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는 현수가 7년 전에 만든 회사명인데, 너한테 주려고 했던 생일선물이었어. 네가 그때 법정에서 그를 지목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야. S는 배현수, Y는 조유진이라는 뜻이지. 현수가 너와의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는 동안, 너는 그의 뒤통수를 쳤어. 그 미래에서 너는 안주인이었는데, 이래도 여전히 아무런 동요가 되지 않아?”육지율은 흥분하여 윽박질렀다.남초윤은 그런 그를 노려보면서 바로 맞받아쳤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현수 씨가 그렇게 되고 유진이도 큰 충격을 받았다고요. Y가 유진이라고 해도 무슨 소용 있어요. 회사대표도 아니고 주주도 아닌데 어떻게 회사를 관리하겠어요. 왜 유진이한테 뭐라고 그래요!”육지율은 할말이 없어졌다. 조유진은 확실히 회사를 관리할 명분이 없었다. 그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서재에서 하룻밤을 꼴딱 샌 조유진의 멍한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SY의 의미를 듣고서는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남초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면서 말했다. “유진아, 지금 힘들면 나중에 다시 생각해도 돼. 현수 씨가 그렇게 되었지만, 너에겐 선유가 있잖아. 지금 회사보다 더 중요한 건 너랑 선유가 아무 일 없는 거야. 힘들겠지만 잘 생각해 봐. 다른 마음먹으면 안 돼.”조유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남초윤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전에 딱 한 번 본적이 있었다. 1년 전, 그녀의 어머니 안정희 장례식에서.그때 조유진은 남초윤의 바로 눈앞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남초윤은 그녀의 우울증이 재발해 다시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겁이 났다. 조유진은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와 현수 씨는 아직 법적 부부가 아니라서, 육 변호사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그이의 지분을 상속받을 자격이나 명분이 없어요. 만약 선유가 상속받게 된다면 정말로 현수 씨가 사망했다고 선고한 거나 다름없는데, 그러면 회사에 더 안 좋은 것 아닌가요?”게다가, 배현수의 사고 소식을 그녀는 아직 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지도 못했다. 육
듣고 있던 육지율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에게 아주 먼 이야기였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부부 사이가 너무 좋으면, 한쪽이 세상을 뜨면 다른 한쪽은 그리움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고 했다. 조유진과 배현수는 법적으로 부부는 아니지만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얽히고설켜 모진 풍파를 겪었으니 이젠 떼 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인생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배현수가 정말로 없어진다면 조유진도 점차 말라 죽어갈 뿐이었다.조유진이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도 배현수가 따라 죽으려고 했었던 것처럼.정말 죽음까지 생각한 거라면 회사가 어떻게 되어도 그녀에게 상관이 없을 것이다. 조유진은 육지율과 남초윤을 마당까지 바래다줬다.“회사의 일은 육 변호사님께서 부탁드립니다. 일주일 뒤에도 현수 씨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때 다시 주주총회를 열고 지분 문제를 논의하죠. 저도 선유를 데리고 참석할 겁니다.”육지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현수가 사망하면 그의 지분은 자연스레 딸한테 상속될 것이다. 그 지분을 팔든 보유하고 있든 이들은 앞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남초윤은 조유진을 안아주면서 말했다.“유진아, 딴생각하지 말고 요 며칠 푹 쉬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잖니.”‘그래,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다.’배현수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니, 조유진은 앞날이 까마득했다.예전에 두 사람은 서로 떨어져 있어도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돌고 돌아 만나게 되어있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도 욕심을 부린 적이 없었다. 그저 그가 살아있기만을 바랐다. 함께 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멀리서 그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하늘은 마치 계속 그녀를 놀리는듯했고 이제는 두 사람을 서로 다른 세상에 갈라놓았다. 별장을 떠난 후 차 안에서 육지율과 남초윤은 서로
남초윤은 순간 이해가 안 되는 듯 되물었다.“내가 뭐요?”“남자들은 모두 사랑꾼인 척 연기하고, 여자는 일편단심이지만 티를 내지 않을 뿐이라며. 그러면 당신도 그런 여자예요?”육지율은 문득 그녀가 김성혁에게 어느 정도의 감정인지 궁금해졌다.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나는 유진이랑 달라요. 나도 당신들처럼 입에 발린 말을 잘하죠.”다 남자들한테서 배운 것이다.육지율은 건조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남자들이 좋아하겠군.”남초윤은 순간 그가 비웃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헷갈렸다. “지금 같은 세상에 유진 같은 여자도 흔치 않아요. 만약 현수 씨가 안 돌아온다면, 정말로 그를 따라가고도 남을 여자예요. 요 며칠 내가 매일 전화해 줘야겠어요. 아니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정말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아마 첫사랑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김성혁도 남초윤의 첫사랑이었다. 만약 김성혁이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봤지만 아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좀 정이 없는 편인가?’남초윤은 대학교 때부터 조유진하고 배현수 두 사람이 유별나다고 생각했었다. 배현수는 조유진하고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 했으며 어쩌다 그녀가 조유진과 같이 영화 보러 가려고 해도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녀가 한창 회상에 젖어 있는데 육지율이 문득 입을 열었다.“그래서, 만약에 좋아하는 사람이 죽으면 당신도 따라 같이 죽을 거예요?”“내가 미쳤어요? 이 세상에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내가 죽으면 그 명품 백들은 어떡해요. 아까워서 못 죽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끝까지 행복하게 살 거예요.”남자가 죽으면 또 찾지 뭐. 세상에 널린 게 남자인데 뭐가 아쉬워서.그런 그녀를 보면서 육지율은 큰 소리로 웃고 있었지만,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임무 중에 죽기라도 한다면 이 여자는 아마 그날로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날 것이다. 육지율은 이해 안 되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않던
그도 혹시 슬픔을 못 견디고 유진이처럼 그러지는 않을까?남초윤은 육지율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좋은 남자는 아직 많으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이후에도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예요.”“...”‘젠장,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육지율은 얼굴이 잿빛이 된 채로 앞만 노려봤다. 차가 길가에 급정거하더니 그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내려요.”“왜요? 가는 길에 나 잡지사에 데려준다고 하지 않았어요?”“지금은 아니에요.”“나 오늘 하이힐 신었다 말이에요.”육지율은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남초윤은 그를 노려보다 할 수 없이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내리자마자 차는 쌩하고 출발해 버렸다. 남초윤은 한쪽 하이힐을 벗어 질주하는 차를 향해 던지며 소리쳤다.“개자식! 하여튼 부부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만약 그가 죽으면 이튿날 바로 남자 꼬시러 갈 거라고 그녀는 이를 갈며 다짐했다. “절친이 죽었다고 같이 슬퍼해 주고 위로해 줬더니. 양심은 진짜 개나 줘버려!”그녀는 깡충거리며 다시 하이힐을 주워 왔다. ‘근데 절친이 행방불명됐는데 왜 저렇게 담담하지. 평소랑 별반 다르지 않잖아. 역시 남자들의 의리란. 쯧.”배현수가 사고를 당한 후 회사 일은 육지율이 그를 대신해 임시로 처리하고 있었고 서정호는 비서로서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지만, 배현수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피를 말리는 일주일이 지나가고 조유진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딸은 계속 그녀에게 아빠가 어디 갔냐고 보챘다.조유진은 더는 숨길 수가 없어 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얘기했다.“선유야, 아빠 아마 돌아오지 않을 거야.”조선유는 이해가 안 되는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왜? 아빠가 다른 이모랑 같이 떠난 거야? 아빠가 밖에 다른 이모랑 아기와 같이 살고 있는 거야?”딸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면서 조유진의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엄마, 울지마. 아빠 지금 어디 있
“우리 방마다 불 다 켜놓고 있자. 그러면 아빠가 불빛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어.”“진짜야?”“응.”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사실 그녀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싶었다. 길을 잃은 배현수가 불빛을 따라 집에 돌아올 수 있기를.조유진은 딸과 같이 소파에 가만히 기대어 앉아있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와 그녀의 머리를 간지럽혔다. 조선유는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엄마, 나 조금 무서워, 아빠가 귀신으로 변하면 어떡해?”조유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딸을 달랬다.“걱정하지 마. 아빠가 귀신이 되어도 우리 선유는 해치지 않을 거야.”아직 어린 딸은 죽음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뭔지 몰랐다. 어른처럼 심장이 찢기는 아픔을 아직 몰라서 다행이었다.조선유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아빠 오늘 밤에 집에 올 수 있어? 나 아빠한테 할 얘기가 있는데. 지난번에 내가 받아쓰기 시험에서 꼴찌를 했는데 100점 맞았다고 거짓말했어. 이따 아빠를 만나면 사실대로 말할 거야. 아빠 하늘나라 가서 걱정하지 않게.”조유진은 귀여운 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내 눈물이 눈앞을 가로막았다.그녀는 딸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선유야, 졸리면 자도 돼. 아빠가 오면 엄마가 꼭 깨워줄게.” 조선유는 그렇게 그녀의 품에서 잠들었다. 조유진은 창밖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 세상에 귀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배현수가 귀신의 모습을 해서라도 그녀 앞에 나타나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조유진은 소파에 앉아서 날밤을 새웠다.조유진은 조용히 딸을 안아서 침대에 눕히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육지율은 아침 일찍 그녀에게 전화했다. “오전 열 시에 주주총회가 있어. 준비됐어?”“네. 사실 준비할 것도 없네요.”조유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주주들과 임원들, 말이 거칠어질 수도 있어. 마음의 준비는 하고 가는 게 좋을 거야.”“네.”전화를 끊고 조유진은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하얀색 정장으로 갈아입은 후,연한 화
“그러니까요. 이게 어디 회사 정관에 맞는 일입니까? 아이가 성인이 된 거라면 몰라도, 아직 쥐방울만 한 아이한테 지분을 넘겨주면, 앞으로 회사의 결정 사항은 누구 말을 들어야 하겠어요?”“우리야 당연히 회사가 점점 더 발전하고 성장하면 좋지요. 한데, 지금 배 대표가 생사 확인이 안 되는 마당에 애를 데려오면 어쩌자는 거요! 진짜로 회사 지분 저 애한테 넘기면 나는 모든 지분을 팔고 나갈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소.”“육 변호사님, 내가 보기엔 배 대표님 지분을 우리 주주가 사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래도 안 된다면 일부를 외부인에게 팔면 되잖아요. 그러면 회사에 영향도 안 주고 배 대표 유가족들도 그 돈으로 앞으로 걱정 없이 살 수도 있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요.”“그리고 말이 나와 말이지, 딸이라며. 지금은 그렇다 치지만 나중에 커서 후계자로 양성한다고 해도 이 큰 회사를 관리해야 되는데 누가 여자아이의 말을 따르겠습니까.”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조유진은 이내 비웃으며 맞받아쳤다. “아니 지금 어떤 시대인데, 지금 그 뜻은 배 대표님이 하나뿐인 자식이, 딸이라는 이유로 지분을 상속하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그러면 아들이면 가능하고?”“조유진 씨,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조유진은 그의 말을 끊고 계속 쏘아붙였다. “조선유는 배 대표님의 하나뿐인 핏줄이에요. 절대적인 상속권을 갖고 있다는 뜻이죠. 딸이 뭐 어때서요? 딸은 자식 아닌가요? 배 대표님이 살아있다면 아마 그도 선유 양을 SY그룹의 후계자로 키워냈을 겁니다. 하지만 저도 주주 여러분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투표로 결정하죠.”그녀의 가냘픈 몸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나왔다. 조선유는 고개를 들어 조유진을 올려다보면서 눈빛을 반짝였다. 어른들이 뭐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조선유의 눈에는 엄마가 멋져 보였다. 주주들은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각자의 속내는 달랐지만, 최종 목적은 일치했다. 그들은 배현수의 지분을 나눠 가지려 꿍꿍이를 하고 있었다. 아직
유언장 낭독이 끝나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하였다.“아니 이게 무슨 뜻이야? SY 그룹을 남의 손에 맡긴다고?”“육 변, 배 대표 지분을 딸이 상속받는 데까지는 우리가 어떻게든 이해하겠소, 배 대표의 딸이니까. 근데 지금 이거는 너무 한 거 아니오?”“내 말이. 이 유서 아무래도 가짜 같은데!”“육 변, 아무리 배 대표님이랑 친하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육지율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이 유서는 진짜입니다. 여러분들이 못 믿으시겠다면 법무팀에 의뢰해서 감정을 진행하시죠.”“진짜든 아니든, 글쎄 우리는 회사를 한낱 외부인에게 맡길 수 없다니까?”그중 나이가 많은 주주가 벌떡 일어서서는 조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니. 저 여자가 뭔데 회사를 관리한다고 나대고 있어? 그리고, 7년 전에 저 여자가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바람에 배 대표가 감옥에 들어간 거 아니오! 배 대표가 제정신이면 저 여자를 자리에 앉힐 수가 없지!”“설령 배 대표의 부인이라고 해도 대표이사 자리는 안 되죠!”“조유진 씨가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건, 배 대표님 하나뿐인 딸의 친모라서 가능한 거요. 누울 자리를 봐 가면서 발을 뻗으라고!”“그래요. 여러분들 말이 다 맞습니다. 제가 여기에 참석해 발언할 자격도 없고 대표 자리에 앉을 자격은 더더욱 없습니다. 근데 만약에 이 모든 게 배현수 씨의 유언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저는 반드시 그의 유언대로 따를 예정입니다.”“회사 관리가 무슨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아나? 아니 어디서 뭐 하다 온 사람인지도 모르는 여자가 덜컥 나타나서 SY를 경영하겠다 그러는데, 당신이 생각해도 너무 웃기지 않아?”“조유진 씨라고 했죠? 그냥 집에 가서 애나 보지. 여기가 어디라고!”“잠깐, 나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조햇살인가 인플루언서인지 뭔지였잖아. 육 변호사님, 이건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주주들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조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유서가 진짜라면 지금부터 효력이 발생하게 되는데 여러분들이
육지율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아마 드래곤 파가 엮인 게 틀림없어. 배 대표가 공해에서 그들을 쳤으니 가만있지 않을 거야.”서정호는 불길한 예감에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누군가 이 틈을 타서 풀매수하지는 않겠죠?”“그럴 수도 있어.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봐야지. ”“그런데 육 변호사님, 이 유서 진짜 현수 씨가 쓴 건가요?”조유진이 물었다. “당연하지. 직접 보면 알 거야. 현수 필체를 잘 알잖아.”필체가 날카롭고 대범한 것이 확실히 배현수의 필체였다. 기재한 날짜는 그녀가 납치되던 날이었다. 조유진의 마음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는 살아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유서를 보기 전까지 그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배현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육지율이 이어서 말했다.“공해에 나가기 전에 배 대표가 이 유서를 주고 갔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너를 도와 회사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지. 회사 일 아직 익숙하지 않을 거야. 나랑 서 비서한테 물어보면 돼. 아니면 전문 경영인 불러서 해도 되고.”“그이의 마지막 유언인데, 아무리 힘들어도 할 거예요. 다만 배울 시간이 좀 필요해요.”전에 성남에 있을 때 그녀는 기업경영과 관리를 배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이론에 불과했으며 이 회사에서의 앞날이 얼마나 고될지 그녀 자신조차도 상상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내 딸한테 머물렀다. 차갑던 눈빛은 부드럽고 단단하게 변했다.이제는 배현수가 없으니,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강해져서 딸의 보호막이 되어야 했다. 회사에서 출발하기 전, 조유진은 다시 한번 서정호에게 확인했다.“서 비서님, 현수 씨를 아직도 못 찾은 건가요?”시신 잔해라도?“네.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폭발하면서 시신이...”서정호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자신이 없어서 말끝을 흐렸다. 주먹 쥔 조유진의 손톱이 살에 박혔지만, 그녀는 아픈 줄 몰랐다. 그저 가슴이 욱신거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