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상혁의 품에 기대어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꼬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 둔 게 있는데, 오빠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오빠가 동의하지 않으면 나는 안 할게요.”이토록 진지한 모습을 본 상혁은 하연의 긴장과 불안을 느꼈고, 하연의 손을 잡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말해 봐.”“한서준 아버지 본처의 죽음을 조사하고 싶어요. 그 죄를 저지른 자가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겠어요.”하연의 말이 끝나자 상혁의 입술이 서서히 굳어갔다.“한서영과 이 사건이 큰 관계가 없다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오늘 할머니 말씀을 듣고 난 후로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요. 알면서도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하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설명을 마치고 상혁의 대답을 기다렸다.상혁은 눈을 내려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한씨 집안의 일을 파헤친다는 건 한서준과 한서준 쪽의 모든 사람과의 대립을 의미하는 거야. 그럴 각오가 돼 있어?”왜냐하면, 조사의 결과는 분명 한씨 집안에 큰 타격을 줄 것이고, 나아가 HT그룹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하연은 상혁이가 자신이 한서준과의 관계를 신경 쓰는 줄 알고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조사를 결심한 이상, 한서준이 무서워서 못 할 이유는 없어요. 우리 둘 사이엔 이미 그럴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요.”상혁은 소파에 반쯤 몸을 기대고 근육질의 가슴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럼 넌 어떤 신분으로 조사할 생각이야?”하연은 순간 얼어붙었다.사실 상혁의 말이 맞았다. 전처라는 신분도, 사장이라는 신분도 이 문제를 조사하는 데 있어선 모두 월권이었다.“조사할 이유는 뭐야? 단순히 동정심 때문이야?”상혁은 하연의 귀 옆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하연이 왜 이러는지 상혁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 드문 위기감이 일어났다. 하연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했고, 볼은 약간 부풀어 있었다.
상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연이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최하연, 진짜 날 사랑한다고?” “네, 사랑해요, 부상혁 씨, 날 믿을 수 있겠어요?” 하연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는데, 상혁이 정말 언젠가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상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고, 하연의 머리를 눌러 품에 꽉 껴안았다. “믿어, 네가 한 말은 다 믿을 수 있어.”지금, 상혁은 마음속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던 수많은 말들을 끝내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대신 하연을 믿기로 했다.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만족스러운 듯 잠시 안겨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아! 깜빡했어요! 진숙 이모의 비행이 당장 내일인데, 아직 아무것도 준비 안 했어요.”상혁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뭘 준비해야 하는데?”“모레가 설인데, 아무것도 안 샀잖아요.”“가사도우미가 다 알아서 살 거야.”“그건 달라요. 내가 직접 준비해야 분위기가 살죠.” 하연은 서둘러 상혁을 끌어당기며 마트에 가서 설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고급 마트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설을 앞두고 직접 장을 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특히 하연과 상혁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직접 장을 보러 나온 경우도 꽤 있었다.하연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 카트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상혁이 카트를 밀고 가는 동안, 그녀는 카트 안에 과자들을 안고 다리를 흔들며 물었다.“부상혁 씨, 우리 마지막으로 같이 설을 보낸 게 언제였죠?”“네가 대학교 3학년 때.” 상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컬럼비아 대학은 방학이 늦었잖아. 원래 수업을 빼먹고 D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10년에 한 번 있을 만한 폭설을 만나서 C나라에 갇혀서 그곳에서 설날을 보냈었지.”하연은 그때 일이 떠올라 깔깔 웃었다.“그때, 할아버지께서 전화를 거셔서 우리를 엄청나게 혼내셨죠.” “C나라에서 머물던 집에서 너는 만두를 만들려고 했지만, 끓는 물에 넣자마자 다 터져버렸지.” 상혁은
하연은 그 말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빨리 아이를 낳으세요라니, 너무 민망해!” 하지만 상혁은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카트에서 빨간 봉투를 꺼냈다. 그는 봉투에 현금 열 장을 넣고는 이함에게 건넸다.“세뱃돈이야.”“아니에요, 너무 과분해요.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이함의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아이한테 주는 거예요.” 상혁은 단호하게 말했고, 이함의 손에 봉투를 꼭 쥐여주었다.하연은 그 장면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냥 받으세요. 오늘 기분이 좋은가 봐요.” 아마도 조금 전에 이함이가 말한 그 ‘빨리 아이를 낳으세요'는 말이 상혁의 마음을 건드린 모양이었다.마트를 나서면서 하연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아니, 왜 우리가 결혼했다고 말했어요?”“어차피 할 일인데, 미리 말한 것뿐이야. 거짓말은 아니지.” 상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하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오빠는 아이를 좋아하나 봐요.”“그냥 그럭저럭. 네가 낳지 않아도 상관없어.”상혁은 아이가 엄마의 몸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하연의 건강이 우선이었다.“남자아이랑 여자아이 중 뭐가 좋아요?” 하연이 상혁의 앞에서 깡충깡충 뛰며 물었다.상혁은 그녀가 걸어가는 길을 지켜보며 말했다.“여자아이.”“왜요?”“너를 닮은 여자아이니까.”하연은 미소를 참지 못했다. 비록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는 것이 아직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지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졌다.다음 날.하연은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오는 걸 보고 놀랐다. 조진숙과 함께 부동건까지 온 것이다. 부동건은 조진숙의 가방과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상장기업의 회장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상혁도 예상치 못한 듯 물었다.“왜 가사도우미는 데려오지 않으셨어요?”“네 아버지가 안 데려와도 된다고 하더라. 자기가 둘 몫은 한다고.” 조진숙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부동건을 돌아보았다.부동건은 억지로 미소를 지
하경과 함께 온 또 다른 사람은 DS그룹 법무팀의 변호사였다. 하연은 맨 앞에서 걸어가며 VIP 병실 구역으로 향했다. 그녀는 한 병실 앞에서 멈춰서 노크했다. 문을 연 사람은 간병인이었다. 상대방은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이방규 대표님을 뵈러 왔어요. 안에 계신가요?” “그분은...” 간병인은 잠시 망설였다. “미리 약속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누구야?”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는데, 다름 아닌 한서영이었다. 간병인은 몸을 옆으로 비켰고, 한서영은 하연을 보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정말 귀한 손님이시네. 최 사장님 같은 고귀한 분이 병원에 오다니, 체면이라도 깎이는 거 아니야?” 하연은 서영을 무시하고 곧장 병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방규는 병실에 없었다. “내가 너더러 들어오라고 했어? 뭘 봐?” 서영은 하연을 밀어내려 했지만, 서영의 손목은 하경에게 단단히 붙잡혔다. “저기요, 너무 가까이 오지 마세요.” 하경이 말했다. “너는 뭐야? 최하연의 경호원이야? 감히 내 손을 잡다니, 당장 놔!” 서영은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하경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어떤 의미로는 맞는 말이네요. 어릴 때부터 난 촤하연의 경호원이었거든요.” 그는 손에 힘을 주었고, 서영은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렀다. “놔! 내 손 부러지겠어, 제발!” 하연은 웃음을 참으며 하경에게 눈짓을 보냈다. “난 너를 찾으러 온 게 아니야. 이 대표는 어디 있어?” 서영은 손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너한테 보고라도 해야 해? 넌 뭐든 다 알 수 있다면서, 왜 안 찾아보는 건데? 혹시 최 사장님도 못 알아내는 게 있는 건가?”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차분히 대답했다. “이 대표와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왔어. 네가 이 대표를 대신할 권한이 있다면 너랑 얘기해도 돼.” 서영은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속
하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한서영, 난 왕진을 직접 만났어. 왕진은 이미 네 이름을 불었다고.” 이 말을 들은 서영은 분노와 충격에 휩싸여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절대 그럴 리 없어. 내가 말했잖아, 난 그런 짓을 한 적 없어.”“그래? 그럼 왕진이 거짓말했다는 건데... 경찰이 완진을 다시 심문해야겠네.” 하연은 여유롭게 서영을 압박하며, 그녀가 혼란과 불안 속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서영은 이를 악물고 하연을 노려보며 점점 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내 변호사가 너한테 가짜 증언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려줄 거야.”하연은 그런 서영을 신경 쓰지 않고 창가의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상혁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강한 담배 연기는 그녀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어떻게 되든, 이제 한서영과 왕진 사이의 신뢰는 크게 흔들릴 것이다. 꼬리를 밟힌 쥐는 결국 큰 소동을 일으키는 법이니까.변호사가 법률 조항을 하나씩 설명하는 동안 서영은 점점 더 불안해하며 소리쳤다.“나가! 듣기 싫어!”서영은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막 병실로 돌아온 하경과 마주쳤다. 하경은 손에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방금 이 복도의 CCTV를 입수했어요. 이방규 대표님은 완전히 의식이 있는 상태로 병실을 나가셨어요. 골절이니, 뇌진탕이니... 다 거짓말이잖아요.”하경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서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그걸...”“제 직업은 단순히 최하연 사장의 경호원이 아니에요. 전 원래 프로그래머거든요. 병원 시스템 따위는 제게 별거 아니죠.” 하경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웃음에 서영은 더욱 초조해졌다.서영이 병실 밖으로 완전히 나가기 직전, 하연은 한 마디 던졌다.“이 대표한테 병세를 조작한 일에 대해서 경찰에게 뭐라고 설명할지 물어보는 게 좋을 거야.”하경은 하연이 다가오자 말했다.“또 담배 피우네.”하연은 강한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예요.” 하연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근데 양 형사님은 왜 오신 거예요?”“우리 나 서장님께서 입원 중이라, 보고드리러 왔어요.” 양한빈은 손에 든 자료를 잠시 들었다가 솔직하게 말했다.하연은 아까 했던 추측이 거의 맞았음을 깨달았다.“그쪽 상관은 꽤 높은 분이신가 보네요... 사복 경찰까지 있던데, 그래서 감히 올라가질 못했어요.” 하연은 반쯤 농담처럼 말하며 상황을 떠보았다.양한빈은 고개를 돌려 하연을 보더니, 조용히 그녀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우리 나 서장님, 그 정도로 높은 분은 아니에요. 윗분이 방금 B시에 도착하셨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여기서 요양 중이세요.”사복 경찰이 동원될 정도면 분명 중요한 인물일 텐데, 하연은 호기심이 생겼다.“누군데요?”양한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건 말해드릴 수 없네요, 최 사장님, 저 이제 올라가야 해요.”“아, 그래요.” 하연은 잠시 더 기다려볼까 했지만, 상혁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그때 하경이 전화를 걸어왔다.[하연아, 그 ‘아는 사람’이랑 이렇게 오래 얘기할 일이야? 할아버지께서 빨리 집에 와서 저녁 먹으라고 하셔.]결국 하연은 병원을 떠나기로 했고, 가는 길에 그녀는 상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아까 시립병원에 있었어요?]밤이 되어서야 상혁의 답장이 왔다. [한 어르신을 뵈러 왔어. 날 봤어?]하연은 그제야 안심했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상혁은 솔직히 말했으니, 더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다음 날은 설날 전날인 섣달그믐이었다.하연은 이른 아침부터 셋째 오빠인 최하성에게 끌려 나와 불꽃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그 소리에 하경은 잠에서 깨어나 헝클어진 머리로 방에서 나왔다. “너희 둘, 너희가 아직도 애들인 줄 아는 거야? 지금 몇 시야?”최동신은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즐기며 웃었다.“벌써 해가 중천에 떴어. 네가 어제 또 밤을 새웠으니까 그런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상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하연이 서 있었다.오늘 하연은 평소처럼 가벼운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는 간단한 큐빅 머리 장식으로 틀어 올렸으며, 달빛 같은 연백색 슬림핏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슬림핏 원피스는 입는 사람의 분위기를 타는 옷인데, 하연의 모습은 딱 적당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그녀의 우아한 몸매를 돋보이게 했다. 그 모습은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으며, 전혀 날카로운 기운이 없었다.상혁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하연이 자신의 팔짱을 끼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부상혁의 아내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떠올랐다.가슴 속이 따뜻해졌고, 그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연은 맑고 생기 있는 목소리로 인사했다.“동건 삼촌, 진숙 이모.”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였고, 조진숙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하연을 얼른 끌어안았다.“내가 그랬잖니, 이 옷이 너에게 어울릴 거라고. 정말 그렇구나!”“역시 이모는 눈썰미가 좋으세요. 오늘 오빠들도 저한테 다 예쁘다고 했어요.”“상혁이는 어때? 상혁이는 예쁘다고 생각하니?”상혁은 빛이 비치는 자리에서 하연을 감상하며 말했다.“예뻐요.”하연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상혁의 눈앞에서 눈을 깜빡였다.부동건 일가는 개인 룸에 들어가 서로 인사를 나눴고, 모처럼의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 나갔다.하연은 상혁의 옆자리에 앉았고,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진짜로 예뻐요?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이에요?”상혁은 한 손으로 그녀의 의자 뒤에 얹고, 한쪽 손으로 하성과 건배하며 조용히 대답했다.“나한테만 보여준다면 더 예쁠 것 같아.”하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테이블 아래에서 상혁의 팔을 슬쩍 꼬집었다.이번 설은 가족 모두가 오랜만에 모인 특별한 해였다. 최동신이 먼저 건배사를 했고,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명목상으로는 모두 한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다.상혁도 모처럼 편안하게 느끼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하연은 약간의 술을 마셨고, 얼굴이 붉게
상혁은 메시지를 다 읽고도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화면은 점점 어두워졌고, 그는 그저 술잔을 흔들더니 단숨에 마셨다. “오빠, 몸이 안 좋으면 술은 조금만 마셔요.” 하연은 최동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최동신은 늦게까지 있을 수 없어 먼저 돌아갔다.하민은 조금 취한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하연이 이제 정말 다 컸구나. 사람을 챙길 줄도 알고.”“오빠, 무슨 걱정 있어요?” 하연이 물었다.하민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셔츠의 단추를 풀고, 붉어진 탄탄한 가슴이 드러냈다. 그는 커다란 창 너머로 반짝이는 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럴지도 모르지.”하민의 별처럼 차가운 눈빛 속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하연은 궁금했지만 감히 더 묻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담하게도 추측했다. ‘어쩌면 이전에 잠깐 얘기가 나온 그 여자 친구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하연은 아직 그 여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민이 그 여자를 철저히 숨겼기 때문이다.하연이 더 이상 묻지 않으려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직원인 줄 알고 대답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한껏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며 다소 거친 기운을 풍겼다.하연은 그들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졌다.부남준이었다!부남준은 흰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키가 크고 매력적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입은 옷은 하연이 입은 것과 똑같았으며, 그저 머리 모양만 다를 뿐이었다.이 광경은 너무나도 기묘했다.남준은 그 여자의 손을 잡고 웃으며 앞으로 다가왔다.“무례를 범한다는 건 알지만, 오늘 설날이잖아요. 아버지랑 진숙 이모가 여기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술 한 잔 올리러 왔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연은 본능적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상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술잔을 쥔 손가락은 하얗게 변했고,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는 폭발 직전의 분노가 숨겨져 있었다.조진숙은 더더욱 떨림을 억누를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