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재빨리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부승호에게 음식을 집어드리며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가지무침 드셔보세요.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반찬이잖아요.”김정숙이 말했다.“이것 좀 봐요. 하랑이가 다 기억하는 거. 내가 다 질투 나네.”“우리 하랑이 밖에 없다.”부승호는 젓가락을 들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하랑이는 누구처럼 양심도 없이 이 할아비를 화나게 하지도 않고. 에이, 어느 놈은 이 할아비가 화가 나서 죽길 바라는지.”양심 없는 부승민은 아무 말도 없었다.“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할아버지는 꼭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온하랑의 부모님은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했다. 어머니는 그녀를 원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부양권을 가져왔다. 이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다.그녀의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바빠서 그녀를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고향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몇 년 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잇따라 돌아가셨고 그녀는 다시 아버지의 곁으로 왔다. 16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그녀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지금까지 부승호와 김정숙이 그녀를 데려와 따뜻한 가족이 되어 주었다.가족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고통을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았다.그녀만큼 부승호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식사하는 동안 부승민을 빼고 남은 세 사람은 아주 화목했다.온하랑은 부승호와 김정숙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노력했다. 서로 대화를 나누며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그 모습이 진정한 한 가족으로 보였다.옆에 있던 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가 오시니 할아버님이 전보다 훨씬 활력이 넘치네요.”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부승호와 함께 바둑을 두었다.온하랑은 부승호가 직접 하나하나 가르쳐 준 것이다. 그녀는 빠르게 배웠고 이젠 부승호보다 더 잘 두었다. 부승호도 이젠 진지하게 그녀를 상대했다.“할아버지, 안 돼요. 이건 반칙이에요.”부승호는 온하랑의 불만에 수를 물렀다. 하지만 자세히
두 사람은 오후가 되어서야 본가를 떠났다.차 안에서 온하랑이 말했다.“할아버지 말씀 들었지. 우리 이혼하는 거 반대하시는 거 같은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부승민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먼저 할아버지 모르게 이혼하자.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릴 거야.”역시 그는 이미 선택했고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부승호가 그에게 심각하게 말했다고 해도 그는 부승호를 속이면서까지 거역하려고 했다.온하랑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쉴 때마다 칼에 베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언제 이혼 서류 접수할 거야?”부승민은 핸드폰 안의 스케줄을 확인했다.“요 며칠은 내가 바쁘고 다음 주 월요일에 하자.”“알았어.”온하랑의 깔끔한 대답에 부승민은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하면 온하랑은 아주 아름다웠다.까만 눈동자가 반짝이는 눈은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부드러우면서도 매력적이다. 그런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눈빛은 단호하면서도 밝게 빛나고 있어 무시할 수 없다.그녀는 전형적인 계란형 얼굴이다. 부드럽고 우아한 얼굴선에 오똑한 코와 작고 도톰한 입술이 조화로웠다.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와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귀여웠다.온하랑의 몸매는 유연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녀는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했다. 일주일에 며칠은 퇴근 후에 시간을 내서 요가를 하곤 했다.이점은 부승민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지난 3년 동안 부부의 관계는 종종 부승민의 욕망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눈을 감고 부승민은 황홀경을 떠올렸다.이런 외적인 조건을 제외하더라도 그녀는 능력도 대단했다. 대학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심지어 전국 영어 경시대회에서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유학 기회까지 얻었다. 그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모든 것을 잘 처리했다. MQ를 이 정도로 발전시킨 것도 부승민의 예상을 뛰어넘었다.이런 여자를 어느
본격적인 광고촬영이 시작되었다. 온하랑은 사전에 스튜디오에 도착해 스탭들에게 현장 세팅을 부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촬영 감독과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온하랑의 오래된 파트너로서 수년 동안 함께 일해왔다. 그녀가 한마디만 해도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효과가 무엇인지 이해했다.현장 세팅이 거의 준비가 끝나갔고 온하랑은 시계를 확인했다. 9시가 거의 되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30분이나 지났는데 추서윤과 그녀의 스텝들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비서가 한번 연락해 이미 재촉했다고 한다.촬영 감독인 주현은 카메라를 세팅하며 감탄했다.“추서윤도 갑질이 심하네요.”메이크업 아티스트인 김시연도 비웃으며 말했다.“어쩔 수 없죠. 외국에서 오셨으니 갑질을 해도 우리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모델을 교체할 수도 없고. 하랑 씨가 마음대로 교체할 수도 없는 거니까요.”이번에 모델이 부 대표님이 직접 뽑은 것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그전에는 온하랑이 MQ의 총괄 디렉터로서 모델을 교체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추서윤은 그녀가 마음대로 교체할 수가 없었다.추서윤이 갑질을 한다고 해도 그들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온하랑은 핸드폰을 꺼내 안수빈의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핸드폰에서 통화 연걸음이 들려왔다.그러나 잠시 뒤 뚝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김시연은 깜짝 놀라며 화를 참지 못했다.“이 사람들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부 대표님이 꽂아주니까 하랑 씨를 완전히 무시하네.”몇 분이 지나도 어떠한 전화나 문자도 없었다.온하랑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방이 또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번 더 전화해도 똑같았다. 온하랑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김시연에게 말했다.“늦어도 점심쯤에는 올 거예요. 먼저 돌아가요. 도착하면 내가 연락할게요.”온하랑은 오랫동안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안수빈이 무슨 생각인지는 미팅하던 그날 온하랑은 이미 파악했다.김시연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오랫동안 일하면서 이 정도로 갑질하는 연예
회의가 끝난 뒤 부승민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썹을 문질렀다.바로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보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승민아 지금 회사야? 나 지금 너한테 가도 돼?”부승민은 테이블 위에 놓은 캘린더를 확인했다.“오늘 촬영 이렇게 빨리 끝났어?”추서윤은 머뭇거리며 말했다.“오늘... 오늘 촬영 못했어.”“촬영을 못했다고? 왜?”부승민이 물었다.그는 아까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온하랑의 사무실 문이 잠겨있는 것을 보고 외근을 나간줄 알았다.매번 광고 촬영에 온하랑은 모두 현장에 가서 지켜보았다.아마 오늘도 그녀는 이미 스튜디오로 갔을 텐데 왜 촬영하지 않았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우리가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하랑이가 갑자기 급한 일이 있어서 촬영 못 한다고 하더라고. 그러고는 바로 떠나버렸어. 우리도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몰라.”“그럼 긴급한 상황이 있나 보네. 촬영 없으면 회사로 와.”3년 동안 온하랑의 일 처리를 부승민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정말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녀가 이렇게 촬영을 접는 일은 없었다.부승민의 말투에 온하랑에 대한 책망이 전혀 없는 것을 듣고 추서윤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특수한 상황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어. 맞다, 승민아. 나 한 가지 부탁해도 돼?”“뭔데?”“이번 촬영에서 내 개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데려와도 괜찮을까? 몇 년 동안 해외에 있다가 돌아와서 그런지 물이 잘 안 맞아서 피부상태가 너무 안 좋아. 국내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내 상황을 잘 모를 거 같아서. 메이크업 잘 안되면 카메라에도 당연히 예쁘게 나올 수 없으니까. 내 전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내 피부 상태도 제일 잘 아니까 실력을 잘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부승민은 큰일인 줄 알았다.“뭘 이런 작은 일까지 나한테 보고해?”추서윤이 말했다.“이게 어떻게 작은 일이야?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제대로 소통해야지. 서로 존중하고
부승민이 이미 동의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온하랑은 갑자기 이 상황이 매우 우스워진 느낌이 들었다.추서윤 때문에 부승민은 또 한 번 MQ의 일에 개입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온하랑의 계획을 망쳐 버렸고 수습은 결국 그녀가 다 해야 했다.이미 준비되어 있던 마케팅 계획도 모델을 바꿨기에 결국 폐지되었다. 부승민은 온하랑이 현재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였는지 모를 것이다.그는 단지 추서윤을 기쁘게 하려고 신경을 쓸 뿐이었다.일의 진행에 얼마나 더 문제가 생기든지 모두 온하랑이 감당해야 했다.그는 어떻게 이런 일에 신경 쓸 수 있을까?김시연이 듣더니 더 어이가 없어 물었다.“부 대표님이 동의하셨다고요? 부 대표님이 이런 사소한 문제까지 신경 쓰셨다니.”추서윤이 웃었다.“시연 씨도 알다시피 사소한 문제니까 승민이가 나한테 마음대로 하라고 한 거겠죠.”김시연이 말했다.“추서윤 씨, 지금 내가 말한 사소한 문제는 부 대표님께만 해당하는 말이고요. 메이크업과 스타일링은 촬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예요. 추서윤 씨가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전 단지 부 대표님이 왜 이런 일에 개입하셨는지가 의문이 들어서요.”안수빈이 말했다.“그쪽 말은 우리 서윤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온 전무님 만약 믿을 수 없다면 부 대표님께 전화해서 확인해 보세요. 이 일은 부 대표님이 저희에게 일임한 사안이에요. 저희는 지금 메이크업 바꿀 생각 없습니다. 남은 건 두 분이 해결하세요. 해결하지 못한다면 계약을 해지하면 되고요. 저희 서윤이는 이 광고 찍지 않아도 딱히 문제 될 게 없어서요.”추서윤은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시연은 안수빈의 말에 화가 났지만 참고 있었다.분장실을 나오자마자 그녀는 손으로 가슴을 퍽퍽 치며 말했다.“이 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많은 연예인 하고 일해 봤는데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처음 보네요. 이 광고 안 찍어도 되면 왜 임리안 손에 들어간 광고를 뺏은 거래요? 나쁜 년이 정당한 핑계까지 대는 거 보니까 역겨
온하랑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온하랑은 더 이상 이런 굴욕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부승민의 마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추서윤에게로 향해 있었다.어제 일도 부승민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싶었다면 사람을 보내 조사를 하면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추서윤을 더 믿었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이게 바로 남자들이 제일 못 잊는다는 첫사랑인 걸까?“온 전무님, 김시연 씨와 주현 씨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비서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온하랑을 보고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말을 전했다.“네, 알겠어요.”온하랑은 바로 자기 기분을 정리하고 성큼성큼 대기실로 향했다.“어떻게 됐어요? 부 대표님이 뭐라고 하세요?”대기실로 들어오는 온하랑을 보고 김시연이 바로 물었다.주현도 고개를 들었다.온하랑이 고개를 젓자 주현은 한숨을 쉬었다.김시연은 감탄하며 말했다.“정말 이런 건 예상도 못 했어요. 부 대표님은 정조인 줄 알았는데 숙종이었네요.”“그럼, 이제...”“내가 가서 얘기해 볼게요. 조금이라도 메이크업 수정하고 또 촬영 소품도 좀 바꾸면 될 것 같아요. 주현 씨 후반 작업 잘 부탁드려요. 지금 막 아이디어가 떠오르니까 저녁에 가서 시안 보내드릴게요.”온하랑이 말했다.“네, 좋아요.”주현이 대답했다.온하랑은 다시 분장실로 들어가서 추서윤의 스텝들과 지금 메이크업을 조금 수정해 달라고 소통했다.온하랑은 이미 짜증이 났지만 그녀는 MQ의 책임자로서 반드시 자신의 업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만약 광고 효과가 좋지 않으면 MQ의 책임자인 온하랑에게도 안 좋은 영향이 있을 테지만 추서윤이 더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지난번 추서윤은 부승민과 스캔들이 터짐과 동시에 MQ의 홍보모델이 되었다. 비록 평화로워 보였지만 실제로는 피바람이 불었다.임리안은 최근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이기에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임리안의 손에서 광고를
운전기사는 백미러를 통해 부승민을 흘긋 보더니 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분 사모님이 아니야? 사모님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 캡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꼼꼼히 가리고 스튜디오에서 나오는 걸 보아 아마도 연예인이겠지?’그 남자는 사모님과 사이가 아주 가까워 보였다.운전기사가 조용히 일러줬다.“도련님, 추서윤 아가씨가 나오셨습니다.”“응.”부승민이 무심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기사는 조금 헷갈렸다.“차를 스튜디오 문 앞에 갖다대.”스튜디오 문 앞에 가면 사모님이 볼 텐데?운전기사는 마음속으로 갈팡질팡하다가 부승민의 지시에 따라 차를 스튜디오 앞에 세웠다.대화 중이던 이주혁이 턱을 쳐들며 차를 가리켰다.“저분 너희 대표님 아니야?”온하랑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어느새 스튜디오 문 앞에 검은색 카이엔 한 대가 서 있었고 번호판을 보니 부승민이 자주 사용하는 차량이었다.그리고 차 앞에는 추서윤이 서 있었다.부승민이 차에서 내려 추서윤과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추서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개해 있었다.그리고 부승민은 반대편으로 가서 추서윤에게 문을 열어주더니 매너 있게 손으로 차의 윗부분을 가려줬고 추서윤이 차에 타자 다시 돌아가 차의 뒷좌석에 앉았다.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부승민이 추서윤을 데리러 온 것을 보고 온하랑의 마음에는 씁쓸함이 밀려왔다.하지만 이주혁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우리 매니저가 요즘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이미 여주인공을 추서윤으로 정했대. BX 그룹 산하의 스타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한 대작이래. 특별히 진 감독님을 섭외해서 촬영한다네. 하랑이 너희 대표님은 여자 친구에게 씀씀이가 정말 크더라. 듣기로 전 MQ의 전속모델은 임리안이었다며?”온하랑은 입꼬리를 올렸고 이미 자기도 모르는 새에 소매 안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 깊은 초승달 모양의 자국을 남겼다.그녀는 숨이 멎을 정도로 마음은 답답했다. 알고 보니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부승민은
부승민은 고개를 들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온하랑을 보았다.온하랑은 불빛을 등지고 서 있어 얼굴이 어두워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승민은 그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복도에서 우연히 준형 오빠와 마주쳐서 여러분께 인사드리러 왔어요.”온하랑은 미소를 지은 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친구랑 식사하러 온 거야?”부승민이 물었다.“응.”강민이 웃으며 물었다.“하랑아, 요즘 뭐해?”“MQ 전속모델 계약 건을 맡고 있어요.”그러자 강민은 자신이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은 걸 깨닫고 당황했다.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해서 강민이 추서윤을 가리키고 웃으며 말했다.“그 전속모델이 바로 여기 있잖아?”미소를 짓고 있던 온하랑은 다가와 테이블에서 빈 컵을 들고 직접 차를 따르며 말했다.“오늘 우연히 이곳에서 만났으니 제가 술 한 잔 권하겠습니다. 다음에 식사 대접해 드릴게요. 둘째 오빠도 축하해요.”그녀는 ‘둘째 오빠’라고 또박또박 말했다.두 사람이 결혼한 뒤로 그녀는 부승민을 ‘둘째 오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 대신 더 친밀해 보이게 그냥 ‘오빠’라고 불렀었다.온하랑은 술잔에 들어있는 차를 한꺼번에 들이켰다.“천만에.”“저는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온하랑은 술잔을 내려놓았다.그런데 이때 노준형이 말했다.“하랑아, 이렇게 가면 안 되지! 네 새언니도 여기 있는데 새언니한테 술 안 권해?”강민은 속으로 노준형을 욕했다.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옆에 있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은 노준형을 따라 부추기기 시작했다.“하랑 씨, 승민이가 직접 서윤 씨와의 계약을 성사한 건데, 서윤 씨에게 술 권하지 않아요?”“두 사람 지금 협력하고 있잖아요? 같이 한 잔 마셔요.”온하랑은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앙다물었다.그녀가 어떻게 추서윤에게 술을 권할 수 있겠는가?!“에이, 됐어.”강민이 말했다.노준형은 웃을 듯 말 듯 하면서 말했다.“왜? 하랑인 새언니가 마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