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가 다시 방으로 돌아간 후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서희수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어떡해야 하죠?”이엘리아에게 전부 다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얘기하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모든 잘못을 인정한 후에는 어떻게 이엘리아를 대해야 할지조차 몰랐다.생각하면 할수록 서희수는 머리가 점점 아파졌다.“내일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 오늘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일단 카이사르부터 불러오는 게 어때?”서희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다가 이엘리아의 어린 시절부터 모든 성장 과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이엘리아를 낳을 때 사고가 생겨 카이사르가 실종되었다.서희수는 그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고 초반에 아이를 찾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탓에 몸과 마음 전부 망가져 갔다.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속의 뜨거운 희망은 서서히 식어갔고 비슷한 아이를 봤다는 제보를 듣고서도 예전만큼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하여 서희수는 카이사르에 대한 모든 관심한 사랑을 이엘리아에게 줬고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설령 공부에 재능이 없다 한들 혼내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자라는 거로 만족한다며 한없이 관대했다.어쩌면 이런 관대함이 지금의 이엘리아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자녀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한 건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과 동일하다.동시에 서희수는 7, 8년 카이사르를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이미 실종된 지 20년이 되었기에 두 사람은 애초에 그 어떤 희망도 품지 않았다. 잔뜩 기대하고 갔다가 허무하게 돌아오는 경우가 다수였기에 열정은 점점 식어갔고 실망만 잔뜩 쌓였다.아이를 찾기 위해 투입됐던 인력이 점점 줄어들었지만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결국 소수의 인원이 남았지만 그들은 물러서는 게 아닌 의지력 하나만으로 끝까지 수색했다.그러다가 강남에서 카이사르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서희수의 마음은 그리 동요하지 않았다.나중에 제보자가 유전
카이사르가 어려서부터 필라에서 자랐다면 지금처럼 성숙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이날 밤, 서희수는 많은 감정을 느꼈다.옆에 있던 윌슨도 마찬가지였다.다음날 서희수는 연도진을 집으로 불러들이며 아예 들어와서 살라고 제안했다.그러자 연도진은 주뼛거리며 입을 열었다.“헨리 씨한테 들었어요. 이엘리아는 아마 저 때문에 이런 일을 꾸몄을 거예요. 제가 옮겨온다면 아마 더 싫어할 수도 있어요.”“이런 건 걔가 혼자 결정하는 일이 아니잖니.”지난 며칠 동안 남보다 못하게 카이사르를 대했던 서희수는 죄책감이 밀려왔다.“이엘리아는 아직 저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죠?”서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아직 몰라.”어쩌면 이 상황을 정리해 줄 악역이 필요하여 연도진을 부른 걸 수도 있다.서희수는 이엘리아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단호하게 내쳐낸 용기가 없었다. 마음 독하게 먹었다면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었을 텐데 질질 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연도진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는 못 잡는 거면 저한테 맡겨주세요.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일종의 정신병이거니 당분간 헨리 씨한테 치료를 받는다면 좋아질 거예요.”“그렇게 괴롭혔는데 넌 이엘리아가 밉지도 않니?”“그럴 리가요. 제 동생이잖아요. 동생이랑 싸워서 좋을 게 없잖아요.”“너 같은 오빠가 있으니 정말 든든하구나. 내가 대신 고마워. 어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애 뒤치다꺼리를 해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이엘리아가 치료받으러 가면 어머니도 한적한 곳에서 푹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서희수는 흐뭇한 눈빛으로 연도진을 바라봤다.“그래. 너는? 언제 시연이를 데려올 거니? 걱정 마,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고 단지 한번 보고 싶구나.”“시연이가 최근에 안 좋은 일을 겪어서... 촬영장에 숨어있던 괴한 때문에 동료 한 명이 다쳤는데 그분은 시연이를 대신해서 물건 가지러 갔다가 습격을 받
“왔어?”문을 두드린 사람이 앨리스인걸 본 이엘리아는 재빨리 다가가 마중하고선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았다.앨리스는 이엘리아를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요즘 몸 상태가 별로인가 보네? 살이 왜 이렇게 많이 빠졌어.”“이렇게 해야 엄마랑 아빠가 믿지.”이엘리아는 거울을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선 푹 꺼진 볼을 만졌다.“내가 요즘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알아? 배가 고파서 미칠 지경인데 참았다니까? 눈앞에 있는 음식을 전부 입에 넣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면서 입맛 없는 척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매일 밤 졸려서 죽을 것 같아도 절대 안 잤어. 그래야 다음 날 아침에 초췌해 보이거든. 연기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누가 봐도 환자처럼 보이잖아?”앨리스는 혀를 내둘렀다.“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그 시각 서재에서 화면을 지켜보던 서희수는 앨리스보다 훨씬 더 충격을 받았다.어려서부터 고생 한번 한적없는 이엘리아가 꾀병을 부리기 위해 이 정도로 치밀하게 행동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끈기가 비범한데 애석하게도 삐뚤어진 방식에 사용됐다.앨리스는 이엘리아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이엘리아는 뿌듯함을 드러냈다.“가혹한 건 맞는데 효과가 아주 직방이야. 이틀 전에 엄마가 오빠를 내쫓았거든. 내 생각에 얼마 안 있으면 이 집에 발 디딜 자리도 없을걸?”“그래? 내가 아까 왔을 때는 서로 얘기하고 있던데?”이엘리아는 표정이 돌변했다.“정말이야?”“응.”“물건 가지러 온 건가?”“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다정해 보였어.”이엘리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뭐라고? 이대로는 안 되겠어.”앨리스는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이 정도면 솔직히 대단한 거야. 여기서 더 오바하면 아무 소용이 없을걸?”“그게 무슨 뜻이야?”“어제 심리치료사가 왔다며? 오빠가 소개해 준 거야?”“응.”이엘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내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그냥 가던데?”“사람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노아는 삼촌인 애버트 위슨의 아들이자 이엘리아의 사촌이다.“오빠를 완벽하게 제외하는 방법은 뭐야?”“그건 쉽잖아. 아저씨는 가족의 이익을 해는 사람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 카이사르 오빠가 만약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 기밀을 누설하면 어떻게 될까? 설령 아저씨가 지켜준다 한들 다른 삼촌들과 이모들이 용서하지 않을걸?”“무슨 뜻인지 알겠어.”이엘리아는 두 눈이 반짝였다.“몸이 좋아지면 아빠 회사에 한번 가볼게.”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서희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이엘리아가 똑똑하지 않다는 건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멍청할 줄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다.이기적인 욕망에 눈이 먼 이엘리아는 다른 사람의 부추김만 듣고 회사의 기밀을 누설해 카이사르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울 계획을 꾸몄다.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두 사람 모두 윌슨의 자식이기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다면 윌슨은 모든 가족의 질타를 받게 될 수도 있다.‘어쩜 이렇게 멍청하고 어리석은 거지? 앨리스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거야?’그 시각 앨리스는 이엘리아에게 인사를 건네고 떠날 준비를 했다.위층에서 내려온 그녀는 넓은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카이사르를 발견했다.앨리스는 카이사르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김시연과 결혼했으니 이미 이용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나중에 노아가 윌슨 가문의 후계자가 된다면 사모님 자리에 앉는 건 시간문제다.김시연이 운 좋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아쉽긴 하지만 아직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시도해도 된다.이때 연도진이 입을 열었다.“앨리스.”앨리스는 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연도진도 웃으며 답했다.“이엘리아랑 무슨 얘기를 나눴어요?”그 질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앨리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시선을 피해 애써 초조함 마음을 가라앉혔다.“긴장하지 마요. 그냥 평소에 이엘리아랑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
깜짝 놀란 김시연은 순식간에 정신을 번쩍 차렸고 하마터면 핸드폰을 던질뻔했다.화면을 가득 채운 선홍색의 피를 보니 손가락이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포토샵이겠지? 하긴 이게 진짜일 리가 없잖아.’표정을 잔뜩 찌푸린 채 사진 속에서 포토샵의 흔적을 찾으려 노렸지만 그 어떤 결점도 보이지 않았고 모든 게 현실적이었다.사진 속의 가늘고 섬세한 세 손가락은 손톱마저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어 누가 봐도 여자의 손가락이었다.‘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인가? 설마... 이엘리아의 손가락은 아니겠지?’잔인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 김시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떠보듯이 물었다.[설마... 이거 진짜야?][응.]연도진은 칼답했다.[영상 보여줄까?][아니. 됐어.]김시연은 믿기지 않았다.[이엘리아 손가락이야? 네가 잘랐어?]김시연은 연도진이 잔인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껏해 봤자 지난번처럼 유치장에 보내는 게 전부이기에 모범적인 시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엘리아는 이엘리아의 이름을 도용해서 나쁜 짓을 저지른 쓰레기의 손가락이야.]김시연은 더 이상 그런 거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너 정말 괜찮아? 그 사람이 신고하면 어쩌려고.][신고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거야.][아...]김시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여러 차례 편집하다가 결국 전부 삭제했다.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모티콘을 보내려던 찰나 연도진의 메시지가 떴다.[내가 무서워?]당황함 김시연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건 아닌데... 조금 놀랐어...]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태연하게 행동하는 연도진이 믿기지 않았다.김시연은 그제야 연도진이 더 이상 예전의 정직하고 순한 모범생이 아니라는 걸 인지했다. 그는 윌슨의 아들이자 윌슨 가문의 차기 후계자다.곧이어 연도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김시연은 마치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쥐고 있는 듯 안절부절못하다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침대에 누워있어?”“내 방에 카메
”아... 그래?”“너무 놀랄 필요 없어.”연도진은 김시연을 달래줄 최고의 방법이 떠올랐다.“하랑 씨한테 물어봐봐. 부 대표가 자른 손가락이 나보다 훨씬 많을걸?”김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게 무슨 잘한 일이라고 비교하고 있어.”“아니,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보여주는 거잖아.”“보고 싶지 않으니까 넣어줘.”김시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증거를 다 모아서 경찰에 제출하는 게 나은 것 같아. 법의 심판을 받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분부 받들겠습니다.”“하여튼 말만 잘해.”김시연은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왜 날 죽이려고 했던 거야? 설마 너 때문이야?”“우리가 정말 결혼한 줄 아나 봐. 이대로 포기하는 게 달갑지 않아서 너한테 손을 쓴 거지.”“뭐가 됐든 네가 밖에서 처신을 똑바로 안 하니까 그런 거잖아.”“그래서 이제는 결혼반지 꼭 끼고 다녀.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김시연은 텅 빈 손가락을 바라보며 공허함을 느꼈다.“당연히 그래야지.”“난 아직 처리할 일이 조금 남아서 며칠 있다가 갈게. 갖고 싶은 건 없어?”“없어... 연도진. 우리 계약 파기하자.”핸드폰 너머로 2초간의 침묵이 흘렀고 곧이어 사뭇 진지해진 연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뭐라고?”“계약 파기하자고.”“왜?”“처음 계약했던 목적이 뭔지 기억나? 우리 회사로 들어와서 권력을 잡는 거였잖아. 그때는 네가 윌슨 가문의 아들인 줄 몰랐어. 이제는 알았으니까 너도 네 할 일 해야지. 나한테 발목 잡힌 채로 계속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까... 계약 파기하자.”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았다.“계약 파기? 그럼 우리 결혼은? 대외에 이혼했다고 말할 거야?”“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연도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럼?”“뭐가? 그다음은 없어.”“그러니까 나랑 동거하면서 가짜 부부로 지내다가 관심 없을 때 언제든지 떠나겠다는 거네?”김시연은 죄책감에 입꼬리가 파르르 떨었다.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봐?”“그냥... 궁금해서. 자른 적 있어?”“나야 모르지.”“정말 몰라?”“응.”온하랑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도진 씨가 손가락 잘랐어?”김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손가락 세 개 잘랐어.”온하랑은 깜짝 놀랐다.“누굴?”“앨리스.”김시연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온하랑에게 설명해 줬다.“처음 사진 봤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아? 솔직히 포토샵인 줄 알았어. 그런데 보면 볼수록 너무 현실감이 넘치더라고.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병원에 누워있는 다운이를 생각하면 이렇게라도 벌받는 게 낫겠다 싶어.”“너무 힘들어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잊힐 거야.”“경험 있는 사람처럼 말하네?”“나도 학생 때 부승민이 누구랑 통화하는 걸 들었거든? 그때...”“뭐라고 했는데?”김시연은 잔뜩 흥분한 채로 물었다.“누구누구 다리를 부러뜨린다고 했어. 진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뭐.“육광태를 포함한 부승민의 부하 중에는 전과자가 여러 명 있다. 온하랑은 그들이 부승민의 일을 처리해 주며 사고를 쳤거나 부승민 대신 모든 죄를 뒤접어썼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그때는 무슨 생각이 들었어?”“알다시피 내가 그때 완전히 콩깍지가 씌었잖아. 그래서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부승민이 맞다고 생각했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만든 사람에게 100%의 잘못이 있다고 확신했지.”“아... 그랬구나...”“하지만 지금이라면 그런 잔인한 방법보다는 법의 심판을 받는 게 나을 거라고 설득했을 거야.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죄책감 가지지 마. 앨리스는 살인 미수에 대한 대가를 치른 거야. 도진 씨가 아니었다면 너 정말 큰일 났을걸?”“손가락을 셀 수도 없이 많이 잘라봤대.”온하랑은 할 말을 잃었다....쨍그랑.식기가 바닥에 떨어지며 국과 반찬이 사방에 흩어졌고 곧이어 귀를 찌르는듯한 비명이 들려왔다.“일 똑바로 못해? 이렇게 뜨거운 국물을 마시라고 주신 거야? 할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는 분노만 가득 차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앨리스는 곧장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앨리스가 잊고 있는 게 있었다. 그녀의 손은 물건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그 순간, 휴대폰이 “탁”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더니 그대로 국물 속으로 빠져 버렸다.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앨리스는 휴대폰을 꺼내 깨끗한 곳에 두기 위해 재빨리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두 엄지손가락을 잃은 그녀는 결국 두 손을 사용해 휴대폰을 집어 들어야 했다.아직 엄지손가락이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은 탓에 앨리스의 손가락 힘은 약하기 그지없었다. 국물 때문에 미끌미끌해진 휴대폰은 공중에서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다시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앨리스의 표정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분노의 감정으로 가득 들어찬 가슴이 답답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다시 주워들었다.하지만 공교롭게도 하필 국물로 얼룩져버린 바닥을 밟은 앨리스는 그대로 바닥에 미끌어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며 예기치 못하게 탁자 모서리에 손을 부딪친 그녀는 상처 부위에서 퍼져오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국물로 얼룩진 앨리스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허벅지에는 깨진 도자기 컵의 파편이 박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몸을 일으키기 위해 바닥을 짚은 앨리스의 손바닥에는 찐득한 밥풀까지 붙어버렸다.잠시 침묵을 유지한 앨리스는 결국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의 주전자를 바닥에 내던지고 과일이 담겨있는 접시도 엎어버렸다. 접시에서 쏟아진 과일들이 바닥에서 제멋대로 나뒹굴었다.병실은 또다시 소란스러워지더니 이것저것 깨지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앨리스는 병실 안에서 부술 수 있는 모든 물건을 다 집어 던지며 소란을 피웠다. 바닥은 순식간에 다시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지러워졌다.겨우 아문 상처에서 다시 피가 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