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연과 유진우의 스스럼없는 모습에 사람들은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방금 출소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조홍연의 부장인 공요와 유란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지금까지 그들이 봐왔던 전쟁 여제는 사람을 죽일 때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인정사정없는 사람이었다. 누구를 만나든 차갑고 도도한 표정이었고 화를 내면 더욱 무서웠다. 상대가 누구일지라도 그녀의 앞길을 막는 자는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이치대로라면 남자가 그녀 몸에 손만 대도 손발이 부러질 텐데 유진우가 머리를 만지는데도 화내기는커녕 되레 활짝 웃고 있었다.이 광경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전쟁 여제에게 이런 다정한 면이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정말로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지고 우러러볼 수조차 없던 전쟁 여제란 말인가?“장혁 오빠, 그동안 잘 지냈어요?”그의 익숙한 얼굴을 보고 있는 조홍연은 마음이 복잡미묘했다.한때 이름을 떨치고 천하를 압도했던 천재의 날카로움은 10년 못 본 사이 전부 다 사라졌다. 소년의 건방짐과 날카롭던 눈빛, 그리고 남다른 분위기도 사라졌고 그 대신 눈에 띄게 점잖아졌다.하지만 어떻게 변해도 그는 여전히 유장혁 오빠였고 그녀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난 잘 지내고 있어. 맨날 자유롭게 다니니까 너무 좋아. 받는 스트레스도 없고 싸울 일도 없고.”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어릴 적 코를 흘리며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애가 10년 사이 어엿한 여인이 되었고 용국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전쟁 여제가 되었다.“장혁 오빠, 그동안 왜 한 번도 연락 안 했어요? 조무진도 오빠의 소식을 알고 있던데 나만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요?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조홍연이 원망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아닌데? 무진이더러 너에게 연락하라고 했었어. 설마 걔가 여태껏 말 안 했던 거야?”유진우는 놀란 척했다. 그의 말에 조홍연의 표정이 급변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살기가 순식간에 뿜어져 나왔다. 등에 메고 있던 삼척 청봉검마저도 윙윙거리며 진동
“긴장해 하지 말아요. 당신과 상관이 없다는 거 아니까. 하지만 당신의 부하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유진우가 귀띔했다.“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조사해볼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로스는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퉁퉁 부은 화려한 복장의 뚱보를 유진우 앞에 데려왔다.“도련님, 바로 이놈이었어요. 죽이든 어찌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손이 더러워지는 게 싫으시면 제가 대신 처리해드리겠습니다.”“도련님, 살려주세요.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돈을 주면서 도련님을 잡아들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뚱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머리를 땅에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흘러내렸다.“지시한 사람이 누구야?”유진우가 캐물었다.“강씨 가문의 도련님 강백준입니다.”뚱보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역시 그 사람이었군.”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의심이었지만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소장님, 차 한 대 좀 빌립시다.”유진우가 말했다.“당연히 문제없죠. 어디로 가실 건가요?”로스가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로얄호텔이요.”유진우가 솔직하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로스가 손을 흔들자 부하가 군용 지프차 한 대를 가져왔다.“아 참, 영감님.”유진우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여윈 노인을 보며 말했다.“갈 곳이 없으면 강린파에 가서 홍길수를 찾으세요. 걔가 알아서 머물 곳을 마련해줄 겁니다.”“고맙습니다, 도련님.”사람들은 바로 허리를 굽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른 말 없이 곧장 차를 타고 떠났다. 강백준이 먼저 그에게 손을 썼으니 당연히 갚아줘야지....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짙게 깔렸다.그 시각 로얄호텔 연회장.직위가 높고 명성과 위세가 대단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술을 들고 즐거움을 나누고 있었다.연회장 2
연회장 입구.블랙 드레스를 입은 이청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아름다운 얼굴에 늘씬한 몸매가 더해져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현장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단연코 눈에 띄었다.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녀에게 쏠렸다. 놀란 사람, 기뻐하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 부러워하는 사람, 그리고 욕망이 샘솟는 사람도 있었다.“언니,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오지 않는 건데. 내가 공을 들여 꾸며도 사람들은 다 언니만 쳐다보잖아요. 내 존재감은 하나도 없어요.”이청아와 동행한 단소홍이 낮은 목소리로 원망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오늘 강 장군의 파티에 참석한다는 소리에 직위가 높고 명성과 위세가 대단한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려고 단소홍은 공을 들여 꾸몄다. 드레스 한 벌이 수천만 원에 달했고 몸에 지닌 액세서리 가격만 해도 수억 원이 훌쩍 넘었다. 정말 큰마음 먹고 돈을 확 질렀는데 결과는 어떠한가?이청아의 옆에 서 있으니 그저 들러리일 뿐이었고 눈길 한번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못생긴 게 아니라 이청아가 워낙에 미모가 빼어났기 때문이다. 그 누구든 이청아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서울 전체에서 이청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사람은 아마 조선미밖에 없을 것이다.“청아 씨, 왔어요?”그때 인파가 갈라지면서 화이트 정장 차림에 신수가 훤한 강백준이 웃으며 다가왔다.“강 장군님.”이청아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청아 씨 오늘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눈이 다 부셔요.”강백준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과찬이십니다.”이청아가 웃으며 예의 바르게 답했다.“강 장군님, 그럼 저는요? 저는 예쁘지 않나요?”단소홍이 불쑥 한마디 하더니 자신의 섹시한 몸매를 한껏 드러냈다.“예뻐요, 예뻐요. 두 분 다 예뻐요.”강백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하... 고맙습니다.”단소홍은 일부러 쑥스러운 척했다.그들이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오만한 태도의 남자와 요염한
이청아가 미간을 찌푸렸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안 되겠어. 진우 씨를 구하러 가야겠어.”그러더니 곧장 자리를 떠나려 했다.“언니.”단소홍이 그녀를 덥석 잡고 설득했다.“언니가 간다고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블랙 프리즌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 곳이에요. 이건 변하지 않는 철칙이라고요. 함부로 움직였다가 괜히 불똥이 튈 수 있어요.”“그럼 어떡해? 그렇다고 진우 씨가 힘들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잖아.”이청아가 조급해했다. 블랙 프리즌은 아주 위험한 곳이다. 그곳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생도 더 많이 하게 된다.“언니, 일단 진정해요. 여기 강 장군님이 계시잖아요.”단소홍의 시선이 옆에 있는 강백준에게 향했다.“강 장군님처럼 지위도 높고 못 하는 게 없는 분이라면 블랙 프리즌에서 사람 하나 빼내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닐 거예요.”“강 장군님?”강백준을 쳐다보는 이청아의 두 눈에 기대가 가득했다.“블랙 프리즌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군부대 사람이라고 해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어요.”강백준이 턱을 어루만지며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장군님께서 도와주신다면 그 어떤 대가를 치르든 상관없어요.”이청아가 진지하게 말했다.“청아 씨가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어요.”강백준은 잠깐 망설이는 척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한번 해볼 수는 있지만 장담은 못 해요. 청아 씨도 알다시피 블랙 프리즌은 일반 감옥이 아니잖아요. 거기서 사람을 빼낸다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기예요.”“되든 안 되든 강 장군님의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이청아는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워했다.“별말씀을요. 친구끼리 도와주는 건 당연하죠.”강백준은 씩 웃더니 부하를 불러 귓가에 대고 뭐라 속삭였다. 부하는 대답한 후 바로 나가버렸다.“우리 애들이 블랙 프리즌의 소장에게 연락할 거예요. 혹시 빼내지 못한다고 해도 내 체면을 봐서 그리 고생하지는 않을 겁니다.”강백준이 자신만만하
“뭐야? 저 자식 벌써 나왔어?”갑자기 나타난 유진우를 보자 이원기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강백준이 그저 도와주는 척만 할 줄 알았는데 진짜로 부하에게 빼내라고 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리고 문제는 강백준이 관계를 동원하여 유진우를 잡아넣었는데 또다시 빼내고 말았다.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괜히 힘만 뺀 격이 돼버렸다.아무리 여자의 마음을 얻고 싶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일을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이상하네. 저 자식 어떻게 나왔지?”눈살을 찌푸린 강백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하더러 블랙 프리즌의 소장에게 연락하라고 한 적이 아예 없었다. 게다가 시간도 맞지 않았다.그렇다면 유진우가 진작 나왔다는 말인데...블랙 프리즌은 한번 들어가면 영영 나오지 못하는 곳이다. 한낱 보잘것없는 녀석이 무슨 재주로 그곳에서 나왔단 말인가?설마 다른 거물이 뒤에서 도와주고 있는 건가?“강 장군님이 이렇게나 대단한 분인 줄은 몰랐어요. 전화 한 통에 유진우를 빼내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단소홍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존경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블랙 프리즌에 수감된 사람을 쉽게 빼내려면 그 권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맙습니다, 장군님.”이청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아... 아니에요. 나에게는 별것도 아닌데요, 뭐.”강백준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진우 씨, 블랙 프리즌에 잡혀 들어갔었다면서? 괜찮아? 다친 데 없어?”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이청아는 유진우에게 다가갔다.“청아 씨도 다 알고 있었구나.”유진우의 표정이 무뚝뚝하여 기쁜지 슬픈지 알 수가 없었다.“나도 방금 들었어. 강 장군님이 나서주신 덕에 당신이 풀려난 거야. 안 그러면 아직도 갇혀있었을 거야.”이청아는 한시름을 놓은 표정이었다.“강백준이 도와줬다고?”유진우가 코웃음을 쳤다.‘날 블랙 프
강백준이 누구인가?연경의 강씨 가문 도련님이자 군부대의 소장이고 발만 굴러도 서울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 거물을 때렸다는 건 목숨을 잃어도 아깝지 않다는 건가?“유진우, 넌 정말 양심도 없어. 이럴 줄 알았으면 강 장군님에게 널 구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고 블랙 프리즌에서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건데.”단소홍이 분노를 터트렸다.도와줬는데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되레 따귀를 때리다니, 정말 이보다 더 배은망덕한 놈은 없을 것이다.“지금 날 때렸어? 날 때린 결과가 어떨지 생각해봤어?”따끔거리는 볼을 움켜쥔 강백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따귀를 맞은 건 또 처음이었다.“때리면 안 돼? 너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는데 당연히 맞아야지.”유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진우 씨, 그게 무슨 말이야? 강 장군님이 당신을 구해줬어.”이청아가 눈살을 찌푸렸다.“날 구해줬다고? 허...”유진우가 코웃음을 쳤다.“날 해친 사람이겠지. 저 자식이 날 모함하지 않았더라면 블랙 프리즌에 들어갈 일도 없었어.”“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못 알아듣겠네.”강백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못 알아들은 거야? 아니면 시치미를 떼는 거야?”유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날 블랙 프리즌에 가두면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벌써 나와서 어쩌나? 결판도 내야 하는데.”“결판을 낸다고? 그럴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강백준의 표정도 얼음장같이 차가웠다.“청아 씨 체면을 봐서 따지지는 않을게. 지금 나에게 사과하면 용서해 줄 수는 있어.”그의 말에 이청아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어렸다. 아무 이유 없이 따귀를 맞았는데도 너그러이 용서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진우 씨, 그만 소란 피우고 얼른 사과해.”이청아가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저 자식 때문에 감옥까지 들어갔다 나왔는데 사과하라고? 그게 말이 돼?”유진우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당신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
“응?”유진우는 따끔거리는 볼을 움켜잡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청아를 돌아보았다.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 때문에 그의 뺨을 때릴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유진우는 마치 칼에 찔린 듯 가슴이 아팠다.“나...”이청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유진우를 때리자마자 그녀는 후회가 밀려왔다. 조금 전 상황이 하도 긴박하여 충동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를 때렸다. 만약 유진우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강백준은 군부대의 소장이고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 그런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그야말로 사형감이다.“날 때렸어?”눈살을 찌푸린 유진우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저 사람 때문에, 그것도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 때문에 날 때렸어?”“진우 씨, 제발 진정해. 이게 다 당신을 위해서 그런 거야.”이청아가 설명했다.“진정?”유진우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실망한 눈빛은 감추지 못했다.“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강백준이 날 모함하고 당신들 앞에서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거라고 분명히 얘기했어. 제발 눈 씻고 제대로 보란 말이야!”“그 입 다물어. 강 장군님은 누구보다 정직한 분이야.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이청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에 습격을 당했을 때 강백준이 선뜻 나서서 도와준 덕에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큰할아버지가 아프다고 하니까 귀한 일품 인삼까지 선물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진우가 블랙 프리즌에 갇혔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부하에게 분부를 내렸다.이렇게도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가 있겠는가?“어쨌거나 당신은 날 안 믿는다는 거네.”유진우는 자신을 비웃었다.“당신은 항상 날 완전히 믿지 않았어. 난 그래도 당신이 변한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까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거네.”“진우 씨, 우리 얘기는 돌아가서 해. 오늘 절대 어리석은 짓을 해선 안 돼.”이청아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돌아갈 수 없어.”
그때 연회장 밖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들었다.완전 무장하고 전투태세를 갖춘 병사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살기등등했다.그들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유진우를 물샐틈없이 포위했고 검은 총구를 유진우에게 겨누었다. 명령 한마디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쏠 기세였다.“강 장군님, 저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아요.”이청아가 놀란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청아 씨가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체면은 세워줘야죠.”강백준이 씩 웃더니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닦고는 손을 흔들었다.“다들 물러서. 그냥 가게 내버려 둬.”“네!”대답을 마친 병사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움직임이 어찌나 질서 있는지 훈련 효과가 톡톡히 보였다.유진우는 고개를 돌려 싸늘하게 훑어본 후 밖으로 나갔다.호텔을 나선 그때 보슬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갑자기 불어왔는데 마치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끼익!그때 은색 벤틀리 한 대가 문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조선미가 기쁨에 겨운 얼굴로 내렸다.“여보, 괜찮아요? 당신이 블랙 프리즌에 잡혀들어갔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우리 외할아버지까지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니까요. 그런데 외할아버지가 로스 소장에게 연락하니까 이미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당신도 참, 나왔으면 말을 하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괜찮아요? 다친 데 없어요? 병원에 안 가봐도 돼요?”조선미는 그를 보자마자 숨 쉴 틈도 없이 말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유진우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난 괜찮아요. 들어가서 구경이나 하다가 나왔어요.”유진우가 억지 미소를 쥐어짰다.“그럼 다행이고요.”조선미가 웃으며 한시름을 놓으려던 그때 시선이 유진우의 얼굴에 머물렀다. 가느다란 손가락 자국이 아주 선명했다.“누가 때렸어요?”조선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진우 씨...”그때 이청아가 갑자기 쫓아왔다. 뭐라 설명하려는데 옆에 있는 조선미를 보고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왜 나
유태범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그는 온갖 변수를 고려했지만 유만수가 이렇게 멀쩡히 눈앞에 나타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예상치 못한 충격은 견디기 어려웠다.사실 유태범뿐만 아니라 제갈영군을 비롯한 모든 반란군의 고급 장교들 역시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고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들이 유태범과 함께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유만수가 죽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만약 유만수가 죽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이런 반역을 감행할 용기는 없었다.“오늘 정말 시끌벅적하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다니...”유만수가 천천히 문밖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군중은 자연스럽게 길을 열어주었다.“어르신! 당신은 분명히...”이의진은 말을 잇지 못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분명히 유만수가 칼에 가슴을 관통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의 숨이 멎는 것도 목격했다.게다가 직접 그의 장례식까지 치렀다.그녀는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긴장하지 마. 나는 귀신이 아닌 사람이다.”유만수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암살자의 공격은 내 목숨을 앗아갈 뻔했지만 다행히 진기를 사용해 심장을 보호한 덕에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다.”“여보! 왜 저희에게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나요? 얼마나 슬퍼했는지 아세요?”이의진은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유만수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극심한 슬픔에 빠졌다.그러나 왕부를 지키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며 장례를 치르고 야심을 품은 자들과 치열하게 싸워야만 했다.“의진아, 그동안 고생 많았다.”유만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미소 지었다.“내가 죽은 척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상처를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내가 죽은 뒤 왕부와 서경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여기까지 말한 유만수는 갑자기 유태범 일행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안타깝게도 일이 내가 원하던 대로는 잘 풀리지
‘홍복홍을 계속 저대로 두면 병사들의 사기가 꺾일 거야.’“이게...”흑룡군의 고급 장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망설였다.홍복홍도 한때 흑용군의 대장군으로 그 위엄은 위왕 유만수 다음으로 높았다.서부를 평정한 후 그는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하지만 오래된 강교들은 여전히 그의 성과를 기억하고 경외하고 있었다.“뭐 하는 것이야! 귀가 먹었느냐? 아니면 지금 명령을 어기겠다는 거냐!”유태범은 말하며 사령관 병부를 꺼내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병부가 여기 있다! 누가 감히 내 명령을 어기는 것이냐!”“명령에 따르겠습니다!”유태범이 병부를 꺼내 들자 장교들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칼을 뽑아 들고 홍복홍을 포위하기 시작했다.그러나 홍복홍은 뒷짐을 진 채로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위왕께서 여기 계시는데 누가 감히 날뛰는 것이냐!”그때 갑자기 천둥 같은 목소리가 공중에서 폭발하듯 울려 퍼졌다.그 소리는 굉음처럼 전장을 뒤흔들며 모두를 압도했다.모든 병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왕부의 문 앞에서 한 중년 남자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그는 두 손을 뒤로 하고 있었으며 허리가 약간 굽었고 걸음걸이도 약간 절뚝였다.겉으로 보건대 그 어떤 위엄도 강렬한 기운도 없었다.입고 있는 옷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그를 평범한 농부로 착각했을 것이다.그러나 농부처럼 보이는 중년 남자가 등장하자 전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등장한 이는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서경 왕 유만수이었다.“어... 어르신?”익숙한 얼굴을 마주한 이의진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분명 죽은 걸 확인했는데 어떻게 멀쩡히 저기 있는 거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꿈인가?’“아버지?”유천우도 유만수의 등장에 깜짝 놀라며 손에 들고
“여봐라! 당장 저놈을 잡아라!”유진우가 망설임 없이 공격해 오자 유태범은 결국 명령을 내렸다.강한 자가 자신의 편에 서면 당연히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적에게 넘길 수도 없었다.위협은 반드시 사전에 제거해야 했다.“모두 공격하라!”조군영과 고원이 손짓하며 외쳤다.백여 명의 무도 고수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유진우를 포위하며 공격을 감행했다.이들은 모두 흑용군의 장교급 지휘관들로 각자의 실력도 뛰어나거니와 이들이 합심한 힘은 천군만마를 초월했다.“멈춰라!”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하늘에서 유성처럼 땅에 내리꽂히며 번개 같은 속도로 인파 한가운데에 충돌했다.쾅!거대한 폭음과 함께 땅이 갈라지고 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강력한 충격파가 충돌 지점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주변의 무도 고수들을 연이어 물러서게 했다.모두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렸다.“누구냐!”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50미터 앞에 화려한 옷을 입고 백발이 섞인 머리를 한 노인이 서 있었다.노인의 표정은 냉담했고 그의 몸 주위에는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짙은 살기는 멀리서도 귀신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게 했다.등장한 이는 바로 악명 높은 인도, 홍복홍이었다.“홍복홍? 드디어 나타났네!”이의진은 기뻐하며 외쳤다.위왕이 사망한 이후 홍복홍 역시 자취를 감추었었다.며칠 동안 그의 모습은커녕 어떤 연락도 닿지 않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그는 유씨 가문 삼대 고수 중 한 명으로서 진정한 실력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었다.아무도 홍복홍이 얼마나 강한지 몰랐지만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눈독 들인 자는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었다.“다행입니다! 어르신만 있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생긴 거예요!”갑자기 등장한 홍복홍을 본 장범규는 정신을 차리며 활기를 되찾았다.홍복홍은 전설적인 인물로 위왕이 생전 가장 신뢰하던 조력자였다.비록 평소에는 조용히 지냈지만 그를 과소평가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인도라는
수년이 지난 지금 제강영군의 이미 실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그러나 뜻밖에도 한 젊은이에게 당해 손쓸 틈도 없이 밀릴 줄은 생각지도 했다.이것은 굴욕 중의 굴욕이었다.“이럴 수는 없다!”상황이 점점 나빠지는 것을 본 제갈영군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크게 외치며 곧바로 필살기를 사용했다.그는 한 손으로 창을 들고 빠르게 거리를 벌린 뒤 갑자기 멈춰서 돌아서더니 양손으로 창대를 움켜쥐고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온몸의 강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하늘의 별 따기!”제갈영군이 외치자 창끝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하늘 가득한 창 그림자가 마치 유성처럼 날아가며 천지를 뒤흔들 기세로 유진우를 향해 돌진했다.창 그림자가 지나가는 곳마다 공기가 비틀리고 땅이 갈라지며 공포감을 자아냈다.“흥!”유진우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섰다. 창궁검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검기가 한순간에 뿜어져 나와 하늘 가득한 창 그림자 속으로 돌진했다.쾅! 쾅! 쾅!굉음이 연달아 들려왔다.유진우의 검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듯 모든 창 그림자를 갈기갈기 부수며 제갈영군의 창끝을 정통으로 꿰뚫었다.쾅!커다란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제갈영군의 장창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열몇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폭발로 생긴 강력한 충격파에 제갈영군은 수십 미터 밖으로 날아가 땅에 거칠게 떨어졌다.제갈영군의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며 끊임없이 기침했다.“이럴 수가!”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비록 유진우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제갈영군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그들의 예상으로는 두 사람이 치열한 접전을 벌일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제갈영군이 패배했다.그것도 처참하게 말이다.너무도 갑작스러운 결과였다.“역시 대단한 젊은이네.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군.”유진우가 단 한 번의 검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며 유태범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점점 더 큰 흥미를 느꼈다.‘젊은 나이에
“저 사람 도대체 누구야? 제강영군과 같은 강자를 이 정도로 몰아붙이다니, 정말 대단한데?”“저 나이에 저런 실력을 갖춘다는 건 상상을 초월하네. 만약 우리 편으로 들어오면 정말 든든할 거야.”“아직 제갈영군이 진짜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결과는 지켜봐야지.”숨 막힐 정도로 치열한 유진우와 제갈영군의 전투를 지켜보며 주위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서경에서 이름 날린 고수들은 전부 알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유진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젊은 강자는 완전히 미지의 존재였다.그의 정체에 대해 궁금증은 더욱 커졌고 그의 무공 수준은 그 누구도 쉽게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사실도 점점 명백해졌다.“천우야, 저 젊은 고수를 도대체 어디서 데려온 거니? 왜 한 번도 본 적이 없을까?”이의진이 유천우를 부축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머니, 아직 시기가 적절치 않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유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유진우는 오랫동안 정체를 숨기고 있었고 오늘의 개입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정체를 발설한다면 유태범이 복수를 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나한테도 말 못 한다는 거니?”이의진의 호기심이 깊어졌다.“죄송해요, 어머니. 저도 약속을 지켜야 해서요.”유천우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알겠다. 그래도 한 가지만 묻자. 믿을 만한 사람이야?”“완전히 믿어도 되는 사람입니다.”유천우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좋다. 실력이 제갈영군보다 더 위에 있구나. 만약 상황이 불리해지면 너를 데리고 성 밖으로 탈출시켜 달라고 해야지.”“어머니...”유천우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의진이 말을 끊었다.“이번만큼은 내 말 들어. 유태범은 절대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목숨을 건진 채로 서경을 떠나 연경으로 갈 수만 있다면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협상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저 고수의 도움과 유만군 그리고 800명의 결사
제갈영군은 서경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그의 실력은 그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었다.어젯밤 제갈영군이 병부를 빼앗아 가지 않았다면 유태범의 대군들도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양쪽의 승패는 어쩌면 제갈영군의 손끝에서 결정된다고 할 수도 있었다.“도련님, 현재 형세를 잘 파악하는 사람이 걸출한 인물이 될 수 있는 법이지. 대장군은 당신보다 더 서경 왕에 적합한 인물이야. 그래서 돕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제갈영군이 담담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충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박쥐였나!”유천우가 분노했다.“승자가 왕이 되고 패자는 적이 되는 법. 충신이 될지, 배신자가 될지는 누가 승리하는지에 달렸지.”제갈영군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설령 우리가 패하더라도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유천우가 허공으로 손을 뻗어 땅에 떨어진 장검을 끌어당겼다.“왜? 계속 싸우려고?”제갈영군이 고개를 흔들며 비웃었다.“죽을 각오로 덤빈다고 해도 내 눈에는 그저 하룻강아지에 불과해.”“하룻강아지일지 맹수일지는 붙어봐야 알겠지.”유천우가 한 발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하늘에서 한 사람이 떨어지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그는 바로 인피 가면을 쓴 유진우였다.“이 사람은 내가 상대할 테니 넌 물러나.”유진우가 차분히 말했다.유천우는 잠시 제갈영군을 바라보다 유진우를 보고는 결국 물러섰다.일대일로 싸운다면 유진우의 실력은 제갈영군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유천우는 확신했다.“뭐야, 너였어?”제갈영군은 유진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전투 의욕을 불태웠다.“전에 봤을 때 비범하다고 느껴서 한번 겨뤄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그 기회가 왔네.”“무릉 제후, 저 사람은 누구죠?”유태범이 물었다.“왕부에 숨겨진 고수입니다. 진승민 일행이 생포 당한 것도 저 친구 때문이죠.”제갈영군이 설명했다.“그래요? 왕부에 저런 인물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네요.”유태범이 눈을 좁히며 유진우를 자세히 살폈다.‘이상하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대장군, 제게 아들은 천우 하나뿐입니다. 천우를 두고 혼자 연경에 갈 수는 없어요. 부디 한 번만 관용을 베풀어 주세요.”이의진은 깊이 머리를 숙였다.지금 이 순간 체면 같은 건 이미 내려놓았다. 유천우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질 각오였다.“정 그렇다면 장공주님께서도 서경에 남으시면 되겠죠.”유태범은 담담하게 말했다.“여기서 새롭게 쉴 만한 곳을 하나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경치도 좋고 새소리도 들리는 한적한 곳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시면 어때요?”“대장군께서 서경왕이 되실 텐데, 저희가 이곳에 남으면 여러모로 부적절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저희를 연경으로 보내 주시는 게 문제없이 깔끔할 텐데요.”이의진은 재차 호소했다.“전혀 부적절할 것 없어요. 천우는 제 조카나 다름없고, 여기 남아 저를 도와준다면 훨씬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잘하면 벼슬도 줄 수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지요.”유태범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대장군, 제발 부탁드립니다. 어르신께서 대장군께 베풀었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부디 저희 모자를 그냥 놓아주세요!”이의진은 절박한 목소리로 간청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놀라 굳어 버렸다.이윽고 장범규가 다가가며 말했다.“왕비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일어나십시오!”그러나 이의진은 그가 부축하는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반면 유태범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한때 서경왕부에 군림했던 인물이 이제는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이것이 권세의 맛이었다.“어머니!”바로 그때 유천우가 달려 나왔다.이의진이 문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있는 걸 보자 그의 두 눈엔 분노가 가득 서렸다.“유태범! 네가 감히 내 어머니를 모욕해? 오늘 내가 네 목숨을 끊어 주겠어!”유천우는 격분한 목소리와 함께 손에 쥔 칼을 번쩍 들어 유태범에게 달려들었다.“천우야! 안 돼!”이의진이 급히 손을 뻗어 말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유천
“왕비님...”뒤편에 서 있던 장범규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이의진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했다.“오? 그렇습니까?”유태범은 미소를 띠며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저와 협상을 보겠다는 뜻인가요?”“네.”이의진은 숨김없이 답했다.“제 조건 세 가지만 들어주신다면 저희 모두가 장군님을 새 왕으로 옹립하겠어요. 뒤탈 없이 서경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장공주님,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굳이 여러분이 지지해 주지 않더라도 저는 왕이 될 수 있습니다. 그쪽에서 무엇으로 저를 상대로 조건을 걸겠다는 겁니까?”“대장군께서는 스스로 명성을 아끼시는 분이시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반대 없이 즉위하는 게 나쁘진 않으실 겁니다.”이의진이 차분하게 말했다.“좋습니다. 장공주님께서 굳이 말씀하시겠다니 들어는 보지요.”유태범은 별일 아니란 듯 웃었다.이미 승기를 잡았으니 몇 가지 들어줄 만한 조건이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첫째 조건은, 새 왕이 되시면 서경의 모든 백성과 군민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겁니다. 서경이 이만큼 커지기까지 쉽지 않았어요. 부디 아껴 주셨으면 합니다.”이의진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문제없습니다.”유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왕이 된다면 널리 은혜를 베풀고 백성을 위해 힘쓸 생각입니다.”즉위를 하고 나서는 인심을 사야 하는 법이다. 내줘야 할 것도 당연히 줘야 하는 자리다. 이의진이 말하지 않아도 그는 그렇게 할 생각이었기에 빠르게 대답했다.“두 번째 조건은, 왕부에 속했던 세력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이의진은 뒤편에 서 있던 세 제후와 왕부 장수들을 한번 돌아보았다. 이들은 모두 왕부에 충성한 이들로 그녀로서는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좋습니다.”유태범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앞으로 제대로 반성하고 제 명령에 따르기만 한다면, 더 이상 그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이의진은 미소 대신 살짝 고개만
“뭐라고요? 흑용군이 성문을 봉쇄했다고요? 이렇게 빨리?”주한휘는 깜짝 놀라며 거의 벌떡 뛰어오를 듯한 기세를 보였다.며칠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 하룻밤 사이에 유태범이 대군을 몰고 온 것이다. 무서울 정도의 속도였다.“어서 병력을 집결해 왕비님과 천우를 호위하면서 성 밖으로 빠져나가야 합니다!”장범규가 다급하게 외쳤다.“이미 늦었어요. 흑용군이 도시를 완전히 봉쇄한 이상 저희는 도망칠 수 없을 겁니다.”이의진은 고개를 떨구었다. 목소리마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예상하던 일이라지만 막상 이렇게 맞닥뜨리고 보니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순 없잖습니까.”장범규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해 봐야 소용없어요.”이의진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병부가 이미 유태범 손에 떨어졌는데, 저희가 어찌해 볼 재간이 있겠어요. 차라리 이렇게 된 이상 정정당당히 맞서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죠. 최소한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왕비님...”장범규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이의진이 손을 들어 말끝을 막았다.“장 제후님, 여러분 모두 충직하고 의로운 분들이에요. 굳이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돼요. 그냥 항복하고 몸을 보전하는 게 낫습니다.”“항복이라니...”장범규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평생 전쟁터를 누비며 살아왔으나 적 앞에 무릎 꿇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 또한 그럴 생각이 없었다.그때, 왕부에서 파견된 시위병이 달려와 급히 보고했다.“유태범 표기대장군께서 장수들을 거느리고 왕부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왕비님께 지시를 구합니다!”“이렇게 빨리 오다니. 유태범도 더는 지체할 생각이 없나 보네요.”이의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손에 들었던 장검을 들고 일어서며 명령했다.“문을 열어요. 손님을 맞이합시다.”쿵...무겁게 닫혀 있던 왕부의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이의진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한 손에 칼을 쥔 채 맨 앞에 섰다.왕부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