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어?”문을 두드린 사람이 앨리스인걸 본 이엘리아는 재빨리 다가가 마중하고선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았다.앨리스는 이엘리아를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요즘 몸 상태가 별로인가 보네? 살이 왜 이렇게 많이 빠졌어.”“이렇게 해야 엄마랑 아빠가 믿지.”이엘리아는 거울을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선 푹 꺼진 볼을 만졌다.“내가 요즘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알아? 배가 고파서 미칠 지경인데 참았다니까? 눈앞에 있는 음식을 전부 입에 넣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면서 입맛 없는 척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매일 밤 졸려서 죽을 것 같아도 절대 안 잤어. 그래야 다음 날 아침에 초췌해 보이거든. 연기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누가 봐도 환자처럼 보이잖아?”앨리스는 혀를 내둘렀다.“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그 시각 서재에서 화면을 지켜보던 서희수는 앨리스보다 훨씬 더 충격을 받았다.어려서부터 고생 한번 한적없는 이엘리아가 꾀병을 부리기 위해 이 정도로 치밀하게 행동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끈기가 비범한데 애석하게도 삐뚤어진 방식에 사용됐다.앨리스는 이엘리아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이엘리아는 뿌듯함을 드러냈다.“가혹한 건 맞는데 효과가 아주 직방이야. 이틀 전에 엄마가 오빠를 내쫓았거든. 내 생각에 얼마 안 있으면 이 집에 발 디딜 자리도 없을걸?”“그래? 내가 아까 왔을 때는 서로 얘기하고 있던데?”이엘리아는 표정이 돌변했다.“정말이야?”“응.”“물건 가지러 온 건가?”“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다정해 보였어.”이엘리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뭐라고? 이대로는 안 되겠어.”앨리스는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이 정도면 솔직히 대단한 거야. 여기서 더 오바하면 아무 소용이 없을걸?”“그게 무슨 뜻이야?”“어제 심리치료사가 왔다며? 오빠가 소개해 준 거야?”“응.”이엘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내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그냥 가던데?”“사람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노아는 삼촌인 애버트 위슨의 아들이자 이엘리아의 사촌이다.“오빠를 완벽하게 제외하는 방법은 뭐야?”“그건 쉽잖아. 아저씨는 가족의 이익을 해는 사람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 카이사르 오빠가 만약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 기밀을 누설하면 어떻게 될까? 설령 아저씨가 지켜준다 한들 다른 삼촌들과 이모들이 용서하지 않을걸?”“무슨 뜻인지 알겠어.”이엘리아는 두 눈이 반짝였다.“몸이 좋아지면 아빠 회사에 한번 가볼게.”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서희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이엘리아가 똑똑하지 않다는 건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멍청할 줄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다.이기적인 욕망에 눈이 먼 이엘리아는 다른 사람의 부추김만 듣고 회사의 기밀을 누설해 카이사르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울 계획을 꾸몄다.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두 사람 모두 윌슨의 자식이기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다면 윌슨은 모든 가족의 질타를 받게 될 수도 있다.‘어쩜 이렇게 멍청하고 어리석은 거지? 앨리스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거야?’그 시각 앨리스는 이엘리아에게 인사를 건네고 떠날 준비를 했다.위층에서 내려온 그녀는 넓은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카이사르를 발견했다.앨리스는 카이사르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김시연과 결혼했으니 이미 이용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나중에 노아가 윌슨 가문의 후계자가 된다면 사모님 자리에 앉는 건 시간문제다.김시연이 운 좋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아쉽긴 하지만 아직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시도해도 된다.이때 연도진이 입을 열었다.“앨리스.”앨리스는 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연도진도 웃으며 답했다.“이엘리아랑 무슨 얘기를 나눴어요?”그 질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앨리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시선을 피해 애써 초조함 마음을 가라앉혔다.“긴장하지 마요. 그냥 평소에 이엘리아랑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
깜짝 놀란 김시연은 순식간에 정신을 번쩍 차렸고 하마터면 핸드폰을 던질뻔했다.화면을 가득 채운 선홍색의 피를 보니 손가락이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포토샵이겠지? 하긴 이게 진짜일 리가 없잖아.’표정을 잔뜩 찌푸린 채 사진 속에서 포토샵의 흔적을 찾으려 노렸지만 그 어떤 결점도 보이지 않았고 모든 게 현실적이었다.사진 속의 가늘고 섬세한 세 손가락은 손톱마저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어 누가 봐도 여자의 손가락이었다.‘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인가? 설마... 이엘리아의 손가락은 아니겠지?’잔인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 김시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떠보듯이 물었다.[설마... 이거 진짜야?][응.]연도진은 칼답했다.[영상 보여줄까?][아니. 됐어.]김시연은 믿기지 않았다.[이엘리아 손가락이야? 네가 잘랐어?]김시연은 연도진이 잔인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껏해 봤자 지난번처럼 유치장에 보내는 게 전부이기에 모범적인 시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엘리아는 이엘리아의 이름을 도용해서 나쁜 짓을 저지른 쓰레기의 손가락이야.]김시연은 더 이상 그런 거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너 정말 괜찮아? 그 사람이 신고하면 어쩌려고.][신고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거야.][아...]김시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여러 차례 편집하다가 결국 전부 삭제했다.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모티콘을 보내려던 찰나 연도진의 메시지가 떴다.[내가 무서워?]당황함 김시연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건 아닌데... 조금 놀랐어...]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태연하게 행동하는 연도진이 믿기지 않았다.김시연은 그제야 연도진이 더 이상 예전의 정직하고 순한 모범생이 아니라는 걸 인지했다. 그는 윌슨의 아들이자 윌슨 가문의 차기 후계자다.곧이어 연도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김시연은 마치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쥐고 있는 듯 안절부절못하다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침대에 누워있어?”“내 방에 카메
”아... 그래?”“너무 놀랄 필요 없어.”연도진은 김시연을 달래줄 최고의 방법이 떠올랐다.“하랑 씨한테 물어봐봐. 부 대표가 자른 손가락이 나보다 훨씬 많을걸?”김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게 무슨 잘한 일이라고 비교하고 있어.”“아니,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보여주는 거잖아.”“보고 싶지 않으니까 넣어줘.”김시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증거를 다 모아서 경찰에 제출하는 게 나은 것 같아. 법의 심판을 받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분부 받들겠습니다.”“하여튼 말만 잘해.”김시연은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왜 날 죽이려고 했던 거야? 설마 너 때문이야?”“우리가 정말 결혼한 줄 아나 봐. 이대로 포기하는 게 달갑지 않아서 너한테 손을 쓴 거지.”“뭐가 됐든 네가 밖에서 처신을 똑바로 안 하니까 그런 거잖아.”“그래서 이제는 결혼반지 꼭 끼고 다녀.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김시연은 텅 빈 손가락을 바라보며 공허함을 느꼈다.“당연히 그래야지.”“난 아직 처리할 일이 조금 남아서 며칠 있다가 갈게. 갖고 싶은 건 없어?”“없어... 연도진. 우리 계약 파기하자.”핸드폰 너머로 2초간의 침묵이 흘렀고 곧이어 사뭇 진지해진 연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뭐라고?”“계약 파기하자고.”“왜?”“처음 계약했던 목적이 뭔지 기억나? 우리 회사로 들어와서 권력을 잡는 거였잖아. 그때는 네가 윌슨 가문의 아들인 줄 몰랐어. 이제는 알았으니까 너도 네 할 일 해야지. 나한테 발목 잡힌 채로 계속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까... 계약 파기하자.”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았다.“계약 파기? 그럼 우리 결혼은? 대외에 이혼했다고 말할 거야?”“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연도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럼?”“뭐가? 그다음은 없어.”“그러니까 나랑 동거하면서 가짜 부부로 지내다가 관심 없을 때 언제든지 떠나겠다는 거네?”김시연은 죄책감에 입꼬리가 파르르 떨었다.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봐?”“그냥... 궁금해서. 자른 적 있어?”“나야 모르지.”“정말 몰라?”“응.”온하랑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도진 씨가 손가락 잘랐어?”김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손가락 세 개 잘랐어.”온하랑은 깜짝 놀랐다.“누굴?”“앨리스.”김시연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온하랑에게 설명해 줬다.“처음 사진 봤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아? 솔직히 포토샵인 줄 알았어. 그런데 보면 볼수록 너무 현실감이 넘치더라고.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병원에 누워있는 다운이를 생각하면 이렇게라도 벌받는 게 낫겠다 싶어.”“너무 힘들어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잊힐 거야.”“경험 있는 사람처럼 말하네?”“나도 학생 때 부승민이 누구랑 통화하는 걸 들었거든? 그때...”“뭐라고 했는데?”김시연은 잔뜩 흥분한 채로 물었다.“누구누구 다리를 부러뜨린다고 했어. 진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뭐.“육광태를 포함한 부승민의 부하 중에는 전과자가 여러 명 있다. 온하랑은 그들이 부승민의 일을 처리해 주며 사고를 쳤거나 부승민 대신 모든 죄를 뒤접어썼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그때는 무슨 생각이 들었어?”“알다시피 내가 그때 완전히 콩깍지가 씌었잖아. 그래서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부승민이 맞다고 생각했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만든 사람에게 100%의 잘못이 있다고 확신했지.”“아... 그랬구나...”“하지만 지금이라면 그런 잔인한 방법보다는 법의 심판을 받는 게 나을 거라고 설득했을 거야.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죄책감 가지지 마. 앨리스는 살인 미수에 대한 대가를 치른 거야. 도진 씨가 아니었다면 너 정말 큰일 났을걸?”“손가락을 셀 수도 없이 많이 잘라봤대.”온하랑은 할 말을 잃었다....쨍그랑.식기가 바닥에 떨어지며 국과 반찬이 사방에 흩어졌고 곧이어 귀를 찌르는듯한 비명이 들려왔다.“일 똑바로 못해? 이렇게 뜨거운 국물을 마시라고 주신 거야? 할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는 분노만 가득 차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앨리스는 곧장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앨리스가 잊고 있는 게 있었다. 그녀의 손은 물건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그 순간, 휴대폰이 “탁”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더니 그대로 국물 속으로 빠져 버렸다.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앨리스는 휴대폰을 꺼내 깨끗한 곳에 두기 위해 재빨리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두 엄지손가락을 잃은 그녀는 결국 두 손을 사용해 휴대폰을 집어 들어야 했다.아직 엄지손가락이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은 탓에 앨리스의 손가락 힘은 약하기 그지없었다. 국물 때문에 미끌미끌해진 휴대폰은 공중에서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다시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앨리스의 표정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분노의 감정으로 가득 들어찬 가슴이 답답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다시 주워들었다.하지만 공교롭게도 하필 국물로 얼룩져버린 바닥을 밟은 앨리스는 그대로 바닥에 미끌어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며 예기치 못하게 탁자 모서리에 손을 부딪친 그녀는 상처 부위에서 퍼져오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국물로 얼룩진 앨리스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허벅지에는 깨진 도자기 컵의 파편이 박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몸을 일으키기 위해 바닥을 짚은 앨리스의 손바닥에는 찐득한 밥풀까지 붙어버렸다.잠시 침묵을 유지한 앨리스는 결국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의 주전자를 바닥에 내던지고 과일이 담겨있는 접시도 엎어버렸다. 접시에서 쏟아진 과일들이 바닥에서 제멋대로 나뒹굴었다.병실은 또다시 소란스러워지더니 이것저것 깨지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앨리스는 병실 안에서 부술 수 있는 모든 물건을 다 집어 던지며 소란을 피웠다. 바닥은 순식간에 다시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지러워졌다.겨우 아문 상처에서 다시 피가 새어
12월에 접어들자 날씨가 점점 더 쌀쌀해졌다.임신한 온하랑의 배는 점점 더 불러오고 있었고 촬영 업무도 전보다는 줄어들어 이제는 스튜디오로 출근하는 대신 집에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했다.온하랑이 직접 출근하지 않자 스튜디오에서도 다른 사진기자들 여러 명을 고용해 서로 다른 각도에서 사진 촬영을 진행하도록 했다.부승민이 이사 오자 안문희와 부시아도 함께 그 고급아파트로 이사했다.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온하랑의 집으로 뛰어와 저녁을 먹었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송이와 잠시 놀다가 위층으로 올라가 잠을 잤다.온하랑의 생활도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임신으로 불편해진 거동을 도와줄 사람 한 명이 더 생겼을 뿐이었다.부승민이 이사 왔던 첫날 밤, 온하랑은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다.“배고파?”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부승민도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온하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조금.”“먹고 싶은 거 있어?”“아무거나.”“냉장고에 김이 있었던 것 같은데, 김밥 먹을래?”“좋아.“부승민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부승민이 문을 열고 나가자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온하랑 역시 따뜻한 이불 속에서 슬쩍 기어 나왔다.온하랑이 막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온 부승민이 물었다.“뭐 먹고 싶은… 왜 일어나 있어?”“화장실 가고 싶어서.”최근 들어 온하랑이 한밤중에 잠에서 깨 화장실로 가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부승민은 빠르게 걸어와 그녀의 팔과 허리를 붙잡았다.“내가 화장실까지 데려다줄게.”그제야 부승민은 온하랑이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화장실이 급해서 깼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승민은 금방 잠에서 깨어난 온하랑이 혹시라도 발을 헛디딜까 봐 걱정되었다.“나 혼자 갈 수 있어.”“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온하랑은 어쩔 수 없이 부승민의 품에 기대 화장실로 향했다.변기 앞에 도착한 그녀는 손을 바지 허리춤에 올리며 부승민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조금 전의 그 전화는 정신 병동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부선월이 부승민을 만나야겠다며 계속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내용의 전화였다.온하랑이 김밥 네 조각을 집어 먹었고 남은 네 조각은 부승민이 먹었다.이 모든 게 하룻밤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밤… 온하랑이 매일 밤 화장실을 갈 때마다 부승민은 늘 온하랑을 화장실까지 부축해 주었다가 다시 침대로 데려다주었다.매일 밤 두세 번씩 말이다.온하랑은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부승민이 밤에 제대로 쉬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녀는 언제든 잠을 충분히 자고 일어날 수 있었지만 부승민은 매일 아침 회사로 출근해야 했다.하지만 그런 온하랑의 걱정에도 부승민은 아무 문제 없다며 오히려 그녀를 안심시켰다.“정말 괜찮아?”온하랑이 물었다.“어젯밤에도 나가서 전화 받는 소리 들은 것 같은데.”물론 그 시각, 온하랑은 이미 잠에 빠져있던 때라 말소리만 그저 희미하게 들었을 뿐이었다.“응, 괜찮아.”부승민이 고집을 부리자 온하랑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잠자리에 들기 전, 부승민은 또 간호사에게서 걸려온 국제전화를 받았다.수화기 너머의 간호사는 아주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찰스 씨, 사모님께서 또 소란을 피우고 계십니다. 찰스 씨가 전화를 받지 않으시면 죽어버리겠다고 난리를 치시네요. 아내 분 일도 언론에 폭로해서 이미지 추락시키고 찰스 씨한테는 어머니를 죽게 한 죄명까지 씌우겠다면서 협박 중이세요.”부승민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로 저한테 전화하지 마시죠…”“큰일 났어요, 찰스 씨! 사모님께서 정말로 손목을 그으셨어요! 피가 너무 많이 납니다, 빨리 아무나 좀… 찰스 씨, 그냥 전화 한 번만 받아보시는 게 어떨까요?”부승민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의 간호사가 당황하기 시작했다.방문을 닫고 나온 부승민은 노래방으로 들어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손목을 그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