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형이지만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포스가 느껴졌다.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것으로 보이니 임서연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그녀도 얘기를 나누고 싶었으니까.옆에 있던 임국진이 그녀를 쳐다보며 경고 조로 말했다.“대화할 때 선 잘 지켜.”결혼하기도 전에 심기를 건드려버리면 안 되니까. 김하준의 싸늘한 표정을 보니 그녀가 썩 마음에 안 드는 눈치인데 김씨 일가와 같은 재벌가와 사돈을 맺는 건 임씨 일가에 경사나 다름없다. 물론 더 나아가 회사 업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임서연이 혼사를 망치는 건 절대 용납할 수가 없다.그녀는 못 들은 척하며 강지우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임서연은 당연히 임국진의 속셈을 잘 꿰뚫고 있다.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일까? 그녀가 김씨 일가에 시집가면 자신을 도와줄 거란 이 무모한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왔냐는 말이다.그가 고작 임서연의 아빠라서?그렇다면 과연 임서연을 딸처럼 여겼던가? 이 8년 동안 그녀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관심은 했고?임서연은 한창 생각에 잠겨있다가 머리가 탄탄한 ‘벽’에 부딪히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방금 그 완벽한 얼굴이 바로 앞에 나타났는데 한창 그녀를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는 역시 일어설 수 있었다.즉 임서연의 추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그녀는 머리가 오싹해 났지만 애써 덤덤한 척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일부러 못 걷는 척 한 거죠?”김하준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상대에게 속내를 들킨 언짢음이 스쳐 지나갔다. 목소리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았지만 충분히 압도적이고 위엄이 차 넘쳤다.“내가 못 걷는다는데도 왜 굳이 나랑 결혼하려는 거야? 의도가 뭔데? 돈? 아니면 재벌가 사모님이 꿈인가?”임서연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들 것 같았고 무형의 손이 심장을 꽉 쥐어 잡은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말했다.“난 두 살 때 김하준 씨랑 결혼 약속을 맺었어요. 설마 내가 두 살부터 돈
임서연은 아줌마가 왜 더 해명하지 않는지 얼추 짐작이 갔지만 옅은 미소만 지었다.김하준과의 결혼은 단지 거래일 뿐이니 그의 사생활에 대해 따져 물을 권한이 없다.오히려 이 남자가 옆에 없으니 더 편하고 좋았다.안방에 들어간 그녀는 침실을 쭉 둘러보았는데 아주 독특한 인테리어로 되어있었다. 블랙 앤 화이트로 깔끔하게 꾸며진 방은 럭셔리하면서도 너무 과하지 않고 우아한 분위기가 차 넘쳤다.“여기가 도련님 방입니다.”우진경이 웃으며 말했다. 결혼해서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함께 자는 건 당연한 일이다.임서연은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처음 낯선 곳에서 자는 거라 쉽게 잠들지 못한 그녀는 침대 맡에 기댄 채 구직 앱으로 일자리를 검색해보았다. 일단 취직해서 안정하게 자리를 잡아야 엄마를 보살필 수 있고 배 속의 아이에게 미래를 선사할 수 있다.쭉 둘러보던 그녀는 번역 구직 정보가 눈에 띄었다. 번역직은 이상할 것 없지만 A국 언어 번역은 보기 드문 요구였다.A국은 바로 임국진이 그녀를 데리고 간 나라였다. 그곳은 매우 낙후한 열대 나라라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우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세계에서 유통되는 언어들은 대부분 선진국이거나 실력이 강한 나라의 언어였다.급여와 복리후생도 나름 괜찮은 것 같으니 임서연은 바로 본인 정보를 남겨놓았다.곧이어 휴대폰을 내려놓고 누워서 잠이 들었다.달빛이 창가에 드리워지며 은은한 빛이 흘러내리고 고요한 밤이 서서히 깊어져 갔다.임서연은 저도 몰래 깊은 잠에 빠졌고 이때 하얀 빛줄기가 정원에 내비치더니 마이바흐 한 대가 떡하니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고 듬직한 체구의 실루엣이 차에서 내려왔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발걸음은 평소처럼 차분한 게 아니라 조금 들떠있어 보였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목이 마른 지 방에 들어가 컵에 물을 받더니 꿀꺽꿀꺽 삼켰다. 짙은 눈동자에는 취기가 어려 있었고 이제 좀 목마른 느낌이 가신 듯싶었다. 오늘 밤 저녁 약속이 잡혀서 양주를 적잖게 마셨
김하준은 미간을 구기고 왠지 속은 기분이 들었다.거실에서 우진경이 어느덧 아침밥을 다 차려놓았다.임서연이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있자 그녀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어젯밤엔 잘 주무셨죠?”그녀도 김하준이 어제 백재아와 함께 보내며 안 돌아올 줄 알았는데 밤중에 인기척을 느끼고 일어나서 힐끗 살펴보았더니 도련님이 돌아왔을뿐더러 방에 들어가 잠을 잔 것이다.이건 사모님께서 도련님을 위해 정해주신 신붓감이니 당연히 괜찮은 사람일 테고 도련님께서 드디어 결혼하니 줄곧 그를 보살펴왔던 우진경도 기쁘기 마련이다.그녀의 말투나 표정 모두 지나치게 열정적이니 왠지 모르게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하여 임서연은 뻣뻣하게 억지 미소를 지었다.“네, 뭐.”“얼른 가서 옷 갈아입으세요. 아침 준비해놨으니 이따가 드시면 돼요.”말을 마친 우진경은 주방으로 들어갔다.임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잠옷을 내려다봤다.‘내 옷 아직 침실에 있는데 지금쯤이면 이 남자 옷 다 갈아입었겠지?’그녀는 곧장 침실 문 앞에 도착해 가볍게 노크했다.안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또다시 두드렸지만 여전히 무반응이었다.임서연은 마지못해 문을 열어보았는데 안에서 잠근 상태가 아니라 바로 열렸다.다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한파와도 같은 살벌한 한기가 심장을 움찔거리게 했다.김하준이 침대 맡에 앉아서 한없이 차가운 눈길로 종잇장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그 종잇장은 바로...임서연은 그 종잇장이 임신진단서라는 걸 바로 알아챘고 바닥에 널브러진 본인 물품들을 보자 사생활을 침범당한 듯한 굴욕감이 들어 잽싸게 달려가서 진단서를 낚아챘다.“왜 동의도 없이 남의 물건을 함부로 봐요? 이건 엄연한 프라이버시잖아요!”‘참 나.’김하준이 쓴웃음을 지었다.“프라이버시?”그는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뱃속에 딴 놈 애를 품고 나랑 결혼했으면서 지금 뭐? 감히 프라이버시를 논해?”“그건...”임서연은 해명하고 싶었으나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김하준은 자
“어떻게 된 거야 대체?”선주영은 질문을 건넨 순간 뭔가 깨달은 것 같았다.“설마 그 돈 가해자 배상금이 아니었어?”그날의 교통사고로 엄마의 병원비와 남동생의 장례식 비용까지 적잖은 돈이 들었을 텐데 귀국하기 전 임서연은 또 엄마에게 약간의 돈을 드리면서 가해자의 배상금에서 쓰고 남은 돈이라고 했다.임서연은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차마 입밖에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그녀의 침묵이 곧 묵인이었다. 어린 소녀가 대체 어디서 그 많은 돈을 구할 수 있을까. 선주영은 심장을 쿡쿡 찌르듯 아프고 또 감히 믿을 수가 없었다.“너 설마... 몸 판 거야?”그녀는 임서연의 손목을 꽉 잡았다.“이 아이 낳으면 안 돼. 지금 당장 병원 가!”“왜요?”임서연은 손을 빼내려고 몸부림쳤다.“낳으면 네 인생 망치는 거야!”이 아이는 절대 낳을 수 없다. 임서연은 이미 결혼했으니 상대가 아는 순간 인생을 망치는 격이 된다.“엄마, 제발 부탁드려요. 이 아이 낳게 해주세요.”임서연이 눈물로 호소했다.하지만 아무리 애원해봐도 선주영의 태도는 여전히 매우 단호했다.결국 곧장 그녀를 이끌고 병원으로 향했다.임서연이 안 가겠다고 하면 엄마가 죽는 꼴을 보고 싶냐고 협박해댔다.임서연은 마지못해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를 지우기에 앞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아야 했고 선주영이 검사 결과를 가지러 간 후 그녀는 홀로 복도 벤치에 앉아 두 손으로 배를 쓰다듬었다.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괴로움과 무기력함에 휩싸여버렸다.“하준 씨, 나 괜찮아요. 너무 긴장할 거 없어요. 그냥 살짝 데인 거예요.”그 시각 백재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검은색의 타이트한 원피스로 몸매를 한껏 드러냈고 어깨에는 정장 외투를 하나 걸치고 있었다. 옆에 있는 김하준은 하얀색 셔츠 차림에 옷소매를 걷고 튼실한 팔뚝을 드러냈다.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살짝 데였어도 바로 응급처치 안 하면 흉터 남아.”백재아는 살며시 그의 품에 기댔다.“흉터 남으면 나 싫어할 거
임서연이 천천히 머리를 들고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하 선생님?”그의 뒤에 한 무리 사람들이 서 있었고 이에 임서연은 더더욱 놀랐다.“선생님이 왜 여기에 있어요?”그녀의 남동생이 자폐증을 앓을 때 하윤재에게 병 치료를 맡겼고 그렇게 두 사람도 서로 알게 됐다.하윤재가 다정하게 웃으며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이 병원 원장이 선뜻 가로챘다.“이분은 우리 병원에 강연하러 오셨어요.”하윤재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고 특히 자폐증에 조예가 깊다.“그러는 넌 병원에 왜 왔어? 어디 아파?”하윤재가 물었다.엄마의 단호한 태도를 떠올리며 그녀는 문득 온몸이 움찔거렸다.“서연아!”이때 선주영이 진단서를 들고 복도 반대편에서 급히 달려왔다. 진단서를 받고 돌아왔는데 간호사한테 임서연이 도망친 사실을 듣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이렇게 발견하고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임서연은 입술을 앙다물고 코끝이 찡해졌다.“엄마...”하윤재는 옆에 있는 원장에게 나지막이 말했다.“먼저 들어가 보세요. 저는 잠깐 볼일이 있어서.”“네, 편하게 일 보세요.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 선생님만 원하신다면 저희 병원 측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어떤 요구 사안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만족시켜드리겠습니다. 그럼 선생님이 저희 병원에 오시기만 기다릴게요.”하윤재가 웃으며 대답했다.“네, 고려해볼게요.”“어머님, 여긴 얘기하기 불편하니까 우선 밖에 나가요 우리.”병원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얘기를 나누기가 적절치 못했다.선주영도 하윤재를 알고 있다. 아들을 병 치료할 때 가끔 돈을 마련하지 못했고 그때마다 하윤재가 먼저 본인 돈을 대신 내주었다.선주영은 그런 하윤재를 몹시 존경한다.그녀는 임서연이 행여나 도망칠까 봐 손목을 꽉 잡았다.병원 대문을 나서자마자 임서연이 대뜸 선주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엄마, 제발! 이젠 서진이도 없으니 이 아이만큼은 낳게 해줘!”순간 하윤재가 미간을 찌푸렸다.‘뭐지?’다만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죠?”백재아의 말에 그녀는 도통 뭐라고 이어받을지 몰랐다.그럼 뭐 설마 미안하다고, 김하준과 혼약을 맺지 말았어야 했다고,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걸까?그게 오히려 더 가식적일 텐데...게다가 혼약은 양가 어머님께서 정해주신 건데 그녀인들 뭘 할 수 있을까?김하준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는데 보이지 않는 압박의 기운을 내뿜었다. 이에 임서연은 저도 몰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제가 하준 씨 심기라도 건드렸나요?”옆에 있던 백재아가 앞으로 나서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화 풀어요 하준 씨. 다 내 잘못이에요. 이런 말들을 하는 게 아닌데. 서연 씨도 이제 막 이 집안에 들어온 거잖아요. 내가 여길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럼 일찍 쉬세요. 난 이만 가볼게요.”“여길 떠날 사람은 네가 아니지.”김하준은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당기며 위층으로 올라갔다.백재아는 내심 기뻤다. 김하준은 그녀와 함께하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그런 그가 오늘 이렇게 나오니 백재아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어쨌거나 그날 밤 그와 함께한 건 백재아가 아니었기에 진짜 실질적인 관계가 발생해야 이 남자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을 수가 있다.임서연은 위를 올려다보지 않고 묵묵히 돌아서서 제 방으로 들어갔다.이때 백재아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는데 야위고 가녀린 몸매가 문득 그날 밤 그 여자의 뒷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그날 밤 백재아는 차오르는 질투와 분노를 꾹 참으며 첫 경험이 없는 여자를 찾아 김하준의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 시기 질투가 극에 달했으니 차마 여자의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았고 김하준과 한 몸이 되어 뒤섞이는 건 더더욱 보기 싫었다.다만 그 여자가 떠날 때 야위고 가녀린 뒷모습을 힐긋 보았을 뿐이다.어쩐지 임서연을 처음 봤을 때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더라니, 다 이런 연유가 있어서였다.그날 밤 그 여
그녀가 A국 언어를 할 줄 알다니.만약 오늘 이전에 임서연이 그날 밤 그 여자애라는 걸 확신하지 못했다면 백재아는 무조건 동의했을 것이다.“백 비서님?”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부하 직원이 의아해하며 말했다.“회의 곧 시작해요.”백재아는 수중의 서류를 부하에게 건넸다.“일단 이 서류들 대표님께 전해주세요. 저는 이따 바로 합류할게요.”“그럼 내일 회사로 나오세요.”이 나라의 언어를 아는 사람이 워낙 적었던지라 임서연이 업무 경력은 없지만 A국 언어를 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임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감사합니다.”그녀가 기쁜 마음으로 면접실을 나선 후 백재아가 곧바로 안으로 들어왔다.“아까 그 여자 지원 조건에 부합되지 않으니 채용하지 마세요.”“업무 경력은 없지만 A국 언어를...”“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요?”백재아가 엄하게 다그쳤다.그녀는 김하준의 비서이자 그의 여자친구, 더 나아가 김씨 일가의 안방마님으로 거듭날 사람인데 누가 감히 심기를 건드릴까?면접관은 결국 임서연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백재아의 요구에 동의했다.“네.”로비에서 나온 임서연은 이제 드디어 삶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마냥 기쁠 따름이었다.이제야 모든 패턴이 조금씩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녀는 길옆에서 택시를 잡고 임씨 저택으로 향했다.차가 곧장 임씨 저택에 도착했고 임서연은 택시비를 내고 차에서 내렸다.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에 들어갔다.거실에서 심수정이 실크 잠옷을 입고 요염한 몸매를 뽐내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집에 들어온 임서연을 보자 그녀가 정교한 눈썹을 들썩거렸다.“어머, 이게 누구야? 서연이가 어쩐 일이래?”임서연의 시선은 심수정의 손목에 닿았다. 그녀가 낀 옥 팔찌를 본 순간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그 팔찌는 임서연이 어릴 때 엄마의 보석함에서 본 팔찌였으니까. 엄마는 이 팔찌가 외할머니께서 물려주신 팔찌라고 그녀에게 말했었다.그런데 지금 심수정의 손에
분명 만족스러워했는데... 순간 임서연은 얼굴을 찡그렸다.더 나은 사람을 찾았겠지.이렇게 생각하니 임서연은 받아들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저녁, 김하준은 돌아와서 업무 때문인지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오후에 임서연이 우진경에게 김하준이 좋아하는 요리를 물어보고 직접 저녁을 준비하자 우진경은 웃으며 말했다.“아내로서 이렇게 해야죠.”임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미소만 지었다. 부탁할 일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잘 보이려 애쓰지도 않았을 거다.우진경은 한숨을 쉬었다.“여사님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어르신도 둘째 부인을 들이셔서 도련님은 자주 가지 않아요. 겉으로 차가워 보여도 사실 굉장히 감성적인 분이세요.”임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백재아 씨가 어렸을 때 도련님을 구해줬는데 커서도 도련님을 따라다녔어요. 도련님도 예전엔 싫어했다가 출장 다녀오고 나서 태도가 달라졌죠. 하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진짜 안주인은 여기 있잖아요.”우진경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하자 임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가 누굴 만나든 할 말이 없었다.부부지만 남과 다를 게 없는 사이였으니까.이 허무한 관계에 대해 그녀는 이미 해탈한 상태였다.임서연은 서재 쪽을 바라보다가 아침에 백재아가 내려준 블랙커피가 생각나서 물었다.“아주머니, 원두 어디 있어요? 커피 끓여주려고요.”이를 들은 우진경은 그녀가 마음 쓰는 걸 알고 원두를 꺼내 임서연에게 건네며 알려주었다.“도련님은 단 걸 안 좋아하니까 설탕이나 우유는 넣지 마세요.”임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커피를 내려 정교한 커피잔에 따른 뒤 직접 가져갔다.서재 안에서는 김하준이 다소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인사팀은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번역가 하나 채용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그는 꽤 많은 언어를 알고 있지만 A국 언어는 많이 쓰는 것도 아니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신규 확장으로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은데 언어가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