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는 작은 머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물었다.“그럼 엄마, 나 사랑하냐고 계속 물어봐도 돼?”조유진은 녀석의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당연하지, 몇 번을 물어봐도 엄마가 다 대답해 줄게.”선유는 작은 팔을 벌려 조유진을 껴안았다. 품에 안긴 녀석은 많이 감동한 듯 살짝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엄마, 나도 엄마 많이 사랑해.”“엄마도 선유를 너무 사랑해.”앞에서 차를 운전하던 셀리나는 백미러로 모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사모님이 임신한 걸 배 대표님이 알면 정말 기뻐할 겁니다.”차창 밖, 하늘에서 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조유진은 선유를 안고 창밖을 내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배현수가 기뻐할지 잘 모른다.그는 항상 어린아이가 성가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선유를 매우 사랑하지만 선유가 재잘거리면 시끄러워했다.큰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그냥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선유에 대한 요구는 항상 엄격했다.이번처럼 스위스에 와도 선유의 과외 숙제는 하나도 빠짐없이 체크했다. 개인 선생님이 집에 오기 시작하면서 선유가 배워야 할 것이 더욱 많아졌다. 일반과목 외에 피아노, 미술, 응용, 컴퓨터, 웅변 토론도 배워야 했다... 아직은 초기 시작단계인 수업도 있지만 일단 시작한 이상 멈추지 않았다.선유가 아무리 징징거려도 배현수는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녀석의 수업을 지켜봤다.둘째 아이도 선유처럼 공부를 시키지는 않을까? 뭔가 두려웠다. 아이가 크면 선유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어른의 행세를 할 것이다.“나도 다 겪어 온 거야. 습관이 되면 괜찮아!”여기까지 생각한 조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처음에는 둘째를 낳을 생각이 없었지만 의외의 일은 항상 계획보다 빨리 다가왔다.소식을 천천히 받아들인 후, 그녀는 아이가 빨리 태어나기를 기대하기 시작했다.어느새 집에 도착해 따뜻한 방안에 들어왔다.조유진은 셀리나의 눈총을 받으며 침대에 누웠다.셀리나
네 식구가 평온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꿈은 끝없이 이어져 나갔고, 바람에 살랑살랑 스치는 보리밭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부드럽고 밝은 분위기였다.조유진은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발신자는 남초윤이었다.조유진은 일어나 앉아서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잠기운이 묻어져 나왔다.“여보세요, 초윤아?”전화를 건 남초윤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져 나왔다.“유진아, 잘 지내?”“응? 난 잘 지내는데, 왜?”남초윤의 다급함과 걱정에 비해 조유진은 지나치게 담담했다.초윤이 물었다.“너 지금 어디야?”“전에 말했잖아. 현수 씨가 나랑 선유 스위스로 바래다줬다고. 스위스에 온 지 며칠 됐어. 아, 맞다. 여기 설경이 너무 예뻐.”조유진의 평온한 말투를 듣다 보니, 그녀가 배현수와 백소미의 약혼 소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남초윤은 조유진에게 사실을 알려줄지 말지 고민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 나갔다.“네 인스타 봤어. 눈사람 너무 귀엽더라.”조유진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차분히 들려왔다.“임신만 아니면 선유 데리고 나가 돌아다니면서 이쁜 사진 많이 찍어 너한테 보태줄텐데. 의사 말로는 태아 상태가 불안정해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해서 집에만 틀어박혀 창밖 설경만 보고 있어.”“뭐? 너 임신했어? 배현수 애야...?”남초윤의 목소리가 흠칫하며 지나치게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조유진이 웃으며 답했다.“현수 씨 애 아니면 누구 애겠어.”남초윤은 입술은 짓씹으며 하려던 말을 거뒀다.“그러게... 현수씨 애 아니면 누구애겠어... 생각하는 것 좀 봐! 유진아, 너 정말 둘째 낳게?”“둘째 계획은 없었는데, 선유도 싫어하지 않고 와줬으니 지울 수는 없잖아?”조유진이 말을 이었다.“큰 문제는 없을 거야. 그저 안정을 취하고 흥분하지 않는다면 문제없을 거야.”‘큰일이네, 흥분하면 안 된다니...’남초윤이 입술을 짓이기며 혀끝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임신 초기니, 휴대전화 너무 오래 사용하지 마. 전화에도 방
남초윤은 심호흡하며 애써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태아가 불안정한 상태로 임신한 조유진에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이런 일을 얼마나 더 감출 수 있을까?전화를 끊은 남초윤은 정신을 딴 곳에 팔고 있었다.아래층 마당에서 엔진소리가 들려왔다.육지율이 본가에서 돌아온 것이었다.남초윤은 배현수에게로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었지만, 배현수의 전화는 꺼져있었다.배현수와 백소미의 약혼 소식은 빅 뉴스인데, 육지율이 내막 정도는 알 것 같아 남초윤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막 집안으로 들어서던 육지율은 마중 나온 남초윤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웬일로 이렇게 적극적이에요?”남초윤은 귀찮다는 듯이 그의 농담을 흘려듣고 진지하게 물었다.“배현수와 백소미가 약혼한다는 사실 알고 있었어요?”육지율은 놀랄 것 없다는 듯이 답했다.“알고 있었는데 왜요?”남초윤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배현수는 왜 유진이를 그렇게 먼 스위스까지 보내서 임신시키고, 본인은 엄씨 가문의 딸과 약혼하는 거예요? 지금 유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속고 있어요...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면...”남초윤은 더 깊이 생각하기 무서웠다.육지율이 담담하게 답했다.“감정에 있어서 이유는 없어요. 이건 현수와 조유진의 일이에요. 옳고 그름은 우리가 판단하는 게 아니에요.”육지율은 겉으로 보기에는 따듯한 사람이었지만 마음은 냉정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 관련된 일에 끼어드는 건 싫어했다.특히 친구의 감정사에 그러했다. 감정사에 끼어들기 시작하면 죽도 밥도 되지 않았다.이전 배현수가 3년 동안 감방에 갇혀있을 때, 육지율은 조유진이 이기적인 여자라 배현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당사자가 아니기에, 그 사람들의 감정은 영원히 알 수 없었다.또한 이성 사이에 어울리는지 어울리지 않는지에 대한 문제는 본인이 판단할 문제이지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육지율은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를 떼어 책상 위에 놓으며 말했
남초윤은 육시율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내뱉었다.“필요 없어요.”그녀는 육씨 가문에서 지금까지 대접받아 본 적이 없었다.남재원이 비열한 방법으로 그녀를 육씨 가문이라는 높은 곳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처음에는 그녀도 자신에게 억지 부지리 말고 육씨 가문 어른들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꼭두각시 같은 며느리가 되면 된다고 타일렀다.하여 육씨 가문의 어른들이 뭘 하라고 하면 뭘 했고, 육지율은 끊임없이 남씨 가문의 사업에 투자했다.하지만 이제 그녀도 남재원은 사업을 할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투자한 자금이 200억도 넘어가고 있지만 손실만 나서 그녀로 하여금 육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지금 꿈속에서조차 남씨 가문의 사업이 얼른 망하기를 바랐다.육씨 가문의 어른들이 뒤에서 어떻게 수군거리는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 사람들은 제각각 이러쿵저러쿵하고 있었다.“육씨 가문에서 뭘 보고 그런 애를 들였는지 모르겠어요. 친정에 매번 사업자금을 대주기 위해 집에 들인 것도 아닌데, 2년이 지나도록 아이 하나 없으니... 지율이를 속박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집안에 들인 건 아닌지 궁금하네요.”거만한 성격을 지닌 육지율에게서도 좋은 말이 나가지 않았다.“그냥 이 일자리가 싫은 거예요 아니면 육씨 가문에서 마련해준 일자리라서 싫은 거예요?”육지율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김성혁도 그녀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김성혁이 던져준 동아줄을 잡은 건가?’남초윤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른 채 침착히 답했다.“아직 일자리를 바꿀 생각이 없어요. 어머님께는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남... 초...”그녀는 바로 몸을 돌려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소통을 거부한 것이다.무시당한 육지율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전에 자신의 월급이 적다고 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육지율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몸을 사리는 강 여사는 사적으로 사람을 꽂아주지는 않을 것이었다.육씨 가문의 기업에 가기 싫어하는
한편, 스위스.조유진은 하루 종일 멍하니 침대맡에 기대어 있었다. 핸드폰 보려고 한 순간, 셀리나에게 빼앗겼다.“사모님, 눈 나빠져요. 그러지 마시고 뭐 좀 드세요.”셀리나가 저녁을 챙겨왔다.입 맛이 없는 조유진을 위해, 셀리나는 주방에 부탁해 죽을 만들어 왔다.조유진은 침대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몸이 뻐근했다.“식탁으로 가서 먹고 싶어, 침대에서 먹으려고 하니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아.”셀리나는 유난히 조심스럽게 조유진을 대하며 조언을 건넸다.“사모님, 배 속의 아기님을 위해서라도 조금 참으세요.”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조유진은 그래도 타협해서 죽을 다 먹었다.“셀리나, 오늘 하루 종일 핸드폰도 별로 안 봤어. 잘 만큼 다 잤고, 주식 좀 보고 싶은데, 핸드폰 좀 줄래?”하지만 셀리나는 고집스러웠다.“사모님, 임신 중이신데 그런 건 보지 마세요. 정신건강에 해로워요. 주식 상황을 보면서 정력도 써야 하고, 머리도 써야 하고, 걱정도 쌓이고 안정을 취하는 데 안 좋습니다.”조유진이 실소하며 답했다.“뭐가 그렇게 심각해?”하지만 셀리나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조유진은 점점 더 상황이 의심스러웠다.‘내가 핸드폰을 보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네... 초윤이도 그랬는데... 뭐 감추는 거라도 있나? 설마, SY 그룹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아니면, 현수씨한테...?’셀리나가 나가자, 선유가 조유진을 찾아왔다.“엄마, 드디어 깨났네! 하루 종일 잤어!”조유진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선유야, 태블릿 좀 가져다 엄마 좀 보여줄래?”“좋아! 근데 엄마 핸드폰은?”“셀리나가 가져갔어. 엄마 눈이 나빠질가 걱정스러운가 봐. 태블릿 챙겨올 때 셀리나한테 들키면 안 돼, 알았지?”선유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가슴을 치며 말했다.“옷 속에 감춰서 올게! 엄마, 나 믿어!”조유진이 웃으며 답했다.“알았어.”선유가 태블릿을 챙겨와 조유진에게 건넸다.조유진은 바로 트위터에 접속했다.송인아의 팬들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잘 접속
“그 성행 그룹의 엄씨 가문이 맞아! 재력으로는 SY 그룹이랑 맞먹는데,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 달라! 성행 그룹은 제일 처음에 부동산 자재로 시작한 기업이야. 이후에는 배터리, 에너지 사업으로 돌렸지!”“그건 알고 있어! 지난해, 성행 그룹과 SY 그룹이 협력했잖아. SY 그룹에서 전기차를 만들 때, 성행 그룹과 협력했지. 성행 그룹에서 SY 그룹에 배터리를 공급해 줬잖아. 설마, 협력할 때 엄씨 가문의 아가씨랑 배 대표님께서 눈이 맞은 건가?”“맙소사! 비즈니스로 맺어진 커플! 결혼 후, 사랑으로 이어지는 커플! 너무 좋아!”“조햇살 같은 신데렐라가 재벌 그룹의 대표와 이어진다는 이야기는 너무 올드해! 그런 이야기는 지겹다! 엄씨 가문의 아가씨와 배 대표님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근데... 조햇살도 신데렐라는 아니지 않아? 조햇살도 이전 충남 시장의 딸인데? 비록 아빠의 권력은 끝이 났지만, 그래도 신데렐라는 아니지 않아?”“권력이 끝이 났다며, 그럼 신데렐라지! 그것도 소문이 안 좋은 셀럽!”조유진도 무슨 정신으로 댓글들을 다 읽었는지는 몰랐다.이틀 전의 뉴스였다.배현수가 어제저녁 스위스로 오기 전, 이미 발생한 일이었다.하지만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해줄 수 있지?뉴스를 본 그녀는 가슴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아니야, 이게 진짜일 리가 없어.’어제저녁, 배현수는 그녀를 업고 대성당 안으로 가, 무릎 꿇으며 프러포즈했다. 그리고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를 그녀의 약지에 끼워주며 귀국 후, 혼인신고하고 결혼식을 올리자고 했다.그는 언제나 조유진의 것이라고, 그녀만의 것이라고 했다.조유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녀는 묵묵히 태블릿을 선유에게로 건네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선유야, 엄마 갑자기 목이 마르네. 셀리나 아줌마한테 물 좀 가져다 달라고 해줄래?”조유진은 선유를 내보냈다.한참을 회복한 후에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심란했던 탓일까, 복부가 당겨왔다.심호흡을 몇
배현수의 핸드폰은 계속 꺼져있는 상태였다.시간을 계산해 보면, 그는 이미 도착한 지 한참이 되었을 시간이었다.하지만 무슨 이유에서 핸드폰이 계속 꺼져있을까?뉴스의 내용을 생각하며, 조유진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셀리나는 더 이상 조유진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사모님, 흥분하지 마세요. 일정이 늦어졌을 수도, 혹은 시차 때문에 적응 중일 수도 있잖아요. 아직 상태가 불안정하신데 감정이 격해지면 안 돼요.”이렇게 큰일을 마주했는데, 어떻게 평온한 마음을 유지한다는 말인가?조유진은 거실로 가 여권을 찾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서랍 안에 넣어뒀는데 말이다.조유진은 서랍을 뒤지며 물었다.“셀리나, 내 여권 못 봤어?”“사모님, 저는... 저는 못 봤습니다.”셀리나가 말을 더듬었다.조유진이 어리둥절한 상태로 고개를 들어 캐물었다.“내 여권 가져갔어?”셀리나가 어찌 감히 그런 일을 하겠는가. 그녀는 다급히 해명했다.“사모님, 아니에요. 다른 곳에 뒀을 수도 있죠, 저도 같이 찾아볼게요!”하지만 조유진은 분명 모든 여권과 증명서를 이곳 서랍에 두었다. 이틀 전에도 봤었다.위치를 잘못 기억할 리는 없었다.중요한 여권과 증명서를 어떻게 아무렇게나 놓을 수 있었을까.셀리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조유진이 차갑게 말했다.“여권 돌려줘. 안 주면, 재발급받을 거야.”조유진의 단호한 태도를 본 셀리나는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사모님께서 여권 재발급을 받으러 가신다면 제가 운전해 대사관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분실 신고를 하고 재발급을 받으려면 최소한 일주일, 아무리 급하게 처리한다고 해도 삼일은 걸렸다.아침, 배 대표가 떠나기 전, 사모님의 여권과 증명서들을 그녀에게 맡기며 절대 돌려주지 말라고, 귀국시켜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전공 석화 사이, 조유진은 무엇인가 깨달은 듯했다.그녀는 온몸이 그 자리에 굳어 있었고, 두 눈은 빨갛게 달아올라 입술을 짓씹으며 웃기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다이아몬드 반지가 바닥에 팽개쳐졌다. 경도가 강한 다이아몬드와 더불어 힘껏 던지다 보니 나무 바닥에 작은 홈이 파였다.빛을 잃은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는 그렇게 외롭게 구석에 박혔다.셀리나가 앞으로 나서며 위로하려 했다.“사모님...”그 호칭을 듣자, 조유진은 바로 말을 잘랐다.“사모님? 내가 무슨 사모님이야.”그녀는 배 대표의 사모님이 아니었다.그녀와 배현수는 정당한 명분이 없었다.순진하게도 몇 마디의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갔다.셀리나는 한편에서 속수무책으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하면 할수록 실수만 쌓이고, 조유진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았다.조유진이 쓴 웃음을 지었다.그녀의 처지가 배현수가 해외에 숨겨둔 정부와 무슨 다를 바가 있다는 말인가.정말 다른 사람과 결혼할 예정이라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한다면, 그녀도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그에게 매달리지 않을 터였다.하지만 배현수는 왜 이런 방식을 선택해 그녀를 능욕하는 것일까?심지어 어젯밤 깊은 스킨십을 나눌 때,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키스하며 수없이 그녀에게 속삭였다.“유진아, 나는 네 거야. 너만의 것이야.”다른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다.배현수도 뱉은 말을 안 지킬 수 있구나, 배현수도 사람을 솎 일수 있구나 싶었다.조유진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손톱을 손바닥 깊이 박아 넣었다.‘거짓말쟁이, 정말 거짓말쟁이야!’온 세상 사람들이 배현수가 다른 사람과 결혼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녀만 제일 마지막에 알게 되었다. 큰 그림이었다.어젯밤, 배현수가 그녀에게 SY의 우 씨 영감의 본처는 대제주시, 첩은 미국에 있다고 한 사실이 떠올랐다. 어느 날 그의 부인이 갑자기 스위스로 찾아와 어린 선유를 납치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우스웠다.고상함의 대표인 조유진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첩이 되겠는가.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더욱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셀리나, 여권 재발급 받으러 갈 거야. 귀국할 거야.”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