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문제없죠. 도련님의 친구분들이라면 분명 정의가 넘치고 의로운 일을 하시는 분들이겠죠.”로스는 한마디 아첨한 후 손을 흔들었다.“풀어줘!”철컹! 철컹!잠겨있던 쇠사슬이 하나둘 전부 풀렸다. 사람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여생을 블랙 프리즌에서 보낼 줄 알았는데 오늘 다시 바깥의 해를 볼 수 있다니, 정말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고맙습니다, 소장님.”여윈 노인 일행은 다시 무릎을 꿇었다.“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 감사 인사는 도련님께 해.”로스는 참으로 눈치가 빨랐다.“고맙습니다, 도련님.”사람들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눈에 비친 유진우는 그야말로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어쨌거나 나도 악당파의 일원인데 당신들이 이곳에서 고생하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죠. 함께 나갑시다.”유진우는 씩 웃어 보이고는 감옥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비록 함께 지낸 시간이 길지 않지만 본성이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고 죽여야 할 사람을 죽였다는 걸 유진우는 알고 있었다. 하여 직접 나서서 그들을 구한 것이었다.블랙 프리즌의 감옥은 지하에 있었다. 유진우가 로스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에 도착했을 때 마침 해가 저물고 있었다.하늘 끝 붉은 석양이 천천히 지고 있었다. 유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심호흡을 한 후 철문을 나섰다.그런데 그가 몇 걸음 옮기자마자 누군가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은발과 빨간 무사 도복 차림에 삼척 청봉검을 메고 있었고 얼굴은 차가우면서도 미인의 기개가 넘쳤다.유진우는 순간 멍해졌고 예전의 기억들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쳤다.“저 여자분은 누구셔? 참 예쁘게도 생겼네.”“목소리 낮춰. 어깨의 배지를 보니까 장군이야.”“아니야, 장군이 아니라 전쟁 여제 배지야.”“뭐? 전쟁 여제라고? 우리 용국에 저런 분이 계셨어?”“세상에나! 설마 저분이 바로 명성이 자자한 홍연 전쟁 여제란 말이야?”그 소리에 현장이 순식간에
조홍연과 유진우의 스스럼없는 모습에 사람들은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방금 출소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조홍연의 부장인 공요와 유란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지금까지 그들이 봐왔던 전쟁 여제는 사람을 죽일 때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인정사정없는 사람이었다. 누구를 만나든 차갑고 도도한 표정이었고 화를 내면 더욱 무서웠다. 상대가 누구일지라도 그녀의 앞길을 막는 자는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이치대로라면 남자가 그녀 몸에 손만 대도 손발이 부러질 텐데 유진우가 머리를 만지는데도 화내기는커녕 되레 활짝 웃고 있었다.이 광경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전쟁 여제에게 이런 다정한 면이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정말로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지고 우러러볼 수조차 없던 전쟁 여제란 말인가?“장혁 오빠, 그동안 잘 지냈어요?”그의 익숙한 얼굴을 보고 있는 조홍연은 마음이 복잡미묘했다.한때 이름을 떨치고 천하를 압도했던 천재의 날카로움은 10년 못 본 사이 전부 다 사라졌다. 소년의 건방짐과 날카롭던 눈빛, 그리고 남다른 분위기도 사라졌고 그 대신 눈에 띄게 점잖아졌다.하지만 어떻게 변해도 그는 여전히 유장혁 오빠였고 그녀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난 잘 지내고 있어. 맨날 자유롭게 다니니까 너무 좋아. 받는 스트레스도 없고 싸울 일도 없고.”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어릴 적 코를 흘리며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애가 10년 사이 어엿한 여인이 되었고 용국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전쟁 여제가 되었다.“장혁 오빠, 그동안 왜 한 번도 연락 안 했어요? 조무진도 오빠의 소식을 알고 있던데 나만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요?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조홍연이 원망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아닌데? 무진이더러 너에게 연락하라고 했었어. 설마 걔가 여태껏 말 안 했던 거야?”유진우는 놀란 척했다. 그의 말에 조홍연의 표정이 급변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살기가 순식간에 뿜어져 나왔다. 등에 메고 있던 삼척 청봉검마저도 윙윙거리며 진동
“긴장해 하지 말아요. 당신과 상관이 없다는 거 아니까. 하지만 당신의 부하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유진우가 귀띔했다.“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조사해볼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로스는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퉁퉁 부은 화려한 복장의 뚱보를 유진우 앞에 데려왔다.“도련님, 바로 이놈이었어요. 죽이든 어찌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손이 더러워지는 게 싫으시면 제가 대신 처리해드리겠습니다.”“도련님, 살려주세요.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돈을 주면서 도련님을 잡아들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뚱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머리를 땅에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흘러내렸다.“지시한 사람이 누구야?”유진우가 캐물었다.“강씨 가문의 도련님 강백준입니다.”뚱보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역시 그 사람이었군.”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의심이었지만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소장님, 차 한 대 좀 빌립시다.”유진우가 말했다.“당연히 문제없죠. 어디로 가실 건가요?”로스가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로얄호텔이요.”유진우가 솔직하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로스가 손을 흔들자 부하가 군용 지프차 한 대를 가져왔다.“아 참, 영감님.”유진우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여윈 노인을 보며 말했다.“갈 곳이 없으면 강린파에 가서 홍길수를 찾으세요. 걔가 알아서 머물 곳을 마련해줄 겁니다.”“고맙습니다, 도련님.”사람들은 바로 허리를 굽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른 말 없이 곧장 차를 타고 떠났다. 강백준이 먼저 그에게 손을 썼으니 당연히 갚아줘야지....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짙게 깔렸다.그 시각 로얄호텔 연회장.직위가 높고 명성과 위세가 대단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술을 들고 즐거움을 나누고 있었다.연회장 2
연회장 입구.블랙 드레스를 입은 이청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아름다운 얼굴에 늘씬한 몸매가 더해져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현장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단연코 눈에 띄었다.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녀에게 쏠렸다. 놀란 사람, 기뻐하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 부러워하는 사람, 그리고 욕망이 샘솟는 사람도 있었다.“언니,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오지 않는 건데. 내가 공을 들여 꾸며도 사람들은 다 언니만 쳐다보잖아요. 내 존재감은 하나도 없어요.”이청아와 동행한 단소홍이 낮은 목소리로 원망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오늘 강 장군의 파티에 참석한다는 소리에 직위가 높고 명성과 위세가 대단한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려고 단소홍은 공을 들여 꾸몄다. 드레스 한 벌이 수천만 원에 달했고 몸에 지닌 액세서리 가격만 해도 수억 원이 훌쩍 넘었다. 정말 큰마음 먹고 돈을 확 질렀는데 결과는 어떠한가?이청아의 옆에 서 있으니 그저 들러리일 뿐이었고 눈길 한번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못생긴 게 아니라 이청아가 워낙에 미모가 빼어났기 때문이다. 그 누구든 이청아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서울 전체에서 이청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사람은 아마 조선미밖에 없을 것이다.“청아 씨, 왔어요?”그때 인파가 갈라지면서 화이트 정장 차림에 신수가 훤한 강백준이 웃으며 다가왔다.“강 장군님.”이청아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청아 씨 오늘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눈이 다 부셔요.”강백준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과찬이십니다.”이청아가 웃으며 예의 바르게 답했다.“강 장군님, 그럼 저는요? 저는 예쁘지 않나요?”단소홍이 불쑥 한마디 하더니 자신의 섹시한 몸매를 한껏 드러냈다.“예뻐요, 예뻐요. 두 분 다 예뻐요.”강백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하... 고맙습니다.”단소홍은 일부러 쑥스러운 척했다.그들이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오만한 태도의 남자와 요염한
이청아가 미간을 찌푸렸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안 되겠어. 진우 씨를 구하러 가야겠어.”그러더니 곧장 자리를 떠나려 했다.“언니.”단소홍이 그녀를 덥석 잡고 설득했다.“언니가 간다고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블랙 프리즌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 곳이에요. 이건 변하지 않는 철칙이라고요. 함부로 움직였다가 괜히 불똥이 튈 수 있어요.”“그럼 어떡해? 그렇다고 진우 씨가 힘들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잖아.”이청아가 조급해했다. 블랙 프리즌은 아주 위험한 곳이다. 그곳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생도 더 많이 하게 된다.“언니, 일단 진정해요. 여기 강 장군님이 계시잖아요.”단소홍의 시선이 옆에 있는 강백준에게 향했다.“강 장군님처럼 지위도 높고 못 하는 게 없는 분이라면 블랙 프리즌에서 사람 하나 빼내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닐 거예요.”“강 장군님?”강백준을 쳐다보는 이청아의 두 눈에 기대가 가득했다.“블랙 프리즌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군부대 사람이라고 해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어요.”강백준이 턱을 어루만지며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장군님께서 도와주신다면 그 어떤 대가를 치르든 상관없어요.”이청아가 진지하게 말했다.“청아 씨가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어요.”강백준은 잠깐 망설이는 척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한번 해볼 수는 있지만 장담은 못 해요. 청아 씨도 알다시피 블랙 프리즌은 일반 감옥이 아니잖아요. 거기서 사람을 빼낸다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기예요.”“되든 안 되든 강 장군님의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이청아는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워했다.“별말씀을요. 친구끼리 도와주는 건 당연하죠.”강백준은 씩 웃더니 부하를 불러 귓가에 대고 뭐라 속삭였다. 부하는 대답한 후 바로 나가버렸다.“우리 애들이 블랙 프리즌의 소장에게 연락할 거예요. 혹시 빼내지 못한다고 해도 내 체면을 봐서 그리 고생하지는 않을 겁니다.”강백준이 자신만만하
“뭐야? 저 자식 벌써 나왔어?”갑자기 나타난 유진우를 보자 이원기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강백준이 그저 도와주는 척만 할 줄 알았는데 진짜로 부하에게 빼내라고 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리고 문제는 강백준이 관계를 동원하여 유진우를 잡아넣었는데 또다시 빼내고 말았다.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괜히 힘만 뺀 격이 돼버렸다.아무리 여자의 마음을 얻고 싶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일을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이상하네. 저 자식 어떻게 나왔지?”눈살을 찌푸린 강백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하더러 블랙 프리즌의 소장에게 연락하라고 한 적이 아예 없었다. 게다가 시간도 맞지 않았다.그렇다면 유진우가 진작 나왔다는 말인데...블랙 프리즌은 한번 들어가면 영영 나오지 못하는 곳이다. 한낱 보잘것없는 녀석이 무슨 재주로 그곳에서 나왔단 말인가?설마 다른 거물이 뒤에서 도와주고 있는 건가?“강 장군님이 이렇게나 대단한 분인 줄은 몰랐어요. 전화 한 통에 유진우를 빼내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단소홍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존경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블랙 프리즌에 수감된 사람을 쉽게 빼내려면 그 권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맙습니다, 장군님.”이청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아... 아니에요. 나에게는 별것도 아닌데요, 뭐.”강백준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진우 씨, 블랙 프리즌에 잡혀 들어갔었다면서? 괜찮아? 다친 데 없어?”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이청아는 유진우에게 다가갔다.“청아 씨도 다 알고 있었구나.”유진우의 표정이 무뚝뚝하여 기쁜지 슬픈지 알 수가 없었다.“나도 방금 들었어. 강 장군님이 나서주신 덕에 당신이 풀려난 거야. 안 그러면 아직도 갇혀있었을 거야.”이청아는 한시름을 놓은 표정이었다.“강백준이 도와줬다고?”유진우가 코웃음을 쳤다.‘날 블랙 프
강백준이 누구인가?연경의 강씨 가문 도련님이자 군부대의 소장이고 발만 굴러도 서울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 거물을 때렸다는 건 목숨을 잃어도 아깝지 않다는 건가?“유진우, 넌 정말 양심도 없어. 이럴 줄 알았으면 강 장군님에게 널 구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고 블랙 프리즌에서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건데.”단소홍이 분노를 터트렸다.도와줬는데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되레 따귀를 때리다니, 정말 이보다 더 배은망덕한 놈은 없을 것이다.“지금 날 때렸어? 날 때린 결과가 어떨지 생각해봤어?”따끔거리는 볼을 움켜쥔 강백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따귀를 맞은 건 또 처음이었다.“때리면 안 돼? 너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는데 당연히 맞아야지.”유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진우 씨, 그게 무슨 말이야? 강 장군님이 당신을 구해줬어.”이청아가 눈살을 찌푸렸다.“날 구해줬다고? 허...”유진우가 코웃음을 쳤다.“날 해친 사람이겠지. 저 자식이 날 모함하지 않았더라면 블랙 프리즌에 들어갈 일도 없었어.”“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못 알아듣겠네.”강백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못 알아들은 거야? 아니면 시치미를 떼는 거야?”유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날 블랙 프리즌에 가두면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벌써 나와서 어쩌나? 결판도 내야 하는데.”“결판을 낸다고? 그럴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강백준의 표정도 얼음장같이 차가웠다.“청아 씨 체면을 봐서 따지지는 않을게. 지금 나에게 사과하면 용서해 줄 수는 있어.”그의 말에 이청아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어렸다. 아무 이유 없이 따귀를 맞았는데도 너그러이 용서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진우 씨, 그만 소란 피우고 얼른 사과해.”이청아가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저 자식 때문에 감옥까지 들어갔다 나왔는데 사과하라고? 그게 말이 돼?”유진우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당신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
“응?”유진우는 따끔거리는 볼을 움켜잡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청아를 돌아보았다.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 때문에 그의 뺨을 때릴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유진우는 마치 칼에 찔린 듯 가슴이 아팠다.“나...”이청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유진우를 때리자마자 그녀는 후회가 밀려왔다. 조금 전 상황이 하도 긴박하여 충동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를 때렸다. 만약 유진우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강백준은 군부대의 소장이고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 그런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그야말로 사형감이다.“날 때렸어?”눈살을 찌푸린 유진우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저 사람 때문에, 그것도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 때문에 날 때렸어?”“진우 씨, 제발 진정해. 이게 다 당신을 위해서 그런 거야.”이청아가 설명했다.“진정?”유진우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실망한 눈빛은 감추지 못했다.“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강백준이 날 모함하고 당신들 앞에서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거라고 분명히 얘기했어. 제발 눈 씻고 제대로 보란 말이야!”“그 입 다물어. 강 장군님은 누구보다 정직한 분이야.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이청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에 습격을 당했을 때 강백준이 선뜻 나서서 도와준 덕에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큰할아버지가 아프다고 하니까 귀한 일품 인삼까지 선물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진우가 블랙 프리즌에 갇혔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부하에게 분부를 내렸다.이렇게도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가 있겠는가?“어쨌거나 당신은 날 안 믿는다는 거네.”유진우는 자신을 비웃었다.“당신은 항상 날 완전히 믿지 않았어. 난 그래도 당신이 변한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까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거네.”“진우 씨, 우리 얘기는 돌아가서 해. 오늘 절대 어리석은 짓을 해선 안 돼.”이청아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돌아갈 수 없어.”
“아니에요?”유장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용호산은 여태껏 무림인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무관심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해.”서태양이 말했다.인재를 선발해 위상을 높이려고 진무사가 나섰다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하지만 용호산은 전혀 관계가 없지 않은가?“그럼 무슨 의도인데요?”유장미가 되물었다.“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궁금하거든?”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서태양은 어깨를 으쓱했다.“보혁 씨는 내막에 훤하니까 화두를 꺼낸 거겠죠?”유이슬이 시선을 돌렸다.“내막까지는 아니지만 주워들은 소식이 몇 가지 있긴 해요.”염보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로는 용호산 뒷산의 금지구역에 최근 신비로운 보물이 나타났는데 향후 100년 동안 무림인들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요.”“무슨 보물이 그렇게 대단해요?”유장미가 깜짝 놀랐다.유이슬과 서태양도 예상치 못한 듯 충격을 금치 못했다.무림인들의 흥망성쇠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만약 제 추측이 맞는다면 용원의 기와 관련된 보물일 거예요.”염보혁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순간, 유진우는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이내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용원의 기? 그게 뭔데요?”유장미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용맥의 정수이기도 하죠.”유이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며칠 전 호룡각이 와해하면서 지하 용맥이 다섯 개의 용원의 기로 변해 세상에 뿔뿔이 흩어졌어. 소문에 의하면 용원의 기를 얻는 자는 천하무적이 되어 승승장구한다고 해.”호룡각이 무너지고 용맥이 파괴된 일이 워낙 큰 이슈였기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진짜요?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 있어요?”유장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서에서 관련된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용원의 기를 얻은 자들은 세상을 주름잡는 수장이거나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었어.”유이슬이 한마디 보탰다.“맞아요.”염보혁이 대
유진우는 옆에 있는 염보혁을 흘깃 쳐다보았고, 속으로 상대방이 아무리 예뻐도 남자를 좋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쿨럭!”염보혁은 사레가 들린 나머지 연신 기침하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슬 씨, 지금 절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네요.”“당연히 칭찬하는 거죠. 그런 얼굴을 보고도 어떤 남자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어요?”유이슬이 정색하며 말했다.“네?”염보혁은 말문이 막혔다.설령 사실일지언정 어찌 면전에서 대놓고 말할 수 있지?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정 믿기 어려우면 태양한테 물어봐요.”유이슬이 문득 말했다.한편, 서태양은 염보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시선을 돌렸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은 도둑이 제 발 저린 듯싶었다.“제가요?”서태양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선배, 장난하지 마세요. 저랑 무슨 상관이죠?”“뭔가 냄새가 나는데요?”유장미가 눈썹을 까딱하더니 눈알을 굴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설마 보혁 씨한테 진짜 반한 건 아니죠?”“이... 계집애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서태양이 펄쩍 뛰면서 얼굴이 벌게진 채 고래고래 외쳤다.“남자끼리 엮일 리가 없잖아.”“침착해요. 단지 농담했을 뿐이에요.”유장미가 키득거리며 말했다.“게다가 남남 커플이 진짜 사랑이죠. 어차피 안 될 건 없잖아요. 만약 사귈 생각이 있다면 진심으로 축복해줄게요. 하하하!”“입만 열면 헛소리 하네.”서태양은 짐짓 화가 난 듯 혼내려는 액션을 취했다.유장미는 잽싸게 유이슬의 등 뒤로 숨어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산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당사자인 염보혁은 말문을 잃었다.더욱이 유장미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그를 흘끔거리는 서태양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몰래 훔쳐보는 탓에 괜히 기분이 세했다.“진우 씨, 이슬 씨, 다들 용호산은 처음이죠? 제가 구경 좀 시켜드릴까요? 주변에 뭐 있는지 소개해줄게요.”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염
술이 몇 잔 오가자 서서히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이슬 씨, 방금 검종의 제자라고 하시던데 무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용호산에 오른 건가요?”염보혁이 넌지시 물었다.“그런 셈이죠.”유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성격이 무심한 편이라 말주변이 딱히 없었다.“사실 저희는 스승님의 명을 받고 찾아왔어요.”상대적으로 외향적인 유장미가 웃으며 말을 보탰다.“노천사가 용호산에서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거든요. 검종 뿐만 아니라 천하회, 주술교를 포함한 파벌에서 최정예 제자들을 파견해 출전할 예정이에요.”“그럼 검종에서는 세 분이 참석하는 건가요?”염보혁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요.”유장미가 고개를 저었다.“저희는 단지 구경하러 왔을 뿐,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는 따로 있어요.”그녀와 서태양은 선천 후기에 속했고, 유이슬은 실력이 뛰어나긴 했으나 반보 마스터에 불과했다.어찌 됐든 천교에 비하면 열세에 처하는지라 검종을 대표해서 출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따로 있다니? 설마 홍군림이에요?”염보혁의 눈썹이 까닥했다.“그건 저도 잘 몰라요.”유장미가 생긋 웃었다.“워낙 제멋대로에 신출귀몰하는 사람이라 이번 무림대회에 참가할지 아무도 몰라요. 만약 홍 선배가 진짜 출전한다면 우승은 우리 검종이 차지할 거예요.”홍군림은 천교 랭킹의 1위에 올랐을뿐더러 어린 나이에 경천 랭킹에 진입한 검종의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다만 성격이 까칠하고 독불장군이라 종주를 제외하고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장미야, 그건 네 생각이고.”이때 유이슬이 입을 열었다.“홍 선배가 실력이 뛰어나고 검종의 천재로서 일반 무사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능력자가 한 명 더 있잖아.”“누구요?”유장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장혁.”유이슬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홍 선배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요?”유장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막상막하야. 천교
“네?”염보혁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특히 잘 보이기 급급했던 서태양은 굳은 얼굴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허공에 손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럴 수가?방금 목숨 걸고 구하려던 사람이 남자였다니?“남자...? 농담이죠?”붉은 옷 소녀가 염보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경국지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인이 대체 어디를 봐서 남자란 말인가?푸른 옷 여인은 입만 벙긋했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흡혈파 망나니들이 여자가 아닌 남자한테 집적거렸다니?취향 한번 독특했다.“아니요. 진짜 남자예요.”염보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밖에 나가면 여자로 오해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붉은 옷 소녀가 말을 아꼈다.“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염보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해탈한 듯 말했다.“아쉽네요.”붉은 옷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본인이 이렇게 예쁜 얼굴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선배? 왜 그래요? 괜찮아요?”그녀는 아직도 넋을 잃은 서태양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어깨를 툭 쳤다.“응? 아, 괜찮아. 단지 조금 놀랐을 뿐이야.”서태양은 꿈에서 깨어난 듯 금세 정신을 차렸다.다만 눈빛만큼은 남자한테서 떠나지 않았다.이렇게 요염한 얼굴이 사내란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그야말로 재능 낭비이지 않은가?“저는 염보혁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염보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유이슬이에요.”푸른 옷 여인이 대답했다.“저는 유장미라고 해요.”붉은 옷 소녀가 활짝 웃었다.비록 남자이지만 미모에 저절로 눈이 갔다.“서태양입니다.”서태양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술이나 한잔 하시죠?”염보혁은 손을 내밀더니 소개를 이어갔다.“이쪽은 유진우 씨, 그리고 두 분은 호위무사인...”“춘화와 추월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수염 난 사내의 몸에 피투성이 상처가 생겼다.눈 깜짝할 사이에 연신 검에 찔린 탓에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비록 수염 난 사내가 힘은 더 셌지만 기교에서는 한참 못 미쳤다.여자의 화려한 검술은 감탄을 자아냈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악!”수염 난 사내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사지가 부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은 마치 좀비를 연상케 했다.온몸은 피가 흥건했고 상처로 가득했다. 비록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형님!”패배한 우두머리를 보자 흡혈파 제자들이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항상 위풍당당하고 기세등등했던 수장이 이런 몰골을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젠장! 감히 우리 형님을 다치게 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저년을 없애버려!”흡혈파 제자들이 고래고래 외치며 검을 빼 들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여자를 덮쳤다.“무용지물이야.”푸른 옷 여인은 콧방귀를 뀌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었다.얼마 안 되어 흡혈파 제자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채 선혈이 낭자했다.“역시 대단하세요!”눈앞의 광경에 붉은 옷 소녀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망나니 따위가 감히 검종에게 대들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서태양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뭐... 뭐라고? 너희들이 검종 제자였어?”흡혈파 제자들은 안색이 돌변하더니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검종은 무림인들의 세계에서 3대 문파 중 하나로 천하회와 주술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비록 제자들이 많지 않았지만 뛰어난 인재들밖에 없다.특히 검종의 홍군림은 어린 나이에 천교 랭킹 1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경천 랭킹에 진입하여 세계 10위의 강자가 되었다.경천 랭킹 10위권에 검종 제자가 무려 2명이나 있는데 압도적인 실력으로 3대 파벌의 수장 자리를 거머쥐었다.여기서 검종의 제자들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이제야
“윽!”서태양은 이를 악물고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온 채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이내 양손으로 검을 쥐고 온 힘을 다해 어깨를 짓누른 흡혈검을 떼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힘이 점점 더 가해졌고 무릎이 닿은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작 이런 실력으로 감히 우리 흡혈파한테 덤비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수염 난 사내가 냉소를 지었다.“형님! 멋져요.”“역시 대단하세요.”부하들이 질세라 감탄했다.북쪽에서 흡혈파라고 하면 꽤 이름 있는 큰 파벌인지라 애송이 같은 놈이 도발할 만한 게 아니었다.“감히 내 앞에서 영웅 행세해? 넌 오늘 인생에서 가장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거야. 교훈 삼아 사지를 부러뜨려줄게!”수염 난 사내가 비열한 미소를 짓더니 흡혈검을 들어 올려 서태양의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챙!검이 닿기 직전 청색 보검이 불쑥 나타나 허공에서 공격을 막아냈다.“응?”수염 난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푸른 옷 여인이 보검을 들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선배?”서태양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그제야 한숨 돌렸다.조금만 늦었더라도 오른손을 잃어버렸을 텐데 그나마 선배가 제때 도움을 줘서 천만다행이었다.“괜히 참견하지 마.”수염 난 사내가 음흉하게 웃었다.“우리 후배한테 손을 대는 순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여자가 싸늘하게 말했다.“맞아! 너희들 같은 망나니는 벌을 받아 마땅하지.”이때, 붉은 옷 소녀가 검을 빼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언니, 제가 도와줄게요.”“아니야. 넌 태양이랑 지켜보고 있어. 이런 놈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푸른 옷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수염 난 사내가 히죽 웃었다.“그런 왜소한 몸으로 오빠의 검을 어찌 막으려고? 차라리 무기는 내려놓고 침대에서 겨뤄보는 건 어때?”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부하들이 폭소를 터뜨렸다.곧이어 음흉한 시선으로 여자를 훑으며 멋대로 평가하
서태양이 움직이자 수염 난 사내의 뒤에서 덩치가 산만 한 남자 두 명이 튀어나왔다.두 사람은 무기로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몸체는 강한 피비린내와 함께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는 칼날이 오랫동안 선혈에 노출된 결과였다.무림인들의 세계에서는 흡혈검이라고 불렀다.다만 아쉽게도 그들이 지닌 검은 아직 미성숙 단계였고 기세가 한창 부족했다.챙! 챙!서태양이 먼저 검을 빼 들고 혼자서 두 명의 사내와 대결을 벌였다.그들은 기세등등하게 맞서 싸웠지만 힘만 강했을 뿐 행동이 굼뜬 편이었다.공격할 때마다 동작이 다소 어설펐다.반면, 서태양은 누가 봐도 고수의 가르침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스피드, 힘,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느 하나 뒤처진 데 없었다.세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는 순간 실력 차이가 현저했고, 서태양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내를 쓰러뜨렸다.그리고 응징할 겸 각자의 다리에 검을 관통했다.“흥! 고작 이런 실력으로 우쭐거려? 제 주제도 모르고.”서태양은 장검을 비스듬히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좋아! 잘했어!”승리를 거머쥔 서태양을 보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비록 나서서 싸울 용기는 없었지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그래도 실력은 꽤 있나 보네? 어쩐지 참견하더라니.”수염 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고 음침한 목소리로 협박했다.“하지만 오늘 임자를 만났지. 흡혈파를 마주친 이상 살아남을 방법은 없어.”“흡혈파는 무슨, 들어보지도 못했구먼.”서태양의 표정은 기고만장했다.“하! 괜찮아. 네 피를 전부 흡수하고 나면 우리가 왜 흡혈파라고 불리는지 알 거야.”수염 난 사내가 이죽거리더니 두말없이 공격을 개시했다.그가 발을 내딛자마자 맹렬한 기세가 솟구쳤고, 손에 든 흡혈검은 핏빛을 뿜어내며 곧장 서태양을 덮쳤다.앞서 상대했던 부하들과 달리 수염 난 사내의 흡혈검은 살기로 가득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쉽게 화를 부르는 법이다.염보혁은 남자였지만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요염한 얼굴을 지녔다.길을 나서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지금처럼 깡패 무리와 마주할 때면 번번이 시비에 휘말리기 일쑤였다.유진우는 모른 척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어이, 이쁜이. 저런 나약한 놈이랑 술 마셔서 뭐 하겠어? 차라리 우리랑 한잔하지, 아주 즐겁게 해줄 테니 말이야!”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염보혁의 턱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이 손 치우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염보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어여쁜 외모 탓에 남녀를 불문하고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처럼 대놓고 희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오, 이쁜이가 화를 내네?”수염 난 사내는 턱을 문지르며 비웃었다.“솔직히 말해서 화난 얼굴이 더 매력적인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욱 감탄스럽군.”그의 말에 뒤따르던 무리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유진우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눈앞의 이 사내는 제법 능숙하게 수작을 부렸다.염보혁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셋을 센다. 그 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내가 직접 손봐주지.”염보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본다고? 하하하!”수염 난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이거 제법 앙칼진데?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위층으로 올라가서 천천히 우리를 손 봐줘, 어때?”“맞아, 맞아! 방도 넉넉하니 차례대로 너랑 놀아줄 수 있다고!”그의 동료들도 시시덕거리며 말을 보탰다.“셋.”염보혁은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이쁜이, 괜히 버티지 말고 그냥 올라가자. 내가 아주 다정하게 대해줄 테니 말이야.”수염 난 사내는 입을 커다랗게 벌려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댔다.“둘.”염보혁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을 유지했다.“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안아 올라가는 수밖에.”그가 손을
유진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혁 씨가 이렇게까지 많은 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제 생각엔 장일청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것 같은데요.”용호산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염보혁이 이렇게나 많이 알고 있다니, 이건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었다.“진우 씨께서 과찬해 주시는군요. 저는 그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듣는 걸 좋아해서 호기심에 이런저런 소문을 알아본 것뿐입니다. 사실 별다른 능력은 없어요.”염보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덧붙였다.“하지만 만약 진우 씨께서 무림대회에 참가하신다면 전 온 힘을 다해 진우 씨가 우승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보혁 씨,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전 그저 세상 구경이나 해볼 겸 참가하는 것뿐입니다. 우승 같은 건 감히 꿈도 꾸지 않아요. 애초에 제 실력으로 어떻게 그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겨룰 수 있겠습니까?”“진우 씨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저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합니다.”염보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우 씨는 외모도 준수하고 기품 또한 비범하시죠. 멀리서 봐도 강렬한 기세가 느껴졌습니다. 비록 진우 씨의 신분은 알 수 없지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진우 씨는 절대 범상한 인물이 아닙니다!”“보혁 씨께서 저를 이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평범한 출신에 보잘것없는 실력을 갖췄을 뿐입니다. 아마 실망할 겁니다.”“하하, 괜찮습니다. 커다란 황금 잉어가 어찌 작은 연못에서만 머물겠습니까? 바람과 구름을 만나면 반드시 용이 되어 날아오를 것입니다. 지금 진우 씨의 명성이 미미할지라도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하늘 높이 날아오를 날이 올 거라고!”염보혁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눈빛은 절대적인 믿음을 담고 있는 듯했다.유진우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뭐지? 분명 오늘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