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3년 차, 온하랑은 끝내 부승민의 마음을 녹이지 못했다. 첫사랑이 귀국하는 순간, 그녀에게 주어진 건 달랑 이혼협의서 한 장뿐. “만약 내가 오빠의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이혼할 거야?”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발버둥 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매정한 대답만 들려왔다. “만약은 없어.” 결국, 절망에 빠진 나머지 이제 그를 놓아주기로 했다. ... 나중에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는 병상에 누워 이혼협의서에 사인했다. “부승민, 우린 이제 남남이야...” 줄곧 과감하고 거침없기로 소문 난 마왕 같은 남자가 병상에 엎드려 나지막한 목소리로 간절히 애원했다. “하랑아, 제발 이혼하지 말아줘...”
Lihat lebih banyak최동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였다.“네. 얼마 전에 경주 떴다고 알고 있습니다.”‘어디 보기만 했을까, 잠도 잤는데.’“가희가 연지 데리고 사과하러 갔는데 설윤이 거절하고 가희를 다치게 했대. 그리고 그 책임을 물을까 봐 도망갔다던데 그때는 가희 몸에 상처도 나 있어서 그 말을 믿었거든.”여기까지는 최동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그런데 오늘 설윤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알아보니까 설윤이 임신 사실을 가희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쫓은 거더라고.”최국환의 말을 듣다 보니 혼란스러워진 최동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설윤... 설윤 씨가 혼자 경주로 돌아왔다고요?”임가희한테 쫓겨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다움시에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놀라웠다.하지만 최국환은 설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동철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응... 회사 주위를 맴돌다가 직원한테 발견된 거야. 울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려주는데 얼마나 짠하던지. 애도 유산될뻔했대.”그 말에 최동철은 입꼬리를 올렸다.돌아오기 전에 최동철이 같이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거절하던 설윤이었다.다움시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인터넷쇼핑까지 하던 사람이 힘들게 살았다니.최동철도 떠나기 전 설윤에게 몇억을 주고 왔었는데 수중에 돈이 남으면 남았지 모자랄 리는 없었을 것이다.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인네에게 달라붙은 것도, 아이를 잃을뻔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두 우스워서 최동철은 냉소를 흘렸다.매일 밤 잠자리를 가질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아이가 갑자기 아쉬워진 건가.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낯부끄러웠던 최국환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가희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설윤이 다시 데려오겠대. 아이 낳을 때까지 잘 보살펴주겠다고 해서 나도 동의했고.”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재벌가에서 첩을 들이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어떤 본처는 첩을 데리고 쇼핑도 하면서 아이
최동철은 사색에 잠긴 듯 한동안 임가희를 바라보았다.빨갛게 부어오른 눈과 눈물이 말라붙은 볼 때문에 사람이 유독 초췌해 보였다.설윤을 쫓아낸 일이 들통난 건지 임가희는 최국환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넌 서재로 가 있어.”“... 제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하시게요?”최동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최국환의 눈치를 보던 임가희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옷자락을 꼭 쥐는 임가희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최국환을 번갈아 보던 최동철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서재에 가 있을게요.”최동철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온 거실을 가득 채웠다.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내며 집안의 장식들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지만 그럼에도 어두운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최동철을 올려보낸 최국환은 금세 표정을 굳히더니 임가희를 보며 말했다.“당신 입으로 뱉은 말 지켜. 당장 다시 데려와서 치료부터 음식까지 당신이 다 책임져. 가희야, 넌 똑똑하니까 알 거야. 설윤이랑 걔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임가희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설윤 씨 아이 낳을 때까지 내가 잘 보살필게요.”설윤이 도망가버린 뒤로 임가희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사실 매일 밤을 불안 속에서 지새우고 있었다.사람을 시켜 알아보던 설윤의 행적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됐을 때는 그 불안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찌르고 할퀴었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하필 이때 최국환이 모든 걸 알게 된 것이다.모든 거리의 CCTV, 간하림을 포함한 직원들의 증언 그리고 설윤의 임신 검사결과보고서까지 수많은 증거를 들이미니 임가희도 차마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최국환 앞에서는 설윤의 존재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본처 연기를 하며 임연지 더러 사과까지 하게 하고 선물도 전해줬었는데 뒤에서 이런 모진 짓을 했다는 게 들켜버리는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다.임신 사실을 뻔히 알
“알겠어요.” 부시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연도진은 부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병원 병실.연도진이 부시아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오빠.” 이엘리아는 연도진 뒤에 서 있는 부시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시아 왔구나. 엄마한테 와 봐.”부시아는 다가가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삼촌이 말한 대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아요?”“천천히 회복 중이야.”“그렇군요.” 부시아는 고개를 돌려 연도진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삼촌, 저 하루 종일 비행기만 타고 있었더니 너무 피곤해요. 이제 집에 가요.”이엘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시아 데리고 먼저 갈게.”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엘리아의 눈빛 속에는 어딘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경주. 밤이 깊어가며 화려한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거리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네온사인 불빛이 창문에 비쳐 그 빛과 그림자가 뒤엉켰다.최동철은 하루의 바쁜 일정을 마친 뒤 차 뒷좌석에 앉아 피곤에 지쳐 좌석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기사는 익숙하게 차를 시동 걸고 천천히 차들 사이로 움직였다.최동철은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비비고 무심코 창밖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익숙한 인물을 보았다그 인물은 바로 한 여인이었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풀어놓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최동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로 세운 뒤 그 방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그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까?’‘설윤 씨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그는 다시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엔 설윤의 얼굴과 민박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떠올랐다.다움시에서 돌아온 이후 두 사람은 더
필라시 국제공항.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방송에서는 항공편 정보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연도진은 도착 대기 구역에서 사람들 속을 살피며 부승민과 부시아를 찾고 있었다.그는 잘 맞춘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차분한 표정으로 가끔씩 시계를 확인하며 여유 있게 서 있었다.잠시 후, 부승민이 짐 수레를 밀고 통로를 지나 나오고 부시아는 짐 수레 위에 앉아 손에 봉제 인형을 안고 신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어린 소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두 개의 작은 땋은 머리를 한 채로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삼촌!” 부시아는 멀리서 연도진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짐 수레에서 뛰어내리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왔다.연도진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맞아 안았다.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시아야, 돌아온 거 환영해.”부시아는 연도진의 품에 안겨 목을 감싸며 맑고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정말 보고 싶었어요.”부승민은 부시아를 보고 잠시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네.’부시아는 혀를 내밀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연도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도 너 정말 보고 싶었어. 이번에 삼촌이랑 많이 놀자.”부승민은 짐 수레를 밀고 다가오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연도진 씨, 오랜만입니다.” 연도진은 일어난 후 부승민과 악수를 나누며 차분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시아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연도진은 눈길을 부시아에게 돌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시아야, 피곤하지 않아?” 부시아는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안 피곤해요. 비행기에서 만화도 보고 잠도 자고 왔어요.” 연도진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부승민에게 말했다. “이엘리아가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직 병원에 있어요. 시아를 데리고 이엘리아를 보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그
이엘리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무심한 듯 말했다. “엘리샤, 우리 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엘리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벌써 6년이 되었어요. 아가씨.” “6년이라...”이엘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시간 참 빠르네. 처음 왔을 때는 수줍음 많던 소녀였는데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졌구나.” 엘리샤는 감사의 마음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아가씨.” “고마워할 것까진 없어. 넌 요 며칠 동안 날 성심껏 돌봐줬잖아. 그 보답으로 네게 아파트 한 채를 선물하려고 해.” 엘리샤는 순간 귀를 의심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아치 거리 쪽에 있는 곳이야. 내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당장 처리하긴 어렵지만 퇴원하면 함께 소유권 이전을 하러 가자.” 이엘리아는 엘리샤의 놀란 표정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왔지만 그 속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너는 우리 집을 위해 정말 많은 걸 해줬어. 이건 당연히 네가 받을 자격이 있는 보상이야.” 엘리샤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목소리가 떨리며 말했다. “아가씨... 너무 과분한 선물이에요. 어떻게 받아야 할지...”이엘리아는 부드럽게 손을 흔들며 안심시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담 갖지 마. 내겐 그저 작은 선물일 뿐이지만 네겐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잖아. 난 늘 너한테 감사하고 있었어.” 엘리샤는 두 손을 꼭 모으며 감정이 북받친 듯 말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해서 아가씨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엘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똑똑한 아이야. 난 항상 널 높이 평가해왔어. 앞으로도 내 곁에서 충성심을 잃지 않는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엘리샤는 감동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평생 윌슨 가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앨리스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지더니 기계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적응 중이야. 원래 손처럼 자유롭진 않지만 최소한 간단한 일은 할 수 있어. 그나마 나은 편이지. 그보다 네 상황이 더 걱정돼.”이엘리아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이전보다는 한결 나아 보였다. 그녀는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담담히 말했다. “괜찮아. 의사도 잘 쉬면 금방 회복될 거라고 했어.”“다행이네.”앨리스는 이엘리아를 직시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케이사르가 돌아왔어. 만나 봤지?”연도진의 말이 나오자 이엘리아는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며 눈빛에는 깊은 냉기가 서렸다. “만났어.”“그래?” 앨리스는 그녀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며 물었다. “내가 듣기로 네가 그 사람에게 사과했다던데?”이엘리아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걸 믿었어? 내가 그럴 리 없잖아.”앨리스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케이사르가 김시연 때문에 널 그렇게 오래 감금했는데 화해라니. 말도 안 되지.”이엘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케이사르의 귀환은 오히려 우리 계획을 실행하기에 완벽한 기회야. 난 그저 그 사람을 방심시키고 경계를 풀게 하려고 했을 뿐이야.”“하지만 지금 넌 병원에 있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이엘리아는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직접 움직일 수 없지만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앨리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엘리아, 우리가 직접 나서긴 어려워. 모두가 노아와 케이사르가 경쟁 관계라는 걸 알고 있잖아. 만약 케이사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노아가 가장 먼저 의심받게 될 거야. 이 일을 끝낼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아무도 널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이엘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최소 한 달은 병원에 있어야 해. 퇴원하더라도 아빠가
서희수의 눈에 맺힌 눈물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엘리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서희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이엘리아, 엄마는 네가 좋은 아이라는 걸 항상 믿었어. 네가 진심으로 고칠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널 지지할 거야.” 이엘리아는 서희수의 품에 기대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감정들이 쏟아지듯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억눌린 죄책감과 후회,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했다. 그녀의 울음 속에서 가족 간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고 어딘가 따스한 공기가 흐르는 듯했다. 얼마 후 이엘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희수는 하인에게 이엘리아를 잘 돌보라고 당부하며 병실을 떠났다. 빈센트 윌슨과 연도진은 회사로 향했고 서희수는 집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주위는 침묵에 쌓였고 오직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의 진심 어린 대화에 여전히 얽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 감동적인 분위기를 벗어나고 이성의 끈이 조금씩 돌아오며 그들은 현실을 직시하게 되였다. 이엘리아의 사과는 진심처럼 들렸지만 점점 생각할수록 무언가 빠져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엘리아는 김시연을 해친 일, 그리고 연도진을 모함하려 했던 일을 고백했지만 그녀가 회사에 들어가려 했던 일이나 노아와 앨리스와 함께 연도진을 가문에서 내쫓아내려던 일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모든 계획에 대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서희수는 이엘리아가 눈물로 고백하던 그 모습과 구금된 상황에서 겁먹은 척했던 모습이 떠올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엘리아는 너무나도 뛰어난 연기를 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단지 속이기 위한 술수였는지.서희수는 알 수 없었다. ‘그 감동적이었던 사과,
연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로 다가갔다. “너 차 사고 날 때 내가 딱 돌아오던 참이었어. 걱정 마. 사고 낸 운전사는 이미 잡혔고 경찰이 엄중히 처벌할 거야. 푹 쉬고 빨리 나아.”“고마워요, 오빠.”이엘리아는 고개를 들어 연도진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어색하게 입술을 깨물었다.병실 안은 잠시 고요해졌다.이엘리아는 죽을 몇 숟가락 더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불편함을 느끼고 결국 말을 꺼냈다. “그만 먹을래요.”서희수는 그릇 안의 남은 음식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무 적게 먹은 것 같아. 더 안 먹을래?”이엘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의사 선생님이 지금은 많이 먹지 말고 조금씩 자주 먹으라고 하셨어요.”하인들이 그릇과 식사를 치우고 나가자 병실 안엔 가족 네 명만 남았다.이엘리아는 잠시 연도진을 쳐다보았고 얼굴에는 말을 꺼낼지 말지 망설이는 표정이 떠올랐다. 결국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서희수는 부드럽게 물었다. “오빠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네...”이엘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서희수는 연도진을 잠시 바라보았다.연도진은 일어나 침대 옆으로 다가가며 시선이 이엘리아와 서희수 사이를 한 번 스쳤다. “무슨 일이에요?” “이엘리아가 너한테 할 말이 있대.” 서희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멀어져야 할지 고민했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오빠... 미안해요.” 이엘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모든 힘을 다해 그 말을 꺼낸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 이불을 꽉 쥐고 고개를 숙인 채 연도진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연도진은 잠시 멈칫했다. 이엘리아가 갑자기 사과를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엘리아가 사과한다고?’ 연도진은 잠시 멈칫하다가 부드럽게 물었다.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야?” 이엘리아는
노아는 그 자리에 서서 연도진의 뒷모습이 복도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그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서서히 사라지고 대신 어두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손끝으로 책상 위를 무심코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빈센트 윌슨은 말로는 자신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지만 연도진이 돌아오자마자 중요한 프로젝트를 전부 맡긴 사실에 속으로 차가운 웃음이 나왔다. ‘결국 친아들이란 말이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 헛수고가 될 뿐이다. 노아는 주먹을 꽉 쥐며 눈빛 속에서 불만과 분노가 번뜩였다. 다행히도 그는 이미 삼촌의 진짜 속내를 파악했기에 더 이상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말이 맞아. 연도진을 내보내지 않으면 가문 기업을 장악할 기회는 영원히 내게 오지 않을 거야.’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노아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앨리스는 거실에서 꽃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비싼 기계 손가락을 장착한 상태로 적응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전, 앨리스와 노아는 결혼식을 올려 부부가 되었다. 그가 돌아오자 엘리스는 고개를 들며 물었다.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일이 잘 안 풀렸어?” 노아는 코트를 벗어 소파에 던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사르가 돌아왔어.” 앨리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꽃가지를 떨어뜨렸다. 끊어진 손가락이 아직도 아픈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잠시 원망의 감정이 스쳤고 곧 허리를 굽혀 꽃가지를 주워 들며 말했다. “그게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 억울해서 그래. 카이사르는 돌아오자마자 바로 ‘불사조 테크놀로지’ 프로젝트를 맡았어.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해왔는데 결국 그 친아들보다 못하다는 게 너무 억울해.” “그건 당연하지. 그쪽은 가족이고 너는 그들에겐 남일 뿐이야.” 앨리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엘리아가 그렇게 멍청한데도 회
“환자분은 천성적으로 자궁벽이 얇은 편이라 태아의 위치가 정상이 아닐 가능성이 커요. 평소에 식단 조절 잘하고 운동도 빼먹지 마시고 항상 조심하는 게 좋아요.”의사가 말하면서 처방전을 작성하고 건네주었다.“자, 약 가지고 가세요.”“네, 감사합니다. 선생님.”온하랑은 처방전을 건네받고 천천히 일어섰다.이때, 의사가 한 마디 더 보탰다.“진짜 조심해야 해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큰일 날지도 몰라요.”자궁벽이 얇으면 유산하기 쉬웠다. 게다가 한 번 유산하면 다시 임신하지 못하는 임산부들이 대다수였다.“선생님, 감사합니다. 꼭 유의할게요.”온하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결혼 3년 차, 그녀만큼 아이의 탄생을 고대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아이를 꼭 잘 지키겠다고 다짐했다.약을 받은 다음 온하랑은 병원에서 나와 차로 돌아갔다.기사가 시동을 걸고 백미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오후 3시 비행기로 돌아오시는데 아직 20분 남았어요. 바로 공항으로 가실까요?”“네.”20분 뒤에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온하랑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고, 마음속은 기대로 가득 찼다.부승민이 한 달 가까이 출장 중이라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그녀는 공항으로 가는 내내 가방에서 임신 확인서를 꺼내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는 손으로 아랫배를 살짝 감쌌다.이곳에 그녀와 부승민의 아이가 있으며 8개월만 기다리면 곧 태어난다.지금은 당장 이 기쁜 소식을 부승민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뿐이다.공항에 도착하자 기사는 눈에 잘 띄는 곳에 차를 세웠다.“사모님, 도련님께 연락 한번 해보실래요?”온하랑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부승민이 이미 비행기에서 내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이 꺼져있다는 안내음만 흘러나왔다.“비행기가 연착된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온하랑이 말했다.한참이 지나도 부승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하랑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통하지 않았다.“더 기다려봅시다.”비행기 연착은 워낙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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