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시 국제공항에서 서희수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한 마음으로 반 시간을 기다렸다이엘리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서희수의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이 맺혔다.정성껏 키워온 막내딸이 이토록 큰 고통을 겪을 줄이야.이번 일을 계기로 이엘리아가 교훈을 얻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함부로 괴롭히지 않기를 바랐다.모녀가 서로를 마주했지만 할 말은 없었다.그러나 곧 서희수는 이엘리아가 돌아온 후, 너무도 위축되고 무기력해진 것을 알아차렸다.윌슨은 지팡이를 짚고 엄한 얼굴로 이엘리아에게 경고했다.“이제부터 필라시에서 얌전히 지내. 어디도 못 가. 다시 문제를 일으키면 네 다리를 부러뜨리고 말 거야.”이엘리아가 말대꾸를 할 줄 알고 미리 준비까지 하고 있던 윌슨은 그녀가 공포에 서린 얼굴로 급히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아빠,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앞으로 오빠 말 잘 들을게요. 제발 다시 저를 가두지 마세요. 다시는 그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말을 하면서 이엘리아는 두려움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끔찍한 일을 겪은 듯한 모습이었다.빈센트 윌슨은 잠시 말을 잃었다.“...”서희수는 이엘리아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파 다가가 위로했다.“이엘리아,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여기 있어. 아빠도 네가 잘 되길 바랄 뿐이야.”“엄마...”이엘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정말 저 다시 가두지 않으시겠죠?”“그래, 네가 말을 잘 들으면 그런 일은 없을 거야.”“걱정 마세요. 꼭 오빠 말 잘 들을게요. 엄마, 오빠한테 말해 주세요. 저한테 화내지 말라고요. 네?”“그렇게 할게. 많이 피곤하지? 이제 들어가서 쉬어라.”“네.”이엘리아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서희수는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카이사르가 도대체 뭘 한 걸까요? 이엘리아가 이렇게 겁에 질려 하다니... 구치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연도진에 대한 불만이 스며들어있었고 아직 보지 못한 김시연까지 원망하게 되었다.빈센트
‘이 모든 것이 내가 이엘리아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 탓이야...’이엘리아는 서희수의 품에 안겨 흐느끼며 말했다.“엄마, 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어요? 그 안에 있는 동안 정말 무서웠어요... 매일 밤잠도 못 자고 엄마가 나를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왜 안 왔어요...”눈가가 붉어진 채로 서희수가 속삭였다.“미안해... 정말 미안해...”‘이엘리아가 그렇게 오랫동안 구치소에 갇혀 있게 둔 건 내 잘못이야. 조금만 일찍 도진이에게 부탁해 이엘리아를 꺼내오게 했어야 했는데... 내가 안 그랬어.’이엘리아는 흐느끼며 말했다.“난 엄마가 나를 버린 줄 알았어요.”“엄마가 어떻게 너를 버리겠니?”“오빠가 말했어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엄마 아빠가 떠난 뒤에 날 집에서 쫓아낼 거라고요...”이 말을 들은 서희수는 속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는 이엘리아를 달래며 말했다.“오빠가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이야. 널 걱정해서 그런 거야.”“정말로요?”“물론이지.”서희수는 이렇게 말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확신하지 못했다.그녀는 연도진이 자신들이 떠난 후에도 이엘리아를 잘 돌봐주기를 바랐지만 연도진은 이미 이엘리아에 대해 지친 것처럼 보였다.‘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보상해주려 노력했는데... 여전히 우리에게 특히 이엘리아에게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정말로 그토록 냉혈한 아이인 건가?’필라시에 돌아온 이엘리아는 눈빛이 텅 빈 채로 전신이 생기를 잃어버렸다.이엘리아는 더 이상 외출을 좋아하지 않았고 매일 방 안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서희수는 이엘리아가 이렇게 있는 것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 함께 쇼핑을 가자고 제안했다.이전의 이엘리아라면 기쁘게 따라나섰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가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고 서희수가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활발하고 사랑스러웠던 딸이 이렇게 변한 것을 보며 서희수는 깊은 자책감에 빠졌다.빈센트 윌슨은 이엘리아가 심리 치료를 받
이엘리아의 표정을 보며 앨리스는 미소를 지었다.“이제 연기 그만할래?”그러자 이엘리아는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하지만 앨리스는 이 말을 믿지 않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이엘리아, 내가 널 모를 것 같아? 지금 네 마음속엔 오빠에 대한 증오만 가득할 텐데, 맞지?”자기중심적이고 악랄하며 극단적인 성격인 이엘리아가 스스로 반성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절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리며 스스로가 억울하다고 여기고 있었다.그래서 복수를 꿈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이엘리아가 서희수와 빈센트 윌슨 앞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도 결국은 그들이 카이사르에게 불만을 가지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앨리스는 확신했다.“뭐야? 오빠 때문에 내 실체를 폭로하겠다는 거야?”이엘리아는 더 이상 부정하지 않고 앨리스를 차갑게 노려보았다.앨리스는 만약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카이사르를 위해 이엘리아를 설득하려고 하면 이엘리아가 자신마저도 해치려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설마 내가 그러겠어?”앨리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원래라면 앨리스는 이 일을 계기로 이엘리아와 카이사르가 화해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이미 김시연과 결혼해버렸으니 그녀는 더 이상 그와의 관계를 꿈꿀 수 없었다. 그런데 왜서 앨리스는 문제를 일으키려 하는 것일까?”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카이사르에게 그 대가가 무엇인지 톡톡히 보여주려는 것이었다.‘카이사르... 당신은 평생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야.’“똑똑하네.”이엘리아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아까 그 말... 오빠가 김시연이랑 결혼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네가 구치소에 있을 때 오빠가 김시연과 강남시에서 결혼식을 올렸어. 그때 알게 된 건데 카이사르 오빠가 진짜 좋아한 사람은 김시연이었지 너나 다른 사람이 아니었어.”이엘리아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정말 내 오빠 맞아? 내가 구치소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자기는 결혼할 생각이나
빈센트 윌슨은 서둘러 병원에 도착해 서희수가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그녀를 위로했다.서희수는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제때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난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우리 딸이, 이제 겨우 스물여섯인데, 하마터면... 너무 두려워요...”윌슨은 그녀를 안심시키며 말했다.“걱정 마, 다 잘될 거야. 내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당신은 먼저 가서 쉬어. 또 병이라도 날라.”하지만 서희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난 여기서 이엘리아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가득했다.두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응급실 밖의 빨간 불이 꺼졌다.의사가 안에서 나와 마스크를 벗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환자는 이미 응급 처치를 받았습니다. 병원에 아주 제때 도착했어요. 조금만 늦었더라면 생명이 위험할 뻔했습니다.”이 말을 들은 서희수는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아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러자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별말씀을요.”곧 이엘리아는 인공호흡기를 착용한 채 병실로 옮겨졌다.윌슨은 창백하고 생기 없는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딸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처음에는 이엘리아의 상태가 연기일 수도 있다고 의심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접었다.서희수는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냈고 눈이 붓도록 울었다.오랜 시간 병실에서 지켜보던 서희수는 마침내 마음을 다잡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핸드폰을 꺼내 연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윌슨은 고개를 들어 서희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서희수는 굳은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이번에는 나 말리지 마세요. 내가 반드시 도진이를 불러서 따져야겠어요. 이엘리아가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오빠로서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 말이에요. 그리고 도진이의 결혼도 난 절대 허락할 수 없어요!”서희수는 이전에는 김시연을 직접 만나보고 판단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들이 함께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결
연도진이 필라시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부승민은 낯선 이메일을 받았다.이메일을 열자마자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사진 속 여성을 보며 그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고 마우스를 쥐고 있는 손에 갑자기 힘을 들어가며 경직되었다.사진의 배경은 해외의 어느 병원 산부인과로 보였다. 사진 속 여자는 한 손으로 불룩하게 나온 배를 감싸고 다른 손에는 검사 결과지를 들고 간호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 여자의 얼굴은 부승민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온하랑이였다. 아주 젊은 온하랑, 대략 스무 살 정도로 보였고 풋풋하고 순수한 모습이었다.그녀는 몸매가 여전히 가늘고 가녀렸지만 배는 유독 부풀어 올라 힘들어 보였다.부승민은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가 이 일을 잊으려 할 때마다 누군가가 항상 다양한 방법으로 그를 괴롭혔다.‘도대체 누가 이 일을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거지? 누가 그토록 나와 온하랑이 잘 지내지 않기를 바라는 걸까?’그 답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이 사진을 보내온 사람이 단순히 부승민을 화나게 하려고 이 사진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했다.얼마 후, 그 사람은 또 다른 이메일을 보냈다.[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나요? 11월 4일, 필라시 헨리 호텔 0302호로 오세요. 기회는 이때뿐입니다.]이메일에는 두 장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첫 번째 사진에는 온하랑이 병원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녀의 배는 이미 납작해져 있었다. 두 번째 사진에는 간호사가 갓 태어난 듯한 작은 남자아이를 안고 목욕시키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부승민의 얼굴은 점점 심각해졌다.그는 이 이메일을 보낸 사람이 부선월이라고 생각했다.전에 부승민은 부선월이 필라시에서 온하랑을 몇 번 목격하고 그저 사진 몇 장을 찍었을 뿐이라고 여겼다.하지만 이제 이 사진은 온하랑이 출산을 한 병실에서 찍은 것이 명백했다.그리고 아이는 분명히 이 사진을 찍은 사람에게 인도되었을 것이다.깨어나 아이가 없어
온하랑은 김시연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거의 맞아. 연도진 씨랑 결혼식을 올렸으니 주변 사람들 눈에는 너희가 부부로 보일 거야. 같이 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연도진은 외부 사람들에게는 고아로 보이니까 너희가 아이를 가지면 그 아이는 네 성을 따르고 가업을 잇는 게 자연스럽겠지. 연도진 씨가 필라시에 간다면 그냥 출장 간다고 생각하면 돼. 만약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냥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 이엘리아 같은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무시해버려.”김시연은 웃으며 대답했다.“온하랑, 너 이제는 정말 경험이 많아졌구나.”그러자 온하랑은 피식 웃으며 감자를 골랐다.“이미 오래전에 깨달았어. 감정에 너무 집착할 필요 없어.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가면 되는 거야. 미래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김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그럼 지금 만약 부승민이 죽으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온하랑은 감자를 손에 들고 멍하니 있다가 되물었다.“뭐라고?”김시연은 질문을 반복했다.“내 말은 만약 지금 부승민이 죽으면 넌 어떻게 할 거냐고.”온하랑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부승민이 죽는다면... 그 사람의 장례를 치러주고 한바탕 울고 나서 계속 잘 살아가겠지.”김시연은 또 물었다.“안 슬퍼할 것 같아?”온하랑은 잠시 고민한 후 솔직하게 말했다.“예전 같았으면 매우 슬펐을 거야. 아마 그 사람이랑 함께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슬프긴 하겠지만 이제는 그 사람이 내 미래에 영향을 주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이 말에 김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그럼 부승민이 처음에 추서윤이랑 사귈 때 너한테로 빼앗아 올 생각은 안 해봤어?”온하랑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왜냐하면 내가 본가에서 부승민이랑 추서윤이 함께 있는 모습을 직접 봤거든.”온하랑은 또 다른 감자를 골라 플라스틱 봉지에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그리고 할아버지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 한쪽
온하랑의 심장은 두 번 크게 뛰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작은 빨간 방울토마토를 만지작거리며 무심한 듯 물었다.“뭐가 그렇게 좋아?”그러자 부승민은 손을 닦으며 온하랑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고 그 속에는 별빛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그냥... 그저 기뻐.”그는 이전에 받은 두 개의 이메일로 인해 느꼈던 모든 답답함이 사라진 것 같았다.“아, 그래.”대충 대답한 뒤, 온하랑은 그가 김시연과 자신이 한 통화를 엿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씻은 방울토마토를 들고 부엌을 나서려고 했다.그러나 부승민은 온하랑의 앞을 가로막고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온하랑은 그를 피해 옆으로 한 걸음 옮기려 했지만 부승민도 따라 움직였다.“뭐 하는 거야?”온하랑은 미간을 찌푸렸다.부승민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과일 접시를 받아들고 조리대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하랑아, 난 정말 행복해.”그의 목소리는 이미 하늘 끝까지 올라간 듯 들떠 있었다.“기쁘면 기쁜 거지 왜 자꾸 나한테 말하는 건데?”온하랑은 약간 짜증이 난 듯 말했다.“알았어. 하랑아, 너 진작부터 나를 좋아했구나.”“자만하지 마.”“자만하는 게 아니라 네가 직접 말했잖아.”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부승민의 눈가에는 약간의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온하랑이‘만약 부승민이 죽으면’이라고 말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부승민은 나머지 모든 말을 들었다.그리고 이제야 온하랑이 그를 좋아했음을 깨달았다.하지만 부승민은 그녀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그 당시 그의 관심은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었고 온하랑이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부승민은 온하랑의 뜨거운 사랑을 잃어버렸고 그녀가 가장 그를 사랑했을 때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이를 깨달았을 때, 온하랑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하지만 부승민은 다행히도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이제 그는 그녀에게 조금씩 더 다가갈 것이다.“난 아무 말도
“나도 너한테 감사할 게 있긴 해. 네가 내 삶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난 아마 오랫동안 퇴폐해 있으면서 학업과 대학 입시에 영향이 미쳤을 거거든. 제의대에 합격할 수도 없었을 거야.”부승민은 잠시 침묵한 후 조용히 물었다.“제의대 경영학과에 지원한 게 나 때문이었어?”온하랑이 부승민을 좋아한 시점이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이었음을 깨닫고 그는 놀랐다.하지만 지금 보니 그녀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니 어쩌면 더 이른 부씨 일가에 들어와서부터 자신을 좋아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당시 온하랑의 모습은 이제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져버렸고 그저 몇 가지 흐릿한 장면들만이 떠올랐다. 그들은 본가에서 처음 만났고 부승민은 오빠로서 그녀의 성적에 대해 한 번 물어봤던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저 형식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온하랑은 항상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부승민에게 어떤 특별한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즈음, 그는 할아버지에게서 온하랑이 제의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부승민의 직계 후배가 된 것이다.할아버지는 온하랑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부승민에게 조언을 구하라고 했고 부승민은 시간을 내어 그녀를 가르쳐주라 당부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아들였다.하지만 온하랑은 한 번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고 부승민도 그녀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그저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온하랑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셈이야.”부승민은 그녀의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그럼 BX 그룹에 들어간 것도 나 때문이야?”온하랑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그리고 할아버지의 기대도 있었어.”부승민은 조용히 웃었다.“너 정말 잘 숨겼구나. 난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온하랑, 그래서 감독들이 널 캐스팅하려고 했구나.”이 말에 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우린 원래 관계가 별로 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