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준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완벽한 선을 자랑하는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가더니 덤덤하게 말을 뱉어냈다.“말해.”“8년 전 임국진 씨와 선주영 씨가 이혼하면서 모녀를 A국에 보내서 살게 했는데 8년 동안 돌아오지 않다가 얼마 전 임국진 씨가 데려왔어요.”김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A국 언어를 잘했던 건가, 거기서 살았기 때문에?“그게 다야?” 이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목소리였다.강지우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선주영 씨는 A국으로 보내진 후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자폐증 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들었어요. 그리고 그 남자아이는 돌아오기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답니다.”미간을 찌푸린 김하준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지난번 그녀의 얼굴에 보였던 슬픈 기색이 동생 때문이었나?그럼 배 속에 있는 아이는...“끝이야? 옆에 남자가 있었던 적은 없어?”“네, 가깝게 지내는 정신과 의사만 있었습니다.”강지우는 알아보기 위해 그곳으로 보낸 사람들이 전해온 정보를 꼼꼼히 살폈다.“더 없습니다. 학창 시절 때도 연애하지 않았고 주위에 다른 남자와 가까이 지낸 적도 없습니다.”그러니까 다시 말해 바로 그 정신과 아이를 뱄을 가능성이 컸다.자신과의 결혼 때문에 임국진이 데려온 걸까?돈을 밝혔던 건 A국에서 생활고에 시달렸던 탓에 서류 번역할 때도 돈을 달라고 하고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거다.이렇게 생각한 김하준은 임서연의 이상한 행동들이 모두 정리가 되었고 하윤재의 말뜻도 이해했다.마음이 다소 복잡해진 그는 한번 뒤돌아 보고는 계단을 내려와 차에 오른 뒤 병원을 떠났다.병원에서 임서연은 점심을 먹지 않아 배가 조금 고팠다.“엄마, 나 팥죽 먹고 싶어요.”임서연은 갑자기 단것을 먹고 싶었다.선주영은 다 겪어봤기에 여자가 임신하면 특정 맛의 음식을 먹고 싶어진다는 걸 잘 알았다.옛말에 신 걸 먹으면 아들, 매운 걸 먹으면 딸이라는 말이 있는데 대체 임신한 아이가 딸인지 아들인지 모르겠다.“내가 가서 만들어 줄게.” 선
가슴 밑바닥에서 주체할 수 없는 불길이 치밀어 올랐지만 본인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서 사랑놀이라도 하는 거야?”이 목소리는...오랜만에 만났지만 임서연은 누구의 목소리인지 단번에 알아차리고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역시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섬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지난번에 내가 한 말을 귓등으로 들었어?”임서연은 무의식적으로 하윤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까는 선주영을 걱정하느라 하윤재와의 신체 접촉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난...”임서연이 해명하려는데 하윤재가 손목을 잡으며 김하준을 바라보았다.“고작 한 달뿐인 결혼이고 각자 원하는 것만 얻어가면 그만인 거래인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서연이 사생활에 간섭하는 거죠?”임서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는 하윤재는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워 이제는 그녀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주고 싶었다.김하준의 시선이 임서연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하윤재에게 고정되고 순간 그의 목구멍에서 조롱 섞인 비웃음이 흘러나왔다.“자기 애를 임신한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 보내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가?”그의 입가에 남아있던 비릿한 웃음마저 사라진 채 매서운 눈길은 예리한 검이 되어 하윤재를 마구 난도질했다.“당신이 그러고도 남자야?”임서연의 가슴이 철렁하며 모욕감과 허무함에 심장이 심하게 요동쳤다.그는 배 속에 있는 아이가 하윤재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윤재는 그저 고맙고 존경하는 상대인데 그런 그를 어떻게 모욕할 수 있겠나.그녀는 하윤재의 꽉 잡은 손을 뿌리치고 김하준을 향해 말했다.“날 탓하고 싶으면 나한테만 얘기해요, 다른 사람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김하준은 임서연의 반박을 예상하지 못했다.정말 서로에 대한 사랑이 넘치네!하지만 그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고 화가 날 뿐이었다.자기 아내면서 보란 듯이 눈앞에서 애정행각을 보여주니 왠지 모를 분노가 가스에 들끓었다.하지만 하윤재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들의 결혼은 단지 거래일뿐이고 그는 탓할 자
임서연은 그런 그가 당황스러웠다.그도 백재아를 만나고 있지 않나.게다가 그녀와 하윤재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도 아닌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간섭하는 걸까?“난 그쪽 신경 안 쓰니까 그쪽도 내 사생활에 간섭...”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무언가 입을 막았고 온갖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읍...”정신을 차린 임서연이 그를 밀어냈고 이성을 되찾은 김하준도 한 발짝 물러섰다.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눈앞에 여자를 응시했다.지금 뭐 한 거지?백재아가 아무리 적극적으로 들이대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눈앞에 이 여자가 핑크빛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하는 걸 보고 있자니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자제력을 잃고 본인조차 놀랄 행동을 저질렀다.임서연은 그날 밤을 제외하고는 어떤 남자와도 이렇게 친밀한 행동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수치스럽고 충격적이었다.“당, 당신이 뭔데!”임서연은 자신이 더럽혀졌다는 느낌이 들었다.자기를 팔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가벼운 여자는 아니었다.그런데 그가 무슨 자격으로?김하준은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등진 채 말했다.“넌 내 아내야.”그러니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지!임서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억지가 어디 있나!“우린 부부가 아니고 단지 거래일 뿐이에요!” 임서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남자와의 접촉이 무서웠다.악몽 같은 그날 밤을 겪은 이후 임서연은 남녀 사이의 스킨십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다.임서연은 너무 화가 나서 평소와 다른 김하준의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침착함과 덤덤함은 전부 그녀에게 보여주는 가면이었고 만약 임서연이 조금이라도 침착했다면 붉게 달아오른 김하준의 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아무리 거래라도 부부로 지내는 동안 부부로서 해야 할 일을 못 한다는 말은 없었잖아.”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인 임서연을 바라보며 미간이 찡그려졌다.저렇게 무너질 만큼 그의 키스가 싫었던 건가?
“나랑...”“이제 나가도 돼!” 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김하준이 말을 끊었다.그는 임서연이 자신과 그 남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무척 거슬렸다.임서연은 입술을 벙긋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돌아 나갔다.서재 문이 닫히는 순간 김하준의 얼굴에 있던 평온함과 평정심은 모두 사라졌다.그는 조금 전 충동적인 본인 행동에 미간을 문질렀다.짧았지만 인상적이었던 키스를 떠올리며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고 여전히 그녀의 향기가 남아있는 것 같아 저도 모르는 사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본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미소였다.우스꽝스럽게도 미련이 남았다.그녀의 입술은 말랑했다, 그날 백재아의 입술처럼.하지만 그날 밤 이후 그는 백재아에게서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 느낌을 찾을 수 없었다.그땐 몸 상태가 달라서 그랬던 걸까?기분이 묘했다.서재에서 나온 임서연은 어머니가 아직 병원에 계셔서 간병해야 했기 때문에 집에 머물지 않았고 밖으로 나오자 마침 저택에 온 백재아와 마주쳤다.백재아는 볼 때마다 섬세한 화장과 잘 어울리는 옷차림으로 예쁘고 단아한 모습이었다.“외출해요?” 백재아가 웃으며 물었다.“네.” 임서연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 여자와는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것처럼 보여도 누가 알겠나.“임서연 씨, 당신은 다른 사람 아이를 배고도 하준 씨와 결혼했죠. 하준 씨가 당신이랑 결혼한 건 단지 어머니가 남긴 결혼 약속 때문이지 다른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하준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니까.”누가 들어도 분명한 백재아의 말뜻을 임서연이 모를 리가 있나.김하준이 그녀를 사랑하는 건 다 아는 사실인데 굳이 그녀 앞에서 한 번 더 강조하는 건 텃세라도 부리고 싶은 걸까?임서연은 웃으며 말했다.“전 제 주제를 잘 아니까 백재아 씨가 굳이 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백재아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한 채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는 나이는 어려도 속내는 성숙한 여자였다.그 순간 서
임서연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자 김하준이 백재아를 놓아준 뒤 차분하고 안정된 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칼날 같은 그의 입꼬리가 차갑게 말려 올라간 채 다가와 매정하게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재아한테 사과해!”임서연은 움직이지 않고 고집스럽게 그의 눈빛을 응시했다.“난 사과 안 해요!” 아무리 그가 두려워도 그녀는 잘못한 게 없었다. 백재아가 먼저 그녀를 밀려고 했다!그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뿐이다.그런데 왜 사과를 해야 하나!김하준의 시선은 그녀의 완고한 얼굴에 고정되었고 미간은 깊게 파여 있었다. 한 번도 이 여자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던 그는 이성을 잃고 키스하는 순간에도 눈여겨보지 않았다.마른 그녀의 얼굴은 손바닥만 했고 섬세한 이목구비에 청순함이 가득했다. 별을 박은 듯한 한 쌍의 눈이 고집스럽고 단호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다.두 눈이 허공에 부딪혔고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네가 밀었으니까 사과해야지!”그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전처럼 날카롭지는 않았다.그녀의 표정에 흔들리는 듯했다.“하준 씨, 난 정말 괜찮아요.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그런 거지 임서연 씨와 상관없어요.”백재아가 달려와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을 가로막으며 김하준의 팔짱을 꼈다.“하준 씨.”그녀는 김하준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물기 어린 두 눈엔 억울함과 인내가 담겨 있었다.“하준 씨, 내가 중심 못 잡아서 그런 거예요. 하이힐을 너무 높은 걸 신었나 봐요. 진짜 임서연 씨 탓이 아니에요.”그녀는 필사적으로 임서연을 옹호했다.김하준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하며 그녀가 신고 있던 하이힐을 바라봤다. 높긴 했어도 분명 임서연이 그녀를 미는 걸 봤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하준 씨, 나 발을 삐끗했나 봐요, 아파요.” 백재아의 예쁜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고 평소 얌전한 모습과는 달리 조금 귀엽기도 했다.김하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이 여자는 아무런 대가도
하지만 다른 뜻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백재아가 다가가 문을 두드리려 하자 우진경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도련님께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어요?”우진경이 자신을 싫어하는 건 백재아도 알고 있었다.그녀에게 아무리 잘 보이려 애써도 효과는 미미했다.우진경은 그냥 가정부가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김하준을 돌봐온 사람이었기에 김하준 앞에서도 나름대로 입지가 있었다.“아주머니, 전 하준 씨 기분이 안 좋아서 옆에 있어 주고 싶어서요...”“옆에 있는 건 사모님이 하면 되니까 백재아 씨는 앞으로 자주 오지 마세요. 괜히 사람들이 내연녀라든가 뭐라던가 해서 백재아 씨 이미지만 망가지겠어요.”과거 김하준이 임서연과 결혼하기 전에도 우진경은 백재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김하준이 임서연과 결혼한 후에도 백재아는 내연녀처럼 김하준 곁에 달라붙었다.세상에 내연녀라는 존재를 환영할 사람이 어디 있나.더군다나 우진경처럼 나이 많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거부감이 들어 했다.“하준 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저예요. 임씨 집안 사람하고 결혼한 건 본인이 원해서 한 게 아니에요. 하준 씨 키워주신 분이면서 하준 씨가 행복하길 바라지 않으세요?”백재아는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써 참았다.가정부인 그녀가 여기서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못마땅했다.“여사님께서 도련님에게 이 결혼을 주선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도련님은 이미 결혼한 사람인데 백재아 씨는 남의 결혼에 개입해 가정을 파탄 내서 남들 손가락질 받는 내연녀가 되고 싶으세요?”우진경은 단호하게 말해도 갖춰야 할 예의는 다 갖췄다. 그녀는 백재아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손짓했다.“이만 가주세요, 백재아 씨.”백재아는 양옆으로 드리워진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분노에 몸을 떨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갈 수밖에 없었다.백재아가 집을 나서자마자 우진경은 곧바로 문을 닫았다.몸이 굳어지며 천천히 돌아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는 백재아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지며 추한 모습이 역력했다.
임서연이 병원에 도착하자 하윤재는 병동 밖 복도에 앉아 무릎에 손을 얹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 허리를 살짝 구부린 채 앉아 있었다.임서연이 옆에 다가가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무슨 생각 해요?”하윤재는 고개를 들어 임서연임을 확인한 뒤 감정을 추스르고 병실을 흘깃 쳐다보았다.“어머님 기분이 안 좋으셔.”임서연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네, 이만 돌아가서 쉬어요. 여긴 내가 있을게요.”하윤재의 시선이 그녀의 복부를 스치듯 훑었다.“너도 좀 쉬어야지.”“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임서연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고 하윤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해.” 임서연이 대답하자 하윤재는 일어서서 바깥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임서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와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그의 가정 배경이나 다른 가족은 어떤지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분명 무슨 일이 있어서 넋이 나가 있었던 것 같은데...이때 하윤재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임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줌마들한테서 좀 알아봤는데 누가 돈 주고 그런 말을 하라고 시키고 벽에다 낙서까지 하라고 했대.”임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오빠.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도 돼요.”임서연이 그를 바라보며 말하자 하윤재는 가볍게 웃었다.“난 괜찮아.”임서연은 누구에게나 남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은 있기 마련이었기에 굳이 더 묻지 않았다.하윤재가 떠난 후 그녀는 바로 병실에 들어가지 않고 생각했다. 누가 이웃들을 매수한 걸까?임유리? 심수정?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그렇다면...쨍그랑-그때 갑자기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임서연은 가슴이 철렁하며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자 선주영의 발 앞에 깨진 유리컵이 보여 얼른 다가가 허리를 굽혀 유리 조각을 주워들었다.“엄마, 물 마시고 싶어요? 잠깐 앉아 있어요. 내가 다 치우고 물을...”말을 채
“어, 어떻게 치료하면 되죠?”임서연은 말을 더듬으며 그저 간신히 버티고 서있었다.의사는 한숨을 쉬었다.“정신질환은 치료가 쉽지 않은데 하 선생님과 아는 사이고 그분이 정신과 의사이니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네요.”임서연은 아까 하윤재의 행동을 떠올리며 혹시 그가 뭔가 감지했지만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 건 아닐지 생각했다.“어머니 모시고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임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의사를 돌려보낸 임서연은 바닥에 드러누워 선주영이 자기 얼굴을 할퀴는 모습에 마음이 아파 숨조차 쉴 수 없었다.머릿속에는 그녀가 미쳐 날뛰며 자해하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그날로 선주영은 정신과로 이송되었고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며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정신질환 환자라 가족이라 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 자해를 하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만 면회할 수 있었다.치료를 위해 외부와 거의 고립된 채로 지내야 했다.병원을 나선 임서연은 선주영과 그녀의 물건을 정리한 뒤 집 계약을 물렸다.문에 새겨진 것들 때문에 집주인은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선주영의 병원비는 모두 하윤재가 먼저 대주었는데 갈수록 그에게 큰 빚을 지는 것 같았다.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차는 저택 앞에 멈췄고 그녀는 가방을 챙겨 택시비를 지불한 뒤 차에서 내렸다.저택 앞에 선 그녀는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넋이 나가 있었다.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차 한 대가 들어왔고 이곳에 오래 살지 않았지만 김하준의 차를 알아본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김하준은 차에서 내려 가만히 서 있는 임서연을 바라보며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갔었어?” 병원에 갔지만 그녀는 이미 퇴원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반나절 동안 어디에 가 있었던 걸까.임서연은 선주영의 일로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라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일이 좀 있었어요.”김하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이게 무슨 태도지?그가 성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