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남자가 갑자기 이를 악물더니 순식간에 목소리가 매서워졌다.“왜... 왜 그래?”온하랑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남자가 웃었다.“아니야. 사모님, 칭찬 고마워. 내가 잘 모셔줄게.”“모신다”라는 말을 남자는 일부러 강조하듯 힘주어 말했다.남자는 약속대로 입, 혀와 손을 모두 사용해 온하랑을 제대로 애무해 주었다. 그는 결박된 온하랑의 손목과 발목을 모두 풀어주었다.일이 끝나자 온하랑은 이미 온몸이 나른해져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미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너무 피곤했지만 또 그만큼 편안했다. 몸이 나른해진 온하랑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앉았다. 이제 남자고 뭐고 신경 쓸 기력이 없었다.그 순간, “딸깍”하는 스위치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눈부신 백열등의 불빛에 온하랑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실눈을 가늘게 뜬 채 천천히 밝은 불빛에 적응했다.남자는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을 주워 소파 한쪽에 올려두었다.온하랑은 옷도 입지 않고 방안을 돌아다니는 남자를 보며 이불을 끌어 올려 자신의 몸을 가렸다.“출장 간 거 아니었어?”“비행기 안 탔어.”“범인” 부승민이 천천히 다가와 이불을 걷어내더니 온하랑의 곁에 자리 잡고 누웠다.“왜?”온하랑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처음 누군가에 의해 입이 틀어막히고 벽에 밀쳐졌을 때, 온하랑은 정말 깜짝 놀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하지만 남자가 입을 여는 순간, 온하랑은 그의 정체를 눈치챘다. 그녀는 익숙한 향기를 맡으며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했다.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온 덕에 아무리 목소리를 낮게 깔아봤자 온하랑은 단번에 그 남자의 정체가 부승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번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누군가 날 일부러 거기까지 끌어들이려는 게 아닐까 싶네.”부승민이 말했다.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장 필라시로 향하라는 메일을 받았다.그때부터 부승민은 배후 인물의 목적이 무엇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온하랑은 그대로 몸을 돌려 부승민을 등진 채 하품했다.“나 지금 너무 피곤하고 졸리거든. 그러니까 먼저 잘게. 냉장고에 샌드위치 있으니까 데워 먹든지.”부승민은 머리를 괸 채 온하랑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는 혼잣말인 척 일부러 온하랑이 다 들을 수 있게 말했다.“좋았겠지. 너 엄청 예민하고 민감하잖아. 몇 번 안 돼서 바로 가고.”온하랑은 이를 악물며 애써 부승민의 말을 무시하고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계속해서 아무 대답이 없자 부승민도 장난치는 것을 관두고 침대에서 내려와 대충 옷을 걸치며 화장실로 향했다.방안은 다시 고요해졌다.온하랑은 한쪽 눈을 뜬 채 사방을 둘러보고는 다시 몸을 돌려 기지개를 켰다.눈을 감자 조금 전에 있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처음에는 방 안에 또 숨어 있을지 모르는 다른 사람을 의식해가며 일부러 부승민에게 맞춰주었다. 그러니 그녀의 공포와 두려움은 완전히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방 안에 부승민 한 명뿐이라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연기에 몰입해 있는 부승민에게 계속해서 맞춰주며 그가 어디까지 할지 계속 지켜보았다.결국, 온하랑은 부승민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바로 그녀와 함께 자는 것.역할 놀이를 곁들인 채 말이다.아무런 예고도 없었다.부승민은 정말 성실하게 범죄자 역할에 몰입해 있었다.온하랑도 그 남자가 부승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부승민도 자신을 알아본 온하랑이 함께 몰입해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암묵적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 온하랑은 아주 잠깐 자신의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조용히 방에 침입한 도둑이라는 생각까지 했다...임신한 온하랑을 고려한 것인지 부승민의 움직임은 매우 조심스러웠다.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웠고 속도도 훨씬 느렸다.하지만 왜인지 그녀는 평소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절정에 도달했다.그
부승민이 웃으며 말했다.“얼굴 좀 닦고, 양치는 하고 자야지.”온하랑은 부승민의 손에 든 물건을 확인하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응.”그녀는 몸을 일으켜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리고는 부승민에게서 칫솔과 양치 컵을 받아들었다.세수를 마친 온하랑이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부승민은 갖고 나온 물건을 욕실로 갖다 두고는 다시 밖으로 나와 침대에 누웠다.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이불 끝을 꽉 잡았다.“또 뭐 하려고?”부승민은 그저 미소만 지으며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온하랑에게 다가갔다.온하랑은 다시 이불로 자신을 감싸며 말했다.“안돼, 나 진짜 더 못해...”“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그냥 침대 시트 좀 갈아주려고 했던 건데. 이렇게 젖었는데 여기서 계속 자려고?”어떤 장면들이 떠오른 것인지 온하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랐다.부승민은 온하랑을 이불째로 들어 올려 소파에 옮기고는 헌 시트를 벗겨내고 새 시트를 꺼내 잘 펴두었다. 그리고는 온하랑을 다시 안아 올려 새 이부자리 위로 옮겨주었다.온하랑은 마침내 눈을 감고 편히 잠들 수 있었다.부승민은 화장실로 가 간단히 샤워를 마쳤다. 그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냉장고에 있는 샌드위치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웠다.방으로 돌아와 보니 온하랑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부승민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치고는 온하랑의 곁에 누워 평온하게 자는 어여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습관적으로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그 순간, 아기가 부승민의 손길에 대답이라도 하듯 배가 갑자기 불룩하게 튀어 올랐다.그 기척에 부승민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방금 그게 혹시 태동이라는 건가?부승민은 다시 손을 배 위에 올리고는 천천히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배가 다시 불룩하게 튀어 오르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부승민의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는 당장이라도 온하랑을 깨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종일 일하고 돌아와 피곤할 그녀를 굳이 깨우지는 않았다.한밤중에 갑자기 배가 고
그릇을 절반만 비워도 온하랑은 배가 불렀다. 그렇게 남은 것은 전부 부승민의 뱃속으로 들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부승민은 식기들을 모두 주방으로 가져가 냄비와 함께 싱크대에 넣어 깨끗이 설거지를 마친 뒤, 하나하나 정리해두었다.부승민이 주방에서 나오며 손을 닦고 있던 그때, 눈 부신 빛이 그의 시야를 다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당신 누구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눈치 있게 얼른 나가. 안 그러면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가정부는 한 손으로 부승민에게 손전등을 비추며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한밤중에 느껴지는 인기척에 가정부는 온하랑이 샌드위치를 데우러 나갔을 것이라 여겼다.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이상해 몸을 일으켜 살금살금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 처음 보는 남자가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언제 들어온 걸까?왜 전혀 몰랐던 걸까?“우선 그 손전등부터 내려놓고 얘기하시죠. 저는 하랑이... 남자친구입니다. 하랑이 보러 온 거예요.”그 말에 가정부는 천천히 손전등을 내려놓고 부승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조금은 믿는 눈치였지만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정말이에요? 지금 당장 하랑 씨한테 가서 확인해볼 겁니다.”그녀는 온하랑의 방문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하랑 씨? 하라 씨? 일어나 봐요!”“안 자니까 말씀하세요.”“지금 여기 어떤 남자가 하랑 씨 남자친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말 남자친구 맞아요?”“...네, 진짜예요. 저 만나러 와서 방금 저한테 밥도 해줬어요. 아주머니는 가서 쉬고 계세요.”온하랑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가정부는 부승민을 흘려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자리를 떴다.부승민은 온하랑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침대에 누운 온하랑은 부승민을 한 번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강도처럼 굴려다가 정말 강도 취급당할 뻔했네.”...필라시.벤 한 대가 외곽의 한 저택 입구에 멈춰 섰다.저택의 정문은 활짝 열려 있
그러던 중, 부선월의 얼굴에 피었던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더니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해보았지만 그중에 부승민은 없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부승민은?부선월은 곧장 건장한 사내에게 전화를 걸었다.사내들은 자리를 뜨자마자 유흥을 즐기러 가고 있었다. 부선월의 전화를 받은 사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십니까, 사모님?”“한 명이 없잖아.”“무슨 한 명이요?”“지금 한 명이 부족하다고. 빨리 가서 데려와!”그 말에 사내가 더욱 혼란스러워했다.“그 세 명이 전부였어요! 호텔 근처는 다 수색했는데 다른 수상한 한국인은 안 보였다고요!”“그럴 리가 없어!”사내가 반박했다.“왜 그럴 리가 없어요? 못 믿으시겠으면 지금 당장 호텔 가서 CCTV 찾아보시든가요! 왜요, 갑자기 돈이 아까우세요? 아무 변명 거리라도 찾아서 돈 돌려받으시게?”“이 사람 중에 내가 찾는 부승민이 없잖아!”“그럴 리가요? 가운데에 있는 그 사람이 부승민 아니에요? 우리랑 얘기도 나눴어요!”부선월은 가운데에 있는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정체는 연민우였다!젠장!부선월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정말 자기를 부승민이라고 소개했단 말이야?”“그렇다고요! 그럼 사모님 뜻은 지금, 저 사람이 가짜라는 소리인가요?”“... 그래!”사내가 말했다.“그럼 저희를 탓하시면 안 되죠. 저희한테 암호만 알려주시고 사진은 안 보여주셨잖아요!”잔뜩 화가 난 부선월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이번에도 부승민에게 제대로 당했다!그녀는 온하랑의 명성이 걸린 일이니 부승민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찾아오리라 생각했다.하지만 부선월은 그에게 연민우가 있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온하랑의 비밀이라면 연민우 역시 알고 있었다.부승민은 처음부터 올 생각이 없었다!진상을 밝히는 것과 온하랑을 지키는 것 중, 부승민은 후자를 택했다.역시 부선월 아들 아니랄까 봐, 온하랑에게 홀려도 단단히 홀려버렸다!몇 시간 후, 부선
히스테리를 부리는 부선월이 익숙해진 지 오래였던 부승민은 태연하게 말했다.“당연히 저한테 생명을 준 고마움을 잊을 리가 없죠.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게 제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부선원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게 무슨 말이니?”“이제 곧 알게 될 거예요.”그 말속에 담긴 뜻을 곰곰이 생각하던 부선월은 순간 아래층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부선월은 재빨리 문을 열고 난간에 기대어 아래층을 확인했고 그 순간 충격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거실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무장한 남자들이 가득했고 바닥에 누워있던 육광태도 어느새 멀쩡하게 서 있었다.고개를 들자 육광태는 위층에 있는 부선월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재빨리 옆에 있던 사람에게 명령했고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2층으로 돌진했는데 누가 봐도 타깃은 부선월이다.이를 본 부선월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지만 도망칠 구석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핸드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부승민, 나는 널 낳아준 엄마라고. 엄마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고작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을 꾸며? 넌 양심이라는 게 없구나. 내가 왜 너 같은 아들을 낳고 키웠을까. 애초에 태어났을 때 깊은 산속에 버려서 늑대들의 먹이로...”부선월은 마치 초원의 맹수처럼 사납게 울부짖으며 발광했다.부승민은 한숨을 내쉬었다.“할 말 다했어요? 이번 생에 나누는 마지막 통화일 수도 있으니까 맘껏 얘기해요. 앞으로는 그럴 기회조차 없을 텐데.”부선월은 흠칫하더니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포효했다.“부승민!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딱히 할 말 없는 것 같으니까 이만 끊을게요. 앞으로 남은 인생 편안하게 살게 해드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부선월은 할 말이 남은 듯 입을 벙끗했으나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건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뚝.어느새 건장한 사내들이 부선월을 포위했고 단숨에 두 팔을 잡아 제압했다.부선월은 몸부림치며 반항했지만 그들
주시온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그럼 빨리 가서 가져와야지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야.”“아... 지금 바로 갈게요.”매니저는 가방을 내려놓고 곧바로 대기실로 달려갔다.주시온은 허탈한 듯 김시연을 바라보며 한탄했다.“누나, 수아 알죠? 계속 저랑 같이 일하다가 이번에 출산 휴가를 썼거든요. 그래서 회사에서 매니저 한 명 새로 뽑았는데 꼼꼼하지 못하고 실수가 너무 많아요.”“수아? 이미 애 낳은 거 아니었어?”김시연은 머리를 정리해 주며 주시온과 수다를 떨었다.“낳은 지 아마 두달정도 됐을걸요? 다음 달부터 출근할 수 있다던데 하루라도 빨리 복귀했으면 좋겠어요.”김시연은 빗으로 마지막 정리까지 마쳤다.“이제 됐어. 수아 이제 복귀하면 용돈 챙겨줘야겠네?”“당연히 챙겨야죠. 수아만큼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이때 사원증을 목에 건 소품 담당자가 다가왔다.“시연 씨, 혹시 시간 좀 괜찮아요? 촬영에 쓰일 엄청 중요한 소품을 놓고 와서 그런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지금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요.”“뭔데요?”“유리로 만든 빨간색 옥패예요. 아마 소품실 좌측 서랍의 두 번째 케이스에 있을 거예요.”“알겠어요. 제가 다녀올게요.”“감사합니다.”말을 마친 담당자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그럼 나 먼저 갈게.”김시연이 이제 막 인사를 나누고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주시온이 입을 열었다.“안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다운이가 마침 대기실로 갔잖아요. 시간도 얼마 없는데 어차피 소품실이랑 가까우니까 제가 그냥 다운이한테 가져오라고 할게요.”다운이는 방금 대본 찾으러 간 주시온의 매니저다.“빨리 대본 봐야 하는 거 아니야?”“괜찮아요. 어차피 대사는 이미 외웠거든요.”“다행이네.”주시온은 핸드폰을 꺼내 다운에게 전화를 걸었고 옥패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오는 길에 가져오라고 했다.그 후 주시온은 상대 배우와 서로 대사를 주고받으며 진지하게 촬영에 돌입했고 말없이 집중해서 지켜보던 감독은 두 사람의
“뭐라고요?”주시온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언제요? 많이 다쳤어요? 지금은 괜찮아요?”촬영장에 괴한이 들어온 것도 이상한데 마침 소품실에 숨어있는 게 뭔가 꺼림칙했다.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주시온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몇 분 전 김시연에게 소품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던 그 관계자가 보이지 않았다.“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일단 가보자.”“시온아, 어디가? 촬영 벌써 끝났어?”화장실을 다녀온 김시연은 감독과 함께 자리를 옮기는 주시온의 뒷모습을 보고선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주시온은 사건의 경과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시온이가 다쳤어요. 감독님 말로는 소품실에 숨어있던 괴한의 습격을 받아 칼에 찔렸대요.”김시연은 아연실색했다.“갑자기? 많이 다쳤어? 그 사람은 잡은 거야?”“모르겠어요. 저희도 이제 막 그쪽으로 가려던 참이었거든요.”“얼른 가자. 나도 같이 갈게.”김시연은 곧바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시온이가 나 대신 소품 가지러 간 게 아니었다면 내가 찔렸을 수도 있겠네?”그 말을 들은 감독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김시연은 대충 설명해 줬다.“이렇게 우연일 수가 있나?”감독은 우연처럼 보이는 이 찝찝함이 너무 거슬렸다.“그렇죠? 저도 너무 이상한 것 같아요.”이때 주시온이 과감한 추측을 했다.“설마 그 괴한이 누나를 공격하려고 한 건 아니겠죠?”주시온의 말을 듣고 난 김시연도 입술을 깨문 채 곰곰이 생각했다.‘정말 나를 타킷으로 삼은 건가? 누구지? 이엘리아?’“소품 가져오라고 부탁했던 그 사람은 누구야?”김시연은 생각에 잠겼다.“사원증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요.”순간 표정이 싸늘하게 돌변한 감독은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경찰이 오면 얘기하자.”그 시각 소품실 입구. 스태프 몇 명이 괴한을 제압했고 도망치지 못하게 밧줄로 꽁꽁 묶었다.바닥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다운이 누워있었는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복부에는 칼자루가 꽂혀있었고 그 주위는 피로 붉게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