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요?”주시온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언제요? 많이 다쳤어요? 지금은 괜찮아요?”촬영장에 괴한이 들어온 것도 이상한데 마침 소품실에 숨어있는 게 뭔가 꺼림칙했다.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주시온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몇 분 전 김시연에게 소품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던 그 관계자가 보이지 않았다.“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일단 가보자.”“시온아, 어디가? 촬영 벌써 끝났어?”화장실을 다녀온 김시연은 감독과 함께 자리를 옮기는 주시온의 뒷모습을 보고선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주시온은 사건의 경과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시온이가 다쳤어요. 감독님 말로는 소품실에 숨어있던 괴한의 습격을 받아 칼에 찔렸대요.”김시연은 아연실색했다.“갑자기? 많이 다쳤어? 그 사람은 잡은 거야?”“모르겠어요. 저희도 이제 막 그쪽으로 가려던 참이었거든요.”“얼른 가자. 나도 같이 갈게.”김시연은 곧바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시온이가 나 대신 소품 가지러 간 게 아니었다면 내가 찔렸을 수도 있겠네?”그 말을 들은 감독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김시연은 대충 설명해 줬다.“이렇게 우연일 수가 있나?”감독은 우연처럼 보이는 이 찝찝함이 너무 거슬렸다.“그렇죠? 저도 너무 이상한 것 같아요.”이때 주시온이 과감한 추측을 했다.“설마 그 괴한이 누나를 공격하려고 한 건 아니겠죠?”주시온의 말을 듣고 난 김시연도 입술을 깨문 채 곰곰이 생각했다.‘정말 나를 타킷으로 삼은 건가? 누구지? 이엘리아?’“소품 가져오라고 부탁했던 그 사람은 누구야?”김시연은 생각에 잠겼다.“사원증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요.”순간 표정이 싸늘하게 돌변한 감독은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경찰이 오면 얘기하자.”그 시각 소품실 입구. 스태프 몇 명이 괴한을 제압했고 도망치지 못하게 밧줄로 꽁꽁 묶었다.바닥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다운이 누워있었는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복부에는 칼자루가 꽂혀있었고 그 주위는 피로 붉게
괴한은 다른 곳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마 받았어?”괴한은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다.“죽이는 데 실패했는데 그 사람이 과연 돈을 줄까?”그 말을 들은 괴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김시연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곧이어 귀를 찌르는 경적소리가 들려왔는데 현실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현실적이로 느껴졌다.“구급차 도착한 거지?”두 눈이 번쩍 뜨인 감독은 급히 사람을 내보내 길을 안내했다.의료진들은 다운을 구급차에 실었고 김시연은 동행하겠다며 나섰다.따지고 보면 그녀를 대신해 칼을 맞았을 가능성이 컸기에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놓였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다운은 수술실로 옮겨졌고 김시연은 간호사의 안내를 받으며 수술비와 입원비를 지불했다.그 후 증빙서류를 들고 수술실로 돌아와 앞에서 대기했다.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주시온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주시온은 경찰이 도착했을 때 모든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고 말했고 경찰은 현장에서 바로 모든 소품 관계자를 불러 모았다고 한다.하지만 수많은 사람 중에 김시연에게 부탁했던 그 남자는 없었다.드라마나 영화인 경우 제작진들이 배우 간의 케미나 현장이 에피소드가 담긴 비하인드 영상을 찍기 위해 늘 몇 대의 카메라를 돌린다.정말 다행히도 카메라 중 한대에 남자의 모습이 찍혔다.현장에서 어슬렁거리는 걸 보니 몰래 들어온 사람이 틀림없었고 김시연과 주시온이 자리를 뜨자 곧바로 현장에서 사라졌다.경찰은 이미 수색에 돌입했다.주시온은 다운의 부상을 걱정하며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다시는 덤벙거린다고 혼내지 않을 거예요.”다운이 대본을 대기실에 놓고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 수술실에 누워있는 건 김시연이다.김시연의 체력이나 몸집으로 봤을 때 괴한의 손에 잡힌 순간 바로 죽음이다.한 시간 뒤 수술이 끝났고 의사가 밖으로 나왔다. 장기에 손상이 간 건 맞지만 제때 치료한 덕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고 당분간은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게 좋다며
경찰들은 이엘리아가 국내에 없으니 체포할 방법이 없다며 난감해했다.그 시각 김시연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살기가 밀려와 당장이라도 이엘리아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죽이겠다는 목적 하나로 생각 없이 행동한 이엘리아는 계획이 실패한 건 둘째 치고 무고한 사람까지 이 일에 끌어들였다. 정황증거가 이렇게 명백한데 해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손을 쓸 수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바로 이때 연도진의 국제전화가 걸 려왔다.그의 번호를 본 김시연은 고민도 없이 수신 거부를 눌렀다.연도진의 목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전화를 받은 김시연은 싸늘하게 말했다.“왜?”“시연아, 너 괜찮아?”익숙한 그 목소리에 담긴 걱정과 불안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연도진은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다.시차를 계산해 보면 새벽인데 이렇게 빨리 소식을 접한 게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대충 둘러대려던 김시연은 순간 생각이 번뜩였다.“안 괜찮아. 병원인데 지금 죽을 것 같아.”“기다려. 내가 바로 갈게.”“아니. 난 네가 보고 싶지 않아. 그냥 오지 마. 평생 안 왔으면 좋겠어.”“시연아, 화난 건 알겠는데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은 내가 반드시 꼭 설명해 줄게.”김시연은 그 말을 듣고 입을 삐죽였다.“할 말 없으면 끊을게.”부모님이 목숨 걸고 이엘리아를 지켜주는 상황에 연도진이 할 수 있는 설명 따윈 없다.김시연은 이미 그에게 아무런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았다.“잠깐만.”그녀의 무심한 말투를 들은 연도진은 가슴이 미어졌다.김시연은 이제 그에 대한 믿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연도진은 노력한다면 반드시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왜?”“앞으로 촬영 현장에서 무슨 일 있으면 승기 찾아가. 도와줄 거야.”그 말에 김시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승기? 설마 그 어시스턴트를 말하는 건가?’“알겠어. 끊을게.”김시연은 연도진에게 말
‘얼른 연도진한테 전화하지 않고 뭘 망설이는 거야. 아까 그렇게 화냈는데 지금 얼마나 속상하겠어. 이엘리아는 이엘리아고 연도진은 연도진이잖아. 이엘리아의 잘못은 연도진의 탓으로 돌리는 건 너무하잖아. 연도진은 널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이엘리아는 연도진의 동생이야. 탓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지 생각해 봐. 이엘리아는 연도진이 필라에 있는 상황에서도 이런 일을 꾸몄는데 앞으로 무사할 것 같아? 차라리 이번 기회에 완전히 연도진랑 헤어지는 게 나아.’김시연은 핸드폰을 꺼내 통화 기록 맨 위에 있는 번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막 누르려던 직전에 멈췄다.다운이 비밀로 해달라고 얘기했으니 당분간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한편으로는 앞으로 연도진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필라시.이엘리아는 이미 퇴원했다.집에서 연도진을 본 이엘리아는 마치 귀신이라도 만난 듯 겁을 먹었고 어쩔 수 없이 서희수는 연도진에게 당분간 다른 곳에서 지내라고 했다.연도진은 흔쾌히 동의했다.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쥔 이엘리아는 한껏 기쁨을 만끽했고 부모님 역시 그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오직 연도진만이 갈 곳 없는 유기견처럼 이리저리 치이는 신세다.겉으로는 이엘리아의 편을 드는 것 같지만 서희수도 남몰래 마음속으로는 연도진을 걱정하고 있었다.정신과 의사의 제안에 따라 열심히 약을 복용하며 치료를 받았지만 며칠 동안 지켜보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이엘리아는 오히려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순간 그녀는 연도진의 말이 떠올랐다. 얼마 전 연도진은 권위 있고 명성이 높은 심리학자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엘리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서희수는 그분을 모시고 싶었고 연도진은 역시나 흔쾌히 동의했다.동생이 빨리 회복하길 바라며 최선을 다해 돕는 연도진의 모습을 보니 이엘리아가 이렇게 된 게 어쩌면 연도진과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심리치료사는 바로 다음 날 필라시로 날아와 윌슨 부부를 만났다.그는 허탈하다는 듯
웃음기조차 없는 헨리의 진지한 표정은 일의 심각성을 증명하는 듯했다.“그럴 리가 없습니다.”서희수는 그의 전문성을 의심하여 단호하게 부인했다.“농담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손목을 그어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은 뻔한 아이예요. 이게 어떻게 연기일 수 있죠?”그 말을 들은 헨리는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제 소견에는 그 어떤 과장이나 추측도 없습니다. 자살하고 싶어서 손목을 그은 환자를 제가 처음 봤을까요? 수많은 사람을 거쳤지만 이엘리아 씨 같은 반응을 보이신 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엘리아 씨는 저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세한 표정 변화, 눈빛, 행동까지 관찰해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입니다. 손목을 그은 건 맞지만 사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을 겁니다.”“의사 선생님이 직접 말씀해 준 거예요. 저도 며칠 동안 병간호를 했고요.”서희수는 여전히 확고했다.“그 의사분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죠. 이엘리아 씨가 만약 조금의 의학 지식을 알고 있다면 손목을 어느 정도 그을지조차 계획했을 겁니다. 단언컨대 지금은 연기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서희수는 기분이 언짢았다.“거짓말을 하는 의사 선생님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그쪽도 지금 거짓말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요?”표정이 돌변한 헨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사모님, 제 직업윤리와 존엄을 모욕하는 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제 소견을 믿지 않으실 거면서 왜 카이사르 씨에게 모셔 오라고 부탁하신 거죠?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잠시만요.”윌슨은 떠나려는 헨리를 다급하게 붙잡았다.“내 아내가 딸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실례를 범한 것 같군요.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고 이쪽에 앉아서 천천히 얘기해 봅시다. 이렇게 급하게 모셔왔다는 건 그만큼 헨리 씨를 높게 평가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헨리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카이사르 씨의 체면을 봐서라도 이번 한 번은
‘카이사르 때문에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어 보복하려고 이런 일을 꾸민 건가?’서희수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애썼다.그녀는 이엘리아가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이 일로 카이사르를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정말로 아픈 걸 수도 있잖아.”윌슨은 옆에서 끊임없이 타일렀다.“진실을 알고 싶은 거면 아주 간단해. 이엘리아 그 방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면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알게 될 거야.”“하지만 그건 사생활 침해가 아닐까요?”서희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우리에게 다른 방법은 없어. 만약 아픈 게 사실이라면 혹시라도 자해하게 된다면 제때 발견할 수 있으니 좋은 거잖아. 어차피 비밀번호는 당신만 알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노출될 걱정은 안 해도 돼.”서희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동의를 받아낸 후 윌슨은 앨런에게 부탁해 최신 초소형 카메라와 사용 설명서를 손에 넣게 되었다.동시에 서희수는 헨리를 찾아가 부탁했다. 그는 치료 명목으로 이엘리아를 다실로 불러냈고 그 틈을 타 윌슨과 서희수는 이엘리아의 방에 카메라를 설치했다.매번 식사 시간이 되면 도우미가 이엘리아의 음식을 방으로 배달해 줬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저녁 식사 30분 후에 서희수는 평소처럼 물 한 잔과 알약들을 들고 이엘리아를 찾아갔다.이를 먹은 이엘리아는 곧바로 하품하며 눈을 비볐다.“엄마, 졸려서 자고 싶어요.”“그래. 푹 쉬어. 내일 보자. 잘자.”이엘리아의 방에서 나온 서희수는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컴퓨터에는 모니터링 화면이 떠올랐는데 그 어디에도 이엘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옷방이나 화장실에 갔을 수도 있다며 서희수는 최대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내적 갈등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다.만약 옷방에서 잠옷을 갈아입고 나온다면 정말 졸리고 아파서 자는 걸 수도 있기에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화장실에서 약을 토해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건강하다는 걸 증명했으니 그
헨리가 다시 방으로 돌아간 후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서희수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어떡해야 하죠?”이엘리아에게 전부 다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얘기하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모든 잘못을 인정한 후에는 어떻게 이엘리아를 대해야 할지조차 몰랐다.생각하면 할수록 서희수는 머리가 점점 아파졌다.“내일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 오늘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일단 카이사르부터 불러오는 게 어때?”서희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다가 이엘리아의 어린 시절부터 모든 성장 과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이엘리아를 낳을 때 사고가 생겨 카이사르가 실종되었다.서희수는 그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고 초반에 아이를 찾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탓에 몸과 마음 전부 망가져 갔다.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속의 뜨거운 희망은 서서히 식어갔고 비슷한 아이를 봤다는 제보를 듣고서도 예전만큼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하여 서희수는 카이사르에 대한 모든 관심한 사랑을 이엘리아에게 줬고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설령 공부에 재능이 없다 한들 혼내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자라는 거로 만족한다며 한없이 관대했다.어쩌면 이런 관대함이 지금의 이엘리아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자녀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한 건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과 동일하다.동시에 서희수는 7, 8년 카이사르를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이미 실종된 지 20년이 되었기에 두 사람은 애초에 그 어떤 희망도 품지 않았다. 잔뜩 기대하고 갔다가 허무하게 돌아오는 경우가 다수였기에 열정은 점점 식어갔고 실망만 잔뜩 쌓였다.아이를 찾기 위해 투입됐던 인력이 점점 줄어들었지만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결국 소수의 인원이 남았지만 그들은 물러서는 게 아닌 의지력 하나만으로 끝까지 수색했다.그러다가 강남에서 카이사르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서희수의 마음은 그리 동요하지 않았다.나중에 제보자가 유전
카이사르가 어려서부터 필라에서 자랐다면 지금처럼 성숙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이날 밤, 서희수는 많은 감정을 느꼈다.옆에 있던 윌슨도 마찬가지였다.다음날 서희수는 연도진을 집으로 불러들이며 아예 들어와서 살라고 제안했다.그러자 연도진은 주뼛거리며 입을 열었다.“헨리 씨한테 들었어요. 이엘리아는 아마 저 때문에 이런 일을 꾸몄을 거예요. 제가 옮겨온다면 아마 더 싫어할 수도 있어요.”“이런 건 걔가 혼자 결정하는 일이 아니잖니.”지난 며칠 동안 남보다 못하게 카이사르를 대했던 서희수는 죄책감이 밀려왔다.“이엘리아는 아직 저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죠?”서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아직 몰라.”어쩌면 이 상황을 정리해 줄 악역이 필요하여 연도진을 부른 걸 수도 있다.서희수는 이엘리아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단호하게 내쳐낸 용기가 없었다. 마음 독하게 먹었다면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었을 텐데 질질 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연도진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는 못 잡는 거면 저한테 맡겨주세요.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일종의 정신병이거니 당분간 헨리 씨한테 치료를 받는다면 좋아질 거예요.”“그렇게 괴롭혔는데 넌 이엘리아가 밉지도 않니?”“그럴 리가요. 제 동생이잖아요. 동생이랑 싸워서 좋을 게 없잖아요.”“너 같은 오빠가 있으니 정말 든든하구나. 내가 대신 고마워. 어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애 뒤치다꺼리를 해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이엘리아가 치료받으러 가면 어머니도 한적한 곳에서 푹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서희수는 흐뭇한 눈빛으로 연도진을 바라봤다.“그래. 너는? 언제 시연이를 데려올 거니? 걱정 마,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고 단지 한번 보고 싶구나.”“시연이가 최근에 안 좋은 일을 겪어서... 촬영장에 숨어있던 괴한 때문에 동료 한 명이 다쳤는데 그분은 시연이를 대신해서 물건 가지러 갔다가 습격을 받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