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들은 이엘리아가 국내에 없으니 체포할 방법이 없다며 난감해했다.그 시각 김시연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살기가 밀려와 당장이라도 이엘리아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죽이겠다는 목적 하나로 생각 없이 행동한 이엘리아는 계획이 실패한 건 둘째 치고 무고한 사람까지 이 일에 끌어들였다. 정황증거가 이렇게 명백한데 해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손을 쓸 수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바로 이때 연도진의 국제전화가 걸 려왔다.그의 번호를 본 김시연은 고민도 없이 수신 거부를 눌렀다.연도진의 목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전화를 받은 김시연은 싸늘하게 말했다.“왜?”“시연아, 너 괜찮아?”익숙한 그 목소리에 담긴 걱정과 불안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연도진은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다.시차를 계산해 보면 새벽인데 이렇게 빨리 소식을 접한 게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대충 둘러대려던 김시연은 순간 생각이 번뜩였다.“안 괜찮아. 병원인데 지금 죽을 것 같아.”“기다려. 내가 바로 갈게.”“아니. 난 네가 보고 싶지 않아. 그냥 오지 마. 평생 안 왔으면 좋겠어.”“시연아, 화난 건 알겠는데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은 내가 반드시 꼭 설명해 줄게.”김시연은 그 말을 듣고 입을 삐죽였다.“할 말 없으면 끊을게.”부모님이 목숨 걸고 이엘리아를 지켜주는 상황에 연도진이 할 수 있는 설명 따윈 없다.김시연은 이미 그에게 아무런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았다.“잠깐만.”그녀의 무심한 말투를 들은 연도진은 가슴이 미어졌다.김시연은 이제 그에 대한 믿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연도진은 노력한다면 반드시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왜?”“앞으로 촬영 현장에서 무슨 일 있으면 승기 찾아가. 도와줄 거야.”그 말에 김시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승기? 설마 그 어시스턴트를 말하는 건가?’“알겠어. 끊을게.”김시연은 연도진에게 말
‘얼른 연도진한테 전화하지 않고 뭘 망설이는 거야. 아까 그렇게 화냈는데 지금 얼마나 속상하겠어. 이엘리아는 이엘리아고 연도진은 연도진이잖아. 이엘리아의 잘못은 연도진의 탓으로 돌리는 건 너무하잖아. 연도진은 널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이엘리아는 연도진의 동생이야. 탓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지 생각해 봐. 이엘리아는 연도진이 필라에 있는 상황에서도 이런 일을 꾸몄는데 앞으로 무사할 것 같아? 차라리 이번 기회에 완전히 연도진랑 헤어지는 게 나아.’김시연은 핸드폰을 꺼내 통화 기록 맨 위에 있는 번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막 누르려던 직전에 멈췄다.다운이 비밀로 해달라고 얘기했으니 당분간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한편으로는 앞으로 연도진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필라시.이엘리아는 이미 퇴원했다.집에서 연도진을 본 이엘리아는 마치 귀신이라도 만난 듯 겁을 먹었고 어쩔 수 없이 서희수는 연도진에게 당분간 다른 곳에서 지내라고 했다.연도진은 흔쾌히 동의했다.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쥔 이엘리아는 한껏 기쁨을 만끽했고 부모님 역시 그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오직 연도진만이 갈 곳 없는 유기견처럼 이리저리 치이는 신세다.겉으로는 이엘리아의 편을 드는 것 같지만 서희수도 남몰래 마음속으로는 연도진을 걱정하고 있었다.정신과 의사의 제안에 따라 열심히 약을 복용하며 치료를 받았지만 며칠 동안 지켜보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이엘리아는 오히려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순간 그녀는 연도진의 말이 떠올랐다. 얼마 전 연도진은 권위 있고 명성이 높은 심리학자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엘리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서희수는 그분을 모시고 싶었고 연도진은 역시나 흔쾌히 동의했다.동생이 빨리 회복하길 바라며 최선을 다해 돕는 연도진의 모습을 보니 이엘리아가 이렇게 된 게 어쩌면 연도진과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심리치료사는 바로 다음 날 필라시로 날아와 윌슨 부부를 만났다.그는 허탈하다는 듯
웃음기조차 없는 헨리의 진지한 표정은 일의 심각성을 증명하는 듯했다.“그럴 리가 없습니다.”서희수는 그의 전문성을 의심하여 단호하게 부인했다.“농담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손목을 그어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은 뻔한 아이예요. 이게 어떻게 연기일 수 있죠?”그 말을 들은 헨리는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제 소견에는 그 어떤 과장이나 추측도 없습니다. 자살하고 싶어서 손목을 그은 환자를 제가 처음 봤을까요? 수많은 사람을 거쳤지만 이엘리아 씨 같은 반응을 보이신 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엘리아 씨는 저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세한 표정 변화, 눈빛, 행동까지 관찰해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입니다. 손목을 그은 건 맞지만 사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을 겁니다.”“의사 선생님이 직접 말씀해 준 거예요. 저도 며칠 동안 병간호를 했고요.”서희수는 여전히 확고했다.“그 의사분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죠. 이엘리아 씨가 만약 조금의 의학 지식을 알고 있다면 손목을 어느 정도 그을지조차 계획했을 겁니다. 단언컨대 지금은 연기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서희수는 기분이 언짢았다.“거짓말을 하는 의사 선생님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그쪽도 지금 거짓말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요?”표정이 돌변한 헨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사모님, 제 직업윤리와 존엄을 모욕하는 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제 소견을 믿지 않으실 거면서 왜 카이사르 씨에게 모셔 오라고 부탁하신 거죠?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잠시만요.”윌슨은 떠나려는 헨리를 다급하게 붙잡았다.“내 아내가 딸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실례를 범한 것 같군요.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고 이쪽에 앉아서 천천히 얘기해 봅시다. 이렇게 급하게 모셔왔다는 건 그만큼 헨리 씨를 높게 평가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헨리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카이사르 씨의 체면을 봐서라도 이번 한 번은
‘카이사르 때문에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어 보복하려고 이런 일을 꾸민 건가?’서희수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애썼다.그녀는 이엘리아가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이 일로 카이사르를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정말로 아픈 걸 수도 있잖아.”윌슨은 옆에서 끊임없이 타일렀다.“진실을 알고 싶은 거면 아주 간단해. 이엘리아 그 방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면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알게 될 거야.”“하지만 그건 사생활 침해가 아닐까요?”서희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우리에게 다른 방법은 없어. 만약 아픈 게 사실이라면 혹시라도 자해하게 된다면 제때 발견할 수 있으니 좋은 거잖아. 어차피 비밀번호는 당신만 알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노출될 걱정은 안 해도 돼.”서희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동의를 받아낸 후 윌슨은 앨런에게 부탁해 최신 초소형 카메라와 사용 설명서를 손에 넣게 되었다.동시에 서희수는 헨리를 찾아가 부탁했다. 그는 치료 명목으로 이엘리아를 다실로 불러냈고 그 틈을 타 윌슨과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방에 카메라를 설치했다.매번 식사 시간이 되면 도우미가 이엘리아의 음식을 방으로 배달해 줬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저녁 식사 30분 후에 서희수는 평소처럼 물 한 잔과 알약들을 들고 이엘리아를 찾아갔다.이를 먹은 이엘리아는 곧바로 하품하며 눈을 비볐다.“엄마, 졸려서 자고 싶어요.”“그래. 푹 쉬어. 내일 보자. 잘자.”이엘리아의 방에서 나온 서희수는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컴퓨터에는 모니터링 화면이 떠올랐는데 그 어디에도 이엘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옷방이나 화장실에 갔을 수도 있다며 서희수는 최대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내적 갈등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다.만약 옷방에서 잠옷을 갈아입고 나온다면 정말 졸리고 아파서 자는 걸 수도 있기에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화장실에서 약을 토해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건강하다는 걸 증명했으니 그
헨리가 다시 방으로 돌아간 후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서희수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어떡해야 하죠?”이엘리아에게 전부 다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얘기하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모든 잘못을 인정한 후에는 어떻게 이엘리아를 대해야 할지조차 몰랐다.생각하면 할수록 서희수는 머리가 점점 아파졌다.“내일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 오늘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일단 카이사르부터 불러오는 게 어때?”서희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다가 이엘리아의 어린 시절부터 모든 성장 과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이엘리아를 낳을 때 사고가 생겨 카이사르가 실종되었다.서희수는 그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고 초반에 아이를 찾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탓에 몸과 마음 전부 망가져 갔다.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속의 뜨거운 희망은 서서히 식어갔고 비슷한 아이를 봤다는 제보를 듣고서도 예전만큼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하여 서희수는 카이사르에 대한 모든 관심한 사랑을 이엘리아에게 줬고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설령 공부에 재능이 없다 한들 혼내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자라는 거로 만족한다며 한없이 관대했다.어쩌면 이런 관대함이 지금의 이엘리아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자녀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한 건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과 동일하다.동시에 서희수는 7, 8년 카이사르를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이미 실종된 지 20년이 되었기에 두 사람은 애초에 그 어떤 희망도 품지 않았다. 잔뜩 기대하고 갔다가 허무하게 돌아오는 경우가 다수였기에 열정은 점점 식어갔고 실망만 잔뜩 쌓였다.아이를 찾기 위해 투입됐던 인력이 점점 줄어들었지만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결국 소수의 인원이 남았지만 그들은 물러서는 게 아닌 의지력 하나만으로 끝까지 수색했다.그러다가 강남에서 카이사르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서희수의 마음은 그리 동요하지 않았다.나중에 제보자가 유전
카이사르가 어려서부터 필라에서 자랐다면 지금처럼 성숙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이날 밤, 서희수는 많은 감정을 느꼈다.옆에 있던 윌슨도 마찬가지였다.다음날 서희수는 연도진을 집으로 불러들이며 아예 들어와서 살라고 제안했다.그러자 연도진은 주뼛거리며 입을 열었다.“헨리 씨한테 들었어요. 이엘리아는 아마 저 때문에 이런 일을 꾸몄을 거예요. 제가 옮겨온다면 아마 더 싫어할 수도 있어요.”“이런 건 걔가 혼자 결정하는 일이 아니잖니.”지난 며칠 동안 남보다 못하게 카이사르를 대했던 서희수는 죄책감이 밀려왔다.“이엘리아는 아직 저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죠?”서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아직 몰라.”어쩌면 이 상황을 정리해 줄 악역이 필요하여 연도진을 부른 걸 수도 있다.서희수는 이엘리아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단호하게 내쳐낸 용기가 없었다. 마음 독하게 먹었다면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었을 텐데 질질 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연도진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는 못 잡는 거면 저한테 맡겨주세요.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일종의 정신병이거니 당분간 헨리 씨한테 치료를 받는다면 좋아질 거예요.”“그렇게 괴롭혔는데 넌 이엘리아가 밉지도 않니?”“그럴 리가요. 제 동생이잖아요. 동생이랑 싸워서 좋을 게 없잖아요.”“너 같은 오빠가 있으니 정말 든든하구나. 내가 대신 고마워. 어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애 뒤치다꺼리를 해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이엘리아가 치료받으러 가면 어머니도 한적한 곳에서 푹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서희수는 흐뭇한 눈빛으로 연도진을 바라봤다.“그래. 너는? 언제 시연이를 데려올 거니? 걱정 마,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고 단지 한번 보고 싶구나.”“시연이가 최근에 안 좋은 일을 겪어서... 촬영장에 숨어있던 괴한 때문에 동료 한 명이 다쳤는데 그분은 시연이를 대신해서 물건 가지러 갔다가 습격을 받
“왔어?”문을 두드린 사람이 앨리스인걸 본 이엘리아는 재빨리 다가가 마중하고선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았다.앨리스는 이엘리아를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요즘 몸 상태가 별로인가 보네? 살이 왜 이렇게 많이 빠졌어.”“이렇게 해야 엄마랑 아빠가 믿지.”이엘리아는 거울을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선 푹 꺼진 볼을 만졌다.“내가 요즘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알아? 배가 고파서 미칠 지경인데 참았다니까? 눈앞에 있는 음식을 전부 입에 넣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면서 입맛 없는 척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매일 밤 졸려서 죽을 것 같아도 절대 안 잤어. 그래야 다음 날 아침에 초췌해 보이거든. 연기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누가 봐도 환자처럼 보이잖아?”앨리스는 혀를 내둘렀다.“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그 시각 서재에서 화면을 지켜보던 서희수는 앨리스보다 훨씬 더 충격을 받았다.어려서부터 고생 한번 한적없는 이엘리아가 꾀병을 부리기 위해 이 정도로 치밀하게 행동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끈기가 비범한데 애석하게도 삐뚤어진 방식에 사용됐다.앨리스는 이엘리아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이엘리아는 뿌듯함을 드러냈다.“가혹한 건 맞는데 효과가 아주 직방이야. 이틀 전에 엄마가 오빠를 내쫓았거든. 내 생각에 얼마 안 있으면 이 집에 발 디딜 자리도 없을걸?”“그래? 내가 아까 왔을 때는 서로 얘기하고 있던데?”이엘리아는 표정이 돌변했다.“정말이야?”“응.”“물건 가지러 온 건가?”“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다정해 보였어.”이엘리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뭐라고? 이대로는 안 되겠어.”앨리스는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이 정도면 솔직히 대단한 거야. 여기서 더 오바하면 아무 소용이 없을걸?”“그게 무슨 뜻이야?”“어제 심리치료사가 왔다며? 오빠가 소개해 준 거야?”“응.”이엘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내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그냥 가던데?”“사람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노아는 삼촌인 애버트 위슨의 아들이자 이엘리아의 사촌이다.“오빠를 완벽하게 제외하는 방법은 뭐야?”“그건 쉽잖아. 아저씨는 가족의 이익을 해는 사람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 카이사르 오빠가 만약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 기밀을 누설하면 어떻게 될까? 설령 아저씨가 지켜준다 한들 다른 삼촌들과 이모들이 용서하지 않을걸?”“무슨 뜻인지 알겠어.”이엘리아는 두 눈이 반짝였다.“몸이 좋아지면 아빠 회사에 한번 가볼게.”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서희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이엘리아가 똑똑하지 않다는 건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멍청할 줄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다.이기적인 욕망에 눈이 먼 이엘리아는 다른 사람의 부추김만 듣고 회사의 기밀을 누설해 카이사르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울 계획을 꾸몄다.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두 사람 모두 윌슨의 자식이기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다면 윌슨은 모든 가족의 질타를 받게 될 수도 있다.‘어쩜 이렇게 멍청하고 어리석은 거지? 앨리스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거야?’그 시각 앨리스는 이엘리아에게 인사를 건네고 떠날 준비를 했다.위층에서 내려온 그녀는 넓은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카이사르를 발견했다.앨리스는 카이사르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김시연과 결혼했으니 이미 이용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나중에 노아가 윌슨 가문의 후계자가 된다면 사모님 자리에 앉는 건 시간문제다.김시연이 운 좋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아쉽긴 하지만 아직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시도해도 된다.이때 연도진이 입을 열었다.“앨리스.”앨리스는 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연도진도 웃으며 답했다.“이엘리아랑 무슨 얘기를 나눴어요?”그 질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앨리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시선을 피해 애써 초조함 마음을 가라앉혔다.“긴장하지 마요. 그냥 평소에 이엘리아랑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