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부승민은 추서윤을 본가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녀는 아무리 멀리 떨어졌다고 해도 매일 본가에서 학교를 다녔다. 물론 이유는 단지 가끔 찾아오는 부승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그날 비록 그녀의 바람대로 마주쳤지만, 추서윤이 여자 친구라며 가족에게 소개하는 부승민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심지어 정원에서 서로 포옹하고 키스하는 두 사람을 발견하지 않았는가?그녀는 앞으로 평생 멀리서만 부승민을 지켜봐야만 하나 싶었다.부승민과 결혼하는 날까지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물론 꿈이라면 언젠간 깨어나기 마련이다.추서윤이 바로 그녀의 단잠을 깨운 장본인이었다.온하랑은 심장이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꼈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랜만이에요. 서윤 씨는 더 예뻐졌네요.”이제 와서 ‘둘째 새언니’라는 호칭은 죽어도 부르지 못할 것이다.추서윤이 생긋 웃었다.“고마워, 너도 예뻐졌네. 참, L.X 친필 사인 음반은 마음에 들어? 네가 예전에 L.X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마침 해외 활동하다가 알게 된 친구거든. 이번에 귀국하기 전에 사인받으면서 특별히 네 이름까지 적어달라고 부탁했어.”온하랑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침착하고 여유 넘치기로 소문난 그녀인데 순간 혼란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마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음거리 신세로 전락한 광대처럼 느껴졌다.이내 멍하니 부승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애원하듯 바라보았다.부승민이 추서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자신이 챙긴 선물이라고, 그가 특별히 부탁한 것이라고 말해주길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그러나 부승민은 무심하게 쳐다보며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했다.“왜? 서윤이가 준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온하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한참 후,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고 무덤덤하게 말했다.“회포는 나중에 풀고 다들 오전부터 기다렸는데 얼른 앉아서 본론부터 얘기
이제 BX 그룹 직원뿐만 아니라 추서윤의 스텝까지 안색이 변했다. 그중 한 사람이 테이블 아래로 몰래 안수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하지만 안수빈은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매니저님의 뜻은 회장님께서 옛정 따위 안중에도 없이 눈앞의 이익만 추구한다는 건가요?”온하랑이 차분하게 되물었다.순간, 안수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그런 뜻은 아닙니다.”이때, 문이 열리면서 부승민과 추서윤이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부승민은 잘생기고 명문가 출신에 추서윤은 예쁘고 이미 인정받은 배우로서 둘의 만남은 뭇사람의 부러움을 사기 충분했다.프로젝트 매니저가 온하랑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대표님과 추서윤 씨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요? 이제 BX 그룹의 안주인이 곧 생기는 건가요?”온하랑은 따끔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내더니 일어나 두 사람을 자리에 안내하려고 했다.“대표님, 와주셔서 고마워요. 자, 여기 앉으세요. 서윤아, 너도 이리 와서 앉아.”안수빈이 온하랑을 앞질러 말하면서 부승민의 옆자리에 추서윤을 앉혔다.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어서서 둘을 맞이했다.“다들 앉으시죠.”부승민의 말의 끝나기 무섭게 모두 다시 착석했다.그런대로 화기애애한 시간이 이어졌고, 조금 전 어색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안수빈과 다른 사람들이 대화 주제를 찾아서 리드했고, 이따금 부승민과 추서윤에게 질문도 했다.부승민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가끔 허를 찌르는 대답을 했다.그에 비해 유난히 조용한 사람이 있었으나 부승민과 추서윤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이런저런 말이 오가다 안수빈은 추서윤의 앞접시를 보며 잔소리했다.“서윤아, 음식 조절하는 거 잊지 마.”연예인은 몸매 관리에 엄격했다.“알았어...”추서윤은 입을 삐죽 내밀며 삼겹살을 부승민의 앞접시에 놓았다.“승민아, 나 다 못 먹겠어. 네가 먹어줘.”앞에 마침 매운맛 육수와 기본 육수가 있는데, 이는 매운맛 육수에서 건져낸 삼겹살인지라
“아니.”부승민은 의자에 기대앉아 눈썹을 문질렀다. 그는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가자.”집에 돌아오니 도우미들이 이미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간단하게 저녁 밥을 먹은 뒤 부승민은 서재로 가서 또 일을 했다.온하랑은 거실에 앉아서 드라마를 보았다. 따뜻한 물 한 컵을 받고 약상자에서 약을 꺼내 함께 넘겼다.“무슨 약 먹은 거야? 어디 안 좋아?”뒤에서 갑자기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가슴이 철렁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요즘 소화가 잘 안돼서.”부승민은 걸어와서 물 한 컵을 부었다.“병원에는 가 봤어?”그는 오늘 점심 식사에서 따뜻한 음식만 먹겠다고 했던 온하랑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응, 가 봤어.”“그럼 됐어. 이제부터 건강 잘 챙겨.”그의 관심 어린 말에 온하랑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한구석이 조금 서글펐다.이른 아침, 온하랑은 핸드폰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그녀는 졸린 두 눈을 겨우 뜨고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온 전무님, 일이 터졌습니다. 지금 실시간 검색어 확인 부탁드립니다.”온하랑이 물었다.“무슨 일인데요?”한편으로 재빠르게 태블릿으로 각 포털 사이트의 뉴스피드를 확인했다.“부 대표님과 추서윤 씨의 사진이 찍혔습니다.”비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온하랑도 기사를 클릭했다.비서는 온하랑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온 전무님, 어떻게 처리할까요?”“먼저 추서윤 씨 소속사에 연락해서 대응하지 말라고 하세요. 내가 회사에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요.”실시간 검색에 두 사람이 함께 레스토랑에 출입하는 사진이 찍혔다. 각 사이트에서 모두 화제가 되었다.두 회사에서 레스토랑에 출입하는 사진을 동시에 올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을 홍보하면 된다.“알겠습니다.”비서가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온하랑이 말했다.“잠깐만요. 어제 다 같이 찍은 사진 핸
부승민은 BX 그룹의 대표로서 전에도 여러 번 경제 뉴스에 얼굴을 보였었다. 잘생긴 외모와 큰 키, 그리고 대단한 집안까지, 거기에 스캔들도 별로 없어서 그를 좋아하는 팬들까지 있었다. 팬들은 그의 태생이 소설 남자 주인공이라고 말했다.추서윤은 예쁘고 해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어 성공을 이루었다. 두 사람은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모든 면에서 잘 어울렸다. 언론플레이까지 더 해져 네티즌들은 두 사람을 축복했다. 두 커플을 응원하는 팬까지 생겼다. 그들은 부승민과 추서윤 커플의 별명을 ‘윤민커플’이라고 지었다.짧은 시간 내에 팬은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글을 잘 쓰는 팬들은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를 썼고, 미술을 전공한 팬들은 두 사람의 캐리커처를 그렸다. 전에 추서윤이 출연한 드라마의 장면과 부승민이 경제 뉴스에 나온 장면을 편집해 짧은 영상도 만들었다.온하랑은 팬카페에 들어가서 팬들이 닉네임을 바꾼 것도 보았다. 「오늘 부승민과 추서윤은 결혼했나요?」팬들은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달콤한 시간을 포착하려고 했다.그들은 추서윤이 출국한 뒤 부승민은 계속 솔로였고 어떠한 스캔들도 없이 추성윤이 귀국하기를 기다렸다고 생각했다.정말 완벽한 커플이다!그러나 온하랑에게 이런 말들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목이 꽉 메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분명 그녀가 부승민의 부인이다.부승민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녀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었다.온하랑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핸드폰을 끄고 대표 사무실로 향했다.그녀는 문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노크했다.“들어오세요.”안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문을 열고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서 진지하게 말했다.“부 대표님, 오늘 스캔들에 대한 홍보팀의 대처가 부적절했다고 생각됩니다.”부승민을 차가운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말해 봐, 어떤 게 부적절했다는 거지? 뭐가 부적절한데?”“이
침묵이 흘렀다.한참 지난 뒤 부승민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너무 조급했어. 미안해...”미안해...허.결혼 3년 만에 그가 남긴 건 미안하다는 세 글자뿐이었다.“내가 미안해. 원하는 거 있으면 내가 다 보상해 줄게. 하지만 이 일은 서윤이와는 상관없어. 서윤이는 내가 결혼한 것도 몰라. 그러니까 서윤이는 건드리지 마.”온하랑은 쓴웃음을 지었다.이게 바로 그녀의 남편 부승민이었다.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추서윤을 위해 그녀를 협박했다.온하랑은 급격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더 이상 부승민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마음대로 생각해요.”그녀는 성큼성큼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연약하고 처량한 뒷모습.부승민은 온하랑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부승민은 번호를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승민아, 스캔들 너도 봤지? 미안해. 내가 좀 더 조심했으면 찍히지 않았을 텐데.”핸드폰에서 추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부승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네 탓 아니야. 내가 이미 처리했어. 너한테는 피해 안 갈 거야.”“정말? 고마워 승민아. 진짜 너밖에 없어.”추서윤이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안수빈은 감탄했다.“진짜 이런 방법이 통하는구나. 근데 무서운 건 저러다 온하랑이 같이 죽자고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 어떻게 해?”추서윤은 꺼진 핸드폰 화면을 보며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걔는 그렇게 못해.”여자의 직감이 가장 예리하다.3년 전 추서윤은 은연중에 온하랑이 부승민을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온하랑은 잘 숨겼지만 추서윤은 눈치채고 있었다. 부승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온하랑은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요즘 그녀와 부승민이 함께 있을 때 그가 좀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종종 그녀 앞에서 집중을 못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두 사람을 이혼시켜야 했다.자기 사무실로 돌아온 온하랑은 이혼 합의서를 꺼내 앞에 놓고 한참 동안
본가에 도착하니 도우미가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할머님께서는 지금 주방에서 요리 중이세요. 먼저 앉아 계세요.”말을 마친 뒤 도우미는 두 사람에게 티와 과일을 가져다주었다. 부씨 가문의 안주인인 김정숙은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반평생을 재벌 집 사모님으로 축복받은 인생을 살았지만, 여전히 평범한 가정의 할머니처럼 아이들을 돌보는 걸 좋아하고 직접 음식을 하는 걸 즐겼다. 가끔은 뜨개질로 목도리를 떠주는 것도 좋아하셨다.부씨 가문의 후대들은 암암리에 서로 권력 다툼을 벌였지만 김정숙은 모두가 존경했다.온하랑은 신발을 벗으며 도우미에게 물었다.“할아버님은요?”도우미는 위층을 가리키며 말했다.“쉬고 계세요. 요즘 할아버님의 정신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세요.”온하랑과 부승민은 그 말을 듣고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부씨 가문의 사업은 할아버지의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나 할아버지의 손에서 사업이 발전하고 규모가 커졌다. 젊으셨을 때 일하시느라 몸을 혹사하셨는데 나이가 드시니 이제야 건강에 무리가 왔다. 간이식까지 받으시고 계속 거부반응을 억제하는 약을 드셔야 했다.“임 원장님은 뭐라고 하세요?”부승민이 물었다.임 원장은 현대병원의 병원장이자 할아버님의 개인 주치의이다.“임 원장님도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부승민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주방으로 가서 김정숙을 도와주려고 했다.“하랑아, 밖에서 쉬고 있어. 안 도와줘도 돼. 나 혼자서도 거뜬하다.”김정숙은 도우려는 온하랑에게 쉬라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할머님, 거실에 앉아서 할 일도 없는데요. 도와드리고 싶어요.”김정숙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왜 할 일이 없어? 앉아서 승민이 하고 얘기라도 나누고 있어.”아무 말도 없는 온하랑을 보고 김정숙은 또 말했다.“승민이 하고 싸웠니? 뉴스라면 나도 봤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승민이 단단히 혼낼 테니.”“할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와 승민 씨 사이의 일은 저희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온하랑은 재빨리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부승호에게 음식을 집어드리며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가지무침 드셔보세요.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반찬이잖아요.”김정숙이 말했다.“이것 좀 봐요. 하랑이가 다 기억하는 거. 내가 다 질투 나네.”“우리 하랑이 밖에 없다.”부승호는 젓가락을 들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하랑이는 누구처럼 양심도 없이 이 할아비를 화나게 하지도 않고. 에이, 어느 놈은 이 할아비가 화가 나서 죽길 바라는지.”양심 없는 부승민은 아무 말도 없었다.“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할아버지는 꼭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온하랑의 부모님은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했다. 어머니는 그녀를 원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부양권을 가져왔다. 이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다.그녀의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바빠서 그녀를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고향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몇 년 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잇따라 돌아가셨고 그녀는 다시 아버지의 곁으로 왔다. 16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그녀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지금까지 부승호와 김정숙이 그녀를 데려와 따뜻한 가족이 되어 주었다.가족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고통을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았다.그녀만큼 부승호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식사하는 동안 부승민을 빼고 남은 세 사람은 아주 화목했다.온하랑은 부승호와 김정숙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노력했다. 서로 대화를 나누며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그 모습이 진정한 한 가족으로 보였다.옆에 있던 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가 오시니 할아버님이 전보다 훨씬 활력이 넘치네요.”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부승호와 함께 바둑을 두었다.온하랑은 부승호가 직접 하나하나 가르쳐 준 것이다. 그녀는 빠르게 배웠고 이젠 부승호보다 더 잘 두었다. 부승호도 이젠 진지하게 그녀를 상대했다.“할아버지, 안 돼요. 이건 반칙이에요.”부승호는 온하랑의 불만에 수를 물렀다. 하지만 자세히
두 사람은 오후가 되어서야 본가를 떠났다.차 안에서 온하랑이 말했다.“할아버지 말씀 들었지. 우리 이혼하는 거 반대하시는 거 같은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부승민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먼저 할아버지 모르게 이혼하자.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릴 거야.”역시 그는 이미 선택했고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부승호가 그에게 심각하게 말했다고 해도 그는 부승호를 속이면서까지 거역하려고 했다.온하랑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쉴 때마다 칼에 베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언제 이혼 서류 접수할 거야?”부승민은 핸드폰 안의 스케줄을 확인했다.“요 며칠은 내가 바쁘고 다음 주 월요일에 하자.”“알았어.”온하랑의 깔끔한 대답에 부승민은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하면 온하랑은 아주 아름다웠다.까만 눈동자가 반짝이는 눈은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부드러우면서도 매력적이다. 그런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눈빛은 단호하면서도 밝게 빛나고 있어 무시할 수 없다.그녀는 전형적인 계란형 얼굴이다. 부드럽고 우아한 얼굴선에 오똑한 코와 작고 도톰한 입술이 조화로웠다.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와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귀여웠다.온하랑의 몸매는 유연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녀는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했다. 일주일에 며칠은 퇴근 후에 시간을 내서 요가를 하곤 했다.이점은 부승민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지난 3년 동안 부부의 관계는 종종 부승민의 욕망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눈을 감고 부승민은 황홀경을 떠올렸다.이런 외적인 조건을 제외하더라도 그녀는 능력도 대단했다. 대학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심지어 전국 영어 경시대회에서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유학 기회까지 얻었다. 그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모든 것을 잘 처리했다. MQ를 이 정도로 발전시킨 것도 부승민의 예상을 뛰어넘었다.이런 여자를 어느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