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석이 떠난 후, 상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자신 뒤에 하연이 다가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오빠가 나운석을 도왔다는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상혁은 창문에 비친 다소 어색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하연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상혁이 한서준과의 관계에서 질투심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운석은 한서준의 친구였다. 상혁이 나운석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예상 밖이었다.“고마워요, 부상혁 씨.” 하연은 상혁이 자신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음을 깨달았다.상혁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나왔고, 하연을 살짝 안으며 말했다. “너와 나 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어. 우리의 인연은 그 이상이니까.”하연은 그의 목에 팔을 걸며 웃음을 지었다. “너무 좋아요. 그럼 부상혁 씨가 나한테 시집에 오는 게 어때요?”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최 사장님이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에 달렸겠지.”하연은 그의 품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온몸을 떨었다. 바로 그때, 문가에서 가벼운 기침 소리가 들렸고, 이 소리의 주인은 최하민이었다.하연은 깜짝 놀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약간 어색하게 뒤로 물러섰다. “하민 오빠.”하민은 별다른 반응 없이 미소를 띠며 문가에 기대섰다. 그는 상혁을 향해 말했다. “방금 들은 소식인데, B시의 100여 개 클럽이 기습 단속을 받았고, 그중 35개에서 위반 사항이 적발됐대. 그중 가장 큰 클럽은 ‘NIGHT’이라고 하는데, 어제 그 남희 씨가 운영하는 곳이라더라.”상혁은 양손을 뒤로 모으고 여유롭게 대답했다. “형님의 소식은 참 빠르군요. 반나절도 안 됐는데 벌써 다 아셨네요.”하민은 그 모든 것이 상혁의 계획임을 깨달았고, 특별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나서면, 반격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해.”상
하연의 탐색하는 듯한 질문에, 하민은 펜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왜, 네 남자 친구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하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저도 확실히 상혁 오빠가 걱정되긴 해요. 부남준은 막 B시에 왔고, 또 WA 그룹의 사업을 손에 넣었어요. 게다가 지금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제일 큰 클럽의 사장과 거래했잖아요. 사실은 부남준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걸 생각하지 못했잖아요. 부남준의 진짜 실력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클지도 몰라요.” 하민은 이 질문에 쉽게 확답을 내리지 않았다.“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 하지만 상혁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게 좋을 것 같아.”하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오빠, 사실 부남준이 절 찾아왔어요.”하민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그 사람이 왜 널 찾아왔지?”“부남준은 제가 WA 그룹 사업의 총책임자인 서태진 대표의 비리 증거를 찾아내길 원했어요.”“넌 뭐라고 대답했지?”“겉으로는 승낙했어요.”“상혁에게 말했니?”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아직은 말하지 않았어요. 부남준이 경계심을 갖게 될까 봐요. 당분간은 비밀로 하고 싶어요.”그 말을 듣자마자, 하민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네가 부남준과 협력하려고 하는구나.”하연이 급하게 대답했다.“상혁 오빠를 도와서 부남준을 무너뜨릴 기회를 잡으려고 해요.”하연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상혁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그가 겪은 많은 고통과 어려움에 마음이 아팠기 때문에 정말로 상혁을 돕고 싶었다.하민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조용히 대답했다.“난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 반대야. 부씨 가문에 아직 시집가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일찍 부씨 가문의 내분에 휘말리는 건 좋지 않은 일이야. 게다가 부남준이 직접 그런 요구를 했다는 건, 그가 확실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야. 만약 일이
태훈은 이미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실패했기 때문에 잠시 주저했다. “제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하연은 태훈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애가 돌아왔으니, 분명히 증거를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야. 사람을 붙여서 한서준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한서준의 이름이 언급되자, 정태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지금 한서준은 스스로 감당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무슨 일이야?” 하연이 물었다.“어제 ‘NIGHT’에서 불법 거래가 적발됐는데, HT그룹도 한몫했답니다.”하연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한서준이 비록 방탕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HT그룹까지 그런 일에 연루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그가 적어도 가문의 기업을 걸고 도박할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태훈은 덧붙였다. “막 부임한 검찰청 검사장님이 강력하게 수사하고 있으니, 금방 증거를 잡아낼 겁니다. 지금 한서준은 상당히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을 겁니다.”...같은 시각, 시립병원.간호사가 병실을 정리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재킷을 입은 채 병실로 들어와 바닥에 있던 짐을 들었다. “차는 준비됐습니다, 한 검사장님.”40대 중반의 남자는 아직도 숱이 많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웃지 않을 때는 매우 엄숙한 표정이었다. 이 남자는 지팡이에 의지하며 일어섰고,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이 그를 부축했다. “B시에는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많습니다. 병원에서 나가면, 한 검사장님도 몸을 잘 챙기셔야 합니다.”이 말에는 묘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한창명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자기 옆에 있는 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이 준 정보가 아주 정확했군요. 아무래도 스승님께서 제대로 본 모양이에요. 결국, 나도 부 대표님의 손에 놀아난 셈이니까요.” 상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 검사장님은 이번 사건을 통해 B시에서 이름을 떨치셨
HL산업은행의 위기는 설 연휴가 끝난 8일에야 해소되었고, 같은 날 하선유의 퇴원이 이루어졌다. 경찰서에서 사건 처리를 할 때, 하연은 선유와 동행했다.이 사건을 담당하는 사람은 나호중이었는데, 이 사건은 두 명문가 집안이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호중이 직접 처리해야 했다.“현재 증거만으로는 이방규 씨가 성폭행 미수라는 걸 입증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선유 씨가 이방규 씨를 다치게 한 것이 과잉 방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하선유 씨, 중요한 증거를 더 찾을 수 있나요?”선유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꽉 쥐었다.“그 사람이 저를 만졌어요. 제 옷을 찢으려고 했고, 그래서 전 맥주병을 잡았을 뿐이에요. 그 사람이 그렇게 심각하게 다칠 줄은 몰랐어요.”선유의 목소리가 떨리자, 하연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나 서장님, 이방규의 상해진단서를 제출했는데, 이방규의 상처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증거만으로는 사건을 해결할 수 없나요?”나호중은 양쪽의 요구가 엇갈리고 있음을 설명했다.“하선유 씨는 강간미수로 이방규를 기소하고 싶어 하고, 반대로 이방규 씨는 하선유 씨를 상해죄로 고소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법정에서 판가름 나야 할 가능성이 큽니다.”사무실을 나오면서 하연은 선유를 위로했다.“그래도 HL산업은행의 위기가 해소되었으니, 시간이 생겼잖아. 이방규가 소송을 하겠다면, 우리도 맞서 싸우면 돼.”선유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하연의 말에 살짝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네, 다행히도 운석 오빠가 있으니까요.”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아버지가 나운석에 대한 생각이 바꾸셨나 보네?”선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저를 위해 그렇게 큰 위험을 감수하다니, 아버지가 운석 오빠를 칭찬하셨어요. 좋은 인재라고 말씀하시면서요.”경찰서를 떠난 하연은 DS그룹으로 향했다. 오늘은 회사의 첫 업무일이어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순간, 하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해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며느리로서 일을 열심히 했지만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하연은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혜경이는 내 세컨드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의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어떻게 그런 말을?!”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그는 이것이 최음제 때문인 것을 알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채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그래!”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서준을 원망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싼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