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부승민은 의자에 기대앉아 눈썹을 문질렀다. 그는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가자.”집에 돌아오니 도우미들이 이미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간단하게 저녁 밥을 먹은 뒤 부승민은 서재로 가서 또 일을 했다.온하랑은 거실에 앉아서 드라마를 보았다. 따뜻한 물 한 컵을 받고 약상자에서 약을 꺼내 함께 넘겼다.“무슨 약 먹은 거야? 어디 안 좋아?”뒤에서 갑자기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가슴이 철렁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요즘 소화가 잘 안돼서.”부승민은 걸어와서 물 한 컵을 부었다.“병원에는 가 봤어?”그는 오늘 점심 식사에서 따뜻한 음식만 먹겠다고 했던 온하랑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응, 가 봤어.”“그럼 됐어. 이제부터 건강 잘 챙겨.”그의 관심 어린 말에 온하랑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한구석이 조금 서글펐다.이른 아침, 온하랑은 핸드폰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그녀는 졸린 두 눈을 겨우 뜨고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온 전무님, 일이 터졌습니다. 지금 실시간 검색어 확인 부탁드립니다.”온하랑이 물었다.“무슨 일인데요?”한편으로 재빠르게 태블릿으로 각 포털 사이트의 뉴스피드를 확인했다.“부 대표님과 추서윤 씨의 사진이 찍혔습니다.”비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온하랑도 기사를 클릭했다.비서는 온하랑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온 전무님, 어떻게 처리할까요?”“먼저 추서윤 씨 소속사에 연락해서 대응하지 말라고 하세요. 내가 회사에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요.”실시간 검색에 두 사람이 함께 레스토랑에 출입하는 사진이 찍혔다. 각 사이트에서 모두 화제가 되었다.두 회사에서 레스토랑에 출입하는 사진을 동시에 올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을 홍보하면 된다.“알겠습니다.”비서가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온하랑이 말했다.“잠깐만요. 어제 다 같이 찍은 사진 핸
부승민은 BX 그룹의 대표로서 전에도 여러 번 경제 뉴스에 얼굴을 보였었다. 잘생긴 외모와 큰 키, 그리고 대단한 집안까지, 거기에 스캔들도 별로 없어서 그를 좋아하는 팬들까지 있었다. 팬들은 그의 태생이 소설 남자 주인공이라고 말했다.추서윤은 예쁘고 해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어 성공을 이루었다. 두 사람은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모든 면에서 잘 어울렸다. 언론플레이까지 더 해져 네티즌들은 두 사람을 축복했다. 두 커플을 응원하는 팬까지 생겼다. 그들은 부승민과 추서윤 커플의 별명을 ‘윤민커플’이라고 지었다.짧은 시간 내에 팬은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글을 잘 쓰는 팬들은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를 썼고, 미술을 전공한 팬들은 두 사람의 캐리커처를 그렸다. 전에 추서윤이 출연한 드라마의 장면과 부승민이 경제 뉴스에 나온 장면을 편집해 짧은 영상도 만들었다.온하랑은 팬카페에 들어가서 팬들이 닉네임을 바꾼 것도 보았다. 「오늘 부승민과 추서윤은 결혼했나요?」팬들은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달콤한 시간을 포착하려고 했다.그들은 추서윤이 출국한 뒤 부승민은 계속 솔로였고 어떠한 스캔들도 없이 추성윤이 귀국하기를 기다렸다고 생각했다.정말 완벽한 커플이다!그러나 온하랑에게 이런 말들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목이 꽉 메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분명 그녀가 부승민의 부인이다.부승민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녀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었다.온하랑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핸드폰을 끄고 대표 사무실로 향했다.그녀는 문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노크했다.“들어오세요.”안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문을 열고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서 진지하게 말했다.“부 대표님, 오늘 스캔들에 대한 홍보팀의 대처가 부적절했다고 생각됩니다.”부승민을 차가운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말해 봐, 어떤 게 부적절했다는 거지? 뭐가 부적절한데?”“이
침묵이 흘렀다.한참 지난 뒤 부승민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너무 조급했어. 미안해...”미안해...허.결혼 3년 만에 그가 남긴 건 미안하다는 세 글자뿐이었다.“내가 미안해. 원하는 거 있으면 내가 다 보상해 줄게. 하지만 이 일은 서윤이와는 상관없어. 서윤이는 내가 결혼한 것도 몰라. 그러니까 서윤이는 건드리지 마.”온하랑은 쓴웃음을 지었다.이게 바로 그녀의 남편 부승민이었다.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추서윤을 위해 그녀를 협박했다.온하랑은 급격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더 이상 부승민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마음대로 생각해요.”그녀는 성큼성큼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연약하고 처량한 뒷모습.부승민은 온하랑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부승민은 번호를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승민아, 스캔들 너도 봤지? 미안해. 내가 좀 더 조심했으면 찍히지 않았을 텐데.”핸드폰에서 추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부승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네 탓 아니야. 내가 이미 처리했어. 너한테는 피해 안 갈 거야.”“정말? 고마워 승민아. 진짜 너밖에 없어.”추서윤이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안수빈은 감탄했다.“진짜 이런 방법이 통하는구나. 근데 무서운 건 저러다 온하랑이 같이 죽자고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 어떻게 해?”추서윤은 꺼진 핸드폰 화면을 보며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걔는 그렇게 못해.”여자의 직감이 가장 예리하다.3년 전 추서윤은 은연중에 온하랑이 부승민을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온하랑은 잘 숨겼지만 추서윤은 눈치채고 있었다. 부승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온하랑은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요즘 그녀와 부승민이 함께 있을 때 그가 좀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종종 그녀 앞에서 집중을 못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두 사람을 이혼시켜야 했다.자기 사무실로 돌아온 온하랑은 이혼 합의서를 꺼내 앞에 놓고 한참 동안
본가에 도착하니 도우미가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할머님께서는 지금 주방에서 요리 중이세요. 먼저 앉아 계세요.”말을 마친 뒤 도우미는 두 사람에게 티와 과일을 가져다주었다. 부씨 가문의 안주인인 김정숙은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반평생을 재벌 집 사모님으로 축복받은 인생을 살았지만, 여전히 평범한 가정의 할머니처럼 아이들을 돌보는 걸 좋아하고 직접 음식을 하는 걸 즐겼다. 가끔은 뜨개질로 목도리를 떠주는 것도 좋아하셨다.부씨 가문의 후대들은 암암리에 서로 권력 다툼을 벌였지만 김정숙은 모두가 존경했다.온하랑은 신발을 벗으며 도우미에게 물었다.“할아버님은요?”도우미는 위층을 가리키며 말했다.“쉬고 계세요. 요즘 할아버님의 정신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세요.”온하랑과 부승민은 그 말을 듣고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부씨 가문의 사업은 할아버지의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나 할아버지의 손에서 사업이 발전하고 규모가 커졌다. 젊으셨을 때 일하시느라 몸을 혹사하셨는데 나이가 드시니 이제야 건강에 무리가 왔다. 간이식까지 받으시고 계속 거부반응을 억제하는 약을 드셔야 했다.“임 원장님은 뭐라고 하세요?”부승민이 물었다.임 원장은 현대병원의 병원장이자 할아버님의 개인 주치의이다.“임 원장님도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부승민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주방으로 가서 김정숙을 도와주려고 했다.“하랑아, 밖에서 쉬고 있어. 안 도와줘도 돼. 나 혼자서도 거뜬하다.”김정숙은 도우려는 온하랑에게 쉬라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할머님, 거실에 앉아서 할 일도 없는데요. 도와드리고 싶어요.”김정숙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왜 할 일이 없어? 앉아서 승민이 하고 얘기라도 나누고 있어.”아무 말도 없는 온하랑을 보고 김정숙은 또 말했다.“승민이 하고 싸웠니? 뉴스라면 나도 봤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승민이 단단히 혼낼 테니.”“할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와 승민 씨 사이의 일은 저희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온하랑은 재빨리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부승호에게 음식을 집어드리며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가지무침 드셔보세요.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반찬이잖아요.”김정숙이 말했다.“이것 좀 봐요. 하랑이가 다 기억하는 거. 내가 다 질투 나네.”“우리 하랑이 밖에 없다.”부승호는 젓가락을 들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하랑이는 누구처럼 양심도 없이 이 할아비를 화나게 하지도 않고. 에이, 어느 놈은 이 할아비가 화가 나서 죽길 바라는지.”양심 없는 부승민은 아무 말도 없었다.“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할아버지는 꼭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온하랑의 부모님은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했다. 어머니는 그녀를 원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부양권을 가져왔다. 이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다.그녀의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바빠서 그녀를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고향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몇 년 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잇따라 돌아가셨고 그녀는 다시 아버지의 곁으로 왔다. 16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그녀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지금까지 부승호와 김정숙이 그녀를 데려와 따뜻한 가족이 되어 주었다.가족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고통을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았다.그녀만큼 부승호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식사하는 동안 부승민을 빼고 남은 세 사람은 아주 화목했다.온하랑은 부승호와 김정숙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노력했다. 서로 대화를 나누며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그 모습이 진정한 한 가족으로 보였다.옆에 있던 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가 오시니 할아버님이 전보다 훨씬 활력이 넘치네요.”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부승호와 함께 바둑을 두었다.온하랑은 부승호가 직접 하나하나 가르쳐 준 것이다. 그녀는 빠르게 배웠고 이젠 부승호보다 더 잘 두었다. 부승호도 이젠 진지하게 그녀를 상대했다.“할아버지, 안 돼요. 이건 반칙이에요.”부승호는 온하랑의 불만에 수를 물렀다. 하지만 자세히
두 사람은 오후가 되어서야 본가를 떠났다.차 안에서 온하랑이 말했다.“할아버지 말씀 들었지. 우리 이혼하는 거 반대하시는 거 같은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부승민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먼저 할아버지 모르게 이혼하자.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릴 거야.”역시 그는 이미 선택했고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부승호가 그에게 심각하게 말했다고 해도 그는 부승호를 속이면서까지 거역하려고 했다.온하랑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쉴 때마다 칼에 베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언제 이혼 서류 접수할 거야?”부승민은 핸드폰 안의 스케줄을 확인했다.“요 며칠은 내가 바쁘고 다음 주 월요일에 하자.”“알았어.”온하랑의 깔끔한 대답에 부승민은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하면 온하랑은 아주 아름다웠다.까만 눈동자가 반짝이는 눈은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부드러우면서도 매력적이다. 그런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눈빛은 단호하면서도 밝게 빛나고 있어 무시할 수 없다.그녀는 전형적인 계란형 얼굴이다. 부드럽고 우아한 얼굴선에 오똑한 코와 작고 도톰한 입술이 조화로웠다.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와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귀여웠다.온하랑의 몸매는 유연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녀는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했다. 일주일에 며칠은 퇴근 후에 시간을 내서 요가를 하곤 했다.이점은 부승민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지난 3년 동안 부부의 관계는 종종 부승민의 욕망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눈을 감고 부승민은 황홀경을 떠올렸다.이런 외적인 조건을 제외하더라도 그녀는 능력도 대단했다. 대학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심지어 전국 영어 경시대회에서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유학 기회까지 얻었다. 그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모든 것을 잘 처리했다. MQ를 이 정도로 발전시킨 것도 부승민의 예상을 뛰어넘었다.이런 여자를 어느
본격적인 광고촬영이 시작되었다. 온하랑은 사전에 스튜디오에 도착해 스탭들에게 현장 세팅을 부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촬영 감독과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온하랑의 오래된 파트너로서 수년 동안 함께 일해왔다. 그녀가 한마디만 해도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효과가 무엇인지 이해했다.현장 세팅이 거의 준비가 끝나갔고 온하랑은 시계를 확인했다. 9시가 거의 되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30분이나 지났는데 추서윤과 그녀의 스텝들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비서가 한번 연락해 이미 재촉했다고 한다.촬영 감독인 주현은 카메라를 세팅하며 감탄했다.“추서윤도 갑질이 심하네요.”메이크업 아티스트인 김시연도 비웃으며 말했다.“어쩔 수 없죠. 외국에서 오셨으니 갑질을 해도 우리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모델을 교체할 수도 없고. 하랑 씨가 마음대로 교체할 수도 없는 거니까요.”이번에 모델이 부 대표님이 직접 뽑은 것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그전에는 온하랑이 MQ의 총괄 디렉터로서 모델을 교체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추서윤은 그녀가 마음대로 교체할 수가 없었다.추서윤이 갑질을 한다고 해도 그들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온하랑은 핸드폰을 꺼내 안수빈의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핸드폰에서 통화 연걸음이 들려왔다.그러나 잠시 뒤 뚝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김시연은 깜짝 놀라며 화를 참지 못했다.“이 사람들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부 대표님이 꽂아주니까 하랑 씨를 완전히 무시하네.”몇 분이 지나도 어떠한 전화나 문자도 없었다.온하랑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방이 또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번 더 전화해도 똑같았다. 온하랑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김시연에게 말했다.“늦어도 점심쯤에는 올 거예요. 먼저 돌아가요. 도착하면 내가 연락할게요.”온하랑은 오랫동안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안수빈이 무슨 생각인지는 미팅하던 그날 온하랑은 이미 파악했다.김시연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오랫동안 일하면서 이 정도로 갑질하는 연예
회의가 끝난 뒤 부승민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썹을 문질렀다.바로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보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승민아 지금 회사야? 나 지금 너한테 가도 돼?”부승민은 테이블 위에 놓은 캘린더를 확인했다.“오늘 촬영 이렇게 빨리 끝났어?”추서윤은 머뭇거리며 말했다.“오늘... 오늘 촬영 못했어.”“촬영을 못했다고? 왜?”부승민이 물었다.그는 아까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온하랑의 사무실 문이 잠겨있는 것을 보고 외근을 나간줄 알았다.매번 광고 촬영에 온하랑은 모두 현장에 가서 지켜보았다.아마 오늘도 그녀는 이미 스튜디오로 갔을 텐데 왜 촬영하지 않았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우리가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하랑이가 갑자기 급한 일이 있어서 촬영 못 한다고 하더라고. 그러고는 바로 떠나버렸어. 우리도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몰라.”“그럼 긴급한 상황이 있나 보네. 촬영 없으면 회사로 와.”3년 동안 온하랑의 일 처리를 부승민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정말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녀가 이렇게 촬영을 접는 일은 없었다.부승민의 말투에 온하랑에 대한 책망이 전혀 없는 것을 듣고 추서윤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특수한 상황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어. 맞다, 승민아. 나 한 가지 부탁해도 돼?”“뭔데?”“이번 촬영에서 내 개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데려와도 괜찮을까? 몇 년 동안 해외에 있다가 돌아와서 그런지 물이 잘 안 맞아서 피부상태가 너무 안 좋아. 국내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내 상황을 잘 모를 거 같아서. 메이크업 잘 안되면 카메라에도 당연히 예쁘게 나올 수 없으니까. 내 전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내 피부 상태도 제일 잘 아니까 실력을 잘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부승민은 큰일인 줄 알았다.“뭘 이런 작은 일까지 나한테 보고해?”추서윤이 말했다.“이게 어떻게 작은 일이야?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제대로 소통해야지. 서로 존중하고
최동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였다.“네. 얼마 전에 경주 떴다고 알고 있습니다.”‘어디 보기만 했을까, 잠도 잤는데.’“가희가 연지 데리고 사과하러 갔는데 설윤이 거절하고 가희를 다치게 했대. 그리고 그 책임을 물을까 봐 도망갔다던데 그때는 가희 몸에 상처도 나 있어서 그 말을 믿었거든.”여기까지는 최동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그런데 오늘 설윤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알아보니까 설윤이 임신 사실을 가희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쫓은 거더라고.”최국환의 말을 듣다 보니 혼란스러워진 최동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설윤... 설윤 씨가 혼자 경주로 돌아왔다고요?”임가희한테 쫓겨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다움시에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놀라웠다.하지만 최국환은 설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동철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응... 회사 주위를 맴돌다가 직원한테 발견된 거야. 울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려주는데 얼마나 짠하던지. 애도 유산될뻔했대.”그 말에 최동철은 입꼬리를 올렸다.돌아오기 전에 최동철이 같이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거절하던 설윤이었다.다움시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인터넷쇼핑까지 하던 사람이 힘들게 살았다니.최동철도 떠나기 전 설윤에게 몇억을 주고 왔었는데 수중에 돈이 남으면 남았지 모자랄 리는 없었을 것이다.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인네에게 달라붙은 것도, 아이를 잃을뻔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두 우스워서 최동철은 냉소를 흘렸다.매일 밤 잠자리를 가질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아이가 갑자기 아쉬워진 건가.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낯부끄러웠던 최국환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가희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설윤이 다시 데려오겠대. 아이 낳을 때까지 잘 보살펴주겠다고 해서 나도 동의했고.”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재벌가에서 첩을 들이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어떤 본처는 첩을 데리고 쇼핑도 하면서 아이
최동철은 사색에 잠긴 듯 한동안 임가희를 바라보았다.빨갛게 부어오른 눈과 눈물이 말라붙은 볼 때문에 사람이 유독 초췌해 보였다.설윤을 쫓아낸 일이 들통난 건지 임가희는 최국환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넌 서재로 가 있어.”“... 제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하시게요?”최동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최국환의 눈치를 보던 임가희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옷자락을 꼭 쥐는 임가희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최국환을 번갈아 보던 최동철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서재에 가 있을게요.”최동철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온 거실을 가득 채웠다.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내며 집안의 장식들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지만 그럼에도 어두운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최동철을 올려보낸 최국환은 금세 표정을 굳히더니 임가희를 보며 말했다.“당신 입으로 뱉은 말 지켜. 당장 다시 데려와서 치료부터 음식까지 당신이 다 책임져. 가희야, 넌 똑똑하니까 알 거야. 설윤이랑 걔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임가희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설윤 씨 아이 낳을 때까지 내가 잘 보살필게요.”설윤이 도망가버린 뒤로 임가희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사실 매일 밤을 불안 속에서 지새우고 있었다.사람을 시켜 알아보던 설윤의 행적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됐을 때는 그 불안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찌르고 할퀴었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하필 이때 최국환이 모든 걸 알게 된 것이다.모든 거리의 CCTV, 간하림을 포함한 직원들의 증언 그리고 설윤의 임신 검사결과보고서까지 수많은 증거를 들이미니 임가희도 차마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최국환 앞에서는 설윤의 존재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본처 연기를 하며 임연지 더러 사과까지 하게 하고 선물도 전해줬었는데 뒤에서 이런 모진 짓을 했다는 게 들켜버리는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다.임신 사실을 뻔히 알
“알겠어요.” 부시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연도진은 부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병원 병실.연도진이 부시아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오빠.” 이엘리아는 연도진 뒤에 서 있는 부시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시아 왔구나. 엄마한테 와 봐.”부시아는 다가가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삼촌이 말한 대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아요?”“천천히 회복 중이야.”“그렇군요.” 부시아는 고개를 돌려 연도진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삼촌, 저 하루 종일 비행기만 타고 있었더니 너무 피곤해요. 이제 집에 가요.”이엘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시아 데리고 먼저 갈게.”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엘리아의 눈빛 속에는 어딘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경주. 밤이 깊어가며 화려한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거리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네온사인 불빛이 창문에 비쳐 그 빛과 그림자가 뒤엉켰다.최동철은 하루의 바쁜 일정을 마친 뒤 차 뒷좌석에 앉아 피곤에 지쳐 좌석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기사는 익숙하게 차를 시동 걸고 천천히 차들 사이로 움직였다.최동철은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비비고 무심코 창밖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익숙한 인물을 보았다그 인물은 바로 한 여인이었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풀어놓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최동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로 세운 뒤 그 방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그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까?’‘설윤 씨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그는 다시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엔 설윤의 얼굴과 민박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떠올랐다.다움시에서 돌아온 이후 두 사람은 더
필라시 국제공항.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방송에서는 항공편 정보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연도진은 도착 대기 구역에서 사람들 속을 살피며 부승민과 부시아를 찾고 있었다.그는 잘 맞춘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차분한 표정으로 가끔씩 시계를 확인하며 여유 있게 서 있었다.잠시 후, 부승민이 짐 수레를 밀고 통로를 지나 나오고 부시아는 짐 수레 위에 앉아 손에 봉제 인형을 안고 신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어린 소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두 개의 작은 땋은 머리를 한 채로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삼촌!” 부시아는 멀리서 연도진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짐 수레에서 뛰어내리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왔다.연도진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맞아 안았다.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시아야, 돌아온 거 환영해.”부시아는 연도진의 품에 안겨 목을 감싸며 맑고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정말 보고 싶었어요.”부승민은 부시아를 보고 잠시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네.’부시아는 혀를 내밀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연도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도 너 정말 보고 싶었어. 이번에 삼촌이랑 많이 놀자.”부승민은 짐 수레를 밀고 다가오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연도진 씨, 오랜만입니다.” 연도진은 일어난 후 부승민과 악수를 나누며 차분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시아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연도진은 눈길을 부시아에게 돌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시아야, 피곤하지 않아?” 부시아는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안 피곤해요. 비행기에서 만화도 보고 잠도 자고 왔어요.” 연도진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부승민에게 말했다. “이엘리아가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직 병원에 있어요. 시아를 데리고 이엘리아를 보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그
이엘리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무심한 듯 말했다. “엘리샤, 우리 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엘리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벌써 6년이 되었어요. 아가씨.” “6년이라...”이엘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시간 참 빠르네. 처음 왔을 때는 수줍음 많던 소녀였는데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졌구나.” 엘리샤는 감사의 마음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아가씨.” “고마워할 것까진 없어. 넌 요 며칠 동안 날 성심껏 돌봐줬잖아. 그 보답으로 네게 아파트 한 채를 선물하려고 해.” 엘리샤는 순간 귀를 의심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아치 거리 쪽에 있는 곳이야. 내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당장 처리하긴 어렵지만 퇴원하면 함께 소유권 이전을 하러 가자.” 이엘리아는 엘리샤의 놀란 표정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왔지만 그 속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너는 우리 집을 위해 정말 많은 걸 해줬어. 이건 당연히 네가 받을 자격이 있는 보상이야.” 엘리샤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목소리가 떨리며 말했다. “아가씨... 너무 과분한 선물이에요. 어떻게 받아야 할지...”이엘리아는 부드럽게 손을 흔들며 안심시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담 갖지 마. 내겐 그저 작은 선물일 뿐이지만 네겐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잖아. 난 늘 너한테 감사하고 있었어.” 엘리샤는 두 손을 꼭 모으며 감정이 북받친 듯 말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해서 아가씨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엘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똑똑한 아이야. 난 항상 널 높이 평가해왔어. 앞으로도 내 곁에서 충성심을 잃지 않는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엘리샤는 감동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평생 윌슨 가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앨리스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지더니 기계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적응 중이야. 원래 손처럼 자유롭진 않지만 최소한 간단한 일은 할 수 있어. 그나마 나은 편이지. 그보다 네 상황이 더 걱정돼.”이엘리아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이전보다는 한결 나아 보였다. 그녀는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담담히 말했다. “괜찮아. 의사도 잘 쉬면 금방 회복될 거라고 했어.”“다행이네.”앨리스는 이엘리아를 직시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케이사르가 돌아왔어. 만나 봤지?”연도진의 말이 나오자 이엘리아는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며 눈빛에는 깊은 냉기가 서렸다. “만났어.”“그래?” 앨리스는 그녀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며 물었다. “내가 듣기로 네가 그 사람에게 사과했다던데?”이엘리아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걸 믿었어? 내가 그럴 리 없잖아.”앨리스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케이사르가 김시연 때문에 널 그렇게 오래 감금했는데 화해라니. 말도 안 되지.”이엘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케이사르의 귀환은 오히려 우리 계획을 실행하기에 완벽한 기회야. 난 그저 그 사람을 방심시키고 경계를 풀게 하려고 했을 뿐이야.”“하지만 지금 넌 병원에 있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이엘리아는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직접 움직일 수 없지만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앨리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엘리아, 우리가 직접 나서긴 어려워. 모두가 노아와 케이사르가 경쟁 관계라는 걸 알고 있잖아. 만약 케이사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노아가 가장 먼저 의심받게 될 거야. 이 일을 끝낼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아무도 널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이엘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최소 한 달은 병원에 있어야 해. 퇴원하더라도 아빠가
서희수의 눈에 맺힌 눈물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엘리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서희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이엘리아, 엄마는 네가 좋은 아이라는 걸 항상 믿었어. 네가 진심으로 고칠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널 지지할 거야.” 이엘리아는 서희수의 품에 기대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감정들이 쏟아지듯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억눌린 죄책감과 후회,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했다. 그녀의 울음 속에서 가족 간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고 어딘가 따스한 공기가 흐르는 듯했다. 얼마 후 이엘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희수는 하인에게 이엘리아를 잘 돌보라고 당부하며 병실을 떠났다. 빈센트 윌슨과 연도진은 회사로 향했고 서희수는 집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주위는 침묵에 쌓였고 오직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의 진심 어린 대화에 여전히 얽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 감동적인 분위기를 벗어나고 이성의 끈이 조금씩 돌아오며 그들은 현실을 직시하게 되였다. 이엘리아의 사과는 진심처럼 들렸지만 점점 생각할수록 무언가 빠져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엘리아는 김시연을 해친 일, 그리고 연도진을 모함하려 했던 일을 고백했지만 그녀가 회사에 들어가려 했던 일이나 노아와 앨리스와 함께 연도진을 가문에서 내쫓아내려던 일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모든 계획에 대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서희수는 이엘리아가 눈물로 고백하던 그 모습과 구금된 상황에서 겁먹은 척했던 모습이 떠올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엘리아는 너무나도 뛰어난 연기를 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단지 속이기 위한 술수였는지.서희수는 알 수 없었다. ‘그 감동적이었던 사과,
연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로 다가갔다. “너 차 사고 날 때 내가 딱 돌아오던 참이었어. 걱정 마. 사고 낸 운전사는 이미 잡혔고 경찰이 엄중히 처벌할 거야. 푹 쉬고 빨리 나아.”“고마워요, 오빠.”이엘리아는 고개를 들어 연도진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어색하게 입술을 깨물었다.병실 안은 잠시 고요해졌다.이엘리아는 죽을 몇 숟가락 더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불편함을 느끼고 결국 말을 꺼냈다. “그만 먹을래요.”서희수는 그릇 안의 남은 음식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무 적게 먹은 것 같아. 더 안 먹을래?”이엘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의사 선생님이 지금은 많이 먹지 말고 조금씩 자주 먹으라고 하셨어요.”하인들이 그릇과 식사를 치우고 나가자 병실 안엔 가족 네 명만 남았다.이엘리아는 잠시 연도진을 쳐다보았고 얼굴에는 말을 꺼낼지 말지 망설이는 표정이 떠올랐다. 결국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서희수는 부드럽게 물었다. “오빠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네...”이엘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서희수는 연도진을 잠시 바라보았다.연도진은 일어나 침대 옆으로 다가가며 시선이 이엘리아와 서희수 사이를 한 번 스쳤다. “무슨 일이에요?” “이엘리아가 너한테 할 말이 있대.” 서희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멀어져야 할지 고민했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오빠... 미안해요.” 이엘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모든 힘을 다해 그 말을 꺼낸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 이불을 꽉 쥐고 고개를 숙인 채 연도진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연도진은 잠시 멈칫했다. 이엘리아가 갑자기 사과를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엘리아가 사과한다고?’ 연도진은 잠시 멈칫하다가 부드럽게 물었다.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야?” 이엘리아는
노아는 그 자리에 서서 연도진의 뒷모습이 복도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그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서서히 사라지고 대신 어두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손끝으로 책상 위를 무심코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빈센트 윌슨은 말로는 자신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지만 연도진이 돌아오자마자 중요한 프로젝트를 전부 맡긴 사실에 속으로 차가운 웃음이 나왔다. ‘결국 친아들이란 말이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 헛수고가 될 뿐이다. 노아는 주먹을 꽉 쥐며 눈빛 속에서 불만과 분노가 번뜩였다. 다행히도 그는 이미 삼촌의 진짜 속내를 파악했기에 더 이상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말이 맞아. 연도진을 내보내지 않으면 가문 기업을 장악할 기회는 영원히 내게 오지 않을 거야.’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노아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앨리스는 거실에서 꽃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비싼 기계 손가락을 장착한 상태로 적응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전, 앨리스와 노아는 결혼식을 올려 부부가 되었다. 그가 돌아오자 엘리스는 고개를 들며 물었다.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일이 잘 안 풀렸어?” 노아는 코트를 벗어 소파에 던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사르가 돌아왔어.” 앨리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꽃가지를 떨어뜨렸다. 끊어진 손가락이 아직도 아픈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잠시 원망의 감정이 스쳤고 곧 허리를 굽혀 꽃가지를 주워 들며 말했다. “그게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 억울해서 그래. 카이사르는 돌아오자마자 바로 ‘불사조 테크놀로지’ 프로젝트를 맡았어.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해왔는데 결국 그 친아들보다 못하다는 게 너무 억울해.” “그건 당연하지. 그쪽은 가족이고 너는 그들에겐 남일 뿐이야.” 앨리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엘리아가 그렇게 멍청한데도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