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진의 시선을 마주하자 이엘리아는 속이 불안해지고 머리가 아찔해졌다.마치 연도진이 그녀의 모든 계략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그가 알아챘다 한들, 부모님이 자기편에 서 있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얼굴이 창백해지며 곧 이엘리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오빠...”서희수는 그런 이엘리아를 보고 급히 딸의 어깨를 다독이며 연도진을 향해 화를 냈다. “네 동생이 아직 아프잖아. 좀 더 상냥하게 대해 줄 수 없어?”연도진은 이엘리아를 한 번 쳐다본 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지금 여기서 편안하게 치료를 받고 있고 강남시 구치소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상냥하게 대하는 거라고 생각해요.”서희수가 더 말하기 전에 이엘리아는 구치소라는 단어에 격한 감정을 느껴 일부러 다리 위를 세게 꼬집으며 눈물을 쏟아냈다.그러고는 서희수의 품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엄마, 오빠가 또 저를 작은 방에 가두려고 할까요? 제발 저 가두지 말라고 말 좀 잘 해주세요. 저 오빠 말 들을게요...”그러자 서희수는 그녀를 부드럽게 위로하며 말했다.“걱정 마, 엄마가 있으니까. 네 오빠랑 얘기하고 올게. 이엘리아,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이엘리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서희수는 연도진을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 “카이사르, 나랑 얘기 좀 하자.”그렇게 연도진은 잠시 이엘리아를 쳐다본 후, 따라나서며 방을 나왔다.“카이사르, 강남시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네 여동생이 저렇게 된 거야?!”서희수는 계단 옆에서 분노에 차서 물었지만 연도진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이었다.“엄마, 먼저 진정하세요. 건강이 걱정돼요.”“네 동생이 저렇게 되어 있는데 나더러 어떻게 진정하라는 거야?”연도진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본 후, 한 걸음 물러나 벽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서희수는 여전히 화난 얼굴로 물었다.“너, 이엘리아에게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말했었지?”연도진
연도진의 말을 들으며 서희수는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이 상황이 장씨 가문에 알려지면 이엘리아는 분명 검찰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최소한 몇 개월 길게는 반년 이상을 구치소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연도진은 계속해서 말했다.“엄마도 아시다시피 이 상황이 장씨 가문에 알려졌다면 이엘리아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시연이가 왜 온하랑을 말렸겠어요? 바로 저를 생각해서, 제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하려고 했던 거예요. 시연이가 중재하지 않았더라면 이엘리아는 훨씬 더 무거운 처벌을 받았을 거예요.”“시연이가 저의 여자친구임에도 불구하고 난 시연이를 위해 정의를 실현해줄 수 없고 오히려 시연이가 저를 이해하고 배려해줘야 했어요. 엄마, 제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아세요?”“엄마, 이엘리아와 함께 시연이에게 감사해야 해요. 시연이의 너그러움 덕분에 이엘리아는 이렇게 가벼운 처벌로 끝날 수 있었어요.”연도진은 서희수가 이엘리아 때문에 김시연을 미워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한, 온하랑과 이엘리아의 관계는 이미 충분히 나빴고 더 이상 나빠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서희수는 연도진의 말에 얼굴이 더 붉어졌다.‘혹시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을까? 이엘리아의 고통만 생각하고 카이사르의 감정을 무시한 건 아닐까?’연도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이엘리아가 지금 이 지경에 이른 데에는 엄마, 아버지, 그리고 저 모두 책임이 있어요. 엄마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이엘리아를 잘 챙기지 못했고 아버지는 일에 바빠 동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죠. 그 결과 이엘리아는 오만하고 다른 사람을 얕보며 자랐어요. 처음에는 작은 일이라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지만 결국 법을 어기고 큰 문제를 일으켰죠. 그때마다 피해자에게 돈으로 해결하려 했고 이엘리아는 점점 더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어요. 이번에는 운 좋게 넘어갔지만 다음에 이엘리아가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을 건드린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엄마, 저도 이엘리아가 제 동
서희수는 도우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이엘리아를 급히 안아 들고 말했다.“이엘리아, 제발 이런 짓 하지 마. 네가 이러면 엄마 못 살아!”서희수는 연도진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엘리아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그녀는 이엘리아를 꼭 껴안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엄마가 있잖아. 네 오빠가 널 가두지 않게 막았어.”이엘리아는 서희수의 품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오빠가 절 가두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서희수는 재빨리 대답했다.“걱정하지 마라. 내가 네 오빠 혼내고 쫓아냈어!”이엘리아를 달래고 난 후, 서희수는 서둘러 심리 치료사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했다.처음에 심리 치료사는 오기를 꺼렸지만 서희수가 제시한 보수가 너무 많아 결국 병실을 방문하기로 했다.치료사는 윌슨 가문의 친구로 가장하여 병실에 들어갔다.이엘리아는 이 낯선 사람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무기력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그러고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심리 치료사의 질문에는 형식적으로 몇 마디 대답만 할 뿐이었다.30분 후, 서희수는 심리 치료사를 병실 밖으로 안내하며 다급하게 물었다.“어떻습니까?”심리 치료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엘리아가 협조하지 않아서 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가능하면 이엘리아가 시간을 내어 저와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그는 잠시 망설였다.사실 치료사는 간단한 대화 후, 이엘리아의 상태가 진짜 정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일부러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환자의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서희수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서희수는 치료사의 말을 듣고 다시 한숨을 쉬며 결심했다.“알겠습니다. 퇴원하면 바로 데리고 가겠습니다.”...부승민은 비행기에서 내린 후, 이메일에 적힌 주소로 곧장 향했다.그는 거대한 고딕 양식의 건물인 헨리 호텔 앞에 도착해 화려한 간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너는 여기서
두 남자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왼쪽에 있던 남자가 사진 세 장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놓더니 부승민의 앞에 내밀었다.부승민은 어두운 표정으로 사진을 집어 들어 하나하나 살펴보았다.그중 두 장은 이미 이메일에서 본 적이 있는 사진이었지만 세 번째 사진은 처음 보는 것 같은 사진이었다.사진 속 온하랑은 병상 위에 누워 잠들어 있었고 옆에는 아기 포대기가 있었다.부승민은 쿵쿵 뛰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고개를 들어맞은 편에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더 있습니까? 사진 속 아기는 지금 어디 있는 겁니까?”남자가 대답했다.“사진은 많고도 많죠. 아기가 어디 있는지는 찰스 님의 성의에 달려있겠죠.”“원하는 게 뭡니까?”“죄송하지만 찰스 님, 저에게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저희 주인님께서 협상하러 찾아오실 겁니다.”“알겠습니다.”부승민이 다시 고개를 숙여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마실 건 뭐 드릴까요?”“뭐든 괜찮습니다.”문을 열어줬던 남자가 차 두 잔을 우려 각각 부승민과 비서의 앞에 놓아주었다.“천천히 드시고 계세요.”호텔 밖의 육광태는 은밀한 장소에 숨어 호텔 입구를 예의주시하며 수시로 시간을 확인했다.“형씨, 불 좀 있어요? 라이터 좀 빌립시다.”그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육광태는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흘겨보며 아무렇게나 대답했다.“없어요.”“알았어요.”휴대폰을 확인하던 육광태는 문득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조금 전 그 사람은 분명 백인이었는데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정말 라이터가 필요했다면 길거리에서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빌려도 될 텐데 왜 하필 육광태에게까지 찾아왔던 걸까?육광태는 곧장 몸을 돌렸다. 조금 전의 그 백인이 웃으며 무거운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퍽”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육광태는 순간적으로 시야가 캄캄해지더니 곧이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큰일 났다!두 사람은 지금 속은 거다!남자
부승민은 필라시로 출장을 떠났고 온하랑은 평소처럼 일하며 스튜디오에서 거래처의 신제품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다.임신 개월 수가 지날수록 온하랑이 화장실을 찾는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촬영이 잠시 중단된 틈을 타 온하랑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화장실로 향했다.유난히 신중하게 행동했던 부승민은 온하랑에게 양현수 경호팀 외에도 언제 어디서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을 수 있는 여자 경호원까지 붙여주었다.온하랑은 그 덕에 화장실을 갈 때도 혼자가 아니었다.여자 경호원은 먼저 화장실 안을 쭉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문밖에서 온하랑을 기다려 주었다.복도 끝에서는 청소부가 바닥을 걸레로 닦고 있었다.마지막 타일까지 다 닦은 청소부는 걸레를 빨기 위해 화장실로 걸어갔다.청소부가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온하랑의 여자 경호원이 그녀를 가로막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청소부를 훑어보았다.“죄송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누가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어서요.”청소부는 걸레를 꽉 쥐고는 경호원을 한 번 쳐다보았다.“다 같은 여자인데 뭐 어때요? 저 청소 해야 해요!”“죄송합니다. 안에서 촬영용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요. 협찬받은 거라 걸레 물이라도 튀면 아주머니께서도 부담하기 힘드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저 나름대로 조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시죠.”청소부는 화장실 안을 한 번 들여다보더니 경호원의 손을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경호원은 재빨리 한 발 움직여 문 앞을 가로막았다.그제야 청소부가 화를 내며 경호원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왜 이러는 거예요? 화장실이 당신들 것도 아니고 왜 못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당신들 돈 좀 있다고 이런 식으로 사람 무시하는 겁니까...”“이 몇 분 때문에 아주머니께서 경제적인 손해를 입는다면 제가 보상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이게 돈이 문제예요? 지금 당장 퇴근하고 손자 밥 해주러 가봐야 한단 말이에요. 이러다가 우리 애 오후 수업 늦으면 어떻게 책임질
한 보안 요원이 모니터에 비친 청소부를 발견하자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저 사람은 본 적 없는 것 같은데요? 새로 온 사람인가? 경태 씨, 저 사람 알아요?”경태라고 불리는 그 보안 요원이 가까이 다가와 화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모르겠는데요... 몰래 들어온 팬 아닐까요? 전에도 이런 경우 종종 있었거든요...!”무슨 일인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된 양현수가 더 경계심을 가졌다.촬영 도중, 한쪽 구석에 두었던 가방 안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그 소리를 들은 어시스턴트가 재빨리 달려가 확인해보니 온하랑의 가방 안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처음 보는 낯선 번호가 떠 있었다. 개인 번호보다는 법인 번호 같아 보였다.어시스턴트가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안녕하세요, 저는 강남 세화 병원 간호사인데요. 혹시 이현정 씨 가족분이신가요? 뇌출혈로 실려 오셔서 지금 응급실에 계신데 빨리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전화를 받은 어시스턴트가 잠시 당황하더니 물었다.“이현정이 누군데요?”“... 부씨 가문 사모님이세요.”“아, 네.”어시스턴트는 서둘러 온하랑이 사진을 확인하고 있던 기회를 틈타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하랑 씨, 방금 강남 세화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사모님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실려 가셔서 지금 응급실에서 치료받는 중이라 빨리 가봐야 할 것 같다던데요.”그 말에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온몸이 떨리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게 정말이에요?”카메라를 쥔 온하랑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어시스턴트가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그녀는 목에 걸고 있던 카메라를 벗어 어시스턴트에게 넘기며 말했다.“지금 당장 갈게요.”그녀는 이미 너무 많은 가족을 잃었다. 이제 할머니마저 그녀를 떠나려는 걸까?!“왜요? 무슨 일 있어요?”온하랑과 계속 소통하며 촬영현장에 남아있던 거래처 비서는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곧장 다가와 물었다.“죄송한데요, 할머니께서 갑자기
도우미 아주머니의 목소리로는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온하랑은 더 의심하지 않고 곧장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로 달려가며 세 경호원에게 얘기했다.“할머니께서 정말 위독하신 것 같아요. 얼른 갑시다.”세 경호원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이내 온하랑의 뒤를 따랐다.오늘도 평소처럼 양현수가 운전대를 잡고 그의 파트너가 조수석에 앉았다. 그리고 여자 경호원은 온하랑과 함께 뒷좌석에서 그녀를 보좌했다.차는 빠르게 지하주차장을 벗어났다.그들이 자리를 뜨자 모퉁이에 있던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남자는 이윽고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타겟이 방금 출발했다. 차 번호는 이미 알고 있겠지.”수화기 너머에서 답변이 들려오자 남자는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천만 원!이 일만 성공하면 그의 손에는 천만 원이 쥐어진다!그렇게 된다면 감히 누가 그를 무시할 수 있을까.그러던 중,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타겟이 누군데?”“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남자는 무의식적으로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하지만 곧이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의식한 남자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그는 뒤늦게 몸을 돌렸다. 그 뒤에는 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자신을 보며 환히 미소 짓고 있었다. 이윽고 주먹이 날아왔다...왜소한 남자는 순식간에 주먹에 맞아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눈가에 피멍이 맺혔고 얻어맞은 머리는 어질어질했다.“끌고 가.”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손을 털며 단정한 정장을 입은 경호원에게 말했다....강남의 도로는 사방팔방으로 잘 뻗어있었다. 그러니 촬영장에서 세화 병원으로 향하는 길도 여러 갈래였다. 양현수는 그중 가장 빠른 길로 가고 있었다.앞서가고 있던 흰색 차는 초보운전자가 운전 중이었는지 이상할 정도로 속도가 아주 느렸다.표정에서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온하랑의 모습에 양현수는 백미러로 오른쪽 차선에 차가 없는
이런 가벼운 접촉사고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꾸며서 생긴 것일지 모르는 일이었다.그래서 온하랑도 별말 없이 앞으로 다가가 불쌍한 표정으로 경찰을 바라보았다.양현수를 한 번 바라본 경찰은 온하랑의 불룩한 배를 보자 차마 거절 의사를 밝히지 못했다.“그래요, 타세요.”“네, 정말 감사합니다. 경관님.”“아닙니다.”그렇게 세 사람은 경찰차를 타고 세화 병원에 도착했다. 현장에는 남자 경호원 한 명과 S 자동차 서비스 센터 직원만 남겨둔 채 말이다.바로 앞에 보이는 교차로 근처에는 흰색 화물차 한 대가 길가에 주차되어 있었다.화물차 운전자는 운전석에 앉아 창밖으로 목을 내민 채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앞쪽 교차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정말 이상한 일이었다.시간을 계산해보면 온하랑의 차가 진작 이 교차로를 지나갔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걸까?설마 놓친 건가?그럴 리가 없다!운전자는 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잠시 고민하던 운전자는 왜소한 체격의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통화음이 한참이나 울렸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계속 전화를 걸어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누군가가 화물차의 차창을 두드렸다.안 그래도 떳떳하지 못한 일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운전자는 작은 기척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온몸을 떨었다.고개를 들어 보니 창밖에는 경찰이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운전자는 순간적으로 손이 떨려 휴대폰을 차 밑에 떨어뜨리고 말았다.다행히 경찰은 그저 불법 주차로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운전자에게 딱지를 끊어주고는 벌점까지 주며 당장 자리를 뜨라고 명령했다.왜소한 남자와 연락이 닿지 못한 운전자는 경찰의 말대로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그는 다른 주차 공간을 찾아 차를 세워두고는 다시 그 왜소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전화가 연결되었다. 운전자는 급히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왜소한 남자의 대답이 들려왔다.“계획이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