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준의 얼굴이 잠시 굳었지만, 곧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제 결혼식에 다른 사람은 안 와도 되지만, 최 사장님이 없으면 섭섭할 겁니다.” 남준은 마지막 말을 하며 상혁을 향해 도전적인 시선을 보냈다.상혁은 남준을 응시하며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남준의 결혼식이 언제든, 나와 하연이는 성대한 선물을 보낼 거야.”남준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여자 친구’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넌 아직 최 사장님한테 배울 게 많아. 가서 술 한 잔 따라드려.”‘여자 친구’는 부남준의 말에 따라 술잔을 들고 하연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웃음은 억지스러웠다.“최 사장님, 오래전부터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남희입니다. 앞으로 자주 뵙겠네요. 그때마다 최 사장님께서 제게 관대하시길 바랍니다.”남희는 술잔을 내밀었지만, 하연은 그 잔을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저는 낯선 사람과 술을 마시지 않아요.”남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부남준의 여자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대접받을 줄 알았지만, 하연은 전혀 그렇지 않은 눈치였다.하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말아요. 남희 씨를 겨냥한 건 아니에요. 남준의 여자 친구가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은 될 테니, 그분들의 술을 다 마시기엔 제 간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요.”남준은 하연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하연은 상혁의 여자 친구로서 직접 ‘남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바로 그때, 하성이 다가와 장난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맞아요. 남준 도련님이 술을 따라주더라도, 아무런 신분이 없다면 그 술은 마실 수 없죠.”하성의 말은 분명히 남준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비꼬는 것이었다.하경도 말을 이어받았다.“생각해 보니, 나도 오늘이 남준 도련님을 처음 보는 날이네요. 소문대로 아주 매력적이네요.”하민은 다소 품격 있게 사과했다.“우리 집 사람들은 직설적인 편입니다. 부남준 사장님,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부동건은 당혹스럽고 불편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하성과 하경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하민이 먼저 입을 열어 동생들을 제지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자.” 두 사람은 억지로 입을 다물고 외투를 챙겨 입으며 떠날 준비를 했다. 하민은 떠나기 전, 하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홀 안에는 이제 네 사람만 남았다. 홀은 휑했고, 사람들의 발길이 떠나자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하연은 홀 중앙에 홀로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상혁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편, 부동건은 계속해서 변명하고 있었다.“난 25살 때 당신을 만났어. 당시 우리 가문에서는 당신이 내 아내로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했었지. 어른들을 나에게 내조해줄 수 있는 현모양처를 원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모든 면에서 뛰어났고, 너무 독립적이라는 이유로 우리 가문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외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신과 결혼했고, 우리는 수십 년을 함께했어. 나는 지금까지도 당신을 지켜왔어. 당신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오늘 일은 정말 몰랐어.”부동건의 눈에는 오직 조진숙만이 보였고, 그는 진심으로 해명하고 있었다.하지만 조진숙은 그의 말을 듣고 일어서며 차갑게 말했다.“그렇지만 당신은 나를 속였어. 당신이 송혜선과 바람을 피웠을 때, 상혁이는 겨우 세 살이었어! 그 여자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난 아직도 당신의 추악한 비밀을 몰랐을 거라고!” 조진숙은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당시의 고통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부동건의 손을 뿌리치고 바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여보!” 부동건은 그녀를 쫓아 나갔다.부동건과 조진숙이 떠난 뒤,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넓은 홀 안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하연은 그 자리에 홀로 남겨진 상혁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그에게 다가갔다. 상혁은 무표정했고, 평소의 차분하고 따뜻한 모습과는 달리 극도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하연은 그의 곁에
하연은 상혁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토록 인내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하연의 목덜미를 스치며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났다.“그 이후로 난 평정과 인내를 배웠어. 어머니는 부남준의 존재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거라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절대 DL그룹을 놓치면 안 된다고 하셨지.”“어머니는 스스로 능력이 있었고, 내 능력도 믿으셨지만, 부남준에게 DL그룹을 넘겨줄 수 없다고 하셨어. 그래서 난 싸워야 했지.”하연은 조진숙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존심 강한 여자가 어떻게 송혜선 같은 작은 사람에게 밀릴 수 있겠는가? 더구나 자신보다 우월해지는 걸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하연은 마음이 조여오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상혁을 더 꽉 안아주었다.“그동안 오빠도 많이 참았군요.”상혁은 살짝 고개를 들며, 붉게 물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이제는 익숙해졌어. 인내하고, 때를 기다리는 게 내 일상이었으니까.”하연은 이런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상처받고, 무너진 모습은 매우 낯설었다.하연은 손을 뻗어 그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기 위해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래서 내가 한서준이랑 결혼할 때, 오빠가 달려와서 결혼식을 망치지 않은 거군요.”상혁은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약간 억울한 어조로 말했다.“네가 행복하지 않을까 봐 그런 거야. 난 네가 행복하길 바랐어.”“정말 대단하시네요, 부상혁 씨.”하연은 상혁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자신의 눈을 바라보게 했다.“그럼 오빠는 그 이후로 후회한 적 있어요?”상혁은 그녀의 질문에 맑은 눈으로,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매번 꿈에서 깰 때마다 미친 듯이 후회했지.”하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내 꿈도 꿨어요? 무슨 꿈이었어요?”상혁은 이미 마음이 조금 진정된 상태였고, 이제는 약간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는 말을 아끼며, 하연의 허리를 가볍게 꼬집었다.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하연은 핸드폰을 품에 안고, 자신이 입고 있는 호텔 가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조금 실망스러운 듯,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을 지었다.[오빠는 지금 샤워 중이야. 근데 내가 상상했던 건 이게 아니었어.]원래는 예쁜 옷을 입고, 달콤한 향수를 뿌리고, 온몸을 정성스럽게 관리하고 나서야 할 일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즉흥적인 느낌이 들었다.[하연아, 그런 일은 시간을 가리지 않아. 분위기만 맞으면 되는 거지.] [부상혁을 확실히 사로잡고, 끝나면 꼭 피드백 줘! 제발!] 하연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는데, 이렇게 긴장한 적은 없었다.욕실 안에서 상혁은 샤워를 마치고 허리에 수건을 둘렀다. 물방울은 그의 단단한 복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어떻게 됐어?”[송혜선이 분명히 왔습니다. 부남준이 소유한 집에 머물고 있고요. 아, 그 남희라는 여자는 B시의 한 클럽 주인이에요. 주로 사업가들과 어울리긴 하지만, 부남준과 어떤 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아요. 확실한 건 그 여자가 부남준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황연지가 꼼꼼하게 조사 내용을 보고했다.“한창명이 막 B시에 도착했는데, 바로 병원에 들어갔어. 사람들이 한창명을 만만하게 보는 모양이야. 한창명은 B시에서 새해를 맞이할 준비 하고 있어. 우리도 한창명의 선물에 조금 더 추가해 주자.”상혁은 마치 내일 식사 메뉴를 말하는 듯 태연한 목소리였다.[그럼 미리 한 검사장님께 통보할까요?]“설날 첫날이 좋겠지.”전화가 끊겼을 때, 이미 시간이 늦어서 하연은 설레는 마음이 점차 가라앉아 이미 베개를 끌어안고 졸고 있었다.상혁은 그녀 곁으로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하연은 금방 눈을 떴다.“오빠, 샤워 다 했어요?”“응.”“근데 나 너무 졸려요.”하연은 귀엽게 투덜댔다.“바보야, 자자.” 상혁은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두 사람은 함께 누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연은 이 상황이 조금 이상
다음 날 아침, 하연은 온몸의 통증에 깨어났다.그제야 그녀는 로맨스 소설에서 묘사된 남녀가 관계를 가진 후, 여주인공이 ‘차에 치인 것 같은 고통’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눈을 살짝 뜨니, 그녀는 상혁의 품에 안겨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상혁이 평온하게 자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평소의 차가운 표정이 사라지고, 온화함만이 남아 있었다.하연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렇게 만족스럽고 안락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마치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은 것 같았다.그녀는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상혁의 오뚝한 콧대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나 그 순간, 상혁의 손이 빠르게 하연의 손을 잡아챘고, 눈을 뜨며 말했다.“몰래 날 훔쳐보고 있었어?”하연은 놀라며 물었다.“오빠, 벌써 깨어 있었군요.”상혁은 그녀를 더 꽉 끌어안으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네가 조금만 움직여도 난 바로 깨어나.”“설날인데, 우리 할아버지께 일찍 세배하러 가야죠.”하연은 일깨워줬다. 상혁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꼬집으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넌 일어날 수 있겠어?”하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제의 상황은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상혁이 한없이 강렬했고, 그와의 밤은 새벽 네다섯 시까지 이어졌으며, 날이 밝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지금 하연은 몸이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오빠 진짜 너무해요!”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두 시간 더 자고 나서 일어나.”그는 하연의 볼에 입을 맞췄다.“왜요?”상혁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부상혁 씨! 지금 아침이라고요!”이불 속에서 서로에게 푹 빠진 연인은 쉽게 헤어날 수 없었다....한편, B시 시내의 100여 개의 클럽이 갑작스러운 단속을 맞이했다.단속 대상은 주류, 위생, 보안, 그리고 불법 거래 여부였다.하연과 상혁이 집으로 가는 길에 그들의 차가 ‘NIGHT’라는 B시 최대 클럽 앞을 지나쳤다. 그곳에는 네댓 대의 경찰차가 주차되어 있었다.나
하연이 집에 도착했을 때, 하경과 하성은 이미 집에 없었다. 최동신은 두 사람이 일찍 나갔다고 설명했다. 하성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지만, 하경처럼 집에만 있는 사람이 밖으로 나간 것은 의외였다.하연이 웃으며 말했다.“뭔가 이야깃거리가 생길 것 같네요.”하민은 상석에 앉아 직접 차를 우려냈다. 그의 긴 손가락은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였다.“앞으로 자주 볼 것 같군.”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셨다.“형님이 우려내는 차는 정말 특별하네요. 자주 와서 얻어 마셔야겠어요.”두 사람의 대화는 겉으로 보면 평범한 것이었지만, 서로 무언가를 이미 말하고 있었다.그때, 가정부가 문을 두드렸다.“밖에 한 대의 차가 들어오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연 아가씨의 친구라고 합니다.”“제 친구요?” 하연은 별생각 없이 나가며 말했다.“들여보내 주세요.”하연은 친구들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원으로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니 낯선 번호판이었다.차에서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나운석이었다.며칠 사이 그는 한층 성숙해진 듯 보였고, 하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하연 씨.”“여긴 웬일이에요? 선유의 일은 다 해결됐어요?”“저는 방금 F국에서 돌아왔어요. 일도 잘 풀리고 있고요. 그런데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부상혁 대표님께서 여기 계신다고 해서 온 거예요.”운석의 말투는 가벼웠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그늘이 없었다.그는 아크로리버파크에 먼저 들렀다가, 상혁과 하연이 함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에 온 것이다.“상혁 오빠는 왜 찾는 거예요?” 하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모르고 계셨어요? HL산업은행의 위기가 해결됐어요. 다 부상혁 대표님 덕분이에요.”하연이 놀라며 기뻐했다.“정말이에요? 그럼 이제 하 은행장님도 이씨 가문의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겠네요. 이병규와 확실히 대적할 수 있겠어요.”운석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이죠.”하연은 상
나운석이 떠난 후, 상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자신 뒤에 하연이 다가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오빠가 나운석을 도왔다는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상혁은 창문에 비친 다소 어색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하연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상혁이 한서준과의 관계에서 질투심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운석은 한서준의 친구였다. 상혁이 나운석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예상 밖이었다.“고마워요, 부상혁 씨.” 하연은 상혁이 자신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음을 깨달았다.상혁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나왔고, 하연을 살짝 안으며 말했다. “너와 나 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어. 우리의 인연은 그 이상이니까.”하연은 그의 목에 팔을 걸며 웃음을 지었다. “너무 좋아요. 그럼 부상혁 씨가 나한테 시집에 오는 게 어때요?”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최 사장님이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에 달렸겠지.”하연은 그의 품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온몸을 떨었다. 바로 그때, 문가에서 가벼운 기침 소리가 들렸고, 이 소리의 주인은 최하민이었다.하연은 깜짝 놀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약간 어색하게 뒤로 물러섰다. “하민 오빠.”하민은 별다른 반응 없이 미소를 띠며 문가에 기대섰다. 그는 상혁을 향해 말했다. “방금 들은 소식인데, B시의 100여 개 클럽이 기습 단속을 받았고, 그중 35개에서 위반 사항이 적발됐대. 그중 가장 큰 클럽은 ‘NIGHT’이라고 하는데, 어제 그 남희 씨가 운영하는 곳이라더라.”상혁은 양손을 뒤로 모으고 여유롭게 대답했다. “형님의 소식은 참 빠르군요. 반나절도 안 됐는데 벌써 다 아셨네요.”하민은 그 모든 것이 상혁의 계획임을 깨달았고, 특별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나서면, 반격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해.”상
하연의 탐색하는 듯한 질문에, 하민은 펜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왜, 네 남자 친구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하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저도 확실히 상혁 오빠가 걱정되긴 해요. 부남준은 막 B시에 왔고, 또 WA 그룹의 사업을 손에 넣었어요. 게다가 지금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제일 큰 클럽의 사장과 거래했잖아요. 사실은 부남준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걸 생각하지 못했잖아요. 부남준의 진짜 실력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클지도 몰라요.” 하민은 이 질문에 쉽게 확답을 내리지 않았다.“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 하지만 상혁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게 좋을 것 같아.”하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오빠, 사실 부남준이 절 찾아왔어요.”하민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그 사람이 왜 널 찾아왔지?”“부남준은 제가 WA 그룹 사업의 총책임자인 서태진 대표의 비리 증거를 찾아내길 원했어요.”“넌 뭐라고 대답했지?”“겉으로는 승낙했어요.”“상혁에게 말했니?”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아직은 말하지 않았어요. 부남준이 경계심을 갖게 될까 봐요. 당분간은 비밀로 하고 싶어요.”그 말을 듣자마자, 하민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네가 부남준과 협력하려고 하는구나.”하연이 급하게 대답했다.“상혁 오빠를 도와서 부남준을 무너뜨릴 기회를 잡으려고 해요.”하연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상혁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그가 겪은 많은 고통과 어려움에 마음이 아팠기 때문에 정말로 상혁을 돕고 싶었다.하민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조용히 대답했다.“난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 반대야. 부씨 가문에 아직 시집가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일찍 부씨 가문의 내분에 휘말리는 건 좋지 않은 일이야. 게다가 부남준이 직접 그런 요구를 했다는 건, 그가 확실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야. 만약 일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