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청부 살인이라니... 이건 오만방자하고 제멋대로인 것과 별개의 문제이다.전화기 너머의 강이찬은 오랫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그의 얼굴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려있었다.이때 심미경이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하이힐 두 켤레를 들고 와 그에게 물었다.“이찬 씨, 결혼식 날 하이힐은 어떤 거 신을까요?”강이찬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멍하니 자리에선 채 심미경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심미경은 강이찬의 앞에 다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왜 그래요? 누구와 통화한 건데요? 회사에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미경 씨.”“왜요? 이찬 씨,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여요. 어디 불편한 건 아니죠?”순간, 강이찬은 심미경을 덥석 껴안았다. 그는 심미경을 더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아니요. 아픈 데 없어요. 요 며칠 신혼집 꾸미느라 좀 힘들었나 봐요.”하이힐을 두 손에 들고 있는 심미경은 강이찬을 안아주지 못하고 그저 웃으며 말했다.“풍선도 아직 많이 불어야 하는데... 인터넷에 보니까 풍선 불어주는 기계가 있더라고요. 그동안 내가 바보같이 입으로 부니까 속도가 늦었나 봐요. 기계를 생각하지 못하다니... 참, 요즘 이것저것 바쁜 게 너무 많은 데 이진이더러 와서 도와달라고 할까요?”심미경이 기억을 잃은 후, 강이진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심미경을 계속 새언니라고 부르며 아주 깍듯이 대했다.그러다 보니 심미경도 점점 강이진에 대해 마음을 열었다. 강이찬의 여동생이고 미래의 시누이가 먼저 호의를 표시하는데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는가?강이찬은 강이진이 독립하면서 성숙해졌기에 예전처럼 심미경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심미경을 대하는 강이진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은 단지 도둑이 제 발 저려서였기 때문이다.강이진은 심미경이 기억을 되찾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날 교통사고의 범인이 그녀라는 것을 알게 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이
심미경의 외치는 소리에 잠에서 깬 강이찬은 바로 벽에 있는 스위치를 켰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심미경을 본 그는 큰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몽을 꾼 거예요?”겁에 질린 심미경은 강이찬의 품에 안겨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꿈에서 내가 임신했는데... 누군가 칼로...”심미경은 뒤의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강이찬은 이미 그녀의 말을 대충 짐작한 듯했다. 그는 손을 들어 심미경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악몽일 뿐이에요. 겁내지 말아요.”두 사람의 첫 아이는 교통사고로 죽었다.심미경은 기억을 잃었지만 악몽을 꾼 탓인지 아니면 본능 때문인지 아이만 생각하면 누군가 바늘로 심장을 찌르듯 가슴이 쿡쿡 쑤셨다.강이찬의 품에 안겨 있는 심미경은 흐느끼며 말했다.“그날 밤, 내가 차를 몰고 야식을 사러 나가지만 않았어도... 교통사고가 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 아이도... 다 내 탓이에요.”“미경 씨와 상관없어요. 아이는 앞으로 또 가지면 돼요. 지금은 일단 몸조리부터 해요. 신혼생활을 충분히 즐기다가 나중에 아이를 가져도 돼요. 아이를 갖는 게 그렇게 급하지 않아요.”물론 아이가 다시 생긴다고 해도... 이미 잃은 아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눈시울이 빨개진 심미경은 강이찬의 품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우리에게 정말 아이가 있을까요?”심미경은 교통사고로 유산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자궁이 많이 상했고 건강도 전보다 많이 안 좋아졌다. 의사는 그녀가 목숨을 구한 것만으로도 하늘이 도운 것이라 했다.앞으로 어쩌면...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하지만 강이찬은 이 일을 줄곧 심미경에게 말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괴로워할까 봐... 한 번도 그녀 앞에서 언급한 적이 없었다.강이찬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강이찬이 미안해하는 마음과 아픈 가슴은 심미경도 그의 눈빛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꼭 있을 거예요.”만약 심미경이 정말 아이를 갖고 싶은데 임신이
강이진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오빠…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 나는 오빠 친동생이야! 심미경은 멀쩡히 잘 살아 있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그저 유산한 것뿐이잖아? 아이는 결혼하고 다시 가지면 돼. 오빠, 그냥 모른 척해주면 안 돼? 그러다가 내가 진짜 감옥이라도 가게 되면?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그리고 오빠 얼굴에도 먹칠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그냥 모른 척해줘...”“일주일 줄게. 너 절로 가서 자수해. 내가 강요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말을 마친 강이찬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전화기를 쥐고 있는 강이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이내 손에 있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심미경 이 여자 때문에 오빠가 나를 감옥에 보내려 하다니!’강이진은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화도 나고 무섭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절대 자수하러 가지 않을 것이다.자수하는 순간 그녀의 인생은 끝장일 테니까!사고 운전기사는 이미 모든 죄를 인정했다. 사고 운전기사가 진술을 번복하지 않는 한, 강이진은 절대 자기가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증거도 부족한데 강이찬이 그녀를 어떻게 감옥에 들여보낼 수 있겠는가?...산성 별장.송하진은 저녁을 먹은 후, 배현수와 서재에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갔다.조유진은 선유를 씻긴 후, 녀석과 함께 방에서 게임을 했다.선유와 놀고 있던 조유진이 옆에 있던 휴대전화를 힐끗 보니 심미경으로부터 모바일 청첩장이 와 있었다.청첩장을 클릭하자 여러 장의 아름다운 웨딩사진이 떴다.강이찬과 심미경,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이었다.조유진의 품에 안긴 선유는 그녀와 함께 웨딩사진을 보며 말했다.“엄마, 이찬 삼촌과 미경이 이모의 웨딩사진이 너무 예뻐! 엄마와 아빠는 언제 찍어? 나도 같이 찍으면 안 돼?”녀석의 물음에 조유진은 순간 어리둥절했다.웨딩사진... 조유진은 한 번도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7년 전,
선유의 말에 조유진은 깔깔 웃었다.“너의 친구? 어느 친구가 그렇게 말했는데?”“옆에 반의 퀸카 조가은이라고, 걔가 말한 거야. 여자는 남자가 원하는 대로 다 하면 안 된다고, 그러면 여자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했어. 그러니까 엄마도 절대 아빠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안 돼. 알겠지? 그러다가 엄마만 상처받아. 나는 엄마가 힘든 거 싫단 말이야. 나는 엄마가 평생 행복했으면 좋겠어.”선유는 진지한 표정으로 조유진에게 충고하고 있었다.그러자 조유진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어린 녀석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거야?”지금은 초등학교 1학년 애들마저 이렇게 어른스러워진 건가?“조가은도 걔네 엄마가 그렇게 말한 거라고 했어. 우리 반에 조가은을 좋아하는 남자애들이 아주 많거든.”조유진은 선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우리 귀여운 선유를 좋아하는 남자애는 없어?”“나는 우리 반 남자애들이 다 별로야. 키가 작거나 아니면 뚱뚱하거나... 하여튼 못생겼어. 그런 애들은 나를 안 좋아해 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어차피 나도 관심이 없으니까. 잘생긴 사람을 매일 봐서 그런지 그런 애들은 하나도 마음에 안 들어.”조유진은 선유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잘생긴 사람? 어디서 매일 봤는데?”“아빠잖아! 음... 물론 지율 아저씨도 잘생겼는데 지율 아저씨는 여자와 너무 자주 말다툼하는 것 같아. 여자에게 양보할 줄도 모르고, 그래서 별로야. 그러니까 초윤이 이모가 계속 지율 아저씨와 이혼하겠다고 그러지.”그 말에 조유진이 깜짝 놀라 물었다.“그런 얘기까지 했어?”선유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말했다.“응! 지율 아저씨와 초윤이 이모와 같이 놀이동산 가던 날, 진짜 가는 내내 계속 싸웠어. 옆에 있는 내가 다 혀를 찰 정도였다니까? 지율 아저씨는 정말 철이 안 든 것 같아. 내가 말해서야 겨우 싸우지 않았어.”“두 사람이 이혼하겠다고 그랬어?”“응. 초윤이 이모는 이혼하려면 빨리하자고 그랬고 지율 아저씨는 같이 살고 싶지 않으면 살지 말
조유진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현수 씨가 공해 바다에서 사고가 난 후, 서 비서님이 저에게 많은 얘기를 해줬거든요. 경계성 인격장애, 성남에 가서 나와 창민 오빠의 뒤를 따랐던 일, 그리고... 그 화상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 현수 씨, 미안해요. 그동안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그 말에 배현수가 눈살을 찌푸렸다.“그 인간은 정말 입이 가볍네. 연말 보너스를 받을 생각이 없나 봐!”“서 비서님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현수 씨가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예요. 송지연 씨가 현수 씨의 정신과 상담 의사인 것도요.”조유진은 종종 배현수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곁에 가까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졌다.조유진과 이마를 맞댄 배현수는 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거 알아서 뭐 해?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유진아, 나는 동정 따위 필요 없어.”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동정하는 것도 아니고요. 내가 만약... 마음이 아픈 거 라면요?”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최고치에 달했을 때, 이 사람을 볼 때마다 가슴이 더 아픈 게 아닐까?배현수가 혼자 견뎌낸 것들과 군데군데 입은 상처만 생각하면 조유진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순간, 배현수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유진아, 네가 이렇게 말하면 결과가 어떨지 몰라?”“무슨 결과요?”조유진은 순간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배현수의 뜨거운 숨결은 이미 그의 입술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진짜 몰라서 물어?”얼굴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조유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배현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조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싫으면 그냥 자고.”사실 배현수는 오늘 그녀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강이찬과 심미경의 결혼식이 끝나면 배현수는 조유진과 선유를 성남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그러다가 배현수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는 엄창민에
두 사람은 이불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다.배현수의 뜨거운 숨결에 조유진은 온몸이 화끈거렸다. 조유진도 몸을 돌려 그를 꼭 껴안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숨결은 더 가까이 맞닿았다.배현수는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의 몸에 흔적을 남겼다.그의 부드러운 입술에 조유진은 온몸이 나른해졌고 얼굴은 점점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이때 그나마 일말의 이성이 남아 있는 배현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콘돔 쓰고 하자. 응?”조유진이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연 순간 배현수는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협탁을 더듬거리며 콘돔을 찾았다.대제주시의 늦가을 밤공기는 늘 쌀쌀했다. 폐병을 앓았던 조유진은 몸이 허약한 데다 추위도 많이 타는 바람에 추운 계절만 오면 손발이 차가웠다.예전에 배현수는 그녀의 인간 핫팩이었다.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배현수의 몸에 더 밀착했다. 두 손이 그의 살결에 닿은 순간, 그의 몸은 활활 타오르는 불같이 뜨거웠다.배현수는 콘돔 포장을 뜯어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귓가에 속삭였다.“네가 끼워줘. 응?”“나 할 줄 몰라요.”“내가 알려 줄게.”이불속은 밤새 들썩였고 방은 그나마 방음이 좋아 거친 숨소리와 억압된 신음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다음 날 아침, 천우 별장.심미경은 사진이 잘 나올 수 있게 흰색 원피스를 골라 입었고 그 위에 롱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그러고는 화장을 정갈하게 하고 립스틱을 바른 뒤 강이찬의 앞에 서서 물었다.“이찬 씨, 우리 결혼 증명사진 이렇게 하고 찍으러 가도 돼요?”“네, 이뻐요.”심미경을 바라보고 있는 강이찬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불안함과 망설임이 느껴졌다.이를 눈치채지 못한 심미경은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그래요. 우리 가요. 오늘은 화요일이니까 구청에 사람이 많지 않을 거예요. 신분증은 다 챙겼죠?”강이찬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선 채 심미경에게 말했다.“미경 씨, 내가 프러
그러자 강이찬은 직접 조윤미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그동안 제가 미경 씨에게 잘 못 해준 것은 사실이에요. 미경 씨를 잘 보살피지 못했어요. 미경 씨를 소홀히 한 것도 맞고요. 4억은 다시 미경 씨에게 보내시지 않아도 돼요. 미경 씨는 평소에 제 카드를 사용하면 되니까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 돈은 저의 작은 성의입니다. 장모님께서 받아 주시면 됩니다.”이 말을 들은 심미경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그녀는 운 좋게 자기를 이토록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심미경은 몸을 옆으로 돌려 운전하고 있는 강이찬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가 예물 비용으로 4천만 원만 달라고 했는데 왜 4억이나 보냈어요? 엄마가 은행에 갔을 때 잘못 본 줄 알고 여러 번이나 다시 은행직원에게 확인해 달라고 했대요. 4억이라는 것도 은행직원이 확인해 줘서야 믿었고요. 아무리 예물 비용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많아요. 그리고 이제 다 나이 드신 어르신 들이라 평소에 돈을 쓸 일도 없어요. 이렇게 많은 돈을 쓸 일은 더더욱 없고요.”그러자 강이찬이 싱긋 웃으며 따뜻하게 말했다. “나와 결혼하고 나면 앞으로 미경 씨는 계속 대제주시에 있어야 하는데 장인어른도 돌아가신 마당에 장모님 혼자서 분명 외로울 거예요. 전에 고향 시내에 있는 집값 좀 알아봤는데 30여 평 정도 되는 아파트가 2억 정도 되더라고요. 연세도 있으신 장모님이 혹시라도 병원 갈 일이 생기거나 하면 쉽게 가기 위해서라도 시내로 이사를 오시라고 하는 것은 어때요? 그러면 우리가 장모님을 만나러 가기도 편하고 시내에서 살면 좀 더 편히 생활할 수 있을 거예요. 만약 집을 사는 데 돈이 부족하면 나에게 말해요. 내가 더 보내 드릴게요.”심미경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말을 잇지 못했지만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그의 말에 감동하지 않았다면 분명 거짓말이다.“나에게 왜 이렇게 잘해줘요?”“이제 곧 합법적으로 부부가 될 사람에게 잘해주는 건데 당연한 거 아니에요?”게다가... 강이찬은
혼인 신고서를 들고 구청을 나온 심미경은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은 그저 꿈만 같았다. “우리 혼인 신고서를 인스타 스토리에 올려도 돼요?”“당연히 되죠.”강이찬의 허락을 받은 심미경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고마워요. 좀 이따 차에 타면 내가 포토샵 해서 올릴게요.”강이찬은 그녀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이때 심미경이 또 물었다.“참, 우리가 혼인신고도 했는데 저녁에 이진이더러 집에 와서 같이 밥 먹자고 할까요?”강이진은 강이찬의 친동생이기에 심미경은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었다.하지만 강이진의 이름을 들은 강이찬은 바로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아니요. 요즘 이진이가 일자리를 찾느라 바빠요. 샤브샤브 먹고 싶다면서요? 어디 가서 먹을래요? 저녁에 우리끼리 가서 먹어요.”그러자 심미경도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그래요, 그럼.”차에 탄 심미경은 구청에서 찍은 사진을 포토샵 한 후 필터까지 씌워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다.[결혼 축하합니다. 이찬 씨.]...산성 별장.저녁에 선유가 놀이방에서 숙제하는 사이 배현수와 조유진은 몰래 집에서 빠져나왔다.장은숙은 선유의 방 입구에 서서 녀석을 지키며 두 사람이 몰래 나갈 수 있게 도와줬다.마당에 차 엔진소리가 나자 선유는 바로 손에 있던 연필과 지우개를 놓고 뛰쳐나왔다. “할머니! 엄마, 아빠 벌써 나갔어요?”“방금 운전하고 나갔어. 선유야, 너는 빨리 가서 숙제해. 내일 아침에 학교도 가야 하잖아. 엄마와 아빠가 데이트 나갔으니까 늦게 돌아올지도 몰라. 너는 내일 학교 가기 위해서 일찍 자야지.” “흥! 나와 같이 가기로 해 놓고! 거짓말쟁이들! 나 몰래 도망치다니!”“엄마, 아빠는 어른이야. 어른들의 데이트에 어떻게 방해꾼을 데려가겠어. 너는 빨리 숙제나 해. 아빠가 가기 전에 신신당부했잖아. 영어 단어 10개 외우라고. 내일 저녁에 검사할 거라고.”장은숙은 선유의 어깨를 밀며 방으로 들여보냈다.그러자 선유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할머니,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