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말했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걱정된다면 남편분과 함께 오셔서 전반적인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습니다. 임신을 준비하는 단계에서는 사전 검진이 중요하거든요.” 남초윤이 다소 초조해 보이자 의사는 다시 한 번 위로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세요. 임신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니 너무 조급해할 필요 없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 군달 로펌 육지율은 막 중요한 의뢰인 두 명을 만나고 나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회의를 준비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휴대폰에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는데 배현수가 보낸 거였다. 화면을 확인한 그는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너 무력 정자증이라며?] [대체 누구한테 들은 거냐?][??] 물음표가 연속으로 올라왔는데 육지율은 당황했다. [진정해, 이거 큰 병도 아니고 잘 치료하면 충분히 나을 수 있어.] 이 말에 육지율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거칠게 소리쳤다.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야! 그 인간을 끝까지 법정에 세울 거라고!” 전화기 너머로 그의 고함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렸다. 배현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휴대폰을 조금 멀리 둔 채 웃으며 물었다. “정말 네 명예를 훼손하는 말일까? 사실일지도 모르잖아?” “미친... 나는 강하면 강했지 무력할 리가 없다고! 내가 약해 보이냐?” 이 말은 남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민감한 주제였고 육지율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현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하거나 약하거나, 겉으로는 알 수 없지. 내가 너랑 잔 것도 아니니 알 길이 없잖아.” “...야, 배현수! 그게 무슨 소리냐? 네 친구가 이런 모함에 시달리는데 너는 오히려 날 찔러대다니! 우리 절교야!” 이건 절교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배현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좋아, 절교하자. 그런데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는 못 알게 될
육지율은 살벌한 기세로 제일 병원의 남성 클리닉에 도착했다.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전문의가 안경을 쓰며 그를 한 번 훑어보더니 물었다. “젊은이, 어디가 불편한가? 어떤 검사를 하고 싶나?” 남자의 자존심은 목숨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무력 정자증’이라는 단어는 육지율에게 마치 폐에 꽂히는 비수처럼 느껴졌고 입에 담는 것조차 불쾌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얼굴은 어두웠지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물었다. “정자가 정상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죠?” “뭐라고?” 노년 전문의는 잠시 멍하더니 상황을 이해하고 대답했다. “문제가 있다는 소린가? 정액 검사를 하려는 거지?” “...” 육지율의 얼굴은 더 검게 변했다. “아니요. 문제는 없는데 검사를 해보고 싶어서요. 증명하려고요.” 전문의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익숙한 듯이 대답했다. “남성 클리닉에 오는 사람들은 다들 자네처럼 문제없다고 우기지. 검사 전에야 누구나 문제없다고 말하지.” 문제가 정말 없으면 검사를 하러 올 이유가 있을까?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 육지율은 미간을 찡그리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말씀하시고 검사만 해주세요. 제가 문제 있다면 선생님 성씨로 바꾸죠.” 전문의는 기가 차서 웃으며 말했다. “젊은 친구! 내가 이 나이에 갑자기 아들을 얻게 생겼네? 너무 화를 내면 정자에도 안 좋아.” “...” 이 전문의의 입이 이렇게 독할 줄이야. 그의 뒤에는 ‘인심인술’이라는 글씨가 적힌 깃발이 걸려 있었다. 육지율은 그 깃발을 뜯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 남초윤은 오늘 일찍 퇴근했다. 그녀의 결혼 지참금으로 들어왔던 카이엔을 이미 팔아버린 덕분에 교통수단은 이제 고급 차에서 지하철로 바뀌었다. 대제주의 저녁 출퇴근 시간은 정말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몇 번이나 겨우겨우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던 남초윤
그날 밤, 육지율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사진 속에는 다름 아닌 병원의 검사 보고서가 떡하니 있었다. [내 정자는 멀쩡하다고! 누가 또 헛소문 퍼트리면 정말 정자에 문제가 생길 줄 알아!] 이 SNS 게시물은 당당하게 모두에게 공개된 상태였다. 배현수: [봤다. 근데 너무 요란하게 올리면 오히려 가짜 보고서로 진실을 감추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조유진: [축하해요! 얼른 후대 보시길 기원해요!] 유설영: [네가 이런 검사를 왜 해? 만나본 사람은 다 알 텐데.]강란: [정자 질이 좋으면 뭐해? 넌 애도 안 낳을 건데, 상관없지.] 육성일: [삭제해라! 이게 뭐 하는 짓이냐!] “...” 이제 전 세계가 육지율의 정자 상태를 다 알게 됐다. 남초윤은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육지율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배현수의 댓글에 맞대응하고 있었다. [너야말로 발기부전이거든?]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젠장! 저 입은 독약이라도 발랐나 봐!’ 육지율은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침대 옆 협탁에 던졌다. 고개를 돌리자 남초윤이 샤워를 끝내고 깨끗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분이 좀 풀린 육지율은 다리를 툭툭 두드리며 손짓했다. “이리 와요.” 남초윤은 아까 SNS에서 벌어진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갔고, 육지율 앞에 거의 다 왔을 때 그가 갑자기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육지율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평소에 유진 씨랑 무슨 이상한 얘길 하길래 이런 주제까지 가게 된 거예요? 그리고 내가 침대에서 어디가 부족했길래 밖에서 날 그렇게 까요?” “...”‘아니야! 진짜 아니야!’ 남초윤은 당황하며 변명했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유진이가 우리가 왜 아직 애가 없는지 궁금해 해서요. 그러다 나온 말이에요. 배 대표랑 한 번에 임신됐는데 지율 씨는 왜 그러냐고 하더라
육지율이 돌아서려는 순간 남초윤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는 살짝 눈썹을 들며 남초윤의 상처 난 발을 보았다.‘정말로 발이 아팠던 거야?’ 육지율은 다시 침대에 앉아 그녀의 발을 살피기 위해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았다. 남초윤은 무의식적으로 발을 움츠리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육지율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상처 부위를 누르자 남초윤은 아픈 듯 ‘윽’ 소리를 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하이힐 때문에 생긴 상처예요.” 그녀는 원래 출퇴근할 때 차를 타고 다녀서 하이힐을 신어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잡지사에서 지하철역까지 거의 천 미터를 걸었고, 중간에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육지율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발이 아픈데도 하이힐을 신었어요?” “저희 편집장이 깐깐한 사람이잖아요. 회사에 큰 고객이 올지도 모른다면서 옷차림에 신경 쓰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하이힐을 신으면 예쁘잖아요. 예뻐지려면 고생은 감수해야죠.” 운동화가 편하긴 했지만 남초윤은 그게 싫었다. 마치 이 엉망진창인 결혼 생활처럼. 분명히 미련을 둘 게 없는 관계인데도 육지율의 얼굴만 보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육체적으로 끌리는 감정은 가장 치명적이면서도 제어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녀가 편집장에 대해 처음으로 불만을 털어놓는 걸 듣고는, 육지율은 그녀가 그만두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상사가 싫으면 그만둬요. 내가 초윤 씨를 못 먹여 살릴까 봐? 그 일도 별 발전 가능성 없어 보이는데.” 남초윤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신이 날 먹여 살릴 수 있는 것과, 내가 나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건 별개의 문제예요.” 게다가 그가 평생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사 그가 평생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한다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가 평생 동안 오직 자신만을 책임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걸. 육지율
“...” 남초윤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화난 듯이 소리쳤다. “누가, 누가 참지 못한다고! 육지율 씨가 더 급한 거 아니에요?”육지율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욕실에 안 갈 거예요?” “안 가, 안 가, 안 가요! 당신이나 가버려!” 남초윤은 베개를 들어 그에게 던졌다. 육지율은 여유롭게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러 갔는데 정말 얄밉기 짝이 없었다. 남초윤은 침대에 기대어 누워 휴대폰을 잠시 만지며 방금 어지러웠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때, 육지율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 했지만 전화가 꺼지자마자 다시 울렸다. 뭔가 중요한 고객의 전화일 것이라 생각한 남초윤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고, 화면에는 ‘유설영’이라는 이름이 뜨고 있었다. 누가 전화했는지 뻔했다. 남초윤은 왠지 모르게 전화를 받았다.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설영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지율아, 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어? 어디 아픈 거야? 혹시 너 초윤 씨에게 아무 끌림도 없는 거야?” 남초윤은 기가 막혀 답했다. “지율 씨가 나한테 끌림이 있든 없든, 그쪽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남초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유설영은 마치 태세 전환이라도 한 듯,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초윤 씨였어요? 왜 남의 휴대폰을 몰래 훔쳐서 고객 전화를 받는 건데요?” 남초윤은 비웃으며 말했다. “첫째, 전 육지율 씨 아내에요. 몰래 보는 게 아니라고요. 둘째, 대체 어떤 ‘고객’이 한밤중에 유부남에게 전화 걸어서 아내에게 끌림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건데요?” 유설영은 남초윤의 비꼬는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맞아요. 전 엄밀히 말해 정식 고객은 아니죠. 사실 저랑 지율이는 2년간 사귀었던 사이였고, 고등학교 동창에다 같은 반 친구였거든요. 만약 지율이 할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고등학교 졸업 후 지율이는 나랑 영국 유학을 갔을 거예요. 그러니까 남초윤 씨, 우리 사이는 아주
결혼이라는 무덤에 발을 들이기 전에 육지율은 연애를 몇 번 했었고 이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젊고 혈기왕성할 때는 심지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밤 비행기를 타고 5,000마일이 넘는 거리를 날아가 한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한가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일도 없고, 돈은 넘쳐나서 전 세계를 누비던 시절이었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다 둘러보고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봤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식으로 시간을 들여 밤 비행기를 타고 연애를 하러 간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조건이 나쁘지 않은 사람들과 몇 번 사귀었고 결혼까지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서로 나이가 어렸다. 그를 포함한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이성적이고 가정의 결정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물론 그의 조건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그가 상대를 선택하는 편이었다.유설영과 연애하던 시절이 바로 결혼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던 때였다. 유설영이라는 존재 때문에 결혼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저 결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설영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이제는 기억도 희미하지만 그때는 어느 정도는 좋아했던 것 같다. 육지율은 거짓말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초윤을 무릎 위에 앉히며 솔직하게 말했다. “좋아하긴 했지만 그건 다 과거일 뿐이에요.” 그는 결코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현재와 미래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남초윤은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왜 유설영 씨랑 결혼하기 위해 할아버지와 끝까지 맞서지 않았어요?” 그가 홧김에 자신과 결혼한 결과를 보면 육지율이 결심만 한다면 할아버지가 아무리 강경해도 결국은 그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유설영은 뉴욕으로 가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싶어했어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말이에요.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지, 미래를 약속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늘 당장의 모
남초윤이 중얼거렸다. “못 데려가면 뭐 어때.” 육지율은 눈을 내리깐 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래요? 안 무서우면 왜 과일칼을 들고 내 사무실에 와서 날 죽이려 했는데요? 내가 빨리 피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침대에서 초윤 씨를 만족시키지도 못했을 걸요?” 그때 남초윤은 겁도 없이 과일칼을 숨겨 들고 그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그를 보자마자 바로 그의 하반신을 노렸다. 육지율은 그때 놀라 얼어붙었다. 겨우 잠깐 같이 잔 거 가지고 이렇게 화낼 일인가? “...” 과거를 들킨 남초윤은 얼굴이 붉어졌고, 부끄럽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하반신을 제대로 못 관리하고 아무하고나 자대서 그런 거잖아요! 날 안 건드렸으면 우리 아빠도 당신이랑 결혼시키려고 안 했을 텐데, 왜 날 건드린 거예요?” 육지율은 짓궂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냥 자는 맛이 있어서.” “뭐라고요?”‘이 개같은 남자! 정말 진지할 때가 없어요!’남초윤은 화가 나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육지율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그녀 위에 몸을 얹었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그는 잘생긴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초윤 씨, 가정 폭력은 안 돼요. 결혼하고 싶다면 그냥 이쁘게 말로 부탁하면 되잖아요. 그렇게까지 흥분할 필요는 없지 않나?” 육지율의 나른한 목소리는 낮고 자극적인 톤으로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남초윤은 순간 몸이 저릿해졌다. “누, 누가 당신한테 결혼하자고 했어... 으!” 깊게 파고드는 그의 키스에 그녀는 몸을 떨며 저항하려 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아련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육지율...” 그는 단단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꽉 잡고 점점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이걸 원하던 거 아니였나?” “...” 그렇다. 그녀는 이걸 원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열심일 필요는 없었지만... 육지율은 침대 머리
육지율은 먼저 아침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춰서 물었다. “어제 왜 지하철 입구에서 나 기다렸어요? 요즘 차 안 타는 것 같은데, 차는 어디 있어요?” 그는 마당을 한 번 훑어보았지만, 남초윤의 보기 흉한 색의 카이엔은 보이지 않았다. 남초윤은 그가 이걸 눈치챘다는 게 의외였는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 “전에 그 차 색깔이 너무 못생겼다고 불평한 적 있잖아요. 그래서 팔았어요.” “그럼 그게 초윤 씨가 빨간 하이힐을 신고 지하철에 끼어 들어가다가 발이 까진 이유였어요?” “...” 육지율은 다시 돌아와서 식탁 의자를 끌어당기고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남초윤은 여전히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왜 아직도 안 가요?” 육지율은 무심하게 말했다. “얼른 먹어요. 내가 잡지사까지 태워줄게요.” 남초윤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지율 씨 로펌이랑 우리 잡지사는 같은 길이 아니잖아요.” 서로 몇 블록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육지율은 조용히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정말 그 다리로 출근 시간대 지하철에 탈 수 있을 것 같아요?” “...” 사실이었다. 남초윤은 빠르게 아침을 마치고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평소처럼 빨간 하이힐을 신으려던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아침에는 좋은 차로 가더라도 저녁에는 다시 지하철을 타야 할 텐데. 결국 이 하이힐은 부드러운 카펫 위를 걷는 부잣집 사모님에게나 어울리는 거지, 오래 걷기 힘들 것 같았다. 그녀는 하이힐 대신 평소에 신는 편안한 플랫슈즈를 꺼내 신으려 했다. 그때 육지율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은 듯 말했다. “좋아하는 신발이면 그냥 신어요. 저녁에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의 눈이 반짝였다. “저녁에 약속 없어요?” 그는 보통 밤 9시나 10시가 돼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고 때로는 새벽까지 바쁘기도 했다. 육지율은 특별한 설명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요즘은 안 바빠요.” 그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