요. 부 대표가 탐내는 건 이미 본인 옆에 있잖아요!” 서준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하연이었다. “한서준! 입조심해. 난 사람이야, 물건이 아니라고! 더군다나 호가의 물건도 아니야!” 하연은 즉각 반박하며 상혁의 손을 잡고 차에 타려고 했다. 그러나 서준은 차 문 앞에 가로막고 섰다. “비켜!”서준의 시선은 하연과 상혁 사이를 오갔고, 상혁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의 손을 잡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서준은 길을 비켜주었고, 빠르게 몸을 돌려 고택으로 향했다. 30분 전, 강영숙이 서준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집으로 오라고 했기 때문에 서준은 서둘러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하연을 마주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으니 틀림없이 뭔가 일이 생긴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들어서자마자 강영숙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서준에게 따지듯 물었다. “서영이가 어떻게 돌아온 거냐?!” “하연이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왕진이 다시 나타난 건 누구의 명령이지? 서영이야? 아니면 이수애야? 그 둘은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서준은 순간 혼란에 빠졌지만, 자신이 놓치지 않은 단어가 있었다. “왕진이요?” ‘한명준의 어머니를 죽게 한 그 가정부, 그리고 이수애와 한통속이었던 사람. 그 아줌마가 다시 나타난 것인가?’ “시치미 떼지 마라. 명준이가 경찰이 된 후 실종된 것도 난 다 알고 있어. 네가 얼마나 관여했는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말아라.” 강영숙은 바로 핵심을 찔렀고, 말투도 거침이 없었다. 서준조차 강영숙의 기세에 눌려 잠시 움찔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 정말로 몰랐어요.” “서영이가 돌아왔으니 이수애도 찾아와라. 내가 하연에게 해코지하는 걸 절대 두고 보지 않을 거다. 내가 늙었어도 아직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까!” 강영숙은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서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
하연은 상혁의 품에 기대어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꼬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 둔 게 있는데, 오빠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오빠가 동의하지 않으면 나는 안 할게요.”이토록 진지한 모습을 본 상혁은 하연의 긴장과 불안을 느꼈고, 하연의 손을 잡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말해 봐.”“한서준 아버지 본처의 죽음을 조사하고 싶어요. 그 죄를 저지른 자가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겠어요.”하연의 말이 끝나자 상혁의 입술이 서서히 굳어갔다.“한서영과 이 사건이 큰 관계가 없다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오늘 할머니 말씀을 듣고 난 후로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요. 알면서도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하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설명을 마치고 상혁의 대답을 기다렸다.상혁은 눈을 내려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한씨 집안의 일을 파헤친다는 건 한서준과 한서준 쪽의 모든 사람과의 대립을 의미하는 거야. 그럴 각오가 돼 있어?”왜냐하면, 조사의 결과는 분명 한씨 집안에 큰 타격을 줄 것이고, 나아가 HT그룹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하연은 상혁이가 자신이 한서준과의 관계를 신경 쓰는 줄 알고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조사를 결심한 이상, 한서준이 무서워서 못 할 이유는 없어요. 우리 둘 사이엔 이미 그럴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요.”상혁은 소파에 반쯤 몸을 기대고 근육질의 가슴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럼 넌 어떤 신분으로 조사할 생각이야?”하연은 순간 얼어붙었다.사실 상혁의 말이 맞았다. 전처라는 신분도, 사장이라는 신분도 이 문제를 조사하는 데 있어선 모두 월권이었다.“조사할 이유는 뭐야? 단순히 동정심 때문이야?”상혁은 하연의 귀 옆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하연이 왜 이러는지 상혁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 드문 위기감이 일어났다. 하연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했고, 볼은 약간 부풀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