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진이 필라시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부승민은 낯선 이메일을 받았다.이메일을 열자마자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사진 속 여성을 보며 그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고 마우스를 쥐고 있는 손에 갑자기 힘을 들어가며 경직되었다.사진의 배경은 해외의 어느 병원 산부인과로 보였다. 사진 속 여자는 한 손으로 불룩하게 나온 배를 감싸고 다른 손에는 검사 결과지를 들고 간호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 여자의 얼굴은 부승민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온하랑이였다. 아주 젊은 온하랑, 대략 스무 살 정도로 보였고 풋풋하고 순수한 모습이었다.그녀는 몸매가 여전히 가늘고 가녀렸지만 배는 유독 부풀어 올라 힘들어 보였다.부승민은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가 이 일을 잊으려 할 때마다 누군가가 항상 다양한 방법으로 그를 괴롭혔다.‘도대체 누가 이 일을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거지? 누가 그토록 나와 온하랑이 잘 지내지 않기를 바라는 걸까?’그 답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이 사진을 보내온 사람이 단순히 부승민을 화나게 하려고 이 사진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했다.얼마 후, 그 사람은 또 다른 이메일을 보냈다.[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나요? 11월 4일, 필라시 헨리 호텔 0302호로 오세요. 기회는 이때뿐입니다.]이메일에는 두 장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첫 번째 사진에는 온하랑이 병원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녀의 배는 이미 납작해져 있었다. 두 번째 사진에는 간호사가 갓 태어난 듯한 작은 남자아이를 안고 목욕시키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부승민의 얼굴은 점점 심각해졌다.그는 이 이메일을 보낸 사람이 부선월이라고 생각했다.전에 부승민은 부선월이 필라시에서 온하랑을 몇 번 목격하고 그저 사진 몇 장을 찍었을 뿐이라고 여겼다.하지만 이제 이 사진은 온하랑이 출산을 한 병실에서 찍은 것이 명백했다.그리고 아이는 분명히 이 사진을 찍은 사람에게 인도되었을 것이다.깨어나 아이가 없어
온하랑은 김시연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거의 맞아. 연도진 씨랑 결혼식을 올렸으니 주변 사람들 눈에는 너희가 부부로 보일 거야. 같이 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연도진은 외부 사람들에게는 고아로 보이니까 너희가 아이를 가지면 그 아이는 네 성을 따르고 가업을 잇는 게 자연스럽겠지. 연도진 씨가 필라시에 간다면 그냥 출장 간다고 생각하면 돼. 만약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냥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 이엘리아 같은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무시해버려.”김시연은 웃으며 대답했다.“온하랑, 너 이제는 정말 경험이 많아졌구나.”그러자 온하랑은 피식 웃으며 감자를 골랐다.“이미 오래전에 깨달았어. 감정에 너무 집착할 필요 없어.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가면 되는 거야. 미래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김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그럼 지금 만약 부승민이 죽으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온하랑은 감자를 손에 들고 멍하니 있다가 되물었다.“뭐라고?”김시연은 질문을 반복했다.“내 말은 만약 지금 부승민이 죽으면 넌 어떻게 할 거냐고.”온하랑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부승민이 죽는다면... 그 사람의 장례를 치러주고 한바탕 울고 나서 계속 잘 살아가겠지.”김시연은 또 물었다.“안 슬퍼할 것 같아?”온하랑은 잠시 고민한 후 솔직하게 말했다.“예전 같았으면 매우 슬펐을 거야. 아마 그 사람이랑 함께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슬프긴 하겠지만 이제는 그 사람이 내 미래에 영향을 주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이 말에 김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그럼 부승민이 처음에 추서윤이랑 사귈 때 너한테로 빼앗아 올 생각은 안 해봤어?”온하랑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왜냐하면 내가 본가에서 부승민이랑 추서윤이 함께 있는 모습을 직접 봤거든.”온하랑은 또 다른 감자를 골라 플라스틱 봉지에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그리고 할아버지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 한쪽
온하랑의 심장은 두 번 크게 뛰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작은 빨간 방울토마토를 만지작거리며 무심한 듯 물었다.“뭐가 그렇게 좋아?”그러자 부승민은 손을 닦으며 온하랑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고 그 속에는 별빛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그냥... 그저 기뻐.”그는 이전에 받은 두 개의 이메일로 인해 느꼈던 모든 답답함이 사라진 것 같았다.“아, 그래.”대충 대답한 뒤, 온하랑은 그가 김시연과 자신이 한 통화를 엿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씻은 방울토마토를 들고 부엌을 나서려고 했다.그러나 부승민은 온하랑의 앞을 가로막고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온하랑은 그를 피해 옆으로 한 걸음 옮기려 했지만 부승민도 따라 움직였다.“뭐 하는 거야?”온하랑은 미간을 찌푸렸다.부승민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과일 접시를 받아들고 조리대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하랑아, 난 정말 행복해.”그의 목소리는 이미 하늘 끝까지 올라간 듯 들떠 있었다.“기쁘면 기쁜 거지 왜 자꾸 나한테 말하는 건데?”온하랑은 약간 짜증이 난 듯 말했다.“알았어. 하랑아, 너 진작부터 나를 좋아했구나.”“자만하지 마.”“자만하는 게 아니라 네가 직접 말했잖아.”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부승민의 눈가에는 약간의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온하랑이‘만약 부승민이 죽으면’이라고 말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부승민은 나머지 모든 말을 들었다.그리고 이제야 온하랑이 그를 좋아했음을 깨달았다.하지만 부승민은 그녀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그 당시 그의 관심은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었고 온하랑이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부승민은 온하랑의 뜨거운 사랑을 잃어버렸고 그녀가 가장 그를 사랑했을 때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이를 깨달았을 때, 온하랑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하지만 부승민은 다행히도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이제 그는 그녀에게 조금씩 더 다가갈 것이다.“난 아무 말도
“나도 너한테 감사할 게 있긴 해. 네가 내 삶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난 아마 오랫동안 퇴폐해 있으면서 학업과 대학 입시에 영향이 미쳤을 거거든. 제의대에 합격할 수도 없었을 거야.”부승민은 잠시 침묵한 후 조용히 물었다.“제의대 경영학과에 지원한 게 나 때문이었어?”온하랑이 부승민을 좋아한 시점이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이었음을 깨닫고 그는 놀랐다.하지만 지금 보니 그녀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니 어쩌면 더 이른 부씨 일가에 들어와서부터 자신을 좋아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당시 온하랑의 모습은 이제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져버렸고 그저 몇 가지 흐릿한 장면들만이 떠올랐다. 그들은 본가에서 처음 만났고 부승민은 오빠로서 그녀의 성적에 대해 한 번 물어봤던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저 형식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온하랑은 항상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부승민에게 어떤 특별한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즈음, 그는 할아버지에게서 온하랑이 제의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부승민의 직계 후배가 된 것이다.할아버지는 온하랑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부승민에게 조언을 구하라고 했고 부승민은 시간을 내어 그녀를 가르쳐주라 당부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아들였다.하지만 온하랑은 한 번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고 부승민도 그녀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그저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온하랑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셈이야.”부승민은 그녀의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그럼 BX 그룹에 들어간 것도 나 때문이야?”온하랑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그리고 할아버지의 기대도 있었어.”부승민은 조용히 웃었다.“너 정말 잘 숨겼구나. 난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온하랑, 그래서 감독들이 널 캐스팅하려고 했구나.”이 말에 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우린 원래 관계가 별로 좋
부시아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온하랑은 부승민의 어깨를 밀며 그를 서둘러 밀어냈다.“시아가 들어오려고 해.”부승민은 아쉬운 듯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손으로는 여전히 온하랑의 허리를 살짝 어루만지고 있었다.“오늘 밤 나 여기서 자고 싶어.”온하랑은 그 말을 듣고 눈을 흘기며 그의 손을 떼어내고 과일 접시를 들어 부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부시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다 씻었어. 이제 먹어.”부시아는 온하랑의 빨갛게 물든 입술을 보고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고마워요, 숙모.”온하랑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어린애가... 너무 똑똑해도 문제네.’부승민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부시아 옆에 앉으며 말했다.“시아야,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갈까?”그러자 부시아는 눈을 반짝이며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숙모랑 같이 잘래요!”“너 이제 유치원에서도 제일 큰 언니, 누나잖아. 혼자 자는 게 좋지 않겠어? 송이랑 같이 자는 건 어때?”부승민은 부시아에게 살짝 윙크하며 말했다.그러자 부시아는 온하랑을 한 번, 부승민을 한 번 번갈아 보며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곧 헤어질 텐데 내가 양보할게요.”=온하랑은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부시아는 부승민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아빠가 떠나면 숙모는 제 거예요!”부승민은 딸의 만족스러운듯한 표정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아빠, 왜 그래요?”부시아는 부승민이 갑자기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작은 손을 흔들며 물었다. 아이의 동그란 얼굴에는 궁금증이 가득했다.“아니야. 그냥 생각이 좀 나서.”부승민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온하랑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업무가 있어 서재로 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부승민은 부시아에게 거실에서 놀게 한 후, 온하랑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그는 서재를 둘러보며 말했다.“아이도 크고 있
온하랑이 욕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부승민이 문 앞에서 물었다.“샤워하려고?”“응.”곧 온하랑이 화장실로 들어서며 문을 닫으려는데 부승민이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뭐 하는 거야?”그녀는 배를 살짝 감싸며 놀란 눈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지금 자신은 그와 함께 샤워할 수 없는 상태였다.부승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미끄러질까 봐 걱정돼서 같이 씻으려고. 걱정 마. 너 임신 중이니까 아무 짓도 안 할게...”온하랑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부승민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다가가 문을 닫으며 덧붙였다.“둘이 함께 씻으면 물도 절약되고... 안심해도 돼. 아무 일도 안 할 테니까.”온하랑은 할 말을 잃었지만 결국 그가 하는 대로 두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의 동의에 조용히 웃으며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렷다.뒤이어 단단한 근육과 선명한 복근이 드러났고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V라인이 허리 아래로 이어졌다.그 부분은 허리띠에 가려져 있었지만 온하랑은 무심코 그 허리띠를 알아보았다. 결혼 생활 중에 자신이 사준 것이었다.시선을 돌리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지만 고개를 들자 온하랑은 부승민이 자신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온하랑은 힐끗 흘겨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임신 5개월째, 그녀의 몸도 많이 변했고 배뿐만 아니라 가슴도 무거워졌다. 그러나 부승민은 그것을 매우 좋아하는 듯 보였다.샤워가 끝난 후, 온하랑은 피로감에 푹 잠긴 채 부승민에게 안겨 침대로 옮겨졌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입술은 살짝 벌어져 깊은숨을 쉬고 있었다.부승민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녀를 놀라게 했지만 이번에는 적절히 자제해 온하랑을 만족시켰다.부승민은 욕실을 간단히 정리한 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자연스럽게 온하랑을 끌어안았다.“하랑아?”“응?”졸린듯한 목소리로 온하랑이 대답했다.“아니야. 그냥 자.”“...”온하랑은 속으로 ‘이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중얼거리며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하지만
연도진의 시선을 마주하자 이엘리아는 속이 불안해지고 머리가 아찔해졌다.마치 연도진이 그녀의 모든 계략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그가 알아챘다 한들, 부모님이 자기편에 서 있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얼굴이 창백해지며 곧 이엘리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오빠...”서희수는 그런 이엘리아를 보고 급히 딸의 어깨를 다독이며 연도진을 향해 화를 냈다. “네 동생이 아직 아프잖아. 좀 더 상냥하게 대해 줄 수 없어?”연도진은 이엘리아를 한 번 쳐다본 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지금 여기서 편안하게 치료를 받고 있고 강남시 구치소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상냥하게 대하는 거라고 생각해요.”서희수가 더 말하기 전에 이엘리아는 구치소라는 단어에 격한 감정을 느껴 일부러 다리 위를 세게 꼬집으며 눈물을 쏟아냈다.그러고는 서희수의 품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엄마, 오빠가 또 저를 작은 방에 가두려고 할까요? 제발 저 가두지 말라고 말 좀 잘 해주세요. 저 오빠 말 들을게요...”그러자 서희수는 그녀를 부드럽게 위로하며 말했다.“걱정 마, 엄마가 있으니까. 네 오빠랑 얘기하고 올게. 이엘리아,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이엘리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서희수는 연도진을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 “카이사르, 나랑 얘기 좀 하자.”그렇게 연도진은 잠시 이엘리아를 쳐다본 후, 따라나서며 방을 나왔다.“카이사르, 강남시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네 여동생이 저렇게 된 거야?!”서희수는 계단 옆에서 분노에 차서 물었지만 연도진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이었다.“엄마, 먼저 진정하세요. 건강이 걱정돼요.”“네 동생이 저렇게 되어 있는데 나더러 어떻게 진정하라는 거야?”연도진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본 후, 한 걸음 물러나 벽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서희수는 여전히 화난 얼굴로 물었다.“너, 이엘리아에게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말했었지?”연도진
연도진의 말을 들으며 서희수는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이 상황이 장씨 가문에 알려지면 이엘리아는 분명 검찰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최소한 몇 개월 길게는 반년 이상을 구치소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연도진은 계속해서 말했다.“엄마도 아시다시피 이 상황이 장씨 가문에 알려졌다면 이엘리아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시연이가 왜 온하랑을 말렸겠어요? 바로 저를 생각해서, 제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하려고 했던 거예요. 시연이가 중재하지 않았더라면 이엘리아는 훨씬 더 무거운 처벌을 받았을 거예요.”“시연이가 저의 여자친구임에도 불구하고 난 시연이를 위해 정의를 실현해줄 수 없고 오히려 시연이가 저를 이해하고 배려해줘야 했어요. 엄마, 제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아세요?”“엄마, 이엘리아와 함께 시연이에게 감사해야 해요. 시연이의 너그러움 덕분에 이엘리아는 이렇게 가벼운 처벌로 끝날 수 있었어요.”연도진은 서희수가 이엘리아 때문에 김시연을 미워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한, 온하랑과 이엘리아의 관계는 이미 충분히 나빴고 더 이상 나빠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서희수는 연도진의 말에 얼굴이 더 붉어졌다.‘혹시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을까? 이엘리아의 고통만 생각하고 카이사르의 감정을 무시한 건 아닐까?’연도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이엘리아가 지금 이 지경에 이른 데에는 엄마, 아버지, 그리고 저 모두 책임이 있어요. 엄마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이엘리아를 잘 챙기지 못했고 아버지는 일에 바빠 동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죠. 그 결과 이엘리아는 오만하고 다른 사람을 얕보며 자랐어요. 처음에는 작은 일이라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지만 결국 법을 어기고 큰 문제를 일으켰죠. 그때마다 피해자에게 돈으로 해결하려 했고 이엘리아는 점점 더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어요. 이번에는 운 좋게 넘어갔지만 다음에 이엘리아가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을 건드린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엄마, 저도 이엘리아가 제 동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