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수의 핸드폰은 계속 꺼져있는 상태였다.시간을 계산해 보면, 그는 이미 도착한 지 한참이 되었을 시간이었다.하지만 무슨 이유에서 핸드폰이 계속 꺼져있을까?뉴스의 내용을 생각하며, 조유진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셀리나는 더 이상 조유진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사모님, 흥분하지 마세요. 일정이 늦어졌을 수도, 혹은 시차 때문에 적응 중일 수도 있잖아요. 아직 상태가 불안정하신데 감정이 격해지면 안 돼요.”이렇게 큰일을 마주했는데, 어떻게 평온한 마음을 유지한다는 말인가?조유진은 거실로 가 여권을 찾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서랍 안에 넣어뒀는데 말이다.조유진은 서랍을 뒤지며 물었다.“셀리나, 내 여권 못 봤어?”“사모님, 저는... 저는 못 봤습니다.”셀리나가 말을 더듬었다.조유진이 어리둥절한 상태로 고개를 들어 캐물었다.“내 여권 가져갔어?”셀리나가 어찌 감히 그런 일을 하겠는가. 그녀는 다급히 해명했다.“사모님, 아니에요. 다른 곳에 뒀을 수도 있죠, 저도 같이 찾아볼게요!”하지만 조유진은 분명 모든 여권과 증명서를 이곳 서랍에 두었다. 이틀 전에도 봤었다.위치를 잘못 기억할 리는 없었다.중요한 여권과 증명서를 어떻게 아무렇게나 놓을 수 있었을까.셀리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조유진이 차갑게 말했다.“여권 돌려줘. 안 주면, 재발급받을 거야.”조유진의 단호한 태도를 본 셀리나는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사모님께서 여권 재발급을 받으러 가신다면 제가 운전해 대사관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분실 신고를 하고 재발급을 받으려면 최소한 일주일, 아무리 급하게 처리한다고 해도 삼일은 걸렸다.아침, 배 대표가 떠나기 전, 사모님의 여권과 증명서들을 그녀에게 맡기며 절대 돌려주지 말라고, 귀국시켜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전공 석화 사이, 조유진은 무엇인가 깨달은 듯했다.그녀는 온몸이 그 자리에 굳어 있었고, 두 눈은 빨갛게 달아올라 입술을 짓씹으며 웃기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다이아몬드 반지가 바닥에 팽개쳐졌다. 경도가 강한 다이아몬드와 더불어 힘껏 던지다 보니 나무 바닥에 작은 홈이 파였다.빛을 잃은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는 그렇게 외롭게 구석에 박혔다.셀리나가 앞으로 나서며 위로하려 했다.“사모님...”그 호칭을 듣자, 조유진은 바로 말을 잘랐다.“사모님? 내가 무슨 사모님이야.”그녀는 배 대표의 사모님이 아니었다.그녀와 배현수는 정당한 명분이 없었다.순진하게도 몇 마디의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갔다.셀리나는 한편에서 속수무책으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하면 할수록 실수만 쌓이고, 조유진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았다.조유진이 쓴 웃음을 지었다.그녀의 처지가 배현수가 해외에 숨겨둔 정부와 무슨 다를 바가 있다는 말인가.정말 다른 사람과 결혼할 예정이라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한다면, 그녀도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그에게 매달리지 않을 터였다.하지만 배현수는 왜 이런 방식을 선택해 그녀를 능욕하는 것일까?심지어 어젯밤 깊은 스킨십을 나눌 때,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키스하며 수없이 그녀에게 속삭였다.“유진아, 나는 네 거야. 너만의 것이야.”다른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다.배현수도 뱉은 말을 안 지킬 수 있구나, 배현수도 사람을 솎 일수 있구나 싶었다.조유진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손톱을 손바닥 깊이 박아 넣었다.‘거짓말쟁이, 정말 거짓말쟁이야!’온 세상 사람들이 배현수가 다른 사람과 결혼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녀만 제일 마지막에 알게 되었다. 큰 그림이었다.어젯밤, 배현수가 그녀에게 SY의 우 씨 영감의 본처는 대제주시, 첩은 미국에 있다고 한 사실이 떠올랐다. 어느 날 그의 부인이 갑자기 스위스로 찾아와 어린 선유를 납치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우스웠다.고상함의 대표인 조유진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첩이 되겠는가.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더욱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셀리나, 여권 재발급 받으러 갈 거야. 귀국할 거야.”
조유진은 임신한 지 4주밖에 되지 않았다자궁 적출술은 매우 빨랐다. 그녀는 30분 만에 수술실에서 나왔다.마취가 끝난 후, 그녀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누워있었다.셀리나가 그녀의 병상을 지켰다.“사...”사모님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셀리나는 의도적으로 말을 바꿨다.“아가씨, 선유는 아직 집에 있어요. 기분도 안 좋으실 텐데 선유를 데리고 와서 말동무라도 하게 해드릴까요?”조유진이 고개를 저었다.“혼자 있고 싶어. 선유는 아직 어리니 이런 일은 알면 안 좋아.”“그러면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주방장한테 얘기해서 만들어 올게요. 금방 수술을 마쳤으니, 체력도 떨어지고 영양 보충하셔야죠.”“그냥 가볍게 죽이나 먹자.”“알겠습니다.”한참 침묵을 지킨 조유진이 쉰 목소리로 불쑥 물었다.“배현수, 이제는 연락돼?”셀리나가 숨을 들이 삼켰다.조유진이 수술실로 들어간 이후, 셀리나는 계속하여 배현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핸드폰이 꺼져있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셀리나는 조유진이 충격을 받을지 걱정되어 결과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다.셀리나는 계속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배 대표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핸드폰이 계속 꺼져있는데, 어려운 일을 처리하고 있는 것 같아요.”조유진이 실망한 표정으로 가볍게 웃었다.“됐어. 어차피 아이도 유산됐는데. 연락이 닿으면 또 뭐해.”그녀가 제일 필요로 할 때, 배현수는 그녀의 옆에 없었다.그녀의 옆에 있었던 사람은, 그가 배정해 준 셀리나 집사뿐이었다.조유진이 임신의 기쁨을 공유하기도 전에, 아이는 곁을 떠났다.올 때도, 갈 때도 뜻밖이었다.조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납작한 복부를 쓰다듬었다.이미 잃은 아인데, 아이의 아빠가 모른다고 무슨 일이 생길까?조유진이 그를 미워할 수 있다면, 그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는 기꺼이 이 소식을 그에게 알려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배현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다
“너... 너 뉴스 본 거야?”“응, 봤어.”똑똑히 또박또박 봤다.엄창민의 첫 반응도 자연스러운 위안이었다.“백소미가 말한 게 사실이었어. 하지만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우선 속상해하지는 마.”“위로하지 않아도 돼, 오빠. 나 귀국하고 싶어. 그런데 배현수가 내 여권을 가져갔어. 대사관에서 재발급받으려면 며칠 걸릴 것 같아.”엄창민이 멈칫하며 이상함을 감지했다.그는 이를 악물며 욕했다.“배현수 그 개새끼. 어떻게 이렇게 괴롭힐 수 있어?”조유진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창민 오빠, 대사관에 아는 사람 있어? 재발급 빨리 받을 수 있게 해주면 안 될까?”조유진은 스위스에 하루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그 독채는 감옥처럼 그녀를 옥죄었다.“알았어. 가서 한번 알아볼게. 환희야, 속상해하지 말고 있어. 배현수가 정말 백소미와 결혼한다면 내가 네 친정 오빠로 배현수한테 복수해 줄게!”엄창민은 마치 가족처럼 그녀의 뒤에 묵묵히 있어 줬다.무력하고 고통스러울 때 들은 가족의 위안은 눈물을 터트리게 했다.조유진은 한 손으로 핸드폰을 다른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았다. 목소리에서 감출 수 없는 울먹임이 느껴졌다.“창민 오빠... 아이가 유산됐어....”몇 글자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끝까지 얘기한 조유진은 오열하고 있었다.스위스에서 이렇게 긴급한 상황에서, 그녀의 옆에는 셀리나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조유진의 마음속에서, 엄창민은 이미 가족이었다.전화가 걸려 오자, 굳건히 버티고 있던 마지막 방어선도 순식간에 무너졌다.전화 너머 엄창민은 잠시 넋이 나갔다. 그녀의 말을 겨우 이해한 엄창민이 걱정스레 물었다.“너는? 너는 괜찮아?”조유진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답했다.“나는 괜찮아.”감출 수 없는 슬픔을 모두 털어 낸 후, 통제하기 어려웠던 마음이 잠시 안정을 되찾았다.엄창민은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배현수가 해명하지 않으면 결혼식에 가서 난리를 피우자! 배현수의 애를 임신하고 유산까지 했는데 전화도 안 받고 사람도 옆에 없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밤, 겨울 창밖에는 큰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방안은 봄처럼 따듯했다. 하지만 조유진은 온몸이 차가웠다.셀리나가 이불 두 개를 가져다 그녀에게 덮어주고, 따듯한 물주머니도 채워 와 그녀에게 건넸다.막 유산해서 신체 기능이 저하되어 그런지 아무리 따듯하게 만들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늦은 밤, 안방에 불이 꺼지고, 바깥의 흰 눈으로부터 반사된 빛이 들어오는 늦은 시각이었지만, 조유진은 단념하지 않고 서정호에게 연락을 취했다.하지만 서정호의 핸드폰도 꺼져있었다.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속이고 싶었지만, 현실이 그녀를 사정없이 후려쳤다.배현수와 약혼을 하는 엄씨 가문의 아가씨가 백소미라는 사실을 엄창민은 며칠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사실이 오해라는 증거를 찾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너무 추웠다. 그녀는 두 팔로 자신을 꼭 감싸 안고 침대에 웅크려있었다.뜨거운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눈물도 점차 식어갔다.복부에서는 여전히 은근한 통증이 전해져왔다.조유진은 손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이불을 꽉 쥐었다.밖에서는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이 겨울밤은 길고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견디지 너무나도 힘든 밤이었지만, 다행하게도 마지막 밤이었다.한편, 성남 엄씨 사택에 있는 백소미도 배현수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녀는 바로 드래곤 파에 연락했다.“보스, 저예요.”전화기 너머로 변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성행 그룹의 지분 변동은 왜 아직도 공시되지 않는 거지? 다 잘되고 있다더니.”백소미의 눈빛이 가라앉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엄씨 가문의 수양딸, 엄명월이 계속 주주총회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어요. 엄명월을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반대 의견을 내고 있고, 엄창민의 메인 팀들도 저를 지지하지 않고 친자 확인을 다시 하길 요구해요. 보스, 엄명월을 처리해 버릴까요?”지난번에도 그녀는 엄명월을 제거하길 원했다.하지만 보스는 수락하지 않았다.그 이유에 대해서
그녀는 드래곤 파에서 혁진이 죽은 줄로 알게 만드느라 큰 노력을 기울였다. 혼수상태의 혁진을 스페인에서부터 비밀 전용기를 사용하여 한국의 외딴 병원으로 이송했다.며칠만 더 시간을 확보하여 해독제를 구한다면 혁진은 살릴 수 있었다.엄명월?보스가 건드리기 꺼리는 거 보면 혹시 다른 마음을 품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보스와 엄명월 사이의 관계가 깊다면, 엄명월을 납치하여 보스와 협상할 수 있지 않을까?드래곤 파의 보스를 위협한다는 건 리스크도 크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또한 엄명월이 정말로 보스와 인연이 있는지도 몰랐다.하지만, 해독제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한번 도박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죽든 살든, 백소미는 큰 미련이 없었다.만약 혁진이 죽는다면, 그녀는 최선을 다하여 드래곤 파에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백소미가 엄명월의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부 인터넷에 진입하여 개인적인 정보도 확인했다.엄명월은 9살 이전에 한국의 하늘 보육원에 있었었다.하늘 보육원...백소미가 혁진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이번 대의 보스는 혁진과 나이가 비슷하고 함께 임무를 맡은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얼굴도 이름도 몰랐다.그저 보스의 코드네임이 김이라는 사실만 알았다. 스페인 본거지에 오기 전에 한국의 한 보육원에 머물렀다고 했다.코드네임 김...백소미는 오늘 아침 있었던 주주총회에서 엄명월 뒤에 있던 비서가 생각났다.얼핏 엄명월이 그 사람을 김 씨라고 불렀던 기억이 났다.설마, 엄명월도 드래곤 파 사람이었던 것일까?아니었다. 엄명월도 드래곤 파 사람이라면 백소미의 행동에 제약을 걸지 않을 터였다.이름이 겹치지 않는 이상, 염명월 뒤에 서있던 김 씨가 정말 드래곤 파의 보스라는 말인가?백소미는 식은땀이 났다.김 씨가 정말 보스라면, 행방을 감추는 능력이 너무도 뛰어났다. 그들 곁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휘젓고 다녔지만 아무도 그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산속에 있는 별원, 이곳은 엄명월이 성남에 마련해
엄명월은 실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크게 웃기 시작했다.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주무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성행 그룹을 포기하라고? 너랑 어디 가는데? 밥은 빌어먹고 사니? 아니면 흑 파먹고 살아? 바람만 마셔?”그녀는 성행 그룹에 바친 게 너무나도 많았다.성행 그룹에서 처음으로 리조트 사업을 시작했을 때, 경쟁사들에 악의적으로 배척당하여 리조트 프로젝트 자체에 너무 많은 투자를 했다. 수익률은커녕, 부채도 갚지 못한 상태였다.여러 차례 임원 회의에서 모두가 만장일치로 이 프로젝트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아버지마저 그녀를 지지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고집을 굽히지 않고 임원들과 생사 계약서를 체결했다. 반년 안에 리조트 프로젝트의 투자금 80%를 회수하지 못한다면 그룹에서 탈퇴하고 영원히 그룹 업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확인서였다.이렇듯 거대한 압력에서 반년 후, 성행 그룹 산하의 리조트 프로젝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투자금의 95%를 회수하고, 연휴가 아니더라도 투숙률이 60%나 되었다. 그 이후, 성행 그룹 산하의 신라호텔은 성남의 고급 호텔 top 1이 되었다. 성남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보니 랜드마크가 되기도 하였다.그런데 이제 와서 성행 그룹을 벗어나라니?백소미는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은 채 성행 그룹을 손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배후에 누가 있든 간에, 엄명월의 동의는 얻어야 했다.김 씨가 가볍게 웃더니 비꼬는 시선으로 엄명월을 바라보았다.“고작 성행 그룹 하나로 만족하나 봐요?”충분히 취한 엄명월은 그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비틀비틀 소파에 쓰러진 그녀가 중얼거렸다.“김 씨, 나를 따라 일만 깔끔하게 하면 승진도 하고, 월급도 오르고 앞날이 걱정 없을 거야!”산속 별장 창밖, 어두운 밤하늘에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터졌다.김 씨는 시선을 돌려 그녀가 잡은 손을 살며시 떼어내며 말했다.“먼저 갈게, 정미미. 이제 다시 봐.”“응...? 정
“보스, 스위스로 사람을 보내 조유진을 잡아 배현수를 위협할까요?”재웅이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며 말했다.“스위스가 어떤 곳인지 몰라서 그래? 중립국에서 그런 짓을 하면, 국제 적대자가 되려고?”“하지만 배현수가 해독제를 뺏어가고 스페인 기지를 파괴했습니다. 안 갚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재웅이 이를 갈며 섬뜩한 눈빛으로 말했다.“갚아야지, 당연히 갚아야지. 전에 극장이랑 공해에서 두 번 노력했는데, 모두 배현수 때문에 막혔지. 지금까지 경솔하게 일을 처리했으니까, 그 새끼가 조유진을 스위스로 보낸 거 아니야! 한국에서 또 손을 댈 수도 없고, 이 쓸모없는 것들!”재웅이 분노에 차 조수를 차버렸다.조수는 아픔을 억누르며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보스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어르신한테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그쪽은 네가 신경 쓸 거 없다. 어르신... 늙은 양반도 자리를 내놔야지.”조수가 말을 이었다.“강이찬은 주식을 보스에게 매도하기로 했습니다.”재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쓸모 있는 사람이네.”“방금 전해진 최신 소식에 따르면 719부대가 기지를 폭파하면서 그들도 크게 다쳤다고 합니다. 철퇴할 때, 배현수도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재웅이 인색하게 담담히 칭찬을 내뱉었다.“죽지는 않을 거야. 그저 근육과 뼈 좀 다쳤을 뿐이겠지. 명이 길어.”“엄씨 가문에 심어둔 사람은 어떻게 처리할까요?”재웅은 손을 살짝 흔들며 살의를 드러냈다.“배현수가 어떻게 우리 스페인 기지를 알았다고 생각해?”“설마, 저희가 엄씨 가문에 심어둔 사람이 배신한 걸까요?”재웅의 말투가 무뚝뚝해졌다.“백소미 맞지?”“그 이름이 맞을 겁니다.”“흥, 그래도 똑똑하네. 근데 나는 똑똑한 걸로 착각하는 새끼들을 싫어해.”백소미는 지시대로 엄 어르신의 밥에 독을 타고, 배현수와 약혼도 했다. 그로 인해 그녀의 충성심을 증명하려 했다.하지만, 배현수가 시간차 공격으로 719부대를 이끌고 스페인으로 향했다.잘 맞춰 협력했다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