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또 뭐?”이서우가 조금 초조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아직 돈을 안 냈어? 이 약은 귀하고 귀한 건데 그냥 천만 원만 줘.”유진우는 무심하게 말했다.“뭐라고? 이 약 한 병이 천만 원이라고? 그냥 빼앗지 그래?”이서우는 화가 났다.비록 돈이 많긴 하지만 이 정도로 바가지를 씌우다니?“뺏는 것보다는 이게 빠르지. 비싸다고 생각되면 약을 돌려주면 되잖아.”유진우는 귀찮은 듯 약을 돌려달라고 손을 내밀었다.“정말로 염치가 없네!”이서우는 이를 악물고 하는 수없이 천만 원짜리 수표를 주고 떠났다.그녀는 돌아가면서 어머니의 병이 낫지 않으면 유진우에게 백 배 천 배 갚아주겠다고 결심했다.30분 후.이서우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병실에 들어서자 이미 여러 명의 의사들이 모여 있었다.의사들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고 조국화는 여전히 온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서우야, 드디어 돌아왔구나!”장경화가 서둘러 물었다.“어때? 유진우가 치료할 수 있대? 만약 안 된다고 하면 강 명의를 찾아갈 수밖에 없어.”“유진우가 약 한 병 줬는데 한 달 동안 복용하면 괜찮아진다고 했어요.”이서우는 도자기로 된 병을 꺼내더니 검은 알약 하나를 쏟아냈다.땅콩만 한 크기의 알약은 평범했고, 어렴풋이 고약한 냄새가 났다.“이걸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장경화는 믿기지가 않았다.무슨 영약인 줄 알았는데 그냥 거무칙칙한 덩어리였다.“유진우가 그렇게 말했어요.”이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아가씨...”그때 대머리 의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어머님은 현재 위독한 상황이니 제일 정확한 방법은 머리 수술을 받는 것입니다.”“흠! 왜 아픈지 원인도 찾지 못하면서 머리 수술을 하겠다고? 그게 사람을 죽이는 것과 뭐가 달라!”이서우가 콧방귀를 뀌었다.의사가 어머니의 마비 증세는 뇌에 생긴 종양 때문일 수 있다고 해서 CT 검사를 다 해봤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모든 것이 의심일 뿐
원기가 왕성한 조국화를 바라보는 의사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전문가라는 본인들도 방법이 없었던 병이 조그마한 알약으로 치료가 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이 새까만 것이 정말로 영약이란 말인가?“아가씨 그 약은 뭐예요? 저희가 연구하게 해줄 수 있을까요?”놀라움을 뒤로하고 대머리 의사가 물었다.“연구는 무슨! 꺼져!”이서우는 말하면서 대머리 의사를 발로 찼다.대머리 의사는 자신이 불리한 입장이라는 것을 알고 감히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떠났다.“이 작은 알약이 이렇게 신기하다니? 정말 놀라워!”장경화가 침을 꿀꺽 삼켰다.보기에는 흉하고 냄새도 고약했지만 약효가 좋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비록 천만 원이 들었지만 가치는 있는 것 같아요.”이서우가 기뻐하며 말했다.“뭐? 천만 원?!”약의 가격을 듣고 있던 두 사람은 놀랐다.“서우야, 농담하는 거지? 이 약이 천만 원이라고?”장경화의 눈이 커졌다.“맞아! 딸, 너 속은 거 아니야? 이게 어떻게 천만 원씩이나 해?”조국화도 돈이 아깝다는 표정을 했다.조국화는 부자였지만 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인색한 사람이었다.“됐어요,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괜찮아요.”이서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이게 어떻게 괜찮아?”조국화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 자식이 내 뺨을 때린 원수도 갚아주지 못했는데 지금 또 약 한 병에 우리 돈 천만 원을 뺏어가다니? 안 돼, 돈을 꼭 다시 돌려받을 거야!”그렇게 말하면서 조국화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감정이 너무 흥분한 데다 아직 몸이 잘 회복되지 않은 상태여서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엄마!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해요. 지금은 엄마가 건강해지는 게 제일 중요해요.”이서우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형님, 돈은 제가 꼭 받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부터 해요.”장경화가 말했다. 잘 보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알았어, 그럼 이건 자네한테 맡길게!”조국화도 시원하게 말했다.심부름을 해준다고
“됐어, 그만해. 때리지 말고 우선 무슨 일인지 들어보자.”장경화가 이현이 맞는 게 아까워서 서둘러 말렸다.“나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이현은 울먹이며 계속했다.“어젯밤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취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있었고, 차는 사고가 났었어. 게다가 사람까지 사망한 걸 보고 너무 놀라서 도망쳤는데 바로 잡혔어.”“음주운전을 하다가 사람을 치어 죽이고 뺑소니를 쳐? 지금 얼마나 큰 범죄를 저지른 건지 알기나 해? 십 년, 이십 년은 감옥 생활을 해야 돼!”이청아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응?”이청아의 말에 이현의 얼굴은 두려움에 하얗게 질려서 외쳤다.“누나, 나 아직 젊어, 감옥 가기 싫어. 제발 살려줘!”“잘못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사람을 죽이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이청아는 한숨을 쉬었다.이현을 너무나 아끼지만 이번 일은 그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엄마! 누나! 나를 도와줘.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맹세해!”이현은 당황했다.자신의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나른해졌다.“현아, 걱정 마, 엄마가 바로 숙모한테 전화해 볼게. 강북 이씨 가문에서 나서고 돈을 좀 쓰면 괜찮을 거야!”장경화는 곧바로 조국화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형님, 현이가 교통사고를 냈는데 사람이 죽었어요. 지금 경찰서에 있는데 형님 인맥으로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동서, 내가 도와주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어젯밤 청아가 용호걸과 약속을 지키지 않아 가문에서 불만이 많아. 심지어 청아가 용호걸 씨와의 결혼을 동의하지 않으면 자네들한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조국화는 냉정하게 말했다.“네?”장경화의 안색이 굳어지며 시선은 이청아에게로 돌아갔다.“용호걸과 결혼하라고요? 말도 안 돼요!”이청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동의하지 않으면 나도 방법이 없어. 이현의 일은 자네들끼리 알아서 해.”조국화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청아야! 그냥 동의해. 용호걸이 어때서?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어느 고급 클럽에서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용호걸은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 저녁에 만나요. 또 한 번 바람맞히면 알아서 하세요.”그는 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의 옆에는 몇 명의 젊은 남녀가 앉아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 후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호걸 씨의 계략으로 미인을 잡으셨네요. 정말 대단해요!”백발의 청년은 감탄으로 가득 찼다.“하하... 동생을 감옥에 보내지 않으려면 별수 있겠어? 말을 들어야지. 정말로 괜찮은 여자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용호걸은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그가 눈독을 드린 여자들은 모두 도망칠 수 없었다.조금만 머리를 써서 계략을 피우면 바로 성공했었다.예를 들어 이청아는 순결한 여자로 보였지만, 그녀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접근하기만 하면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호걸 씨,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왜 굳이 결혼까지 하시려는 거예요? 평소 스타일과 맞지 않은 것 같아서요.”백발의 청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핵심을 물어보네.”용호걸은 시가에 불을 붙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할게. 굳이 결혼하려는 건 강북 이씨 가문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야. 용씨 가문과 이씨 가문이 혼인을 하기로 한건 이미 결정된 사실이고 이청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본가로 들어갈 거야. 그렇게 되면 그녀의 손을 이용해서 이씨 가문을 내 손아귀에 넣을 수 있거든.”용호걸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다.“역시 용씨 가문 도련님이네요. 그렇게 멀리까지 내다보다니, 대단해요!”“권력도 장악하고 아름다운 여자도 안고 정말 일거양득이네요!”한 무리의 젊은 남녀들이 아부를 늘어놓았다.“내가 이 씨 가문을 장악하고 나면 그때는 용씨 가문의 가주 자리는 내 것이 될 거야!”용호걸은 자신만만해 보였다.강력한 가문의 내부 경쟁은 치열했고, 그의 형제들도 모두 가주 자리를 탐내고 있었기에 그는 반드시 형제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과 실력이 필요했다.“그럼 미리 축
첫 번째, 무응답.두 번째, 역시 무응답.세 번째에야 겨우 연결이 되었다.“청아 씨, 오늘 저녁에 같이 식사하기로 했잖아? 어디야? 언제쯤 도착할 것 같아?”유진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그게... 미안해. 지금 바쁜 일이 생겨서 갈 수가 없어.”이청아는 말을 더듬거렸다.“그랬구나, 그럼 언제쯤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유진우가 다시 물었다.“고객과 저녁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미안해!”이청아가 조금은 이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 일이 중요하니까. 먼저 일봐.”유진우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조금 아쉬웠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 다음에 내가 밥 살게.”“알았어.”유진우는 웃으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낯익은 남성 목소리가 들려왔다.“청아 씨, 누구랑 전화해요? 빨리 와서 한잔해요.”말이 떨어지자 삐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사장님, 손님은 언제 오세요?”매니저가 물었다.“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못 온대요. 이것도 다 치워요. 모두들 수고했어요.”유진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남은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했는데 헛수고였다니?...같은 시각, 로즈 호텔의 룸 안에서.“호걸 씨, 이제 더 이상은 마실 수 없으니 오늘은 그만해요.”이청아는 건배하자고 다가오는 술잔들을 밀어내며 연신 손을 흔들었다.그녀의 얼굴은 이미 술기운에 붉어지고 머리는 어지럽고 온몸에 힘이 풀렸다.“청아 씨, 이현 씨 일을 해결하는 데 정말 힘들었어요. 저의 노력을 봐서라도 저랑 한 잔은 해야지 않겠어요?”용호걸은 약간 불쾌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청아야, 그냥 마셔, 한 잔이잖아. 별거 아니야.”옆에 앉아 있던 장경화가 부추겼다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이현을 구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용호걸을 기쁘게 해줘야 했다.“그건...”이청아는 조금 당황했다.그녀는 자신의 주량을 알고 있었다. 조금만 더 마시면 분명 취해버릴 것 같았다.“청아
프레지덴트 스위트룸 내.장경화는 이청아를 침대에 눕힌 뒤 신발과 양말을 벗겼다.그러고는 뜨거운 물로 이청아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었다.“엄마, 힘들어요, 물 주세요.”이청아는 입이 말라 장경화한테 말했다.“물로는 안 돼. 우유를 사 올게, 좀만 기다려.”장경화가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사모님, 청아 씨 괜찮아요?”장경화가 문을 나서는 순간 뒤따라오던 용호걸과 마주쳤다.“괜찮아요. 한잠 푹 자고 나면 될 거예요.”장경화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어디 나가세요?”용호걸이 물었다.“우유 먹이려고 사러 가요. 속이 안 좋을 것 같아서요.”장경화가 말했다.“그렇군요. 그런데 이 근처에는 우유를 파는 곳이 없어서 아마 좀 멀리 가셔야 하셔서 좀 늦게야 돌아오실 수 있을 거예요.”용호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닌데요? 방금 바로 아래층에 슈퍼가 있는 걸 본 것 같아요.”장경화가 웃으며 말했다.“왜요? 지금 제 말을 의심하시는 거예요?”용호걸의 미소가 서서히 굳어졌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마치 맹수 같았다.“아니에요. 그런 뜻은 아니에요. 알았어요. 늦게 돌아올게요.”장경화는 서둘러 말을 바꿨다.“다행이네요.”용호걸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으며 장경화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장경화가 사라지자 용호걸은 방 키를 꺼내 스위트룸 문을 열고 들어갔다.“엄마, 우유 이렇게 빨리 사 왔어요?”이청아는 침대에 누워 힘없이 물었다.“청아 씨 어머니는 당분간 못 오실 거예요. 그동안은 내가 돌봐줄게요.”용호걸은 거침없이 말했다.“호걸 씨? 당신이 어떻게?”이청아의 안색이 변했다.“어떻게 들어왔어요? 엄마는요?”“당연히 우유 사러 가셨죠.”용호걸은 말 하면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호걸 씨, 뭐 하는 거예요?”이청아의 눈에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솔로인 남녀가 한 방에서 뭐를 하겠어요?”용호걸은 넥타이를 풀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의 눈은 뜨거운 욕망으로 가득 찼다.“호걸 씨, 장난하지 말아요. 전 당신이
만약 상대가 강제로 밀어붙인다면 머리를 박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뜻대로 되게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강요하면 뭐? 이미 결혼 한 번 했었던 여자가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당장 옷 벗어!”용호걸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싫어요!”이청아는 이를 꽉 깨문 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도망쳐?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용호걸은 흉악스럽게 웃으며 재빨리 쫓아갔다. 이청아가 엘리베이터 문 앞까지 도망치려던 그때 용호걸이 갑자기 그녀를 확 덮치고는 미친 듯이 옷을 찢기 시작했다.“땡!”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갑자기 열렸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든 두 사람은 순간 멈칫했다. 유진우가 무뚝뚝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야?”유진우가 살기를 내뿜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통화할 때 얼버무리는 이청아의 모습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이청아 차의 위치를 추적했었다. 그런데 현장에 오자마자 이런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질 줄은 생각지 못했다.“어머, 당신이었군요.”용호걸이 천천히 일어서며 자연스럽게 바지를 올리더니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내가 여자친구랑 애정행각을 하는 걸 몰래 훔쳐보려고 왔어요?”“여자친구?”유진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청아에게 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아니야... 진우 씨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이청아는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청아 씨, 이런 일도 저 사람한테 숨길 건가요? 오늘 밤에 나랑 술도 마시고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만났으니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요.”용호걸이 웃으며 말했다.“청아 씨, 이 사람이 바로 당신이 만나야 한다는 고객이야?”유진우의 낯빛이 말이 아니게 어두워졌다.통화할 때 하도 머뭇거려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는데 이런 밀회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게...”이청아는 말하려다가 멈추었다. 그를 속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 아무 말이 없어? 대답 못 하겠어?”이청아가 아무 말이 없자 유진우의 마지막 희망도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그는 그녀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었지만 아쉽게도 원하는 대답은 얻지 못했다.“미안해...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이청아는 칼로 마음을 도려내듯 찢어지게 아팠고 호흡마저 가빠졌다.“말 못 할 사정?”유진우가 코웃음을 쳤다.“무슨 사정이길래 몸도 팔고 설명조차 못 하는 건데?”“미안해... 정말 미안해...”이청아는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미안하다는 소리 그만해. 우린 이미 이혼했어. 당신이 뭘 하든 나랑 상관없어. 그러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유진우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하지만 앞으로는 날 귀찮게 하지 마. 나도 사람이야, 마음이 아프다고. 그러니까 부탁인데 제발 나 좀 놔줘.”“나...”이청아는 말하려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멈추었다.이런 상황에서 모든 걸 끝내버리면 오히려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남동생과 가족, 그리고 유진우를 위하여 용호걸의 뜻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신혼 첫날밤에 이 세상을 떠날 결심까지 마쳤다.“됐어요, 됐어요. 할 얘기는 다 한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해요.”그때 용호걸이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청아 씨, 먼저 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우린 이따가 제대로 즐겨요.”이청아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유진우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여기 서서 뭐 해요? 계속 구경할 건가요?”용호걸은 마치 하찮은 인간을 쳐다보듯 유진우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아참, 당신 여자 아주 죽여주던데요? 피부도 하얗고 부드러운 게 정말 최고예요. 이따가 제대로 즐겨야겠어요. 물론 당신만 괜찮다면 옆에서 구경해도 돼요. 하하...”용호걸의 미소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이 자식이 뒤지려고!”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유진우는 용호걸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곧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용호걸은 벽에 부딪히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유진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
고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비록 똑같이 연기였지만 조군영보다는 훨씬 진실되어 보였다.“표기대장군 도착하셨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곧이어 금빛 갑옷을 입고 기상이 비범한 중년 남자가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이 사람이 바로 일품 표기대장군 유태범이었다!유태범은 표기대장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만수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유태범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어 모든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만약 유만수가 없었다면 분명 유씨 가문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만수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유태범을 보자 조군영과 고원은 즉시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그들 둘은 모두 유태범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진정한 측근 장수들이었다.마치 유만수와 석태혁의 관계처럼 영광도 함께 하고 손실도 함께했다.“형님!”유태범은 두 심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당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떨리며 얼굴에는 비통함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어찌 이럴 수가? 우리 형님이 어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짓입니까?!”유태범이 붉은 눈으로 연달아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호룡각의 잔당들입니다. 그들이 자객을 부내에 잠입시켜 어젯밤 어르신을 암살했습니다.” 이의진의 얼굴이 흐리멍덩했다.“호룡각?”유태범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다가 즉시 고함쳤다. “누구 없느냐!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 전 성을 수색하라.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잠깐만요!”이의진이 갑자기 나서서 제지했다.“태범 씨, 매우 비통한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직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습니다.”“형님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무
이 말이 나오자 조군영과 고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두 사람이 오늘 온 것은 본래 기세를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의진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입을 열자마자 반역이라는 죄명을 들이대다니.이런 죄가 뒤집어씌워진다면 그들은 아마 왕부의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마마, 농담 마십시오. 반역은 사형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런 일은 감히 못 하지요!” 고원이 연달아 해명했다.“맞습니다. 저희는 왕께 항상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조군영도 따라서 부인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그런 야심이 조금은 있었지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반역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갑옷을 입고 부내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규칙도 모르십니까?” 이의진이 조금도 봐주지 않고 꾸짖었다.그저 이품 장군일 뿐인데 군권이 조금 있다고 감히 왕부 안에서 눈깔을 찌푸리고 있다니.유만수가 살아있을 때 이 둘은 감히 이러지 못했다.“아이고! 제 정신 좀 보세요, 왕부의 규칙을 잊었네요.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군영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어서 갑옷을 벗고 차고 있던 칼을 내려 왕부의 경비에게 건넸다.“저희가 급히 오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으니 개의치마시지요.” 고원이 웃으며 말했고 즉시 갑옷과 칼을 벗었다.이 광경을 보고 이의진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지만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왕께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저희 둘이 특별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고원이 가식적으로 말했다.“소식통이 꽤나 빠르군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늦었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이 의아한 척했다.이의진은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영당으로 향했다.왕부 밖은 비록 동정이 없었지만 왕부 안에는 이미 흰 만장이 가득
“알겠습니다. 제가 경비병 신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손도운이 결국 타협했다.비록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오 무렵, 서경 왕부 안.비록 유만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어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을 왔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보국대장군 도착!”“운미대장군 도착!”왕부 문 앞에서 두 번의 외침이 들렸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중년 남자 둘이 각각 친병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이 친병들은 모두 허리에 장도를 차고 있었고 보기에도 험상궂었다.온 이들은 바로 이품 관직인 보국대장군 조군영과 운미대장군 고원이었다.“두 분, 왕부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셔야 합니다.”한 왕부 친위가 조군영과 고원을 막아서며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흥! 난 밖에 나올 때 갑옷을 벗지 않아. 꺼져!” 조군영이 노하여 꾸짖었다.“조 장군, 이건 왕부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시기 바랍니다.”왕부 친위가 말했다.“규칙? 나한테 감히 규칙을 운운한 건가?”조군영이 왕부 친위의 얼굴을 때리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규칙을 들먹이며 나를 압박하느냐? 죽고 싶나?”“조 장군, 소인도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왕부 친위는 동요하지 않았다.“헛소리 작작 하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조군영이 갑자기 칼을 뽑아 왕부 친위의 목에 겨누었고 그의 모습은 매우 포악하고 극도로 횡포했다.“제 머리를 베신다 해도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왕부 친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개자식! 관짝을 보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조군영은 마침내 화를 내며 칼을 거세게 들어 왕부 친위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멈추세요!”이때 한 소리의 여성의 호통이 울렸다.삼베 흰옷을 입은 이의진이 석태혁 일행을 데
이 순간 유진우의 눈이 피를 뿜을 듯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살기가 솟구쳤다.비록 예전에 아버지와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그동안 품었던 그 작은 분노마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단지 호룡각의 일을 완전히 해결한 후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에 효도를 제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둘이 만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암살당해 돌아가셨다. 이 충격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창공!” 유진우가 갑자기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손을 뻗어 창공보검을 불러들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호룡각의 잔당들을 모조리 섬멸해야만 했다!“전하! 제발 진정하십시오!” 유진우가 이성을 잃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손도운이 급히 그를 막아서며 침착하게 조언했다. “호룡각은 준비를 하고 온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렇게 무모하게 뛰쳐나가신다면 복수는커녕 오히려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리실 수 있습니다!”“비키세요!” 유진우의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창공검의 칼날을 손도운의 목에 바로 겨누었다. 예리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며 상처를 내자 피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전하! 저를 죽이시더라도 전 전하를 막아야만 합니다. 제가 어찌 전하께서 죽으러 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왕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전하께 더 이상의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손도운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진우 앞을 가로막은 채 죽음도 불사하는 자세를 취했다.유진우는 이를 악물었고 그의 손에 든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초간의 대치 끝에 그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마침내 검을 내렸다.손도운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지금 냉정해져야만 했다. 유만수가 죽었으니 왕부가 분명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이때
다른 처녀들도 모두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진심 어린 간청을 했다.이 광경을 본 유진우는 넋이 나갔다.노란 옷 처녀의 말은 그의 귀를 때리는 듯했다.지옥 같은 일을 겪고도 이 아이들이 자신이 아닌 천하의 모든 약자들을 생각하다니... 상상도 못 했다.이런 원대한 뜻과 깨달음은 그조차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이청성이 말했듯, 이들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을 향하는 처녀들이었다.귀하고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누가 여자가 남자만 못하다 했는가?진정한 대의 앞에서 이 여자들이야말로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었다.이런 의로운 용사들이 있는데 어찌 서경이 부흥하지 않을까? 어찌 천하가 평안하지 않을까?“오빠, 결정해요. 받아주지 않으면 저 애들은 살아갈 희망조차 잃을 거예요.” 이청성이 진지하게 말했다.“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어요?” 유진우가 엄숙하게 물었다.“절대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모든 소녀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요! 허락하죠!”유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부터 특별 훈련을 시작할 거예요. 견뎌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의 원대한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지만 견디지 못한다면 편한 곳에서 평안히 살도록 해요.”“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노란 옷의 소녀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소녀들도 따라 외쳤다.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청성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네가 돌봐. 내일 저애들의 거처를 정하도록 해.”“알겠어요.”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으며 소녀들을 데리고 떠났다.일행이 막 나가자 손도운이 급하게 달려 들어왔다.그의 표정이 매우 당황스러워 보였고 큰일이라도 난 듯했다.“전하! 큰일 났습니다!”유진우를 보자마자 손도운은 ‘쿵’하고 무릎을 꿇고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왕부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왕께서 자객의 암살로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요?”이 말을 듣자 유진우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유
“오빠, 급한 건 알지만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아가씨들은 지금 오빠만 믿고 있고 목숨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어요. 받아들이면 좋은 점이 많을 거예요. 예를 들어, 오빠가 외로울 때...”“농담하지 말고 요점이나 말해요!” 유진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솔직히 말할게요.”이청성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장혁 씨, 사실 이 처녀들은 보기 드문 인재예요. 제가 이미 선별했는데 모두 영리하고 의지가 강해요. 조금만 가르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예요.”“무슨 뜻이에요?” 유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밀사의 중요성은 잘 아실 거예요. 특히 여자 밀사는 어떤 면에서 타고난 장점이 있죠. 이 처녀들을 밀사로 키우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이청성이 말했다.“말은 쉽지, 밀사 하나 키우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전 지금 제 몸 하나도 챙기기 힘든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요?” 유진우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그는 이 처녀들이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지, 이용당하거나 장기말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충성심인데 그들은 이미 그걸 가지고 있어요. 장혁 씨가 그들을 구해줬고 장혁 씨의 빛이 그들의 어두운 세상을 비춰줬죠. 저애들은 장혁 씨를 신처럼 여기고 있어요.”“시간과 노력은 걱정하지 마요. 장혁 씨가 직접 가르칠 필요 없이 좋은 스승만 찾아주면 돼요. 장혁 씨 곁의 손도운이라면 아주 적합할 것 같은데요.” 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었다.“그건 청성 씨 생각이고 저 애들한테는 물어봤어요?” 유진우가 물었다.“당연히 물어봤죠. 모두 하겠대요.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이청성이 말했다.“불쌍한 사람들인데 그럴 필요까지야...” 유진우가 눈썹을 찌푸렸다.“장혁 씨, 어둠 속에 있어도 빛을 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세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발 저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