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율이 물었다.“짐 다 챙겼어요? 여권도 잊지 말고 챙기세요.”남초윤은 2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갈래요.”이미 캐리어에 정리해 넣었던 옷들을 다시 옷걸이에 걸기 시작했다.육지율은 약간 짜증이 난 듯 물었다.“또 왜 그래요?”남초윤은 삐친 듯 대답했다.“그냥 가기 싫어졌어요. 안 되나요?”육지율은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육지율의 얼굴에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 눈동자에는 뚜렷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육지율은 남초윤 앞에 서서 검은 눈동자를 반쯤 내리깔고 냉담하게 남초윤을 응시했다. 주변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변덕스러운 것도 이유가 있어야죠.”이유? 육지율이 무슨 자격으로 이유를 묻는 거지?남초윤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육지율을 노려보았다.“지율 씨, 나를 가지고 노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남초윤이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과는 달리 육지율은 그저 살짝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내가 무엇을 가지고 놀았다는 거죠?”“설날 밤에, 당신은 나에게 유설영과 더 이상 연락을 주고받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틀도 안 되어 당신은 유설영의 스튜디오 법률 고문이 되었잖아요. 왜 날 속였어요?”남초윤은 눈가가 희미하게 붉어지며 육지율을 비난했다.육지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고작 그거 때문이에요?”“...”고작 그거 때문에?남초윤은 자신이 참 우습게 느껴졌다.남초윤은 그들 사이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육지율은 그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남초윤은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이 떨렸고 두 팔로 자신을 감싸 안으며 감정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를 애써 억누르려 애썼다.육지율은 남초윤을 달래려 손을 뻗었지만, 남초윤은 그 손을 단호하게 뿌리쳤다.“만지지 마세요!”남초윤이 육지율의 손을 뿌리치면서 손이 드레스룸의 옷장에 부딪혔다. 손등에 통증이 조금씩 느껴졌다.육지율은 손을 거두며 얼굴에 자연스럽게 어두운 기색이 드리웠다. 그리고 육지율은 차분하게 해명했다.“우리 사이의
남초윤의 눈에 붉은 핏줄이 서렸다.남초윤은 손가락을 움켜잡으며 조롱하듯 말했다.“지율 씨는 유설영과 업무적으로 연락할 수 있고 저는 성혁 씨와 연락해서는 안 된다고요? 지율 씨, 너무 이중 잣대 아닌가요?”육지율의 얼굴은 어두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남초윤을 냉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유설영은 저에게 과거일 뿐이에요. 다시 만나도 저는 완전히 공적인 태도로 대할 수 있어요. 저는 공과 사를 충분히 구분할 수 있어요.”“초윤 씨가 성혁 씨에 대해 저와 같이 공과 사를 구분하는 태도를 가졌다면 저는 초윤 씨와 그 사람이 업무적인 관계에 간섭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초윤 씨가 성혁 씨를 인터뷰하는 것이 초윤 씨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월급이 오르거나 승진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무 이익도 없고 오직 골치 아픈 일만 늘어나는 건데 왜 그렇게 불필요한 일에 휘말리려 하는 거죠?”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려 비웃으며 물었다.“그러면 지율 씨와 유설영의 협업의 의미는 뭐죠? 업무를 빌미로 사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건가요?”육지율은 어이없어 웃음을 터뜨리고는 이를 갈며 말했다.“유설영은 단순히 많은 돈을 주는 게 아니라 우리 로펌에 더 많은 유명인을 소개해 줘요. 지금 초윤 씨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좀 차분해진 후에 다시 이야기하죠.”바보가 아닌 이상 유명인들의 위탁을 포기하지 않는다.몇 개의 공문을 작성하고 법률 지원을 해주며 가끔 악성 팬들에게 법원 소환장을 보낸다. 그리고 명예훼손 같은 소소한 소송은 거의 항상 승소한다.이런 간편하고 유익한 비즈니스를 포기할 로펌은 없다.남초윤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물었다.“그래서 지율 씨는 유설영과 계속 연락을 유지하겠다는 거죠?”육지율은 떨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사적인 문제로 내 의뢰자와의 계약을 깨는 건 불가능해요.”이런 행동은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직업적 신뢰도도 떨어뜨린다.어느 로펌도 이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는다.이런 선례가 남겨지면 앞으로 군달 로펌은
핸드폰 화면에 ‘본가’라고 뜨자 육지율은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로 강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율아, 빨리 본가로 와봐! 네 장인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 아침 일찍부터 집에 찾아와서 너희 할아버지께 새해 인사를 드리겠다고 하는 거야. 너희 아버지가 그에게 차를 권했는데, 차를 몇 모금 마시더니 갑자기 100억원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지 뭐야! 너희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많이 나셨어! 어떡하면 좋아?”“알겠어요, 바로 갈게요.”...육씨 가문의 본가 거실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하지만 남재원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저는 그저 급히 쓸 돈이 필요해서 사돈한테 잠시 빌리려는 겁니다. 나중에 꼭 갚을게요!”육성일은 남재원을 원래부터 좋게 보지 않았다.더구나 이전에 육지율이 집안 몰래 남재원에게 얼마나 많은 구멍을 메꿔줬는지를 그는 알고 있었기에 이 사돈을 더욱 못마땅해했다.그는 지팡이를 쥐고 소파에 앉아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갚는다니? 무슨 돈으로 갚을 건가? 나중에 지율 그 녀석한테서 돈을 받아다가 우리한테 갚을 생각이겠지?”“어...어르신, 그건 오해입니다!”남재원은 원래 육근우 쪽에서 100억원을 빌리고, 나중에 사위에게서 또 100억원 을 받아서 육근우에게 갚을 생각이었다.그는 사위의 돈은‘효도'를 위해 쓰는 거니 갚을 생각이 없었으며 다만 사돈한테 빌린 돈은 그래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육성일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자 남재원은 순간 당황하여 할 말을 잃었다.육지율과 남초윤은 부랴부랴 본가로 달려갔다.남초윤은 아버지 남재원을 보자마자 눈썹을 찌푸리며 급히 다가가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아버지, 여기는 왜 오셨어요? 도대체 여기는 뭐 하시냐고요!”“지율 할아버지께 새해 인사를 드리고 인삼을 좀 가져왔을 뿐이야. 근데 네가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육성일은 지팡이를 쥐고 옆에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집사는 눈치를 채고 테이블 위의
이 여러 큰 금액의 빚들은 대부분 올해 9월 이후에 빌린 것이었다.남초윤은 10월 초에 블랙카드를 육지율한테 돌려주고 남재원보고 더 이상 돈을 요구하지 말라고 엄하게 말한 바 있었다.‘이게 도대체 다 뭐야?’반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또다시 거의 백팔십억원이라는 큰 금액을 빌려 갔다.장부를 꽉 쥔 남초윤의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아버지, 내가 지율 씨한테 더 이상 돈을 요구하지 말라고 말했잖아요. 왜 제 말을 듣지 않으세요!”남재원은 자신의 행적이 들통나자 딸을 볼 체면이 없어 약간 당황했다.그는 이내 손을 뻗어 딸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아버지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우리 집의 재정 상황을 잘 몰라서 그래. 이제 집에 가서 얘기하자...”남재원은 서둘러 딸을 데리고 육씨 가문을 떠나려 했다.그때, 육성일은 손에 있던 지팡이를 쥐고 돌리면서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율아, 넌 장인어른을 배웅해 드리고 초윤이는 남아라. 이 할아버지가 할 말이 있다.”육지율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이 돈들은 제가 제 장인어른께 자발적으로 드린 겁니다. 초윤이와 상관이 없어요.”육성일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의 눈빛은 시종일관 평온하여 그의 기분을 알 수 없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육지율의 말을 무시한 채 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남초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초윤야, 서재로 따라와.”한 마디 한 마디가 강력한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남초윤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네.”그녀가 육지율의 옆을 지나갈 때 육지율이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그는 눈을 들어 육성일을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할아버지, 남초윤과 저는 아직 부부입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시려거든 제 앞에서 하실 수 있으시잖아요?”육성일은 지팡이를 땅에 가볍게 두드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초윤이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는 걸 원한다면 너도 함께 들어도 돼. 난 너희 두 사람 앞에서 말해도 상관없어. 내가
“너와 지율이 아직 부부 사이고 네 아버지가 육씨 가문의 사돈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도 다 알아. 그가 사채까지 받은 일이 알려지면 육씨 가문에 큰 타격을 줄 거야. 너도 알다시피 지율의 부모님도 지금 중요한 자리에서 일하고 계시고, 네 아버지의 이런 행동은 육씨 가문에...”육성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초윤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지율 씨랑 이혼하겠습니다. 이 빚들은...제가 다 갚기는 어렵겠지만, 조금이라도 갚아보겠습니다.”육성일이 입을 열었다.“초윤아, 이 빚들은 네가 다 갚지 못해. 네가 지율이랑 이혼하면 네 아버지의 회사는 3개월도 버티지 못할 거야. 네 아버지가 육지율에게 진 빚은 천천히 갚을 수 있겠지만 밖에서 진 빚은 그럴 여유가 없을 거야. 그쪽 사람들은 무법자들이라, 정말로 빚을 갚지 못하면 네 아버지나 너의 팔 하나를 가져가는 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할아버지,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요?”육성일은 침착하게 말했다.“지율과 이혼하고 육씨 가문에 아이를 하나 낳아줘. 그러면 이 빚들은 다 없던 일로 해주겠다. 네 아버지가 밖에서 진 빚도 지율이 혼자서는 다 물어 줄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나서서 그 빚들을 처리해 주마. 그쪽 사람들도 지율은 잘 모르지만, 내 체면은 어느 정도 봐줄 테니까.”남초윤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고 눈물이 그녀의 시야를 가려 흐릿해졌다.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왜 저인가요? 저는 이해가 안 돼요...”사실 육지율에게 아이를 낳아주려는 여자는 많았으며 유설영도 그중 한 명이었다. 육성일은 숨기지 않고 말했다.“너와 지율이가 결혼 기간 동안 낳은 아이는 명분도 확실하여 외부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 거야. 지율도 너를 거부하지 않는 것 같고, 네가 임신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다른 여자를 데려와서 지율이와 아이를 낳게 하려면 또 몇 년이 더 걸릴
육성일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 사실 그녀도 어렴풋이 짐작했다.남초윤도 자신이 신데렐라처럼 운이 좋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멍청하지 않다.유리구두 하나 없는 신데렐라에게 육지율이 오래 감정을 쏟을 필요가 있을까?안타깝지만 육성일의 이런 말들은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개와 3년을 지내면 정이 들기 마련이다.하물며 맞은편에는 육지율이라는 사람이다.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움직인 이상 엎질러진 물이나 다름없다.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마치 정해져 있는 것 같다.사랑이 부족한 사람은 사랑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고 늘 더 많이 사랑한다. 그런 사람은 상대방이 조금만 잘해주면 쉽게 함락된다.육지율에게 마음이 흔들리다니, 뭔가 병이 나도 단단히 났다....육씨 저택에서 나온 후 남초윤은 홀로 남씨 집으로 돌아갔다.문명희가 남재원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설날 이튿날부터 육씨 가문에 가서 돈을 빌리면 어떡해요? 당신 늙은 얼굴이야 체면이 필요 없겠지만 윤이가 앞으로 육씨 집안사람들을 어떻게 보라고 그러는 거예요? 시댁에서 평생 얼굴도 못 들고 살면 어떡해요!”말을 하면서 남재원에게 주먹을 날렸다.짜증이 난 남재원은 한참이나 가만히 있더니 손에 든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나도 설날부터 망신당하고 싶어서 간 줄 알아? 당신 그 좋은 사위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빌려주기는커녕 앞으로 다시는 자기에게 돈을 빌리는 전화를 하지 말라면서 독설을 퍼부었어! 어느 집안 사위가 이렇게 날뛰어? 육씨 성을 가진 사람들만 그런 거라고! 채권자들이 집 앞까지 왔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저 사위 아버지에게 가서 손을 내밀 수밖에!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그렇게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일 줄 누가 알았겠어!”문명희가 눈살을 찌푸렸다.“채권자요? 몇 년 전에 이미 그 밑에 있는 부하들에게 돈을 갚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집까지 찾아와 돈을 달라고 하는 건데요?”그 말에 주눅이 든 남재원은 뭔가 감추려
“원래 주식투자가 취미였어. 그런데 시장이 안 좋아 갑자기 많이 떨어졌어. 그래서 이를 악물고 주식을 보충했지. 이것도 다 당신 그 사위 탓이야, 그 집안 지위로는 주식시장에 대해 빠삭할 텐데 어떤 주식을 사는 것이 적당한지 알려달라고 하면 늘 나를 상대하지 않았어! 오히려 비웃었지. 주제넘은 짓을 한다고. 네가 말해봐. 너무한 거 아니야? 본인도 주식하면서 장인어른한테 좀 알려주면 어때? 육지율과 그 친구 배 대표 모두 주식에 대해 잘 알잖아. 조금이라도 정보를 입수하고 내가 걔네들 따라 주식에 투자하면 손해 볼 일은 없었잖아?”남재원은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굳은 얼굴로 핑계를 늘어놓았다.“카지노에 간 것도 자전거를 오토바이로 변신시키기 위해 간 거야. 너희 두 모녀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내가 왜 카지노에 가겠어.”남초윤은 씩 웃었다.말인지 막걸리인지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남초윤은 한 마디 반박도 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밖에서 진 빚이 대체 얼마인데요?”남재원이 머뭇거리며 말했다.“얼마 안 돼. 얼마 전에 좀 갚았으니 이제 몇억 원 정도면 돼.”남재원은 아직도 잘못한 줄 모르고 거짓말만 하고 있다.남초윤이 일부러 따지고 들었다.“지율 씨에게 진 빚만 몇백억이 넘어요. 남재원 씨, 당신 그 썩은 빚을 나는 갚아 줄 생각도 갚을 수도 없어요. 사채업자들이 나와 우리 엄마를 찾지 못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 데리고 같이 죽을 테니까!”“육씨 가문이 얼마나 큰데 내 빚도 갚지 못해? 사위에게는 껌값이잖아? 가서 한번 부탁해봐. 윤이야, 이 아빠가 그동안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니? 어렸을 때부터 네가 원하는 거면 다 사줬잖아. 그러니까 아빠 지금 힘들 때 네가 좀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남재원은 그녀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의자에 앉아 있는 남초윤의 안색은 점점 더 새하얘졌고 많이 힘들어 보였다.“아빠, 지율 씨와 이혼할 거예요. 이번엔 진짜예요. 더 이상 아빠를 도울 수 없어요. 육씨 가문도 앞으
빈털터리로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정판 가죽 가방, 장롱 가득히 진열된 명품 브랜드의 옷들과 주문제작품들, 오래 걸을 수 없는 빨간 바닥의 하이힐들... 원래 모두 그녀의 소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3년 동안 이것들을 사용하면서 확실히 어느 정도 감정이 생겼지만 아무리 감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이것들의 주인이 아니다. 물건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줄 뿐이다.어려운 건 이혼하기 전에 육씨 가문을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원래 모든 것들에는 가격이 있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즐기다가 어느 날 자리를 털고 떠나려 한다면 긴 청구서가 눈을 찌를 것이다.육성일이 서재에서 그녀에게 말한 일에 대해 그녀는 남재원과 문명희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만약 남재원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녀더러 빨리 임신해 아이를 낳은 후 육씨 가문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육씨 가문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지 않았을 것이다.만약 육성일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남재원은 이유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남초윤은 차갑게 말했다.“이혼은 내 일이예요. 신경 안 써도 되니 사채 빚이나 어떻게 갚을지 고민해 보세요.”말을 마친 남초윤은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남재원은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말했다.“집과 차를 팔면 너는 길바닥에 나앉아야 해! 육지율에게 가서 싹싹 빌어, 그래도 3년 동안은 부부였잖아!”계단을 올라가던 남초윤은 씩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무슨 자격으로 부탁할 수 있는데요?”부탁해서 소용이 있다면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 부탁은 유설영과 연락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그런데 소용이 있었는가?앞으로 다시는 누구에게도 부탁하지 않을 것이다.남재원은 그래도 체념하지 않고 목을 쳐들며 말했다.“너의 그 친구는? 걔 남자 친구가 SY그룹의 배 대표, 아니야? 배 대표가 육지율보다 돈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가서 물어봐? 혹시 알아? 마음이 착한 사람이면 너의 말을 들어줄지도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