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경은 한숨을 쉬었다.“다 도련님을 위해서 이러는 거잖아요.”말을 마치고 그녀가 뒤돌아 가버리자 넓은 부엌에는 김하준만 남았고 천장에 드리워진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동그란 빛을 뿜어대며 그를 감쌌다. 그는 브로콜리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다음날, 김하준이 회사로 출근한 후 임서연도 따라나섰다. 회사에 출근하기로 했으니 레스토랑은 그만두어야 했기에 가서 말해야 했다.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던 중 우진경이 다가왔다.“외출하세요?”임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외박하지 말고 일찍 들어오세요. 결혼하신 유부녀잖아요.”우진경이 상기시켜 주었다.“네.” 임서연은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거긴 버스가 없었기에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고 레스토랑으로 갔다.임서연이 입사하자마자 휴가에 그만두겠다는 말까지 하자 매니저는 당연히 못마땅해했다.“일하기 싫으면 그때 왜 지원했어요? 우리도 일하는 데 문제 생기잖아요.”임서연도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매니저가 굳어진 표정으로 막 보내려는데 점장이 다가와 지금 너무 바쁘다고 말했다.매니저는 임서연을 바라보았다.“지금 먼저 도와주고 한가할 때 가요.”“네.”직업상 윤리에 따라 임서연은 그러겠다 답했고 유니폼을 갈아입으러 갔다. 오늘은 아주 바쁜 날인 것 같았다.“이건 88번 방으로 갖다줘요.”임서연이 음식을 가지러 왔을 때 요리사가 말했고 대답을 마친 임서연이 정교한 음식이 담긴 그릇을 룸으로 서빙하러 갔다.한 손으로 음식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방문을 열자 밝고 넓으면서도 비밀이 프라이빗한 룸에 마호가니 원탁에는 두 사람만 앉아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아는 사람이었다.김하준.서로를 발견한 둘은 그대로 굳어버렸다.헤븐은행 은행장이었던 단철호가 김하준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다가 사람이 들어오니 대화를 멈췄다.임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들어와 음식을 테이블 위로 세팅했다.“레몬가든에 점점 더 어린 여직원이 들어오네요.”단철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
후끈거리는 열기가 등을 서서히 감쌌고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적셨다.“처음이야?”낯선 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온몸이 움찔거려서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임서연은 이 남자가 잠시 동작을 멈추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목소리가 전해졌다.“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후회되면 나가.”그녀는 바짝 긴장한 채 두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내저었다.“후회 안 해요...”그녀는 18살 한창 꽃 필 나이에 그만...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온몸에 퍼졌다.남자의 품에 안긴 그녀는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마지막 자존심만은 지켜내야 했기에 임서연은 입술을 꼭 깨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처음이라는 두려움 외에도 이 남자한테서 전해지는 저돌적인 몸놀림과 놀라운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지칠 줄 모르는 듯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거침없이 탐했고 긴긴밤의 고통은 쭉 이어져갔다...새벽녘, 남자는 드디어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고 임서연도 그제야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일어나서 옷을 대충 걸치고는 문밖을 나섰다.호텔 밖에서 그녀에게 이 거래를 소개해준 중년 여자가 임서연이 나오는 걸 보더니 검은 봉투를 쓱 건넸다.“보수에요. 받아요.”임서연은 망설임 없이 돈을 받고 하반신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아예 무시한 채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다.아직 날이 밝지 않아 복도가 유난히 조용했고 수술실 앞에는 들것 두 개가 싸늘하게 놓여 있었다. 돈을 내지 않아 수술실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임서연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마음을 뒤로한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돈 있어요. 돈 있으니까 얼른 엄마랑 동생 구해주세요...”그녀는 손에 든 돈을 의사에게 건네며 애원했고 의사는 힐긋 보더니 간호사더러 정산하라고 한 뒤에야 환자를 수술실로 들여보냈다.하지만 남동생은 안으로 들이지 않았고 이를 본 임서연이 재빨리 앞으로 다가가며 의사를 꽉 붙잡고 애원했다.“제 동생도 있어요. 제발 꼭 좀 구해주세요...”이때 의사가 한
“서연아, 결혼은 인생에서 엄청 중요한 일이야. 너무 섣불리 결정 짓지 마. 엄마는 허락 못 해.”선주영은 딸아이가 왜 이런 결단을 내리는지 얼추 짐작이 갔다.한편 임서연은 도시락을 침대 맡의 협탁에 내려놓고 음식을 한 개씩 꺼내며 말했다.“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시집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엄마 친구 아들이라면서요.”“걔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서 난 걔네 아들을 전혀 몰라. 약속을 어기는 한이 있어도 엄마가 너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길 바라. 결혼으로 승부를 걸지는 말란 말이야. 그럴 바엔 나 차라리 평생 여기서 지내겠어.”사랑하는 사람?설사 나중에 만난다고 하더라도 임서연이 과연 그럴 자격이나 있을까?그녀는 고개를 푹 떨궜다. 누구와 결혼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빼앗겼던 모든 걸 돌려받는 일이다.선주영은 끝내 임서연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다음 날 바로 귀국했다.임국진은 이들 모녀를 엄청 꺼려서 임씨 저택에 들이지 않고 월세방 하나 마련해줬다. 결혼식 날에 임서연이 저택으로 돌아오면 그만이니까.마침 임서연도 그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면 엄마가 또다시 결혼생활을 파탄해버린 내연녀를 마주할 테니 차라리 월세방에서 지내는 게 더 나을 듯싶었다.적어도 여긴 고요하고 평화로우니까.한편 선주영은 여전히 마음이 안 놓였다.“서연아, 이 결혼은 절대 생각처럼 원만한 결혼이 아닐 거야. 완벽한 결혼이라면 너한테 주어지지도 않았겠지. 아무리 나랑 윤희가 한때 친한 사이라고 해도 말이야.”임서연은 더는 엄마와 이 화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대뜸 말을 돌렸다.“엄마, 얼른 뭐라도 좀 드세요.”선주영은 이 화제를 피하려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임서연은 줄곧 그녀 따라 모진 고생만 해오더니 이젠 결혼까지 희생하려고 한다.한편 젓가락을 든 임서연은 왠지 전혀 식욕이 없고 되레 구역질이 났다.“어디 아파?”선주영이 관심 조로 물었다.임서연은 엄마한테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 비행기를 탔더니 식욕이 없다는 둥 대
임서연이 옷을 다 갈아입고 피팅룸에서 나왔을 때 왼쪽 피팅룸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손님 분위기랑 너무 잘 어울리네요.”종업원은 나름 옷 고르는 센스가 있다. 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 어울릴만한 옷을 거의 고를 수 있으니까. 연하늘색 롱 원피스를 입은 임서연은 새하얀 피부가 유난히 돋보였고 허리에 벨트를 하니 잘록한 허리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다. 좀 많이 야위긴 했지만 좀 전보다 안색이 훨씬 밝아지고 또렷해진 모습이었다.임국진도 괜찮은 것 같아 돈을 내러 갔지만 치마 한 장에 600만 원이나 하니 움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김씨 일가 사람들을 뵙는 자리이니 이를 악물고 돈을 낸 후 싸늘하게 쏘아붙였다.“가자 이만.”임서연은 아빠의 매정함에 적응됐다고 생각했지만 이 싸늘한 말투가 여전히 그녀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임국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곧이어 차가 임씨 저택 문 앞에 도착했다.기사가 임국진을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고 임서연도 나란히 차에서 내렸다.별장 앞에 선 그녀는 몇 초 동안 머뭇거렸다. 엄마와 둘이서 동생의 병 때문에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삶을 살 때 정작 아빠라는 자는 내연녀와 함께 으리으리한 별장에서 실컷 누리면서 지내고 있었다.임서연은 저도 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거기 서서 뭐해?”임국진은 그녀가 따라오지 않자 뒤돌아봤더니 임서연이 문 앞에 떡하니 서 있는 것이었다.그녀는 얼른 임국진을 따라갔다. 가정부가 말하길 김씨 일가에서 아직 안 왔다고 하니 임국진은 그녀더러 거실에서 기다리라고 했다.거실의 통유리창 옆에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었는데 독일 제품 SEIDL&SOHN으로 엄청 고가의 피아노였다. 또한 이는 선주영이 임서연 다섯 살 생일 때 사준 선물이기도 했다.임서연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좋아했고 4살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외국으로 보내진 이후론 만져보지도 못했다.가까스로 피아노를 만져보니 익숙한 느낌에 또다시 마음이 설렜다.검지를 건반 위에 얹고 가볍게 누르자
질문형이지만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포스가 느껴졌다.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것으로 보이니 임서연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그녀도 얘기를 나누고 싶었으니까.옆에 있던 임국진이 그녀를 쳐다보며 경고 조로 말했다.“대화할 때 선 잘 지켜.”결혼하기도 전에 심기를 건드려버리면 안 되니까. 김하준의 싸늘한 표정을 보니 그녀가 썩 마음에 안 드는 눈치인데 김씨 일가와 같은 재벌가와 사돈을 맺는 건 임씨 일가에 경사나 다름없다. 물론 더 나아가 회사 업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임서연이 혼사를 망치는 건 절대 용납할 수가 없다.그녀는 못 들은 척하며 강지우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임서연은 당연히 임국진의 속셈을 잘 꿰뚫고 있다.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일까? 그녀가 김씨 일가에 시집가면 자신을 도와줄 거란 이 무모한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왔냐는 말이다.그가 고작 임서연의 아빠라서?그렇다면 과연 임서연을 딸처럼 여겼던가? 이 8년 동안 그녀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관심은 했고?임서연은 한창 생각에 잠겨있다가 머리가 탄탄한 ‘벽’에 부딪히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방금 그 완벽한 얼굴이 바로 앞에 나타났는데 한창 그녀를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는 역시 일어설 수 있었다.즉 임서연의 추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그녀는 머리가 오싹해 났지만 애써 덤덤한 척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일부러 못 걷는 척 한 거죠?”김하준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상대에게 속내를 들킨 언짢음이 스쳐 지나갔다. 목소리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았지만 충분히 압도적이고 위엄이 차 넘쳤다.“내가 못 걷는다는데도 왜 굳이 나랑 결혼하려는 거야? 의도가 뭔데? 돈? 아니면 재벌가 사모님이 꿈인가?”임서연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들 것 같았고 무형의 손이 심장을 꽉 쥐어 잡은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말했다.“난 두 살 때 김하준 씨랑 결혼 약속을 맺었어요. 설마 내가 두 살부터 돈
임서연은 아줌마가 왜 더 해명하지 않는지 얼추 짐작이 갔지만 옅은 미소만 지었다.김하준과의 결혼은 단지 거래일 뿐이니 그의 사생활에 대해 따져 물을 권한이 없다.오히려 이 남자가 옆에 없으니 더 편하고 좋았다.안방에 들어간 그녀는 침실을 쭉 둘러보았는데 아주 독특한 인테리어로 되어있었다. 블랙 앤 화이트로 깔끔하게 꾸며진 방은 럭셔리하면서도 너무 과하지 않고 우아한 분위기가 차 넘쳤다.“여기가 도련님 방입니다.”우진경이 웃으며 말했다. 결혼해서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함께 자는 건 당연한 일이다.임서연은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처음 낯선 곳에서 자는 거라 쉽게 잠들지 못한 그녀는 침대 맡에 기댄 채 구직 앱으로 일자리를 검색해보았다. 일단 취직해서 안정하게 자리를 잡아야 엄마를 보살필 수 있고 배 속의 아이에게 미래를 선사할 수 있다.쭉 둘러보던 그녀는 번역 구직 정보가 눈에 띄었다. 번역직은 이상할 것 없지만 A국 언어 번역은 보기 드문 요구였다.A국은 바로 임국진이 그녀를 데리고 간 나라였다. 그곳은 매우 낙후한 열대 나라라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우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세계에서 유통되는 언어들은 대부분 선진국이거나 실력이 강한 나라의 언어였다.급여와 복리후생도 나름 괜찮은 것 같으니 임서연은 바로 본인 정보를 남겨놓았다.곧이어 휴대폰을 내려놓고 누워서 잠이 들었다.달빛이 창가에 드리워지며 은은한 빛이 흘러내리고 고요한 밤이 서서히 깊어져 갔다.임서연은 저도 몰래 깊은 잠에 빠졌고 이때 하얀 빛줄기가 정원에 내비치더니 마이바흐 한 대가 떡하니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고 듬직한 체구의 실루엣이 차에서 내려왔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발걸음은 평소처럼 차분한 게 아니라 조금 들떠있어 보였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목이 마른 지 방에 들어가 컵에 물을 받더니 꿀꺽꿀꺽 삼켰다. 짙은 눈동자에는 취기가 어려 있었고 이제 좀 목마른 느낌이 가신 듯싶었다. 오늘 밤 저녁 약속이 잡혀서 양주를 적잖게 마셨
김하준은 미간을 구기고 왠지 속은 기분이 들었다.거실에서 우진경이 어느덧 아침밥을 다 차려놓았다.임서연이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있자 그녀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어젯밤엔 잘 주무셨죠?”그녀도 김하준이 어제 백재아와 함께 보내며 안 돌아올 줄 알았는데 밤중에 인기척을 느끼고 일어나서 힐끗 살펴보았더니 도련님이 돌아왔을뿐더러 방에 들어가 잠을 잔 것이다.이건 사모님께서 도련님을 위해 정해주신 신붓감이니 당연히 괜찮은 사람일 테고 도련님께서 드디어 결혼하니 줄곧 그를 보살펴왔던 우진경도 기쁘기 마련이다.그녀의 말투나 표정 모두 지나치게 열정적이니 왠지 모르게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하여 임서연은 뻣뻣하게 억지 미소를 지었다.“네, 뭐.”“얼른 가서 옷 갈아입으세요. 아침 준비해놨으니 이따가 드시면 돼요.”말을 마친 우진경은 주방으로 들어갔다.임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잠옷을 내려다봤다.‘내 옷 아직 침실에 있는데 지금쯤이면 이 남자 옷 다 갈아입었겠지?’그녀는 곧장 침실 문 앞에 도착해 가볍게 노크했다.안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또다시 두드렸지만 여전히 무반응이었다.임서연은 마지못해 문을 열어보았는데 안에서 잠근 상태가 아니라 바로 열렸다.다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한파와도 같은 살벌한 한기가 심장을 움찔거리게 했다.김하준이 침대 맡에 앉아서 한없이 차가운 눈길로 종잇장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그 종잇장은 바로...임서연은 그 종잇장이 임신진단서라는 걸 바로 알아챘고 바닥에 널브러진 본인 물품들을 보자 사생활을 침범당한 듯한 굴욕감이 들어 잽싸게 달려가서 진단서를 낚아챘다.“왜 동의도 없이 남의 물건을 함부로 봐요? 이건 엄연한 프라이버시잖아요!”‘참 나.’김하준이 쓴웃음을 지었다.“프라이버시?”그는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뱃속에 딴 놈 애를 품고 나랑 결혼했으면서 지금 뭐? 감히 프라이버시를 논해?”“그건...”임서연은 해명하고 싶었으나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김하준은 자
“어떻게 된 거야 대체?”선주영은 질문을 건넨 순간 뭔가 깨달은 것 같았다.“설마 그 돈 가해자 배상금이 아니었어?”그날의 교통사고로 엄마의 병원비와 남동생의 장례식 비용까지 적잖은 돈이 들었을 텐데 귀국하기 전 임서연은 또 엄마에게 약간의 돈을 드리면서 가해자의 배상금에서 쓰고 남은 돈이라고 했다.임서연은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차마 입밖에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그녀의 침묵이 곧 묵인이었다. 어린 소녀가 대체 어디서 그 많은 돈을 구할 수 있을까. 선주영은 심장을 쿡쿡 찌르듯 아프고 또 감히 믿을 수가 없었다.“너 설마... 몸 판 거야?”그녀는 임서연의 손목을 꽉 잡았다.“이 아이 낳으면 안 돼. 지금 당장 병원 가!”“왜요?”임서연은 손을 빼내려고 몸부림쳤다.“낳으면 네 인생 망치는 거야!”이 아이는 절대 낳을 수 없다. 임서연은 이미 결혼했으니 상대가 아는 순간 인생을 망치는 격이 된다.“엄마, 제발 부탁드려요. 이 아이 낳게 해주세요.”임서연이 눈물로 호소했다.하지만 아무리 애원해봐도 선주영의 태도는 여전히 매우 단호했다.결국 곧장 그녀를 이끌고 병원으로 향했다.임서연이 안 가겠다고 하면 엄마가 죽는 꼴을 보고 싶냐고 협박해댔다.임서연은 마지못해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를 지우기에 앞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아야 했고 선주영이 검사 결과를 가지러 간 후 그녀는 홀로 복도 벤치에 앉아 두 손으로 배를 쓰다듬었다.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괴로움과 무기력함에 휩싸여버렸다.“하준 씨, 나 괜찮아요. 너무 긴장할 거 없어요. 그냥 살짝 데인 거예요.”그 시각 백재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검은색의 타이트한 원피스로 몸매를 한껏 드러냈고 어깨에는 정장 외투를 하나 걸치고 있었다. 옆에 있는 김하준은 하얀색 셔츠 차림에 옷소매를 걷고 튼실한 팔뚝을 드러냈다.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살짝 데였어도 바로 응급처치 안 하면 흉터 남아.”백재아는 살며시 그의 품에 기댔다.“흉터 남으면 나 싫어할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