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임서연은 아줌마가 왜 더 해명하지 않는지 얼추 짐작이 갔지만 옅은 미소만 지었다.

김하준과의 결혼은 단지 거래일 뿐이니 그의 사생활에 대해 따져 물을 권한이 없다.

오히려 이 남자가 옆에 없으니 더 편하고 좋았다.

안방에 들어간 그녀는 침실을 쭉 둘러보았는데 아주 독특한 인테리어로 되어있었다. 블랙 앤 화이트로 깔끔하게 꾸며진 방은 럭셔리하면서도 너무 과하지 않고 우아한 분위기가 차 넘쳤다.

“여기가 도련님 방입니다.”

우진경이 웃으며 말했다. 결혼해서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함께 자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임서연은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처음 낯선 곳에서 자는 거라 쉽게 잠들지 못한 그녀는 침대 맡에 기댄 채 구직 앱으로 일자리를 검색해보았다. 일단 취직해서 안정하게 자리를 잡아야 엄마를 보살필 수 있고 배 속의 아이에게 미래를 선사할 수 있다.

쭉 둘러보던 그녀는 번역 구직 정보가 눈에 띄었다. 번역직은 이상할 것 없지만 A국 언어 번역은 보기 드문 요구였다.

A국은 바로 임국진이 그녀를 데리고 간 나라였다. 그곳은 매우 낙후한 열대 나라라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우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세계에서 유통되는 언어들은 대부분 선진국이거나 실력이 강한 나라의 언어였다.

급여와 복리후생도 나름 괜찮은 것 같으니 임서연은 바로 본인 정보를 남겨놓았다.

곧이어 휴대폰을 내려놓고 누워서 잠이 들었다.

달빛이 창가에 드리워지며 은은한 빛이 흘러내리고 고요한 밤이 서서히 깊어져 갔다.

임서연은 저도 몰래 깊은 잠에 빠졌고 이때 하얀 빛줄기가 정원에 내비치더니 마이바흐 한 대가 떡하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듬직한 체구의 실루엣이 차에서 내려왔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발걸음은 평소처럼 차분한 게 아니라 조금 들떠있어 보였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목이 마른 지 방에 들어가 컵에 물을 받더니 꿀꺽꿀꺽 삼켰다. 짙은 눈동자에는 취기가 어려 있었고 이제 좀 목마른 느낌이 가신 듯싶었다. 오늘 밤 저녁 약속이 잡혀서 양주를 적잖게 마셨고 백재아의 생일이다 보니 또 와인 몇 잔 더 들이켰다.

주량이 좀 센 편인데도 오늘은 취기가 약간 올라왔다.

그는 외투를 벗어서 소파에 내던진 채 욕실로 향하지 않고 바로 안방에 들어가 버렸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했지만 그는 익숙하게 침대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곧이어 김하준은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깊이 잠든 임서연은 인기척을 느꼈지만 곧장 잠잠해졌다. 하여 그녀도 몸을 움츠린 채 계속 잠을 청했다.

이른 아침.

눈 부신 햇살이 황금빛처럼 방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임서연은 한창 김하준의 품에 안겨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둘은 꼭 달콤한 연인을 방불케 했다.

이때 김하준이 속눈썹을 살짝 떨다가 천천히 눈을 떠보았는데 지난 밤의 숙취로 인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얼른 일어나 씻고 정신 좀 차려보려고 했지만 팔을 들려던 찰나 무거운 물건에 꽉 짓눌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여자가 그의 품에 쏙 안겨 있었다.

그녀의 긴 생머리가 김하준의 팔에 드리워졌고 새하얀 얼굴에 살짝 올라간 속눈썹은 나비의 날개처럼 아름다웠다. 핑크빛 입술은 살짝 벌어진 채 고른 숨소리가 났다.

서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가녀린 목선과 정교한 쇄골 라인이 드러났고 김하준을 향해 옆으로 누운 탓에 잠옷의 옷깃 사이로 볼륨진 가슴 라인이 은은하게 비쳤다.

그녀의 고른 숨소리가 사람을 혹할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에 김하준은 저도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백재아 앞에서도 충동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는데 고작 두 번 본 이 여자 앞에서 바로 반응을 일으키다니.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통제할 수 없는 이 신체적 반응이 다소 불쾌한 듯 보였으나 좀처럼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한편 임서연은 꿈속에서 아프리카 초원에 떡하니 서 있었는데 바로 앞에 용맹한 사자 한 마리가 그녀를 곧 잡아먹을 것처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놀라서 잠이 깬 그녀는 두 눈을 뜬 순간 한없이 짙고 어두운 눈동자와 마주쳤다. 김하준은 한창 애써 침착한 척하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임서연은 머릿속이 백지장이 돼버렸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가슴팍을 막으며 말까지 더듬거렸다.

“왜? 왜 내 침대에 있어요?”

김하준은 차분하게 시선을 거두고 이불을 젖혔다.

“여긴 내 침대야.”

임서연은 반박하려 했으나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니 할 말을 잃었다.

“여자친구 생일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함께 보내지 않고 왜 돌아온 거예요?”

임서연이 침대에서 내려와 한쪽 옆에 서 있었다.

이건 거의 질의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어제 우진경이 분명 그가 안 돌아올 거라고 말해줘서 경계심을 내려놓고 깊이 잠들었던지라 방에 들어오는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까 어제 이 남자랑 한 침대에서 잤단 말이야?!’

어젯밤에 그의 품에서 잠든 걸 되새기니 임서연은 대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머리를 푹 숙였다.

한편 김하준은 셔츠 단추를 풀었다. 어제 옷을 갈아입지 않아 술 냄새가 배었고 주름져서 꾀죄죄하니 심기가 불편했다. 그는 침대 옆에서 속수무책하게 서 있는 임서연을 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리고 장난치듯 대답했다.

“여자친구 생일이 신혼 첫날밤보다 중요하겠어?”

“...”

임서연은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단지 거래일 뿐이고 두 사람은 부부도 아닌데 신혼 첫날밤이 웬 말일까?

김하준이 셔츠를 벗자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홱 돌렸다.

이 남자가 대놓고 앞에서 옷을 벗을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그녀는 그날 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남자를 유독 배척했고 가까이에서 지내는 건 더더욱 싫어했다.

임서연은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

“난... 일단 나가볼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쪼르르 침실을 나섰다.

김하준도 더 신경 쓰지 않고 벨트를 풀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지금은 일단 샤워하고 머리를 식혀야 하니까.

욕실에서 물소리가 울려 퍼지고 한 시간 반쯤 지난 후 바디 클렌져의 향긋한 냄새와 함께 이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샤워를 마친 김하준은 짧은 머리가 축축이 젖어있었고 하얀 가운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은은하게 비쳤다. 그야말로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환상적인 몸매였다.

옷장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옷을 꺼내입으려 하는데 해바라기 패턴의 낯선 가방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흠칫 놀라며 생각했다.

‘임서연 가방이야? 뭔 해바라기? 보기보다 유치하네.’

‘게다가 스스럼없이 본인 물건을 내 옷장에 넣어?’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옷을 꺼내 입고 옷걸이를 다시 걸어놓으면서 부주의로 그녀의 가방을 툭 건드렸다.

지퍼가 채워지지 않아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고 안에 있던 물건이 전부 쏟아져 나왔는데 데일리 용품이 전부였다.

쪼그리고 앉아서 물건을 주우려던 참에 김하준은 그만 임신진단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임서연, 성별 여, 18세, 임신 6주.]

‘이 여자가 임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