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상혁의 품에 기대어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꼬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 둔 게 있는데, 오빠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오빠가 동의하지 않으면 나는 안 할게요.”이토록 진지한 모습을 본 상혁은 하연의 긴장과 불안을 느꼈고, 하연의 손을 잡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말해 봐.”“한서준 아버지 본처의 죽음을 조사하고 싶어요. 그 죄를 저지른 자가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겠어요.”하연의 말이 끝나자 상혁의 입술이 서서히 굳어갔다.“한서영과 이 사건이 큰 관계가 없다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오늘 할머니 말씀을 듣고 난 후로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요. 알면서도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하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설명을 마치고 상혁의 대답을 기다렸다.상혁은 눈을 내려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한씨 집안의 일을 파헤친다는 건 한서준과 한서준 쪽의 모든 사람과의 대립을 의미하는 거야. 그럴 각오가 돼 있어?”왜냐하면, 조사의 결과는 분명 한씨 집안에 큰 타격을 줄 것이고, 나아가 HT그룹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하연은 상혁이가 자신이 한서준과의 관계를 신경 쓰는 줄 알고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조사를 결심한 이상, 한서준이 무서워서 못 할 이유는 없어요. 우리 둘 사이엔 이미 그럴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요.”상혁은 소파에 반쯤 몸을 기대고 근육질의 가슴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럼 넌 어떤 신분으로 조사할 생각이야?”하연은 순간 얼어붙었다.사실 상혁의 말이 맞았다. 전처라는 신분도, 사장이라는 신분도 이 문제를 조사하는 데 있어선 모두 월권이었다.“조사할 이유는 뭐야? 단순히 동정심 때문이야?”상혁은 하연의 귀 옆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하연이 왜 이러는지 상혁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 드문 위기감이 일어났다. 하연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했고, 볼은 약간 부풀어 있었다.
상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연이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최하연, 진짜 날 사랑한다고?” “네, 사랑해요, 부상혁 씨, 날 믿을 수 있겠어요?” 하연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는데, 상혁이 정말 언젠가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상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고, 하연의 머리를 눌러 품에 꽉 껴안았다. “믿어, 네가 한 말은 다 믿을 수 있어.”지금, 상혁은 마음속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던 수많은 말들을 끝내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대신 하연을 믿기로 했다.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만족스러운 듯 잠시 안겨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아! 깜빡했어요! 진숙 이모의 비행이 당장 내일인데, 아직 아무것도 준비 안 했어요.”상혁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뭘 준비해야 하는데?”“모레가 설인데, 아무것도 안 샀잖아요.”“가사도우미가 다 알아서 살 거야.”“그건 달라요. 내가 직접 준비해야 분위기가 살죠.” 하연은 서둘러 상혁을 끌어당기며 마트에 가서 설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고급 마트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설을 앞두고 직접 장을 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특히 하연과 상혁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직접 장을 보러 나온 경우도 꽤 있었다.하연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 카트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상혁이 카트를 밀고 가는 동안, 그녀는 카트 안에 과자들을 안고 다리를 흔들며 물었다.“부상혁 씨, 우리 마지막으로 같이 설을 보낸 게 언제였죠?”“네가 대학교 3학년 때.” 상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컬럼비아 대학은 방학이 늦었잖아. 원래 수업을 빼먹고 D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10년에 한 번 있을 만한 폭설을 만나서 C나라에 갇혀서 그곳에서 설날을 보냈었지.”하연은 그때 일이 떠올라 깔깔 웃었다.“그때, 할아버지께서 전화를 거셔서 우리를 엄청나게 혼내셨죠.” “C나라에서 머물던 집에서 너는 만두를 만들려고 했지만, 끓는 물에 넣자마자 다 터져버렸지.” 상혁은
하연은 그 말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빨리 아이를 낳으세요라니, 너무 민망해!” 하지만 상혁은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카트에서 빨간 봉투를 꺼냈다. 그는 봉투에 현금 열 장을 넣고는 이함에게 건넸다.“세뱃돈이야.”“아니에요, 너무 과분해요.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이함의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아이한테 주는 거예요.” 상혁은 단호하게 말했고, 이함의 손에 봉투를 꼭 쥐여주었다.하연은 그 장면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냥 받으세요. 오늘 기분이 좋은가 봐요.” 아마도 조금 전에 이함이가 말한 그 ‘빨리 아이를 낳으세요'는 말이 상혁의 마음을 건드린 모양이었다.마트를 나서면서 하연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아니, 왜 우리가 결혼했다고 말했어요?”“어차피 할 일인데, 미리 말한 것뿐이야. 거짓말은 아니지.” 상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하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오빠는 아이를 좋아하나 봐요.”“그냥 그럭저럭. 네가 낳지 않아도 상관없어.”상혁은 아이가 엄마의 몸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하연의 건강이 우선이었다.“남자아이랑 여자아이 중 뭐가 좋아요?” 하연이 상혁의 앞에서 깡충깡충 뛰며 물었다.상혁은 그녀가 걸어가는 길을 지켜보며 말했다.“여자아이.”“왜요?”“너를 닮은 여자아이니까.”하연은 미소를 참지 못했다. 비록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는 것이 아직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지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졌다.다음 날.하연은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오는 걸 보고 놀랐다. 조진숙과 함께 부동건까지 온 것이다. 부동건은 조진숙의 가방과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상장기업의 회장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상혁도 예상치 못한 듯 물었다.“왜 가사도우미는 데려오지 않으셨어요?”“네 아버지가 안 데려와도 된다고 하더라. 자기가 둘 몫은 한다고.” 조진숙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부동건을 돌아보았다.부동건은 억지로 미소를 지
하경과 함께 온 또 다른 사람은 DS그룹 법무팀의 변호사였다. 하연은 맨 앞에서 걸어가며 VIP 병실 구역으로 향했다. 그녀는 한 병실 앞에서 멈춰서 노크했다. 문을 연 사람은 간병인이었다. 상대방은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이방규 대표님을 뵈러 왔어요. 안에 계신가요?” “그분은...” 간병인은 잠시 망설였다. “미리 약속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누구야?”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는데, 다름 아닌 한서영이었다. 간병인은 몸을 옆으로 비켰고, 한서영은 하연을 보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정말 귀한 손님이시네. 최 사장님 같은 고귀한 분이 병원에 오다니, 체면이라도 깎이는 거 아니야?” 하연은 서영을 무시하고 곧장 병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방규는 병실에 없었다. “내가 너더러 들어오라고 했어? 뭘 봐?” 서영은 하연을 밀어내려 했지만, 서영의 손목은 하경에게 단단히 붙잡혔다. “저기요, 너무 가까이 오지 마세요.” 하경이 말했다. “너는 뭐야? 최하연의 경호원이야? 감히 내 손을 잡다니, 당장 놔!” 서영은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하경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어떤 의미로는 맞는 말이네요. 어릴 때부터 난 촤하연의 경호원이었거든요.” 그는 손에 힘을 주었고, 서영은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렀다. “놔! 내 손 부러지겠어, 제발!” 하연은 웃음을 참으며 하경에게 눈짓을 보냈다. “난 너를 찾으러 온 게 아니야. 이 대표는 어디 있어?” 서영은 손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너한테 보고라도 해야 해? 넌 뭐든 다 알 수 있다면서, 왜 안 찾아보는 건데? 혹시 최 사장님도 못 알아내는 게 있는 건가?”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차분히 대답했다. “이 대표와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왔어. 네가 이 대표를 대신할 권한이 있다면 너랑 얘기해도 돼.” 서영은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속
하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한서영, 난 왕진을 직접 만났어. 왕진은 이미 네 이름을 불었다고.” 이 말을 들은 서영은 분노와 충격에 휩싸여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절대 그럴 리 없어. 내가 말했잖아, 난 그런 짓을 한 적 없어.”“그래? 그럼 왕진이 거짓말했다는 건데... 경찰이 완진을 다시 심문해야겠네.” 하연은 여유롭게 서영을 압박하며, 그녀가 혼란과 불안 속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서영은 이를 악물고 하연을 노려보며 점점 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내 변호사가 너한테 가짜 증언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려줄 거야.”하연은 그런 서영을 신경 쓰지 않고 창가의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상혁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강한 담배 연기는 그녀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어떻게 되든, 이제 한서영과 왕진 사이의 신뢰는 크게 흔들릴 것이다. 꼬리를 밟힌 쥐는 결국 큰 소동을 일으키는 법이니까.변호사가 법률 조항을 하나씩 설명하는 동안 서영은 점점 더 불안해하며 소리쳤다.“나가! 듣기 싫어!”서영은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막 병실로 돌아온 하경과 마주쳤다. 하경은 손에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방금 이 복도의 CCTV를 입수했어요. 이방규 대표님은 완전히 의식이 있는 상태로 병실을 나가셨어요. 골절이니, 뇌진탕이니... 다 거짓말이잖아요.”하경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서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그걸...”“제 직업은 단순히 최하연 사장의 경호원이 아니에요. 전 원래 프로그래머거든요. 병원 시스템 따위는 제게 별거 아니죠.” 하경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웃음에 서영은 더욱 초조해졌다.서영이 병실 밖으로 완전히 나가기 직전, 하연은 한 마디 던졌다.“이 대표한테 병세를 조작한 일에 대해서 경찰에게 뭐라고 설명할지 물어보는 게 좋을 거야.”하경은 하연이 다가오자 말했다.“또 담배 피우네.”하연은 강한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예요.” 하연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근데 양 형사님은 왜 오신 거예요?”“우리 나 서장님께서 입원 중이라, 보고드리러 왔어요.” 양한빈은 손에 든 자료를 잠시 들었다가 솔직하게 말했다.하연은 아까 했던 추측이 거의 맞았음을 깨달았다.“그쪽 상관은 꽤 높은 분이신가 보네요... 사복 경찰까지 있던데, 그래서 감히 올라가질 못했어요.” 하연은 반쯤 농담처럼 말하며 상황을 떠보았다.양한빈은 고개를 돌려 하연을 보더니, 조용히 그녀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우리 나 서장님, 그 정도로 높은 분은 아니에요. 윗분이 방금 B시에 도착하셨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여기서 요양 중이세요.”사복 경찰이 동원될 정도면 분명 중요한 인물일 텐데, 하연은 호기심이 생겼다.“누군데요?”양한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건 말해드릴 수 없네요, 최 사장님, 저 이제 올라가야 해요.”“아, 그래요.” 하연은 잠시 더 기다려볼까 했지만, 상혁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그때 하경이 전화를 걸어왔다.[하연아, 그 ‘아는 사람’이랑 이렇게 오래 얘기할 일이야? 할아버지께서 빨리 집에 와서 저녁 먹으라고 하셔.]결국 하연은 병원을 떠나기로 했고, 가는 길에 그녀는 상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아까 시립병원에 있었어요?]밤이 되어서야 상혁의 답장이 왔다. [한 어르신을 뵈러 왔어. 날 봤어?]하연은 그제야 안심했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상혁은 솔직히 말했으니, 더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다음 날은 설날 전날인 섣달그믐이었다.하연은 이른 아침부터 셋째 오빠인 최하성에게 끌려 나와 불꽃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그 소리에 하경은 잠에서 깨어나 헝클어진 머리로 방에서 나왔다. “너희 둘, 너희가 아직도 애들인 줄 아는 거야? 지금 몇 시야?”최동신은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즐기며 웃었다.“벌써 해가 중천에 떴어. 네가 어제 또 밤을 새웠으니까 그런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상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하연이 서 있었다.오늘 하연은 평소처럼 가벼운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는 간단한 큐빅 머리 장식으로 틀어 올렸으며, 달빛 같은 연백색 슬림핏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슬림핏 원피스는 입는 사람의 분위기를 타는 옷인데, 하연의 모습은 딱 적당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그녀의 우아한 몸매를 돋보이게 했다. 그 모습은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으며, 전혀 날카로운 기운이 없었다.상혁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하연이 자신의 팔짱을 끼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부상혁의 아내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떠올랐다.가슴 속이 따뜻해졌고, 그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연은 맑고 생기 있는 목소리로 인사했다.“동건 삼촌, 진숙 이모.”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였고, 조진숙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하연을 얼른 끌어안았다.“내가 그랬잖니, 이 옷이 너에게 어울릴 거라고. 정말 그렇구나!”“역시 이모는 눈썰미가 좋으세요. 오늘 오빠들도 저한테 다 예쁘다고 했어요.”“상혁이는 어때? 상혁이는 예쁘다고 생각하니?”상혁은 빛이 비치는 자리에서 하연을 감상하며 말했다.“예뻐요.”하연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상혁의 눈앞에서 눈을 깜빡였다.부동건 일가는 개인 룸에 들어가 서로 인사를 나눴고, 모처럼의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 나갔다.하연은 상혁의 옆자리에 앉았고,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진짜로 예뻐요?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이에요?”상혁은 한 손으로 그녀의 의자 뒤에 얹고, 한쪽 손으로 하성과 건배하며 조용히 대답했다.“나한테만 보여준다면 더 예쁠 것 같아.”하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테이블 아래에서 상혁의 팔을 슬쩍 꼬집었다.이번 설은 가족 모두가 오랜만에 모인 특별한 해였다. 최동신이 먼저 건배사를 했고,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명목상으로는 모두 한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다.상혁도 모처럼 편안하게 느끼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하연은 약간의 술을 마셨고, 얼굴이 붉게
상혁은 메시지를 다 읽고도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화면은 점점 어두워졌고, 그는 그저 술잔을 흔들더니 단숨에 마셨다. “오빠, 몸이 안 좋으면 술은 조금만 마셔요.” 하연은 최동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최동신은 늦게까지 있을 수 없어 먼저 돌아갔다.하민은 조금 취한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하연이 이제 정말 다 컸구나. 사람을 챙길 줄도 알고.”“오빠, 무슨 걱정 있어요?” 하연이 물었다.하민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셔츠의 단추를 풀고, 붉어진 탄탄한 가슴이 드러냈다. 그는 커다란 창 너머로 반짝이는 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럴지도 모르지.”하민의 별처럼 차가운 눈빛 속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하연은 궁금했지만 감히 더 묻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담하게도 추측했다. ‘어쩌면 이전에 잠깐 얘기가 나온 그 여자 친구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하연은 아직 그 여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민이 그 여자를 철저히 숨겼기 때문이다.하연이 더 이상 묻지 않으려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직원인 줄 알고 대답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한껏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며 다소 거친 기운을 풍겼다.하연은 그들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졌다.부남준이었다!부남준은 흰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키가 크고 매력적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입은 옷은 하연이 입은 것과 똑같았으며, 그저 머리 모양만 다를 뿐이었다.이 광경은 너무나도 기묘했다.남준은 그 여자의 손을 잡고 웃으며 앞으로 다가왔다.“무례를 범한다는 건 알지만, 오늘 설날이잖아요. 아버지랑 진숙 이모가 여기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술 한 잔 올리러 왔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연은 본능적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상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술잔을 쥔 손가락은 하얗게 변했고,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는 폭발 직전의 분노가 숨겨져 있었다.조진숙은 더더욱 떨림을 억누를
“남준 씨, 지금 당신 날 피한 거예요?” 다영은 손에 쥔 라이터를 꽉 쥐었다가 조용히 주머니에 넣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최근 들어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졌고, 남준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상황 역시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두 사람이, 이제는 마치 남이 된 것 같은 이 분위기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남준은 정면만을 응시한 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요.” 다영의 눈에 순간적으로 희미한 빛이 스쳤다. 망설임 없이 그녀는 차 뒤쪽을 돌아 조수석 문 앞에 섰고, 문을 열어 차에 탔다.차에 올라탄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놓인 정교한 포장 상자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영은 상자를 들고서 물었다. “남준 씨, 이거... 내 선물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멈추지 않고 상자를 열고 있었다.남준은 살짝 찌푸린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상자를 열어보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볼 뿐이었다.다영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섬세하게 디자인된 고급스러운 목걸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독특한 디자인의 목걸이는 푸른빛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조명에 반사되어 빛나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말 예쁘네요...” 다영은 감탄하며 목걸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환한 미소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이거 나한테 걸어줄 수 있어요?”남준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어졌고,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목걸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남아공에서 천연으로 채굴된 최고급 보석입니다. 순도와 투명도가 모두 최상급이고, 무엇보다도 희소성이 높아 전 세계에 단 하나뿐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하기에 가장 적합한 아이템이죠.’ 그때 들렸던 매장의 직원 설명이 귀에 맴돌았다.
“나... 나 술 안 취했어.” 남준은 말끝이 흐려졌고, 아까의 당당한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하연은 남준의 이상한 태도를 감지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거기에는 상혁이 어느새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혼자 있는 남자의 긴 그림자가 조명 아래 길게 드리워졌고, 묵직한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오빠...” 하연은 입을 열어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상혁은 모든 상황을 이미 이해한 듯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편안한 눈빛을 주었다. 단 한 번의 눈맞춤으로 하연은 마음속에 있던 불안함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신뢰가 있었다.상혁은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바람이 차니까 빨리 들어가자.”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응, 알았어요.”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서로 맞물리고,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서로에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장면은 남준의 가슴 깊은 곳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남준은 표정만큼은 최대한 담담하게 유지하며 시선을 애써 다른 곳으로 돌리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DS그룹 연말 행사가 있다고 해서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들렸어, 마침 형도 여기 있었네.”상혁은 하연의 손을 살며시 감싼 채 고개를 들고 남준을 바라보았다. 상혁의 눈빛은 깊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왜 이젠 DS그룹 일에도 신경이 쓰여? 모르는 사람은 보면 네가 DL그룹 버리고 DS그룹으로 옮기려는 줄 알겠어.” 남준은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상혁의 말에는 은근한 경계와 조롱이 담겨 있었다. 남준은 불리한 상황임을 깨닫고 억지로 웃으며 변명했다. “형,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분위기나 좀 보려고 들른 거야.”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이미 간파하고
“시간 없어.” 하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메시지를 확인했고, 내용을 본 후 손에 힘이 들어갔다. 10분 후.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남준의 눈에 띄는 빨간색 스포츠카가 비상등을 켠 채 호텔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번화한 호텔 입구에서 유독 도드라져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잠시 후, 차 문이 열리고 남준이 내렸다. 그는 오늘 블랙 패딩을 걸친 채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며 여유롭게 하연을 바라보았다. “역시 올 줄 알았어.” 남자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고, 말투에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찬바람이 부는 겨울밤, 차가운 바람이 하연의 얼굴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하연은 몇 걸음 옮긴 뒤 걸음을 멈췄고, 남준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손을 들어 흩날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말해. 문자에 적힌 상혁 씨하고 관련해서 중요한 일이 뭔데?”남준은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형이 걱정돼?”“그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하연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남준은 그녀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더니, 불과 반걸음 거리에 멈춰서 몸을 약간 숙였다. “너의 그 관심 나 한테도 좀 나눠 주면 안 돼?”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내뱉은 말에 은은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술 마셨어?”남준은 입가를 비틀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혹시 나 걱정하는 거야?”“착각하지 마.”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부남준,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여기서 시간 끌 여유 없어.”남준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어딘가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너 갈수록 성격이 우리 형이랑 닮아가네. 역시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하연
하연은 밝게 웃으며 상혁이 건넨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갓 짠 오렌지 주스는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부 대표님이 직접 짠 오렌지 주스라 그런가, 확실히 맛이 다르네요. 정말 맛있어요.”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맛있으면 자주 짜줄게.” 하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감사히 잘 마실게요, 부 대표님!” “아니, 한참을 찾았는데 여기서 둘이서만 꽁냥거리고 있었네?”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던 하성이 두 팔을 교차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혁, 너 요즘 이 녀석을 너무 애지중지하더라. 그러다 버릇 나빠지겠어.” “오빠!!” 하연은 볼이 부풀어올라 약간 투덜거렸지만, 옆에 있던 상혁은 태연하게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애지중지하든 말든 내 마음이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하성은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투항했다. “알았어, 알았어. 난 그냥 너희 둘이 잘 지내는 거 보니 마음이 놓여서 하는 소리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계속 이렇게 잘 지내줘, 아주 보기 좋아!”그때 하연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부남준’이라는 이름이 뜨자 그녀는 잠시 긴장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오빠들, 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하연이 자리를 비우고 복도로 나가자, 하성은 방금 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상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요즘 너희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있더라. 동건 삼촌 쪽에서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상혁은 하연이 마시다 남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시선을 복도 쪽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첩이 ‘본처’의 자리를 노리는 거야. 흔한 일이잖아.” 하성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동건 삼촌이 그 여자를 꽤 오랫동안 봐줬던 모양이던데. 이제는 꽤 많은 걸 쌓아둔 듯하고, 한번 크게 판을 벌일
“뭐 하는 거야? 빨리 이 주스를 연회장으로 가져가!” 홀 매니저가 다가와 살짝 꾸짖었다. 여자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질투로 번들거리던 눈빛을 감추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다영은 태어나서 가사일 한 번 손댄 적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매니저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너 신입이야?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슴 속에서 송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 친척 중 하나가 DS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엔 그 사람 신분을 쓰는 게 편할 거야.” 침착함을 되찾은 다영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고객지원부의 진미입니다. 연회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지원 나온 거예요.” 매니저는 그녀의 명찰을 한 번 흘깃 본 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신입이라면 전면에 나가면 실수하기 쉬워. 내실에서 돕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다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회장을 바라봤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하연과 상혁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2층 휴게실 안. 원신명은 한 손에 신선한 오렌지 한 봉지를, 다른 손에 포장을 뜯지 않은 녹즙기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오렌지와 녹즙기입니다.” 원신명은 궁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드시는 건가요?” 상혁은 짧게 대답했다. “원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 원신명은 얼른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대표님,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와이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와이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그 단어를 그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신명은 곧 깨달았다. ‘아, 대표님이 직접 최하연 씨를 위해 주스를 준비하시고 싶은 거구나!’ “원 비서, 연말인데도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