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그대로 몸을 돌려 부승민을 등진 채 하품했다.“나 지금 너무 피곤하고 졸리거든. 그러니까 먼저 잘게. 냉장고에 샌드위치 있으니까 데워 먹든지.”부승민은 머리를 괸 채 온하랑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는 혼잣말인 척 일부러 온하랑이 다 들을 수 있게 말했다.“좋았겠지. 너 엄청 예민하고 민감하잖아. 몇 번 안 돼서 바로 가고.”온하랑은 이를 악물며 애써 부승민의 말을 무시하고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계속해서 아무 대답이 없자 부승민도 장난치는 것을 관두고 침대에서 내려와 대충 옷을 걸치며 화장실로 향했다.방안은 다시 고요해졌다.온하랑은 한쪽 눈을 뜬 채 사방을 둘러보고는 다시 몸을 돌려 기지개를 켰다.눈을 감자 조금 전에 있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처음에는 방 안에 또 숨어 있을지 모르는 다른 사람을 의식해가며 일부러 부승민에게 맞춰주었다. 그러니 그녀의 공포와 두려움은 완전히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방 안에 부승민 한 명뿐이라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연기에 몰입해 있는 부승민에게 계속해서 맞춰주며 그가 어디까지 할지 계속 지켜보았다.결국, 온하랑은 부승민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바로 그녀와 함께 자는 것.역할 놀이를 곁들인 채 말이다.아무런 예고도 없었다.부승민은 정말 성실하게 범죄자 역할에 몰입해 있었다.온하랑도 그 남자가 부승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부승민도 자신을 알아본 온하랑이 함께 몰입해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암묵적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 온하랑은 아주 잠깐 자신의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조용히 방에 침입한 도둑이라는 생각까지 했다...임신한 온하랑을 고려한 것인지 부승민의 움직임은 매우 조심스러웠다.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웠고 속도도 훨씬 느렸다.하지만 왜인지 그녀는 평소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절정에 도달했다.그
부승민이 웃으며 말했다.“얼굴 좀 닦고, 양치는 하고 자야지.”온하랑은 부승민의 손에 든 물건을 확인하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응.”그녀는 몸을 일으켜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리고는 부승민에게서 칫솔과 양치 컵을 받아들었다.세수를 마친 온하랑이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부승민은 갖고 나온 물건을 욕실로 갖다 두고는 다시 밖으로 나와 침대에 누웠다.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이불 끝을 꽉 잡았다.“또 뭐 하려고?”부승민은 그저 미소만 지으며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온하랑에게 다가갔다.온하랑은 다시 이불로 자신을 감싸며 말했다.“안돼, 나 진짜 더 못해...”“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그냥 침대 시트 좀 갈아주려고 했던 건데. 이렇게 젖었는데 여기서 계속 자려고?”어떤 장면들이 떠오른 것인지 온하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랐다.부승민은 온하랑을 이불째로 들어 올려 소파에 옮기고는 헌 시트를 벗겨내고 새 시트를 꺼내 잘 펴두었다. 그리고는 온하랑을 다시 안아 올려 새 이부자리 위로 옮겨주었다.온하랑은 마침내 눈을 감고 편히 잠들 수 있었다.부승민은 화장실로 가 간단히 샤워를 마쳤다. 그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냉장고에 있는 샌드위치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웠다.방으로 돌아와 보니 온하랑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부승민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치고는 온하랑의 곁에 누워 평온하게 자는 어여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습관적으로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그 순간, 아기가 부승민의 손길에 대답이라도 하듯 배가 갑자기 불룩하게 튀어 올랐다.그 기척에 부승민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방금 그게 혹시 태동이라는 건가?부승민은 다시 손을 배 위에 올리고는 천천히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배가 다시 불룩하게 튀어 오르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부승민의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는 당장이라도 온하랑을 깨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종일 일하고 돌아와 피곤할 그녀를 굳이 깨우지는 않았다.한밤중에 갑자기 배가 고
그릇을 절반만 비워도 온하랑은 배가 불렀다. 그렇게 남은 것은 전부 부승민의 뱃속으로 들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부승민은 식기들을 모두 주방으로 가져가 냄비와 함께 싱크대에 넣어 깨끗이 설거지를 마친 뒤, 하나하나 정리해두었다.부승민이 주방에서 나오며 손을 닦고 있던 그때, 눈 부신 빛이 그의 시야를 다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당신 누구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눈치 있게 얼른 나가. 안 그러면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가정부는 한 손으로 부승민에게 손전등을 비추며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한밤중에 느껴지는 인기척에 가정부는 온하랑이 샌드위치를 데우러 나갔을 것이라 여겼다.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이상해 몸을 일으켜 살금살금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 처음 보는 남자가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언제 들어온 걸까?왜 전혀 몰랐던 걸까?“우선 그 손전등부터 내려놓고 얘기하시죠. 저는 하랑이... 남자친구입니다. 하랑이 보러 온 거예요.”그 말에 가정부는 천천히 손전등을 내려놓고 부승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조금은 믿는 눈치였지만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정말이에요? 지금 당장 하랑 씨한테 가서 확인해볼 겁니다.”그녀는 온하랑의 방문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하랑 씨? 하라 씨? 일어나 봐요!”“안 자니까 말씀하세요.”“지금 여기 어떤 남자가 하랑 씨 남자친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말 남자친구 맞아요?”“...네, 진짜예요. 저 만나러 와서 방금 저한테 밥도 해줬어요. 아주머니는 가서 쉬고 계세요.”온하랑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가정부는 부승민을 흘려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자리를 떴다.부승민은 온하랑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침대에 누운 온하랑은 부승민을 한 번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강도처럼 굴려다가 정말 강도 취급당할 뻔했네.”...필라시.벤 한 대가 외곽의 한 저택 입구에 멈춰 섰다.저택의 정문은 활짝 열려 있
그러던 중, 부선월의 얼굴에 피었던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더니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해보았지만 그중에 부승민은 없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부승민은?부선월은 곧장 건장한 사내에게 전화를 걸었다.사내들은 자리를 뜨자마자 유흥을 즐기러 가고 있었다. 부선월의 전화를 받은 사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십니까, 사모님?”“한 명이 없잖아.”“무슨 한 명이요?”“지금 한 명이 부족하다고. 빨리 가서 데려와!”그 말에 사내가 더욱 혼란스러워했다.“그 세 명이 전부였어요! 호텔 근처는 다 수색했는데 다른 수상한 한국인은 안 보였다고요!”“그럴 리가 없어!”사내가 반박했다.“왜 그럴 리가 없어요? 못 믿으시겠으면 지금 당장 호텔 가서 CCTV 찾아보시든가요! 왜요, 갑자기 돈이 아까우세요? 아무 변명 거리라도 찾아서 돈 돌려받으시게?”“이 사람 중에 내가 찾는 부승민이 없잖아!”“그럴 리가요? 가운데에 있는 그 사람이 부승민 아니에요? 우리랑 얘기도 나눴어요!”부선월은 가운데에 있는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정체는 연민우였다!젠장!부선월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정말 자기를 부승민이라고 소개했단 말이야?”“그렇다고요! 그럼 사모님 뜻은 지금, 저 사람이 가짜라는 소리인가요?”“... 그래!”사내가 말했다.“그럼 저희를 탓하시면 안 되죠. 저희한테 암호만 알려주시고 사진은 안 보여주셨잖아요!”잔뜩 화가 난 부선월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이번에도 부승민에게 제대로 당했다!그녀는 온하랑의 명성이 걸린 일이니 부승민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찾아오리라 생각했다.하지만 부선월은 그에게 연민우가 있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온하랑의 비밀이라면 연민우 역시 알고 있었다.부승민은 처음부터 올 생각이 없었다!진상을 밝히는 것과 온하랑을 지키는 것 중, 부승민은 후자를 택했다.역시 부선월 아들 아니랄까 봐, 온하랑에게 홀려도 단단히 홀려버렸다!몇 시간 후, 부선
히스테리를 부리는 부선월이 익숙해진 지 오래였던 부승민은 태연하게 말했다.“당연히 저한테 생명을 준 고마움을 잊을 리가 없죠.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게 제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부선원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게 무슨 말이니?”“이제 곧 알게 될 거예요.”그 말속에 담긴 뜻을 곰곰이 생각하던 부선월은 순간 아래층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부선월은 재빨리 문을 열고 난간에 기대어 아래층을 확인했고 그 순간 충격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거실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무장한 남자들이 가득했고 바닥에 누워있던 육광태도 어느새 멀쩡하게 서 있었다.고개를 들자 육광태는 위층에 있는 부선월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재빨리 옆에 있던 사람에게 명령했고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2층으로 돌진했는데 누가 봐도 타깃은 부선월이다.이를 본 부선월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지만 도망칠 구석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핸드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부승민, 나는 널 낳아준 엄마라고. 엄마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고작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을 꾸며? 넌 양심이라는 게 없구나. 내가 왜 너 같은 아들을 낳고 키웠을까. 애초에 태어났을 때 깊은 산속에 버려서 늑대들의 먹이로...”부선월은 마치 초원의 맹수처럼 사납게 울부짖으며 발광했다.부승민은 한숨을 내쉬었다.“할 말 다했어요? 이번 생에 나누는 마지막 통화일 수도 있으니까 맘껏 얘기해요. 앞으로는 그럴 기회조차 없을 텐데.”부선월은 흠칫하더니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포효했다.“부승민!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딱히 할 말 없는 것 같으니까 이만 끊을게요. 앞으로 남은 인생 편안하게 살게 해드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부선월은 할 말이 남은 듯 입을 벙끗했으나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건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뚝.어느새 건장한 사내들이 부선월을 포위했고 단숨에 두 팔을 잡아 제압했다.부선월은 몸부림치며 반항했지만 그들
주시온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그럼 빨리 가서 가져와야지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야.”“아... 지금 바로 갈게요.”매니저는 가방을 내려놓고 곧바로 대기실로 달려갔다.주시온은 허탈한 듯 김시연을 바라보며 한탄했다.“누나, 수아 알죠? 계속 저랑 같이 일하다가 이번에 출산 휴가를 썼거든요. 그래서 회사에서 매니저 한 명 새로 뽑았는데 꼼꼼하지 못하고 실수가 너무 많아요.”“수아? 이미 애 낳은 거 아니었어?”김시연은 머리를 정리해 주며 주시온과 수다를 떨었다.“낳은 지 아마 두달정도 됐을걸요? 다음 달부터 출근할 수 있다던데 하루라도 빨리 복귀했으면 좋겠어요.”김시연은 빗으로 마지막 정리까지 마쳤다.“이제 됐어. 수아 이제 복귀하면 용돈 챙겨줘야겠네?”“당연히 챙겨야죠. 수아만큼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이때 사원증을 목에 건 소품 담당자가 다가왔다.“시연 씨, 혹시 시간 좀 괜찮아요? 촬영에 쓰일 엄청 중요한 소품을 놓고 와서 그런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지금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요.”“뭔데요?”“유리로 만든 빨간색 옥패예요. 아마 소품실 좌측 서랍의 두 번째 케이스에 있을 거예요.”“알겠어요. 제가 다녀올게요.”“감사합니다.”말을 마친 담당자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그럼 나 먼저 갈게.”김시연이 이제 막 인사를 나누고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주시온이 입을 열었다.“안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다운이가 마침 대기실로 갔잖아요. 시간도 얼마 없는데 어차피 소품실이랑 가까우니까 제가 그냥 다운이한테 가져오라고 할게요.”다운이는 방금 대본 찾으러 간 주시온의 매니저다.“빨리 대본 봐야 하는 거 아니야?”“괜찮아요. 어차피 대사는 이미 외웠거든요.”“다행이네.”주시온은 핸드폰을 꺼내 다운에게 전화를 걸었고 옥패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오는 길에 가져오라고 했다.그 후 주시온은 상대 배우와 서로 대사를 주고받으며 진지하게 촬영에 돌입했고 말없이 집중해서 지켜보던 감독은 두 사람의
“뭐라고요?”주시온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언제요? 많이 다쳤어요? 지금은 괜찮아요?”촬영장에 괴한이 들어온 것도 이상한데 마침 소품실에 숨어있는 게 뭔가 꺼림칙했다.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주시온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몇 분 전 김시연에게 소품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던 그 관계자가 보이지 않았다.“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일단 가보자.”“시온아, 어디가? 촬영 벌써 끝났어?”화장실을 다녀온 김시연은 감독과 함께 자리를 옮기는 주시온의 뒷모습을 보고선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주시온은 사건의 경과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시온이가 다쳤어요. 감독님 말로는 소품실에 숨어있던 괴한의 습격을 받아 칼에 찔렸대요.”김시연은 아연실색했다.“갑자기? 많이 다쳤어? 그 사람은 잡은 거야?”“모르겠어요. 저희도 이제 막 그쪽으로 가려던 참이었거든요.”“얼른 가자. 나도 같이 갈게.”김시연은 곧바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시온이가 나 대신 소품 가지러 간 게 아니었다면 내가 찔렸을 수도 있겠네?”그 말을 들은 감독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김시연은 대충 설명해 줬다.“이렇게 우연일 수가 있나?”감독은 우연처럼 보이는 이 찝찝함이 너무 거슬렸다.“그렇죠? 저도 너무 이상한 것 같아요.”이때 주시온이 과감한 추측을 했다.“설마 그 괴한이 누나를 공격하려고 한 건 아니겠죠?”주시온의 말을 듣고 난 김시연도 입술을 깨문 채 곰곰이 생각했다.‘정말 나를 타킷으로 삼은 건가? 누구지? 이엘리아?’“소품 가져오라고 부탁했던 그 사람은 누구야?”김시연은 생각에 잠겼다.“사원증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요.”순간 표정이 싸늘하게 돌변한 감독은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경찰이 오면 얘기하자.”그 시각 소품실 입구. 스태프 몇 명이 괴한을 제압했고 도망치지 못하게 밧줄로 꽁꽁 묶었다.바닥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다운이 누워있었는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복부에는 칼자루가 꽂혀있었고 그 주위는 피로 붉게
괴한은 다른 곳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마 받았어?”괴한은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다.“죽이는 데 실패했는데 그 사람이 과연 돈을 줄까?”그 말을 들은 괴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김시연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곧이어 귀를 찌르는 경적소리가 들려왔는데 현실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현실적이로 느껴졌다.“구급차 도착한 거지?”두 눈이 번쩍 뜨인 감독은 급히 사람을 내보내 길을 안내했다.의료진들은 다운을 구급차에 실었고 김시연은 동행하겠다며 나섰다.따지고 보면 그녀를 대신해 칼을 맞았을 가능성이 컸기에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놓였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다운은 수술실로 옮겨졌고 김시연은 간호사의 안내를 받으며 수술비와 입원비를 지불했다.그 후 증빙서류를 들고 수술실로 돌아와 앞에서 대기했다.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주시온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주시온은 경찰이 도착했을 때 모든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고 말했고 경찰은 현장에서 바로 모든 소품 관계자를 불러 모았다고 한다.하지만 수많은 사람 중에 김시연에게 부탁했던 그 남자는 없었다.드라마나 영화인 경우 제작진들이 배우 간의 케미나 현장이 에피소드가 담긴 비하인드 영상을 찍기 위해 늘 몇 대의 카메라를 돌린다.정말 다행히도 카메라 중 한대에 남자의 모습이 찍혔다.현장에서 어슬렁거리는 걸 보니 몰래 들어온 사람이 틀림없었고 김시연과 주시온이 자리를 뜨자 곧바로 현장에서 사라졌다.경찰은 이미 수색에 돌입했다.주시온은 다운의 부상을 걱정하며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다시는 덤벙거린다고 혼내지 않을 거예요.”다운이 대본을 대기실에 놓고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 수술실에 누워있는 건 김시연이다.김시연의 체력이나 몸집으로 봤을 때 괴한의 손에 잡힌 순간 바로 죽음이다.한 시간 뒤 수술이 끝났고 의사가 밖으로 나왔다. 장기에 손상이 간 건 맞지만 제때 치료한 덕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고 당분간은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게 좋다며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