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지덴트 스위트룸 내.장경화는 이청아를 침대에 눕힌 뒤 신발과 양말을 벗겼다.그러고는 뜨거운 물로 이청아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었다.“엄마, 힘들어요, 물 주세요.”이청아는 입이 말라 장경화한테 말했다.“물로는 안 돼. 우유를 사 올게, 좀만 기다려.”장경화가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사모님, 청아 씨 괜찮아요?”장경화가 문을 나서는 순간 뒤따라오던 용호걸과 마주쳤다.“괜찮아요. 한잠 푹 자고 나면 될 거예요.”장경화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어디 나가세요?”용호걸이 물었다.“우유 먹이려고 사러 가요. 속이 안 좋을 것 같아서요.”장경화가 말했다.“그렇군요. 그런데 이 근처에는 우유를 파는 곳이 없어서 아마 좀 멀리 가셔야 하셔서 좀 늦게야 돌아오실 수 있을 거예요.”용호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닌데요? 방금 바로 아래층에 슈퍼가 있는 걸 본 것 같아요.”장경화가 웃으며 말했다.“왜요? 지금 제 말을 의심하시는 거예요?”용호걸의 미소가 서서히 굳어졌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마치 맹수 같았다.“아니에요. 그런 뜻은 아니에요. 알았어요. 늦게 돌아올게요.”장경화는 서둘러 말을 바꿨다.“다행이네요.”용호걸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으며 장경화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장경화가 사라지자 용호걸은 방 키를 꺼내 스위트룸 문을 열고 들어갔다.“엄마, 우유 이렇게 빨리 사 왔어요?”이청아는 침대에 누워 힘없이 물었다.“청아 씨 어머니는 당분간 못 오실 거예요. 그동안은 내가 돌봐줄게요.”용호걸은 거침없이 말했다.“호걸 씨? 당신이 어떻게?”이청아의 안색이 변했다.“어떻게 들어왔어요? 엄마는요?”“당연히 우유 사러 가셨죠.”용호걸은 말 하면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호걸 씨, 뭐 하는 거예요?”이청아의 눈에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솔로인 남녀가 한 방에서 뭐를 하겠어요?”용호걸은 넥타이를 풀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의 눈은 뜨거운 욕망으로 가득 찼다.“호걸 씨, 장난하지 말아요. 전 당신이
만약 상대가 강제로 밀어붙인다면 머리를 박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뜻대로 되게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강요하면 뭐? 이미 결혼 한 번 했었던 여자가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당장 옷 벗어!”용호걸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싫어요!”이청아는 이를 꽉 깨문 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도망쳐?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용호걸은 흉악스럽게 웃으며 재빨리 쫓아갔다. 이청아가 엘리베이터 문 앞까지 도망치려던 그때 용호걸이 갑자기 그녀를 확 덮치고는 미친 듯이 옷을 찢기 시작했다.“땡!”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갑자기 열렸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든 두 사람은 순간 멈칫했다. 유진우가 무뚝뚝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야?”유진우가 살기를 내뿜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통화할 때 얼버무리는 이청아의 모습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이청아 차의 위치를 추적했었다. 그런데 현장에 오자마자 이런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질 줄은 생각지 못했다.“어머, 당신이었군요.”용호걸이 천천히 일어서며 자연스럽게 바지를 올리더니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내가 여자친구랑 애정행각을 하는 걸 몰래 훔쳐보려고 왔어요?”“여자친구?”유진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청아에게 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아니야... 진우 씨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이청아는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청아 씨, 이런 일도 저 사람한테 숨길 건가요? 오늘 밤에 나랑 술도 마시고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만났으니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요.”용호걸이 웃으며 말했다.“청아 씨, 이 사람이 바로 당신이 만나야 한다는 고객이야?”유진우의 낯빛이 말이 아니게 어두워졌다.통화할 때 하도 머뭇거려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는데 이런 밀회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게...”이청아는 말하려다가 멈추었다. 그를 속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 아무 말이 없어? 대답 못 하겠어?”이청아가 아무 말이 없자 유진우의 마지막 희망도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그는 그녀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었지만 아쉽게도 원하는 대답은 얻지 못했다.“미안해...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이청아는 칼로 마음을 도려내듯 찢어지게 아팠고 호흡마저 가빠졌다.“말 못 할 사정?”유진우가 코웃음을 쳤다.“무슨 사정이길래 몸도 팔고 설명조차 못 하는 건데?”“미안해... 정말 미안해...”이청아는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미안하다는 소리 그만해. 우린 이미 이혼했어. 당신이 뭘 하든 나랑 상관없어. 그러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유진우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하지만 앞으로는 날 귀찮게 하지 마. 나도 사람이야, 마음이 아프다고. 그러니까 부탁인데 제발 나 좀 놔줘.”“나...”이청아는 말하려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멈추었다.이런 상황에서 모든 걸 끝내버리면 오히려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남동생과 가족, 그리고 유진우를 위하여 용호걸의 뜻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신혼 첫날밤에 이 세상을 떠날 결심까지 마쳤다.“됐어요, 됐어요. 할 얘기는 다 한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해요.”그때 용호걸이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청아 씨, 먼저 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우린 이따가 제대로 즐겨요.”이청아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유진우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여기 서서 뭐 해요? 계속 구경할 건가요?”용호걸은 마치 하찮은 인간을 쳐다보듯 유진우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아참, 당신 여자 아주 죽여주던데요? 피부도 하얗고 부드러운 게 정말 최고예요. 이따가 제대로 즐겨야겠어요. 물론 당신만 괜찮다면 옆에서 구경해도 돼요. 하하...”용호걸의 미소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이 자식이 뒤지려고!”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유진우는 용호걸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곧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용호걸은 벽에 부딪히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유진
의원으로 돌아온 유진우는 한참이 지나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이청아의 말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이런 사람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단지 복수하려고 일부러 가까이하고 그를 손아귀에 놓고 가지고 놀았다. 분명 좋게 좋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왜 적이 되지 못해 안달 나 하는지 도무지 이해 되지 않았다.‘대체 왜일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은인님, 무슨 일 있어요?”그때 왕현이 객실에서 걸어 나오며 떠보듯이 물었다.“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며칠 동안의 치료를 거친 결과 그의 단전도 꽤 회복되었다. 비록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만족스러웠다.“술 한잔할까요?”유진우가 진열장에서 술 두 병을 꺼냈다. 주정뱅이 영감이 있는 한 술이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좋죠.”왕현도 흔쾌히 동의하며 자리에 앉았다.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만 기울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침울했다.술을 몇 잔 들이킨 유진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다친 데는 어때요?”“이젠 괜찮아요. 이틀 후면 다 나을 것 같아요.”왕현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게 다 은인님 덕분이에요. 안 그러면 전 진작 폐인이 됐을 겁니다.”“어색하게 은인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진우 씨라고 불러요.”유진우는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어찌 감히 그렇게 부르겠어요... 그럼 그냥 형님이라고 부를게요.”왕현이 멋쩍게 웃었다.“마음대로 해요.”유진우는 술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마셨다.“지금 형님의 모습을 보아하니 혹시 여자 때문인가요?”왕현도 한 잔을 들이켰다.“어? 어떻게 알았어요?”유진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하하,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면 당연히 알죠.”왕현이 자신을 비웃었다. 자신의 스승과 약혼녀가 그렇고 그런 짓을 했는데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하긴.”유진우는 왕현의 처지를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는 술을 마시며 일의
남자는 사납고 포악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렸다.“제가 유진우인데 무슨 일로 오셨죠?”유진우는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 보고는 계속하여 술을 마셨다.“전 현무문 건당의 제자입니다.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건 민간의 룰대로 도전장을 건네러 온 것입니다. 우리 일곱째 형님인 준혁 형님을 죽였으니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큰형님이 당신이랑 끝장을 보려고 친히 강능으로 오셨어요!”남자는 기고만장하며 선전 포고서를 던졌다. 복수해도 당당하게 해야 했고 또 이 기회를 빌려 현무문의 위엄을 선보일 생각이었다.“그냥 돌아가요. 전 관심 없으니까.”유진우는 선전 포고서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왜요? 두려워요?”남자가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준혁 형님을 죽일 땐 미쳐 날뛰더니 큰형님이라는 소리에 바로 쫄았어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난 당신네 큰형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니까.”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흥! 그럼 지금 알려줄게요. 우리 큰형님은 스카이 랭킹의 고수이자 현무문의 8대 천재 중 한 명인 송호예요. 다들 죽음의 칼잡이라고 부르기도 하죠.”“죽음의 칼잡이 송호?”왕현의 낯빛이 확 어두워지더니 두려움이 조금 짙어졌다. 현무문 제자인 그는 당연히 송호의 명성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현무문에 여덟 개의 파벌이 있었는데 각각 건, 곤, 이, 감, 태, 진, 손, 간이다. 매개 파벌마다 최고의 고수가 있었고 그 고수를 수석이라고 불렀으며 당주에 버금가는 존재였다. 권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현무문의 오너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송호가 바로 건당의 수석제자였다.그는 30대 초반밖에 안 된 나이에 스카이 랭킹에 이름을 올린 천재이다.“죽음의 칼잡이는 무슨. 들어도 못 봤어요. 죽고 싶지 않으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거예요.”유진우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흥! 오만하기 짝이 없는 놈!”남자는 더는 예를 갖추지 않고 하찮은 인간을 쳐다보듯 그를 쳐다보았다.“이 자식아, 지금까지 우리 현무문이 보낸 선전 포고서를
어느덧 이틀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현무문의 최고 고수인 송호가 유진우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소문이 세간에 쫙 퍼졌다. 이 소식을 들은 무사들은 재미난 구경을 놓칠세라 곳곳에서 모여들었다.한 사람은 현무문 건당의 수석이자 스카이 랭킹에 이름을 올린 죽음의 칼잡이 송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요즘 명성이 부쩍 높아진 다크호스 유진우이다.두 사람이 대결을 벌인다는 소식에 세간이 시끌벅적해졌다. 수많은 구경꾼들이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벌써 기운산에 도착했다.그 시각 기운산 아래.“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왔어요?”빼곡하게 늘어선 차량을 본 순간 유진우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는 그냥 일반적인 대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정도로 일이 커질 줄은 생각지 못했다.“현무문이 이래요. 명성이 자자한 제자가 누군가와 링 위에서 싸울 때마다 위세를 펼치거든요. 이젠 각 파벌 사이에 암암리에 정해진 규정이 돼 버렸어요.”왕현은 조금도 놀란 기색이라곤 없었다.“그래요?”유진우가 덤덤하게 웃었다.“일을 이렇게 크게 벌여놓고 혹시라도 지면 얼마나 창피해요?”“진다고요?”왕현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상대는 죽음의 칼잡이 송호예요. 현무문의 젊은 세대 중에 송호의 상대가 될만한 자가 거의 없는데 진다는 게 말이 돼요?’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있기에 현무문이 대대적으로 일을 벌인 것이었다. 공증인을 모셔 왔을 뿐만 아니라 각 파벌의 엘리트 제자도 불러 모았다. 현무문의 위상을 과시하여 명성을 떨칠 계획이었다.“형님,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았어요. 정말 올라갈 거예요?”왕현이 떠보듯이 물었다.“여기까지 왔는데 왜 그냥 가요? 올라가서 송호인지 뭔지 한번 만나봅시다.”유진우는 기지개를 켜고는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산 중턱까지 다다랐을 무렵 치열하게 싸우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에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도로 옆쪽의 울창한 숲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싸우고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건장한 사내 십여
노인은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에게서 엄청난 고수의 기운이 풍겼다.“할아버지 역시 대단하세요!”노인이 승리를 거두자 소녀는 손뼉을 치며 유진우와 왕현을 쳐다보았다.“어때요? 우리 할아버지 아주 대단하시죠?”“현영아, 방금 할아버지가 했던 공격 잘 봤지? 이게 바로 철장문의 장법이야. 열심히 훈련해서 성공한다면 반드시 천하에 명성을 떨칠 수 있을 거야.”고창석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꼭 열심히 훈련해서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할게요!”고현영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이 두 분은 누구셔?”고창석의 시선이 유진우와 왕현에게 향했다.“지나가는 사람들인데 오지랖 넓게 끼어들려고 하는 걸 제가 막았어요. 저 사람들 실력에 괜히 끼어들면 민폐만 되잖아요.”고현영이 설명했다.“그런 거였구나.”고창석이 두 사람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이 기운산에 도적 떼가 많고 맹수들도 아주 많아요. 두 젊은이는 괜히 이리저리 다니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충고 감사합니다. 어르신이 괜찮으시니,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유진우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예를 표하고는 곧장 돌아서려 했다.“잠깐만요!”그때 고현영이 갑자기 불렀다.“두 사람도 송호 선배가 유진우인지 뭔지 그 사람이랑 대결하는 거 보려고 온 거예요?”“네, 설마 그쪽도?”유진우가 되물었다.“당연하죠.”고현영이 우쭐거리며 고개를 들었다.“사실대로 얘기할게요. 이번에 현무문에서 아주 많은 무림 선배들을 공증인으로 모셨다고 해요. 우리 할아버지가 바로 공증인 중 한 분이거든요.”“공증인?”유진우는 가소롭게 웃었다.“그럴 필요가 있나요?”“왜 필요가 없죠?”고현영이 두 눈을 부릅떴다.“딱 봐도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명성이 있는 고수가 대결을 펼친다면 반드시 공증인을 모시거든요. 대결의 공정성을 위해서.”“그렇군요.”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간의 이런 규정을 잘 알지 못하는 건 사실이었다.“젊은이들이 생각도 바르고
“싫으면 말고. 난 또 아까 우리를 돕겠다는 마음이 기특해서 기회를 준 건데.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버리겠다면 어쩔 수 없지, 뭐.”고창석은 점잔을 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두 사람이 언젠가는 꼭 후회할 거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모습에 유진우와 왕현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기만 했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랑 함께 올라가요. 혹시라도 다른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니까.”고창석은 뒷짐을 지고 산을 올랐다.“우리 할아버지랑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요.”고현영은 그들을 째려본 후 재빨리 따라나섰다.유진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산을 오르는 길이 이 길밖에 없어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섰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산꼭대기에 도착했다.기운산 산꼭대기에 커다란 야외 링이 놓여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유진우와 송호가 대결을 펼칠 곳이었다.링 주위에 벌써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대부분 명성을 듣고 찾아온 무사들이었는데 삼삼오오 모여드니 참으로 시끌벅적했다.“어머, 고 오너님 아니십니까? 만나서 반가워요!”“고 오너님의 존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고창석이 나타나자 많은 무사들이 다가와 깍듯하게 인사했다. 철장문이 그래도 꽤 지위가 있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봤죠? 이게 바로 우리 할아버지의 위엄이에요!”고현영은 우쭐거리며 유진우와 왕현을 째려보았다.“벌써 후회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늦었어요.”유진우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했고 왕현도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거들떠보지 않았다.“오너님이 이번 결투의 공증인이라면서요? 오너님은 누가 이길 것 같아요?”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물었다.“그게 질문인가요? 당연히 죽음의 칼잡이인 송호 선배가 이기죠.”고현영이 앞다투어 대답했다.“송호 선배는 현무문 건당의 수석제자이자 스카이 랭킹에 이름을 올린 고수예요. 명성을 떨친 후에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요.”“죽음의 칼잡이의 실력이 대
“아니에요?”유장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용호산은 여태껏 무림인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무관심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해.”서태양이 말했다.인재를 선발해 위상을 높이려고 진무사가 나섰다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하지만 용호산은 전혀 관계가 없지 않은가?“그럼 무슨 의도인데요?”유장미가 되물었다.“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궁금하거든?”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서태양은 어깨를 으쓱했다.“보혁 씨는 내막에 훤하니까 화두를 꺼낸 거겠죠?”유이슬이 시선을 돌렸다.“내막까지는 아니지만 주워들은 소식이 몇 가지 있긴 해요.”염보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로는 용호산 뒷산의 금지구역에 최근 신비로운 보물이 나타났는데 향후 100년 동안 무림인들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요.”“무슨 보물이 그렇게 대단해요?”유장미가 깜짝 놀랐다.유이슬과 서태양도 예상치 못한 듯 충격을 금치 못했다.무림인들의 흥망성쇠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만약 제 추측이 맞는다면 용원의 기와 관련된 보물일 거예요.”염보혁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순간, 유진우는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이내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용원의 기? 그게 뭔데요?”유장미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용맥의 정수이기도 하죠.”유이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며칠 전 호룡각이 와해하면서 지하 용맥이 다섯 개의 용원의 기로 변해 세상에 뿔뿔이 흩어졌어. 소문에 의하면 용원의 기를 얻는 자는 천하무적이 되어 승승장구한다고 해.”호룡각이 무너지고 용맥이 파괴된 일이 워낙 큰 이슈였기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진짜요?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 있어요?”유장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서에서 관련된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용원의 기를 얻은 자들은 세상을 주름잡는 수장이거나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었어.”유이슬이 한마디 보탰다.“맞아요.”염보혁이 대
유진우는 옆에 있는 염보혁을 흘깃 쳐다보았고, 속으로 상대방이 아무리 예뻐도 남자를 좋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쿨럭!”염보혁은 사레가 들린 나머지 연신 기침하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슬 씨, 지금 절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네요.”“당연히 칭찬하는 거죠. 그런 얼굴을 보고도 어떤 남자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어요?”유이슬이 정색하며 말했다.“네?”염보혁은 말문이 막혔다.설령 사실일지언정 어찌 면전에서 대놓고 말할 수 있지?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정 믿기 어려우면 태양한테 물어봐요.”유이슬이 문득 말했다.한편, 서태양은 염보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시선을 돌렸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은 도둑이 제 발 저린 듯싶었다.“제가요?”서태양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선배, 장난하지 마세요. 저랑 무슨 상관이죠?”“뭔가 냄새가 나는데요?”유장미가 눈썹을 까딱하더니 눈알을 굴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설마 보혁 씨한테 진짜 반한 건 아니죠?”“이... 계집애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서태양이 펄쩍 뛰면서 얼굴이 벌게진 채 고래고래 외쳤다.“남자끼리 엮일 리가 없잖아.”“침착해요. 단지 농담했을 뿐이에요.”유장미가 키득거리며 말했다.“게다가 남남 커플이 진짜 사랑이죠. 어차피 안 될 건 없잖아요. 만약 사귈 생각이 있다면 진심으로 축복해줄게요. 하하하!”“입만 열면 헛소리 하네.”서태양은 짐짓 화가 난 듯 혼내려는 액션을 취했다.유장미는 잽싸게 유이슬의 등 뒤로 숨어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산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당사자인 염보혁은 말문을 잃었다.더욱이 유장미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그를 흘끔거리는 서태양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몰래 훔쳐보는 탓에 괜히 기분이 세했다.“진우 씨, 이슬 씨, 다들 용호산은 처음이죠? 제가 구경 좀 시켜드릴까요? 주변에 뭐 있는지 소개해줄게요.”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염
술이 몇 잔 오가자 서서히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이슬 씨, 방금 검종의 제자라고 하시던데 무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용호산에 오른 건가요?”염보혁이 넌지시 물었다.“그런 셈이죠.”유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성격이 무심한 편이라 말주변이 딱히 없었다.“사실 저희는 스승님의 명을 받고 찾아왔어요.”상대적으로 외향적인 유장미가 웃으며 말을 보탰다.“노천사가 용호산에서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거든요. 검종 뿐만 아니라 천하회, 주술교를 포함한 파벌에서 최정예 제자들을 파견해 출전할 예정이에요.”“그럼 검종에서는 세 분이 참석하는 건가요?”염보혁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요.”유장미가 고개를 저었다.“저희는 단지 구경하러 왔을 뿐,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는 따로 있어요.”그녀와 서태양은 선천 후기에 속했고, 유이슬은 실력이 뛰어나긴 했으나 반보 마스터에 불과했다.어찌 됐든 천교에 비하면 열세에 처하는지라 검종을 대표해서 출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따로 있다니? 설마 홍군림이에요?”염보혁의 눈썹이 까닥했다.“그건 저도 잘 몰라요.”유장미가 생긋 웃었다.“워낙 제멋대로에 신출귀몰하는 사람이라 이번 무림대회에 참가할지 아무도 몰라요. 만약 홍 선배가 진짜 출전한다면 우승은 우리 검종이 차지할 거예요.”홍군림은 천교 랭킹의 1위에 올랐을뿐더러 어린 나이에 경천 랭킹에 진입한 검종의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다만 성격이 까칠하고 독불장군이라 종주를 제외하고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장미야, 그건 네 생각이고.”이때 유이슬이 입을 열었다.“홍 선배가 실력이 뛰어나고 검종의 천재로서 일반 무사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능력자가 한 명 더 있잖아.”“누구요?”유장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장혁.”유이슬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홍 선배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요?”유장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막상막하야. 천교
“네?”염보혁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특히 잘 보이기 급급했던 서태양은 굳은 얼굴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허공에 손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럴 수가?방금 목숨 걸고 구하려던 사람이 남자였다니?“남자...? 농담이죠?”붉은 옷 소녀가 염보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경국지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인이 대체 어디를 봐서 남자란 말인가?푸른 옷 여인은 입만 벙긋했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흡혈파 망나니들이 여자가 아닌 남자한테 집적거렸다니?취향 한번 독특했다.“아니요. 진짜 남자예요.”염보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밖에 나가면 여자로 오해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붉은 옷 소녀가 말을 아꼈다.“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염보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해탈한 듯 말했다.“아쉽네요.”붉은 옷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본인이 이렇게 예쁜 얼굴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선배? 왜 그래요? 괜찮아요?”그녀는 아직도 넋을 잃은 서태양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어깨를 툭 쳤다.“응? 아, 괜찮아. 단지 조금 놀랐을 뿐이야.”서태양은 꿈에서 깨어난 듯 금세 정신을 차렸다.다만 눈빛만큼은 남자한테서 떠나지 않았다.이렇게 요염한 얼굴이 사내란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그야말로 재능 낭비이지 않은가?“저는 염보혁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염보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유이슬이에요.”푸른 옷 여인이 대답했다.“저는 유장미라고 해요.”붉은 옷 소녀가 활짝 웃었다.비록 남자이지만 미모에 저절로 눈이 갔다.“서태양입니다.”서태양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술이나 한잔 하시죠?”염보혁은 손을 내밀더니 소개를 이어갔다.“이쪽은 유진우 씨, 그리고 두 분은 호위무사인...”“춘화와 추월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수염 난 사내의 몸에 피투성이 상처가 생겼다.눈 깜짝할 사이에 연신 검에 찔린 탓에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비록 수염 난 사내가 힘은 더 셌지만 기교에서는 한참 못 미쳤다.여자의 화려한 검술은 감탄을 자아냈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악!”수염 난 사내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사지가 부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은 마치 좀비를 연상케 했다.온몸은 피가 흥건했고 상처로 가득했다. 비록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형님!”패배한 우두머리를 보자 흡혈파 제자들이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항상 위풍당당하고 기세등등했던 수장이 이런 몰골을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젠장! 감히 우리 형님을 다치게 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저년을 없애버려!”흡혈파 제자들이 고래고래 외치며 검을 빼 들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여자를 덮쳤다.“무용지물이야.”푸른 옷 여인은 콧방귀를 뀌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었다.얼마 안 되어 흡혈파 제자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채 선혈이 낭자했다.“역시 대단하세요!”눈앞의 광경에 붉은 옷 소녀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망나니 따위가 감히 검종에게 대들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서태양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뭐... 뭐라고? 너희들이 검종 제자였어?”흡혈파 제자들은 안색이 돌변하더니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검종은 무림인들의 세계에서 3대 문파 중 하나로 천하회와 주술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비록 제자들이 많지 않았지만 뛰어난 인재들밖에 없다.특히 검종의 홍군림은 어린 나이에 천교 랭킹 1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경천 랭킹에 진입하여 세계 10위의 강자가 되었다.경천 랭킹 10위권에 검종 제자가 무려 2명이나 있는데 압도적인 실력으로 3대 파벌의 수장 자리를 거머쥐었다.여기서 검종의 제자들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이제야
“윽!”서태양은 이를 악물고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온 채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이내 양손으로 검을 쥐고 온 힘을 다해 어깨를 짓누른 흡혈검을 떼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힘이 점점 더 가해졌고 무릎이 닿은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작 이런 실력으로 감히 우리 흡혈파한테 덤비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수염 난 사내가 냉소를 지었다.“형님! 멋져요.”“역시 대단하세요.”부하들이 질세라 감탄했다.북쪽에서 흡혈파라고 하면 꽤 이름 있는 큰 파벌인지라 애송이 같은 놈이 도발할 만한 게 아니었다.“감히 내 앞에서 영웅 행세해? 넌 오늘 인생에서 가장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거야. 교훈 삼아 사지를 부러뜨려줄게!”수염 난 사내가 비열한 미소를 짓더니 흡혈검을 들어 올려 서태양의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챙!검이 닿기 직전 청색 보검이 불쑥 나타나 허공에서 공격을 막아냈다.“응?”수염 난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푸른 옷 여인이 보검을 들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선배?”서태양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그제야 한숨 돌렸다.조금만 늦었더라도 오른손을 잃어버렸을 텐데 그나마 선배가 제때 도움을 줘서 천만다행이었다.“괜히 참견하지 마.”수염 난 사내가 음흉하게 웃었다.“우리 후배한테 손을 대는 순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여자가 싸늘하게 말했다.“맞아! 너희들 같은 망나니는 벌을 받아 마땅하지.”이때, 붉은 옷 소녀가 검을 빼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언니, 제가 도와줄게요.”“아니야. 넌 태양이랑 지켜보고 있어. 이런 놈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푸른 옷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수염 난 사내가 히죽 웃었다.“그런 왜소한 몸으로 오빠의 검을 어찌 막으려고? 차라리 무기는 내려놓고 침대에서 겨뤄보는 건 어때?”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부하들이 폭소를 터뜨렸다.곧이어 음흉한 시선으로 여자를 훑으며 멋대로 평가하
서태양이 움직이자 수염 난 사내의 뒤에서 덩치가 산만 한 남자 두 명이 튀어나왔다.두 사람은 무기로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몸체는 강한 피비린내와 함께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는 칼날이 오랫동안 선혈에 노출된 결과였다.무림인들의 세계에서는 흡혈검이라고 불렀다.다만 아쉽게도 그들이 지닌 검은 아직 미성숙 단계였고 기세가 한창 부족했다.챙! 챙!서태양이 먼저 검을 빼 들고 혼자서 두 명의 사내와 대결을 벌였다.그들은 기세등등하게 맞서 싸웠지만 힘만 강했을 뿐 행동이 굼뜬 편이었다.공격할 때마다 동작이 다소 어설펐다.반면, 서태양은 누가 봐도 고수의 가르침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스피드, 힘,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느 하나 뒤처진 데 없었다.세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는 순간 실력 차이가 현저했고, 서태양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내를 쓰러뜨렸다.그리고 응징할 겸 각자의 다리에 검을 관통했다.“흥! 고작 이런 실력으로 우쭐거려? 제 주제도 모르고.”서태양은 장검을 비스듬히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좋아! 잘했어!”승리를 거머쥔 서태양을 보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비록 나서서 싸울 용기는 없었지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그래도 실력은 꽤 있나 보네? 어쩐지 참견하더라니.”수염 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고 음침한 목소리로 협박했다.“하지만 오늘 임자를 만났지. 흡혈파를 마주친 이상 살아남을 방법은 없어.”“흡혈파는 무슨, 들어보지도 못했구먼.”서태양의 표정은 기고만장했다.“하! 괜찮아. 네 피를 전부 흡수하고 나면 우리가 왜 흡혈파라고 불리는지 알 거야.”수염 난 사내가 이죽거리더니 두말없이 공격을 개시했다.그가 발을 내딛자마자 맹렬한 기세가 솟구쳤고, 손에 든 흡혈검은 핏빛을 뿜어내며 곧장 서태양을 덮쳤다.앞서 상대했던 부하들과 달리 수염 난 사내의 흡혈검은 살기로 가득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쉽게 화를 부르는 법이다.염보혁은 남자였지만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요염한 얼굴을 지녔다.길을 나서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지금처럼 깡패 무리와 마주할 때면 번번이 시비에 휘말리기 일쑤였다.유진우는 모른 척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어이, 이쁜이. 저런 나약한 놈이랑 술 마셔서 뭐 하겠어? 차라리 우리랑 한잔하지, 아주 즐겁게 해줄 테니 말이야!”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염보혁의 턱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이 손 치우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염보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어여쁜 외모 탓에 남녀를 불문하고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처럼 대놓고 희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오, 이쁜이가 화를 내네?”수염 난 사내는 턱을 문지르며 비웃었다.“솔직히 말해서 화난 얼굴이 더 매력적인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욱 감탄스럽군.”그의 말에 뒤따르던 무리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유진우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눈앞의 이 사내는 제법 능숙하게 수작을 부렸다.염보혁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셋을 센다. 그 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내가 직접 손봐주지.”염보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본다고? 하하하!”수염 난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이거 제법 앙칼진데?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위층으로 올라가서 천천히 우리를 손 봐줘, 어때?”“맞아, 맞아! 방도 넉넉하니 차례대로 너랑 놀아줄 수 있다고!”그의 동료들도 시시덕거리며 말을 보탰다.“셋.”염보혁은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이쁜이, 괜히 버티지 말고 그냥 올라가자. 내가 아주 다정하게 대해줄 테니 말이야.”수염 난 사내는 입을 커다랗게 벌려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댔다.“둘.”염보혁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을 유지했다.“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안아 올라가는 수밖에.”그가 손을
유진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혁 씨가 이렇게까지 많은 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제 생각엔 장일청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것 같은데요.”용호산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염보혁이 이렇게나 많이 알고 있다니, 이건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었다.“진우 씨께서 과찬해 주시는군요. 저는 그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듣는 걸 좋아해서 호기심에 이런저런 소문을 알아본 것뿐입니다. 사실 별다른 능력은 없어요.”염보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덧붙였다.“하지만 만약 진우 씨께서 무림대회에 참가하신다면 전 온 힘을 다해 진우 씨가 우승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보혁 씨,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전 그저 세상 구경이나 해볼 겸 참가하는 것뿐입니다. 우승 같은 건 감히 꿈도 꾸지 않아요. 애초에 제 실력으로 어떻게 그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겨룰 수 있겠습니까?”“진우 씨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저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합니다.”염보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우 씨는 외모도 준수하고 기품 또한 비범하시죠. 멀리서 봐도 강렬한 기세가 느껴졌습니다. 비록 진우 씨의 신분은 알 수 없지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진우 씨는 절대 범상한 인물이 아닙니다!”“보혁 씨께서 저를 이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평범한 출신에 보잘것없는 실력을 갖췄을 뿐입니다. 아마 실망할 겁니다.”“하하, 괜찮습니다. 커다란 황금 잉어가 어찌 작은 연못에서만 머물겠습니까? 바람과 구름을 만나면 반드시 용이 되어 날아오를 것입니다. 지금 진우 씨의 명성이 미미할지라도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하늘 높이 날아오를 날이 올 거라고!”염보혁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눈빛은 절대적인 믿음을 담고 있는 듯했다.유진우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뭐지? 분명 오늘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