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미 아주머니의 목소리로는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온하랑은 더 의심하지 않고 곧장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로 달려가며 세 경호원에게 얘기했다.“할머니께서 정말 위독하신 것 같아요. 얼른 갑시다.”세 경호원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이내 온하랑의 뒤를 따랐다.오늘도 평소처럼 양현수가 운전대를 잡고 그의 파트너가 조수석에 앉았다. 그리고 여자 경호원은 온하랑과 함께 뒷좌석에서 그녀를 보좌했다.차는 빠르게 지하주차장을 벗어났다.그들이 자리를 뜨자 모퉁이에 있던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남자는 이윽고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타겟이 방금 출발했다. 차 번호는 이미 알고 있겠지.”수화기 너머에서 답변이 들려오자 남자는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천만 원!이 일만 성공하면 그의 손에는 천만 원이 쥐어진다!그렇게 된다면 감히 누가 그를 무시할 수 있을까.그러던 중,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타겟이 누군데?”“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남자는 무의식적으로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하지만 곧이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의식한 남자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그는 뒤늦게 몸을 돌렸다. 그 뒤에는 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자신을 보며 환히 미소 짓고 있었다. 이윽고 주먹이 날아왔다...왜소한 남자는 순식간에 주먹에 맞아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눈가에 피멍이 맺혔고 얻어맞은 머리는 어질어질했다.“끌고 가.”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손을 털며 단정한 정장을 입은 경호원에게 말했다....강남의 도로는 사방팔방으로 잘 뻗어있었다. 그러니 촬영장에서 세화 병원으로 향하는 길도 여러 갈래였다. 양현수는 그중 가장 빠른 길로 가고 있었다.앞서가고 있던 흰색 차는 초보운전자가 운전 중이었는지 이상할 정도로 속도가 아주 느렸다.표정에서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온하랑의 모습에 양현수는 백미러로 오른쪽 차선에 차가 없는
이런 가벼운 접촉사고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꾸며서 생긴 것일지 모르는 일이었다.그래서 온하랑도 별말 없이 앞으로 다가가 불쌍한 표정으로 경찰을 바라보았다.양현수를 한 번 바라본 경찰은 온하랑의 불룩한 배를 보자 차마 거절 의사를 밝히지 못했다.“그래요, 타세요.”“네, 정말 감사합니다. 경관님.”“아닙니다.”그렇게 세 사람은 경찰차를 타고 세화 병원에 도착했다. 현장에는 남자 경호원 한 명과 S 자동차 서비스 센터 직원만 남겨둔 채 말이다.바로 앞에 보이는 교차로 근처에는 흰색 화물차 한 대가 길가에 주차되어 있었다.화물차 운전자는 운전석에 앉아 창밖으로 목을 내민 채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앞쪽 교차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정말 이상한 일이었다.시간을 계산해보면 온하랑의 차가 진작 이 교차로를 지나갔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걸까?설마 놓친 건가?그럴 리가 없다!운전자는 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잠시 고민하던 운전자는 왜소한 체격의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통화음이 한참이나 울렸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계속 전화를 걸어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누군가가 화물차의 차창을 두드렸다.안 그래도 떳떳하지 못한 일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운전자는 작은 기척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온몸을 떨었다.고개를 들어 보니 창밖에는 경찰이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운전자는 순간적으로 손이 떨려 휴대폰을 차 밑에 떨어뜨리고 말았다.다행히 경찰은 그저 불법 주차로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운전자에게 딱지를 끊어주고는 벌점까지 주며 당장 자리를 뜨라고 명령했다.왜소한 남자와 연락이 닿지 못한 운전자는 경찰의 말대로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그는 다른 주차 공간을 찾아 차를 세워두고는 다시 그 왜소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전화가 연결되었다. 운전자는 급히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왜소한 남자의 대답이 들려왔다.“계획이
“오진”이라는 두 글자를 듣는 순간, 유리로 된 출입문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양현수와 여자 경호원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더욱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다짐했다.온하랑은 드디어 졸였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괜찮다니 다행이네요.”“이제 병실로 옮겨도 되니까 어르신 잘 보살펴 주세요.”의사가 말했다.“퇴원은 언제 가능할까요?”부광훈이 물었다.“이틀 정도만 더 지켜봤다가 아무 이상 없으면 퇴원하셔도 됩니다.”의사가 대답했다.“알겠습니다.”그 순간, 할머니가 간호사들에 의해 수술실 밖으로 나왔다.가정부도 다급히 병상 옆에 따라붙어 병실로 향했다.온하랑도 함께 따라가려던 그때, 순간적으로 무언가가 떠오른 듯 의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뇌출혈이랑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박동 이상 증상이 비슷한 건가요? 어떻게 오진이 되죠?”강남 세화 병원이라 하면 큰 규모의 국립병원이었다. 게다가 뇌출혈이라면 노인들에게 흔한 질환일 텐데 상식대로라면 이런 실수가 없어야 했다.의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온 지 얼마 안 된 인턴이라, 아직 실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다행히 큰 문제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어요.”“생명이 걸린 중요한 일입니다. 이번에는 문제가 없었으니 다행이겠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걱정하지 마십시오. 돌아가면 제가 그 인턴 제대로 혼내고 위에다가도 사실대로 보고 올려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조처를 하겠습니다.”온하랑은 더 말을 얹지 않고 할머니의 병실로 향했다.“하랑 씨, 이번 일 어딘가 조금... 이상한 것 같지 않나요?”양현수가 그녀의 뒤를 따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온하랑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초반까지는 그대로 괜찮았지만, 이번 오진으로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심이 점점 커져만 갔다.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할머니의 많은 나이 탓에 교통사고 같은 과격한 수단은 차마 사용할 수 없으니 뇌출혈이라는 오진으로 온하랑을 병원까지 유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만약 정말 그런
눈을 뜬 이현정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머리가 좀 아프고 힘이 없는 것 같구나. 어떻게 된 일이냐?”“세화 병원 의사 말로는 순간적인 혈압 상승으로 심장박동에 이상이 생겼대요.”안미영이 말을 이었다.“그 병원 의사들은 어딘가 못 미더워요. 처음에 뇌출혈이라고 오진 해버려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별일 없어서 다행이긴 하지만요.”“혈압약이라면 매일 먹고 있는데.”이현정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낮게 중얼거렸다.“그래서 다들 여기까지 온 거야?”“네, 할머니. 제가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이현정이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 원래 앓고 있던 지병이었으니까. 다들 얼른 돌아가, 여긴 아줌마 계시잖니.”“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검사 결과 나오는 거 보고 갈게요.”온하랑이 대답했다.가족들은 병실에 모여 잠시 이현정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임 원장이 검사 보고서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할머님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 일단 모든 수치는 다 정상으로 나오네요.”“할머니께서 두통도 좀 있으시고 몸에 힘도 없다고 하시는데요.“약 드시고 좀 주무시면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 내일 검사 더 받아보고 이상 없으면 퇴원하셔도 돼요.”“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제야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임 원장이 몸을 돌려 병실 밖으로 나섰다.그러면서도 임 원장은 부광훈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계속해서 자리를 지키던 부광훈은 회사에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며 먼저 자리를 떴다.병실을 벗어난 부광훈은 그길로 곧장 임 원장의 사무실로 향했다.“왜 부르셨습니까, 원장님? 설마 저희 어머니 건강에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부광훈의 표정은 마치 엄청난 적이라도 만난 듯 사뭇 진지했다.임 원장은 부광훈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너무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할머님께선 아직 건강하시니까요.”“그럼 저는 왜 여기까지 부르신 거죠...?”“할머
부광훈은 그 길로 본가까지 쉼 없이 달려갔다. 그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해 경비원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며 최근 이 아파트에 새로 입주한 입주민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CCTV 영상에는 한 청년이 이현정에게 길을 묻는 장면이 담겨있었지만, 마스크를 쓴 채 두 눈만 내놓고 있었던 탓에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영상을 앞으로 돌려 추적해보니 청년은 처음부터 옷 소매에 유리병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이현정을 발견하자마자 병마개를 뽑아 소매에 감춰두고는 이현정의 뒤로 따라붙어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며 길을 물었다.이 자식이 분명했다.부광훈이 확신했다.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석연찮은 부분이 존재했다.처음에는 청년이 이현정을 해치려다가 이웃들에게 들켜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고만 생각했었다.하지만 CCTV를 확인해보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정말 이현정을 해치려 했다면 기회는 많고도 많았지만 청년은 그저 이현정이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그렇다고 단순히 청년이 이현정을 병원에 보내기 위해 일을 꾸몄다고 봐야 할까?게다가 세화 병원 응급실 의사도 이상했다. 혈액 검사만 하면 알 수 있는 증상을 오진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부광훈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접수하고는 CCTV 영상과 이현정의 진단서를 증거로 첨부하며 범인을 잡아 달라고 요구했다.하지만 그 청년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자마자 증발하기라도 한 듯 반나절 동안이나 수색해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부광훈은 사람을 시켜 세화 병원에서 이현정의 병을 오진한 의사라도 찾으려 했지만 그 역시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병원을 나선 온하랑은 부현승의 차를 얻어타고 스튜디오까지 도착했다. 그 상태로 저녁까지 일에 집중하고 나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집 문 앞에 도착하자 양현수 경호팀이 온하랑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며 내일 아침 8시 반에 데리러 올 것을 약속했다.온하랑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정부가 이미 준비해둔 저녁
남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천 한 조각을 꺼내 온하랑의 입을 틀어막고는 두 손으로 그녀를 침대 위까지 들어 올렸다.온하랑이 애써 발버둥 쳐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남자는 순식간에 온하랑의 발까지 묶어버리고는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반항하지 마, 그래봤자 아무 소용 없으니까, 아가씨.”“...”남자의 행동으로 온하랑은 지금 방 안에 이 남자 한 명만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온하랑을 침대 위로 내던진 남자는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온하랑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보았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 화면의 불빛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그는 온하랑에게서 등을 돌린 채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온하랑은 그 미약한 불빛을 통해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유리컵을 발견했다.어젯밤, 그녀가 물을 마시고 놓아둔 컵이었다.온하랑은 기회를 엿보며 천천히 침대 머리맡까지 기어갔다.남자는 통화가 연결되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성공했어... 이미 다 묶어놨어... 왜 바로 처리 안 하냐고? 부승민 와이프가 예쁜 임산부라고 하던데, 딱 내 취향이라는 거 잘 알잖아...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내가 그냥 놓칠 리가 있겠어?... 걱정하지 마, 아무 문제 없을 테니까. 다 끝나면 바로 죽여버릴게!”“...”그녀는 가까스로 침대 머리맡에 다다랐다. 목을 길게 뺀 온하랑은 이마로 유리컵을 건드렸다. 컵은 꽤 차가웠다.이 상태로 조금만 힘을 주어도 유리컵이 바닥에 떨어져 깨질 것이다. 그러면 가정부가 그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물으며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을 치워주러 달려올 것이다.밖에 있는 가정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남자는 온하랑이 가정부에게 대답할 수 있도록 그녀의 입에 물려두었던 천을 빼줄 것이다.그러면 온하랑은 그 기회를 틈타 가정부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온하랑이 머리를 이용해 유리컵을 힘껏 앞으로 밀려던 순간, 그녀의 목덜미가 뒤로 잡아당겨 졌다.그녀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온하랑은 그저 가장자리에 멈춰
남자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향했다. 입술이 훑고 지나간 하얀 피부 위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축축한 혀끝이 온하랑의 살을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그 자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식어가며 오히려 더 차가워졌다.“쩌억”하는 소리와 함께 스타킹이 찢어졌다.남자가 내뱉는 뜨거운 숨결은 그녀의 피부 위에 직접 닿았다. 눈앞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악랄한 미소를 지었다.“와, 사모님. 벌써 흥분한 거야?”말을 마친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온하랑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정신은 몽롱했고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남자는 능숙한 솜씨로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계속해서 온하랑을 자극했다.“사모님, 긴장돼?”온하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남자도 온하랑의 대답을 기대한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손놀림을 이어가며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안이 축축하게 젖었어. 엄청나게 조이네. 그리고 아주 뜨겁고...”질끈 감은 온하랑의 두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최대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애썼다.하지만 남자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려 애쓰는 온하랑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는지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애무했다.온하랑의 머릿속은 수백 개의 칼날로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낮은 신음을 흘리며 혼란에 빠졌던 온하랑이 다시 정신을 차렸다.남자는 침대 시트에 손을 닦으며 바지 벨트를 풀었다.온하랑은 다리를 움직여 최대한 침대 머리맡으로 도망쳐 보았지만 남자는 그런 그녀를 다시 끌어당겨 망설임 없이 행동을 개시했다.남자는 온몸으로 만족스러운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사모님, 나랑 부승민 둘 중에 누가 더 커?”“읍.”꺼져.“나?”남자가 해맑게 웃으며 몸을 숙여 온하랑의 여린 살결을 깨물었다.“칭찬 고마워.”“...”“좋아?”온하랑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말 안 해도 난 알아. 몸은 절대 거짓말 못 하거든.”“...”방안은 다시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저 거친 숨소리만이 짙게 내려앉은 적막을
“사모님!”남자가 갑자기 이를 악물더니 순식간에 목소리가 매서워졌다.“왜... 왜 그래?”온하랑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남자가 웃었다.“아니야. 사모님, 칭찬 고마워. 내가 잘 모셔줄게.”“모신다”라는 말을 남자는 일부러 강조하듯 힘주어 말했다.남자는 약속대로 입, 혀와 손을 모두 사용해 온하랑을 제대로 애무해 주었다. 그는 결박된 온하랑의 손목과 발목을 모두 풀어주었다.일이 끝나자 온하랑은 이미 온몸이 나른해져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미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너무 피곤했지만 또 그만큼 편안했다. 몸이 나른해진 온하랑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앉았다. 이제 남자고 뭐고 신경 쓸 기력이 없었다.그 순간, “딸깍”하는 스위치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눈부신 백열등의 불빛에 온하랑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실눈을 가늘게 뜬 채 천천히 밝은 불빛에 적응했다.남자는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을 주워 소파 한쪽에 올려두었다.온하랑은 옷도 입지 않고 방안을 돌아다니는 남자를 보며 이불을 끌어 올려 자신의 몸을 가렸다.“출장 간 거 아니었어?”“비행기 안 탔어.”“범인” 부승민이 천천히 다가와 이불을 걷어내더니 온하랑의 곁에 자리 잡고 누웠다.“왜?”온하랑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처음 누군가에 의해 입이 틀어막히고 벽에 밀쳐졌을 때, 온하랑은 정말 깜짝 놀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하지만 남자가 입을 여는 순간, 온하랑은 그의 정체를 눈치챘다. 그녀는 익숙한 향기를 맡으며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했다.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온 덕에 아무리 목소리를 낮게 깔아봤자 온하랑은 단번에 그 남자의 정체가 부승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번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누군가 날 일부러 거기까지 끌어들이려는 게 아닐까 싶네.”부승민이 말했다.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장 필라시로 향하라는 메일을 받았다.그때부터 부승민은 배후 인물의 목적이 무엇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