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 그룹, 회장 사무실 안.이청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일에 몰두했다.요즘 들어 박호철은 겉으론 움직이지 않았지만 사석에서는 온갖 트집을 잡았다.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그녀에게 떠넘기니 이청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매일 한밤중까지 야근을 해야 했다.“회장님...”그때 젊은 여비서가 갑자기 문을 두드렸다.“무슨 일이야?”이청아가 고개를 들어 보았다.단소홍이 일처리를 믿음직스럽게 하지 않아서, 그녀는 또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비서를 고용했다.“회장님, 방금 누군가가 회장님에게 소포를 보내왔습니다. 서프라이즈가 들어있으니 직접 건네주어야 한다면서요.”비서가 선물상자를 들고 있었다.“알겠어, 책상 위에 올려놔.”이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지민 씨, 날이 늦었으니 먼저 돌아가. 나를 기다릴 필요 없어.”“네.”여비서가 대답하고 돌아섰다.눈을 비비던 이청아는 결국 일을 손에서 내려놨다. 그리고 곧장 선물상자에 시선을 뒀다.하지만 선물상자를 열어본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왜냐하면 선물 상자 안에 피범벅이 된 손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잘린 손은 분명 방금 잘린 것 같았고, 피가 아직 완전히 응고되지 않아 보는 눈이 아찔했다.“딩링링...”이청아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져 나오지 못했을 때 갑자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전화를 받으니 도석현의 목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아가씨, 내가 준 선물 받았지?”“당신 누구야?”이청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 동생이 나한테 76억을 빚졌으니 네가 대신 갚아야 한다는 거야.”도석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이청아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못 믿겠어? 그럼 직접 들어봐...”“누나, 살려줘! 빨리 살려줘! 이 사람들이 내 손목을 잘랐어!”이현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고, 목소리는 몹시 처절했다.“현아, 무슨 일이야? 네가 왜 남에게 빚을 져?”이청아가 얼른 캐물었다.“
“현금?”이청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짧은 시간 안에 내가 어디서 현금을 가져올 수 있어?”“그건 네 일이지, 어차피 여긴 현금만 받아.”도석현이 여유롭게 말했다.“이건 분명히 일부러 난처하게 하는 거잖아!”이청아는 얼굴을 찡그렸다.현금 76억은 아마도 화물차에 실어와야 할 것이다. “아가씨, 말조심해. 네 동생의 다른 손목도 필요 없는 거야?” 도석현이 흘겨보았다.“너...”이청아는 이를 꽉 깨물고 끝내 참아냈다.“이틀만 시간을 줘, 내가 빨리 현금을 가져올게.”“시간을 줄 수는 있어. 하지만 나랑 같이 술을 마셔야 해.”도석현은 천천히 일어나 술잔 두 개를 꺼내 각각 술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 잔을 들어 이청아에게 건넸다.한 잔 가득한 양주를 들여다보며 이청아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상대방은 분명 나쁜 마음을 품고 있어. 이 술을 마시면 이곳을 떠날 수 없을지도 몰라.’“안 마셔? 그렇다면 체면을 세워주지 않는 거지.”도석현은 천천히 웃음을 거두었다. “빚을 지면 돈을 갚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돈을 갚지 못하면 손과 발을 자를 수밖에 없어. 여봐라, 이현의 다른 손도 잘라.”“네.”두 경호원은 사납게 웃으며 즉시 이현을 바닥에 눌렀다.“싫어, 내 손목을 베지 마.”이현은 혼비백산하여 연신 용서를 빌었다.“누나, 살려줘! 빨리, 난 누나 친동생이야. 난 장애인이 되고 싶지 않아. 빨리, 술을 마셔. 부탁이야!”“잘라!”도석현이 힘차게 외쳤다.“잠깐!”도끼가 떨어질 것 같자 이청아는 얼른 소리 내어 제지했다.“마실게.”“허허, 그래야지... 자, 마셔.”도석현이 사악하게 웃었다.이청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결국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이상한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셨다. 동생의 목숨이 상대의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지금 그녀는 단지 자신이 버틸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좋아, 역시 여중호걸답네. 자, 한 잔 더.”도석현이 또 술 한 잔을 가득 따랐다.이청아는 미간을 잔뜩 찌
유진우는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표정으로 걸어 들어왔다.이청아의 문자메시지를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쏜살같이 달려왔다.“너... 네가 왜 여기 있어?”도석현은 움츠러들면서 놀라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나한테 전화 건 이유가 바로 오라고 하는 거 아니야? 난 이미 왔어, 어떻게 할 건데?”유진우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여봐라, 여봐라!”도석현이 계속 울부짖었다.이상하게도 밖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랫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았다.“젠장, 다들 어디 간 거야? 사람은?”도석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쳐도 반응하지 않았다.“내가 전에 경고했을 텐데, 날 다시 건드리면 내 손에 죽는다고. 왜?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유진우가 점점 더 다가갔다.“유진우, 여긴 내 구역이야. 경고하는데 함부로 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네가 살아서 이 문을 나설 수 없어.”도석현은 겉으로 강한 척 말했다.“말해... 어떻게 죽고 싶어?”유진우가 차갑게 물었다.“너 한 걸음만 더 오면 내가 너 죽일 거야.”그때 도석현이 서랍에서 총 한 자루를 더듬어 꺼내 총구를 유진우의 머리에 겨누었다.놈이 총을 믿고 배짱이 훨씬 커졌다.“그래? 어디 한번 해봐.”유진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죽고 싶어?”도석현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과감하게 방아쇠를 당겼다.“탕!”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하지만 유진우는 꿈쩍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위아래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안 됐나?”도석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또 ‘탕탕' 하고 두 발을 쏘았다.결과는 똑같았고 유진우는 똑같이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시발, 내가 널 맞히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도석현은 이를 악물고 사격을 시작해 곧바로 탄알을 모두 날렸다.“탕탕탕탕탕...”총성이 한바탕 울린 후에도 유진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몸에 상처는커녕 옷도 파손되지 않았다.“귀신이 곡할 노릇
“네가 날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진실을 말해줄게.”도석현은 딜을 시도하려고 했다.“아니, 그냥 죽어.”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진우는 발을 푹 디뎠다.“아니...”도석현이 비명을 질렀고 그 자리에서 머리가 터졌다.완전히 목숨을 거두었다.“유진우 씨,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 해결했습니다.”그때 검은 옷으로 복면을 한 두 명의 무사가 불쑥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호위무사의 엘리트들이었다.“좋아, 현장을 깨끗이 처리해. 이 시체는 바로 도씨 가문으로 보내.”유진우가 명령했다.“네.”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식을 잃은 이청아를 안고 재빨리 지하 카지노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대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구석에 어떤 사람이 수상쩍게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바로 전에 탈출한 이현이었다.“나와!”유진우가 뒤를 돌아보았다.“너였구나? 깜짝 놀랐네.”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질책했다.“유진우! 왜 일찍 오지 않았어? 우리 누나가 방금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기나 해? 그리고 네가 너무 늦게 오지만 않았더라면, 내 손목이 잘리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내 손실을 보상할 거야? 내가 말하는데, 36억 정도가 없이 이 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진우는 손을 들어 이현의 뺨을 호되게 후려갈겼다.“퍽!”이현은 비틀거리도록 얻어맞았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얼굴 반쪽이 금방 부어올랐다.“너, 너 미쳤어? 날 왜 때리는 거야?”이현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싸쥐고 놀라 화를 냈다.“첫 번째 따귀는 네가 말버릇이 없어 때리는 거다!”유진우는 차가운 얼굴로 손을 들어 뺨을 때렸다.“퍽!”“두 번째 따귀는 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아서 때리는 거다!”“퍽!”“세 번째 따귀는 네가 비겁하게 죽음을 무서워해서 때리는 거다!”“퍽!”“네 번째 따귀는 네가 청아 씨를 위험에 빠뜨려서 때리는 거다!”“...”유진우는 우렁찬 소리의 따귀를 한 대씩 때리며 이현의 얼굴을 호되
큰소리로 아우성치며 사실을 왜곡하는 이현의 모습에 유진우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이현이 그의 뒤통수를 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잘못을 저지르고 뉘우치기는커녕 되레 유진우에게 전부 뒤집어씌우려 했다. 이현의 이런 행동에 유진우는 치가 떨리도록 화가 났다.“유진우, 너 이렇게 비겁한 놈이었어? 내 딸이 거절하니까 이런 파렴치한 수단을 써? 정말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 따로 없구나.”장경화는 냅다 욕설을 퍼부었다.“난 진작 네가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자일 줄 알았어. 우리 돈을 사기 친 것도 모자라 언니까지 해쳐?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단소홍이 두 눈을 부릅떴다.“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겠다는 거야?”유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잘못이라니? 분명 네 잘못이잖아. 네가 우리 누나를 해쳤잖아.”이현은 여전히 당당했다. 엄마가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빌어먹을 짐승 놈아! 내 딸에게서 손 떼.”장경화는 유진우를 확 밀쳐내고 정신을 잃은 이청아를 빼앗아왔다.“엄마, 저놈은 진짜 나쁜 놈이야. 누나에게 몹쓸 짓을 한 것도 모자라 사람을 시켜 내 손까지 잘랐어. 이번에 꼭 내 복수를 해줘야 해.”이현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이어갔다.“넌 한대 처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더는 참을 수 없었던 유진우는 손을 덥석 들어 이현의 따귀를 세게 후려갈겼다.“짝!”따귀를 맞은 이현은 그대로 튕겨 나갔고 코와 입이 삐뚤어진 채 벽에 부딪치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이 짐승 같은 놈아, 지금 내 아들을 때렸어?”장경화는 어두운 안색으로 버럭 화를 냈다.“유진우, 힘 좀 있다고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단소홍 모녀도 나서서 소리를 질렀다. 유진우의 상대가 되었더라면 그녀들도 진작 달려들었을 것이다.“난 당신들과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이따가 청아 씨가 깨어나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겠죠. 지금 당장 저 빌어먹을 자식을 데리고 꺼져요!”유진우가 호통쳤다. 이번에는 정말로 이현 때문에 여간 화난 게 아니었
기억을 자세히 더듬던 이청아는 드디어 모든 게 떠올랐다.어제 카지노에서 술 두 잔을 마시고 바로 정신을 잃은 탓에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다행히 누군가 구해준 모양이다.“흥, 이게 다 빌어먹을 유진우 때문이야. 걔가 못된 생각만 하지 않았어도 너희 두 남매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장경화가 씩씩거리며 말했다.“진우 씨? 진우 씨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래요?”이청아가 화들짝 놀랐다.“너 아직 모르지? 유진우가 카지노 사장과 결탁해서 너에게 약을 먹이고 못된 짓을 하려 했대. 다행히 이현이 목숨 걸고 널 구했기에 아무 일이 없었던 거야.”장경화가 대답했다.“엄마, 뭔가 잘못 안 거 아니에요?”그녀의 말에 이청아는 실소를 터트렸다.“진우 씨는 절 해칠 사람이 아니고 그런 파렴치한 수단을 쓸 사람은 더더욱 아니에요. 엄마가 진우 씨를 오해했어요.”“청아야, 네가 이렇게 순진하니까 쉽게 속는 거야.”장경화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댔어. 유진우가 얼굴은 멀쩡하게 생겨도 속으로 무슨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알아?”“엄마, 진우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이청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유진우의 인품이 어떠한지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절대 장경화가 말한 파렴치한 인간은 아니다.“청아야, 너 어젯밤에 그 자식의 추악한 모습을 보지 못해서 그래. 너에게 몹쓸 짓을 한 것도 모자라 이현까지 때렸다니까? 이현이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장경화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진우 씨가 이현을 때렸다고요? 설마요...”이청아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어젯밤에 엄마가 직접 봤는데 너에게 거짓말을 하겠어? 그때 네 이모와 소홍이도 그 자리에 있었어. 못 믿겠으면 이따가 물어봐.”장경화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전 진우 씨의 됨됨이를 잘 알고 있어요. 정말로 이현을 때렸다면 이현이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을
그들은 이현의 죽음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어제까지 멀쩡하게 뛰어다니던 아들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죽었다고?“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제 동생이 왜 갑자기 죽어요?”이청아도 믿을 수 없어서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선생님, 제발 제 동생 좀 살려주세요. 돈이 얼마나 들든 다 낼게요.”“죄송합니다. 지금으로선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어떻게 이럴 수가. 말도 안 돼!”이청아는 순식간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고 비틀거리며 제대로 서 있지조차 못했다. 남동생이 갑자기 떠났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아들, 우리 아들!”아들의 시체를 본 순간 장경화는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평소에도 끔찍이 아꼈다. 아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혼내지 않고 감싸주었다.그런데 그런 귀한 아들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떠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이 다 이렇겠지...“선생님, 우리 조카가 어젯밤까지 멀쩡했었는데 오늘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예요? 혹시 선생님들이 무슨 실수라도 한 거 아니에요?”장홍매가 의문을 던졌다.“환자분이 머리를 심하게 부딪쳐서 뇌 안에 출혈이 생겼어요. 저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써봤지만 살려내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의사가 다급하게 설명했다.“머리를 부딪쳤다고요?”그 말에 장경화는 펄쩍 뛰며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유진우야! 유진우 짓이 틀림없어. 걔가 내 아들을 죽였어.”“맞아요, 맞아요. 어제 유진우가 이현 오빠를 때리면서 머리도 부딪쳤잖아요. 그것 때문에 오빠가 죽은 게 확실해요.”단소홍은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새X! 내 아들을 죽였으니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장경화는 연신 고함을 질렀다.“그... 그럴 리가 없어요. 진우 씨일 리가 없어요.”이청아는 다급하게 부정했다.“이청아, 네
이청아는 홀로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눈빛이 흐리멍덩했고 안색도 매우 초췌했다.온종일 울었더니 남아있는 힘이라곤 없었고 머리도 윙한 게 걸어 다니는 산송장이 따로 없었다. 오늘의 충격이 그녀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청아 씨...”그때 유진우가 갑자기 병실로 들어와 걱정스럽게 물었다.“입원했다고 해서 보러 왔어. 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내가 한번 봐줄까?”이청아는 마치 자신을 가둔 것처럼 멍하니 앉아있기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청아 씨, 왜 그래?”유진우가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눈동자가 풀려있었고 표정도 무뚝뚝했다. 얼핏 보면 살아있지 않은 인형 같았다.보통 엄청난 충격을 받거나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종종 이런 표정을 짓곤 한다.유진우는 일그러진 얼굴로 이청아의 맥을 짚어보았다. 그런데 맥이 완전히 흐트러졌고 생명력도 아주 약했다.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촛불처럼 언제든지 꺼질 것만 같았다.“왜 갑자기 이렇게 됐지?”화들짝 놀란 유진우는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재빨리 은침을 꺼내 이청아에게 응급조치를 취했다. 은침이 하나둘씩 꽂히면서 진기를 그녀의 체내에 끊임없이 불어넣었다.“청아 씨, 얼른 일어나.”유진우는 침을 놓으면서 계속 그녀를 불렀다.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청아가 이 지경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죽지는 않아도 정신이 미쳐버릴 거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일어나라고!”마지막 침을 꽂을 때까지도 미친 듯이 진기를 불어넣었다.잠시 후, 이청아의 몸이 드디어 생기가 조금 생겼다. 그녀의 풀렸던 눈동자도 빛을 되찾았다.“너무 다행이야.”그 모습을 보고서야 유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재빨리 그녀에게 물었다.“청아 씨, 대체 무슨 일이야? 방금...”“짝!”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청아는 갑자기 유진우의 뺨을 세게 후려갈겼다. 그 바람에 유진우는 어안이 벙벙했다.“왜 그래?”유진우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청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눈가에 눈
방금 황은아가 던진 검은 안개 폭탄은 그녀가 이전에 만든 하얀 안개보다 독성이 백 배 더 강했다.하얀 안개는 만성 독으로 중독되면 사지가 힘없이 늘어지고 의식을 잃고 쓰러지며 신속히 구출되면 살 가능성도 있다.하지만 검은 안개는 달랐다.강력한 부식성은 몇 초 만에 살아있는 사람을 피와 살이 뒤섞여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로 만들었다.“괴물 같은 여자네.”문관옥은 하늘에서 맴돌고 있는 황은아를 보며 이를 악물고 분노했다.독 안개 하나만으로 수백 미터를 뒤덮던 정예병들을 순식간에 몰살시켰으니 살상 능력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웠다.만약 황은아가 같은 폭탄을 몇 개 더 던진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어때?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제 좀 감이 와?”황은아는 거대한 독수리를 타고 상공에서 내려다보며 소리쳤다.“늙은이들! 상황 파악됐으면 얼른 꺼져! 아니면 폭탄 몇 개 더 던져서 여기를 너희들이 무덤으로 만들어주겠다.”그녀는 말하며 몇 개의 검은 구슬을 꺼내 흔들었다.명백한 위협이었다.지하의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흩어져 숨을 곳을 찾았다.하지만 이 황무지에 독 안개를 피할 만한 적당한 은신처는 없었다.피신처라 해봐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었다.“이제 어떡하죠? 일단 철수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한 총수가 땀범벅인 상태로 달려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유장혁만 상대할 때는 병력이 많아서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강력한 황은아의 독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처참한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직접 키운 병사들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기는 힘들었다.“철수?”부규환이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상부의 명령은 그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유장혁을 죽이는 것이다. 이대로 탈영병이 되려는 것이냐?”“도망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숨어서 해독 방법을 찾은 후 임무를 수행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총수가 얼른 해명했다.“십만 대군이 어린애한테 쫓겨 도망친 일이
하늘 위에서 검은 독수리를 타고 맴돌던 황은아는 냉정한 눈빛으로 지상에 빼곡히 들어선 병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부규환의 빠른 대처로 인해 이전에 퍼진 독 안개는 절반 정도의 병사들만 쓰러뜨리는 데 그쳤지만 그녀의 능력으로 남은 병사들도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주술교가 제일 두려워하지 않는 게 바로 인해전술이었다.“은아?”독수리를 타고 하늘을 나는 황은아를 보며 유진우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자신에게 가장 먼저 도착한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제자라는 사실에 감탄이 나왔다.“아저씨! 괜찮으세요?”황은아가 멀리서 물었다.“괜찮다. 아직 버틸 수 있어.”유진우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는 황은아에게 답하여 얼른 허리춤에서 단약 한 알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계속된 전투로 인해 기력과 진기가 크게 소모된 상태였지만 몸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단약 덕분에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어린 계집아이가 어디서 감히 나서느냐? 정체를 밝혀라!”부규환이 고개를 들어 황은아를 바라보며 외쳤다.“내 입에서 정보를 빼내려는 거라면 헛수고야!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황은아가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늙은이! 다시 한번 경고하지. 당장 사람들을 데리고 꺼져! 그렇지 않으면 독을 살포해 모두 황천길로 보내버릴 테니까!”“흥! 어린 것이 말은 호기롭구나! 우리가 누군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부규환이 차가운 얼굴로 응수했다.“네가 누구든 내 알 바 아니야! 또 지껄이면 네 입부터 독으로 봉해버릴 줄 알아!”황은아가 외쳤다.“건방진 계집이네!”부규환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손바닥을 들어 허공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웅!순식간에 금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손바닥 모양의 기운이 허공을 가르며 황은아와 독수리를 향해 날아갔다.부규환의 공격이 황은아와 독수리에 닿기 직전 흰빛의 검기가 측면에서 날아들어 금빛 손바닥을 베어내며 폭발을 일으켰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검기과 기운이 서로 부딪히며 산산이 흩어졌다.검기를 날린 이는 다름 아
쿵! 쿵! 털썩!여 무사들이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많은 무사가 잇따라 쓰러졌다.이 상황은 빠르게 확산하며 이제는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후방에 서 있던 가장 먼저 안개를 들이마신 병사들은 도미노처럼 차례로 쓰러지기 시작했다.열 명, 백 명, 천 명, 만 명...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중독 증상을 보이며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안개가 지나간 자리마다 마치 강풍에 낙엽이 쓸리듯 몇 분 만에 십만 대군의 절반이 쓰러졌다.“이게 무슨 일이야! 왜 뒤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쓰러지는 거지?”여덟 명의 지휘관은 곧 이상함을 감지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독이다! 안개에 독이 섞여 있어! 모두 조심해!”한 교가 외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중독되어 쓰러지는 병사들의 수는 계속 늘어났고 멈출 기미가 없었다.이대로 가다가는 전군이 괴멸할 위기였다.“어서! 해독제를 복용하라!”여덟 명의 지휘관이 연신 외쳤다.의무병들이 일부 해독제를 비축하긴 했지만 십만 대군 전체를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그러나 지금은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조차도 다행인 상황이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멀쩡하던 전장에 왜 갑자기 독 안개가 나타난 것이냐!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꾸민 거지?”문관옥이 미간을 찌푸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하지만 현장이 워낙 혼란스러웠던 탓에 단서를 찾기 어려웠다.“설마 유장혁에게 동료가 있는 건가?”눈을 가늘게 뜬 부규환의 얼굴에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안개의 독성은 미미했기에 무도 고수들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하지만 무장한 병사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이었다.몇 분만 더 지나면 십만 병사 중 90%가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그렇게 되면 인해전술은 더 이상 펼칠 수 없을 것이다.“일어나라!”결국 부규환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그가 몸을 떨자 금빛 광채가 전신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그 금빛은 마치 생명력을 가진 듯 빠르게 형태를 갖추더니 눈 깜짝할 새에 거대한 금강 형상으로 변했다.“으아아!”
진산 기슭 아래, 포효와 함성 그리고 비명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유진우는 한 자루의 검을 들고 십만 대군 속을 종횡무진하며 검 끝이 닿는 곳마다 무적의 기세를 보였다.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이 피 웅덩이 속에 쓰러졌다.그러나 유진우가 아무리 격렬히 싸우고 있다고 해도 주변의 병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많아졌다.밀려오는 파도처럼 한 무리를 척살하면 또 다른 무리의 병사들이 덮쳐왔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병사들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십만 대군이 가만히 서서 목을 길게 빼고 죽기를 기다린다 해도 사흘 밤낮으로 베어야 할 것이다.하지만 십만 대군은 모두 정예병들이었다.갑옷을 입고 방패를 든 그들을 처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유진우의 실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혼자서 십만 대군을 도륙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사람은 기계가 아니니 고강도의 싸움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유진우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조금씩 체력이 소모됐다.단시간 내에는 눈에 띄지 않겠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로는 서서히 누적되고 기력은 점차 소진될 것이다.결국 유진우는 병사들의 인해전술에 의해 패배할 운명이었다.“흥! 죽여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문관옥은 멀리서 전투를 관전하며 냉소를 지었다.어차피 죽는 건 자기 병사가 아니니 그는 조금의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했다.‘실력으로 보니 많아야 만 명 적도 죽이는 게 한계겠네.’체력이 고갈되면 유진우는 곧 도살될 양처럼 무력해질 것이다.“1년 사이에 실력이 이 정도로 향상되다니 역시 남겨두면 안 될 불씨야.”부규환이 중얼거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유진우의 전투를 지켜보았다.유진우의 재능으로 볼 때 몇 년만 더 성장할 시간을 준다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죽여라! 다 죽여라! 전진!”여덟 명의 지휘관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전진하도록 지시했다.상부의 명령을 받은 그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죽여라!”500명의 정예병이 차량에서 뛰어내리며 앞으로 돌진했다.그때 대형 트럭의 측면 문이 열리며 빼곡히 들어있던 사람들이 드러났다.그들은 검은 전투복을 입은 채 가면을 쓰고 강철 검을 들고 있었다.하나같이 기운이 강대했는데 무도 고수가 분명했다.“돌격!”트럭 위의 가면을 쓴 남자가 장도를 휘두르자 트럭 안의 무사들은 주저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양측 병력은 곧바로 격렬한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조무진의 병력이 더 많았다. 게다가 훈련도 잘되어 있어 공격과 방어가 일체화된 강력한 전력을 자랑했다.반면 가면을 쓴 암살자들은 다섯 명씩 조를 이루어 완벽한 호흡으로 협력하며 매우 맹렬하게 돌격했다.일순간 양측은 팽팽히 맞서며 승부를 가릴 수 없는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다.“진무사?”조무진은 자세히 살펴보다가 이내 단서를 발견했다.가면을 쓴 암살자들은 모두 정예 무사로 각별히 선발된 사람들이 분명했다.일반적인 무림 문파였다면 격전속에서 이토록 통일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었다.오직 공식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받은 무사만이 이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연경 전체에서 봤을 때, 이 정도의 실력과 동기를 가진 집단은 진무사밖에 없었다.진무사까지 출동한 것을 보니 조무진은 사태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때 500리 떨어진 한적한 산림 속.조홍연이 정예 병력 한 부대를 이끌고 산적 토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일부 저항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산적들은 정예군을 보자마자 쥐가 고양이를 보듯이 산채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그들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았다.조홍연은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가볍게 임무를 완수했다.“홍연 님, 산적들은 이미 도망쳤고 저희는 무사히 산채를 점령했습니다. 현재 전리품 정리 중입니다.”조홍연의 측근 중 하나인 여자 장군 공요가 다가와 보고했다.조홍연은 산채의 나무 성벽 위에 서서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서 기쁨은 찾아볼 수 없었다.“홍연 님, 왜 그
홍군림이 백준을 막아서 검을 상대하고 있을 때, 다른 한편 동방의 진산에서 백 리 떨어진 곳에서 조무진이 정예병 500명을 이끌고 급히 진산으로 향하고 있었다.상황이 갑작스럽게 발생한 탓에 병력이 많지 않았지만 이 500명은 그의 직속 친위대로 구성된 강력한 전투력의 부대였다.안에는 적지 않은 무도 고수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만 명 규모의 일반 군사들과 맞서도 전혀 밀리지 않을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더 빨리! 더 속도를 내라! 반드시 최단 시간 안에 서하사에 도착해야 한다.”조무진은 차량에 앉아 연신 재촉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의 이런 반응은 함께 차량에 타고 있던 두 명의 여자 부하에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평소 조무진은 전쟁의 신으로 불리며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담담히 대응하던 사람이었다.‘그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냉철한 판단으로 대응해 온 그가 지금 이토록 다급한 모습을 보이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조홍연 쪽은 어떠한가? 연락이 닿았느냐?”조무진이 갑자기 물었다.“아가씨는 가문 장로들에 의해 긴급 임무에 차출되어 현재로서는 연락이 닿지 않지 않아 일단 메시지를 남겨놓았습니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즉시 지원하러 올 것입니다.”한 여자 부하가 답했다.“무슨 임무? 다 헛소리야! 늙은 놈들이 일부러 방해를 놓은 게 틀림없어!”조무진이 분을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이 중요한 시점에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조홍연을 멀리 차출보내는 건 조씨 가문에서 황가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유장혁이 죽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행위였다.“도련님, 유 도련님께서는 복이 많으신 분이니 분명히 무사하실 겁니다. 너무 염려 마세요.”여자 부하가 조심스럽게 위로를 건넸다.“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조무진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지금 연경성은 이미 폭풍전야다. 황권 뒤에 숨은 세력들조차 움직이기 시작했어. 내 추측이 맞다면 10년 전의 그 비극적인 사건이 다시 벌어질
그의 옷자락은 바람에 나부끼며 속세를 벗어난 듯 초탈한 기운을 뿜어냈다.보통 사람이 이 광경을 봤다면 곧바로 무릎을 꿇고 선인을 외쳤을 것이다.슉!흰옷의 검객이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 갑자기 하얀 보검 하나가 땅에서 솟구쳐 오르며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그 검은 마치 도전장을 내미는 듯했다.“누가 내 길을 막는 것이냐!”흰옷의 검객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검선 선배님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습니다. 하여 후배가 가르침을 청하러 왔습니다.”이때 웃통을 벗은 준수한 청년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라 하얀 보검 위에 가볍게 발을 디뎠다.허공에 떠오른 청년과 검이 검선 백준과 마주 섰다.“네 놈은 누구냐?”백준이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후배 검종, 홍군림이라 합니다. 천 리 길을 달려와 검선 선배님께 몇 수 가르침을 청하고자 합니다.”준수한 청년 홍군림이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 그의 태도는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았다.“홍군림? 검종에서 천하를 누비며 다니는 자?”백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약간 놀란 기색을 보였다.“검종에서 절세의 천재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 보니 과연 소문대로네. 어린 나이에 대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니... 유장혁 그 자식보다 낫구나.”“선배님, 과찬입니다.”홍군림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홍군림, 오늘 중요한 일이 있으니 정말 가르침을 청하려 한다면 다음 기회로 미뤄라.”백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다음을 기약하기보다 어렵게 만났으니 이번 기회에 부디 선배님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홍군림은 물러서지 않았다.“네 말은 일부러 날 막고 있다는 거냐? 설마 검종이 호룡각이 부리는 개가 된 것은 아니겠지?”백준의 얼굴이 서서히 차가워졌다.“제 행동은 검종과도, 호룡각과도 무관합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흥미일 뿐입니다.”홍군림은 담담히 대답했다.“저는 세 살 때부터 검을 익혀 검도의 극한에 이르렀습니다. 선배님의 검이 빠를지 제 검이 빠를지
“뭐라고?”부규환의 말에 유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유진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만수는 서경에 머물면서 막대한 병력을 쥐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는 실력 있는 고수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너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호룡각의 세력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서경왕부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호룡각이 눈엣가시 같은 서경왕부의 존재를 참을 리가 없었다.호룡각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서경왕부를 상대하기에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다시 말해 유만수가 건재한 서경왕부의 세력은 절대 약화하지 않을 것이며 호룡각또한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세력이라는 뜻이었다.그러나 부규환의 말투를 보니 지금은 상황이 이미 많이 바뀐 듯했다.“도련님,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부규환이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호룡각은 10년간 치밀하게 준비해 왔습니다. 언젠가 서경왕부를 제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그날이 머지않았습니다.”“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야!”유진우가 외쳤다.“도련님,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오늘 살아서 나갈 수 없을 테니까요.”부규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흥! 나를 죽이려고?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유진우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아무리 숨겨둔 병력이 많다고 해도 나도 혼자 온 게 아니다! 지원군이 오고 있으니 누가 이길지는 두고 봐야겠지.”“도련님의 계획은 이미 호룡각에 간파되었습니다. 말씀하신 지원군은 아마 오늘 도착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의 도련님은 저희 수중에 들어온 먹잇감에 불과합니다.”부규환이 담담하게 말했다.“하하하, 유장혁!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겠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실력이 강하더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겠구나!”문관옥이 참지 못하고 조소를 터트렸다.경천 랭킹 10위에 오른 강자가 직접 나섬과 더불어 10만 외성 군의 정예병을 내세웠으니 유장혁이 아무리 숨겨둔 비장의 수가 있다고 해도 마지막 발버둥
왜 무림에는 고수들이 넘쳐나고 강자가 끊임없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공무원과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는지를 사람들은 이제야 알았다.그 이유는 실력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수십만 대군이 밀고 들어오면 설령 하늘을 찌르는 능력을 갖췄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어떤 문파라도 관군의 정예 병력과 대적하게 되면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될 뿐이다.“포위하라!”명령과 함께 10만 대군이 안팎으로 유진우와 일행을 완전히 둘러쌌다.병사들은 각자 창과 칼을 들고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으며 살기 가득한 기운이 사방을 압도했다.“나는 옥면 군신 무관옥이에요. 팔방제후는 어디 있어요?”그 순간 무관옥이 앞으로 나와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초품 군신의 위엄을 지닌 그는 이품 고급 장교에게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처럼 느껴졌다.팔방제후로 불리는 실권자들도 무관옥의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그의 질문은 대답 없이 공허하게 메아리쳤고 병사들은 오직 무표정하게 대형을 유지하며 무관옥을 무시했다.“이게 무슨 일이죠? 당신들의 고급 장교 어디 있는 거예요?”무관옥은 불만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무관옥은 30만의 백호랑을 연경으로 보낼 수 없지만, 군신으로서 어떠한 고급 장교도 그를 보고 정중하게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군신님, 오늘 외성군의 지휘는 제가 맡고 있습니다.”그때 중앙 대열에서 하얀 옷을 입은 얼굴 창백하고 수염이 없는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노인의 키는 훤칠하고 체격은 마른 편이며 날카로운 음성이 다소 섬뜩하게 들렸다.“부 내관님?”부 내관을 본 순간 무관옥의 눈동자가 급격히 수축하였다. 좀 전까지 드러냈던 거만한 태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비록 관직은 높지 않지만, 그 지위는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그는 천자의 측근이자 대내 제1고수로 꼽히는 인물이고 경천 랭킹 10위에 오른 절정 고수 부규환이었다.“군신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문제는 이제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부규환은 고개를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