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는 현수가 7년 전에 만든 회사명인데, 너한테 주려고 했던 생일선물이었어. 네가 그때 법정에서 그를 지목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야. S는 배현수, Y는 조유진이라는 뜻이지. 현수가 너와의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는 동안, 너는 그의 뒤통수를 쳤어. 그 미래에서 너는 안주인이었는데, 이래도 여전히 아무런 동요가 되지 않아?”육지율은 흥분하여 윽박질렀다.남초윤은 그런 그를 노려보면서 바로 맞받아쳤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현수 씨가 그렇게 되고 유진이도 큰 충격을 받았다고요. Y가 유진이라고 해도 무슨 소용 있어요. 회사대표도 아니고 주주도 아닌데 어떻게 회사를 관리하겠어요. 왜 유진이한테 뭐라고 그래요!”육지율은 할말이 없어졌다. 조유진은 확실히 회사를 관리할 명분이 없었다. 그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서재에서 하룻밤을 꼴딱 샌 조유진의 멍한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SY의 의미를 듣고서는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남초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면서 말했다. “유진아, 지금 힘들면 나중에 다시 생각해도 돼. 현수 씨가 그렇게 되었지만, 너에겐 선유가 있잖아. 지금 회사보다 더 중요한 건 너랑 선유가 아무 일 없는 거야. 힘들겠지만 잘 생각해 봐. 다른 마음먹으면 안 돼.”조유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남초윤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전에 딱 한 번 본적이 있었다. 1년 전, 그녀의 어머니 안정희 장례식에서.그때 조유진은 남초윤의 바로 눈앞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남초윤은 그녀의 우울증이 재발해 다시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겁이 났다. 조유진은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와 현수 씨는 아직 법적 부부가 아니라서, 육 변호사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그이의 지분을 상속받을 자격이나 명분이 없어요. 만약 선유가 상속받게 된다면 정말로 현수 씨가 사망했다고 선고한 거나 다름없는데, 그러면 회사에 더 안 좋은 것 아닌가요?”게다가, 배현수의 사고 소식을 그녀는 아직 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지도 못했다. 육
듣고 있던 육지율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에게 아주 먼 이야기였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부부 사이가 너무 좋으면, 한쪽이 세상을 뜨면 다른 한쪽은 그리움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고 했다. 조유진과 배현수는 법적으로 부부는 아니지만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얽히고설켜 모진 풍파를 겪었으니 이젠 떼 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인생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배현수가 정말로 없어진다면 조유진도 점차 말라 죽어갈 뿐이었다.조유진이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도 배현수가 따라 죽으려고 했었던 것처럼.정말 죽음까지 생각한 거라면 회사가 어떻게 되어도 그녀에게 상관이 없을 것이다. 조유진은 육지율과 남초윤을 마당까지 바래다줬다.“회사의 일은 육 변호사님께서 부탁드립니다. 일주일 뒤에도 현수 씨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때 다시 주주총회를 열고 지분 문제를 논의하죠. 저도 선유를 데리고 참석할 겁니다.”육지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현수가 사망하면 그의 지분은 자연스레 딸한테 상속될 것이다. 그 지분을 팔든 보유하고 있든 이들은 앞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남초윤은 조유진을 안아주면서 말했다.“유진아, 딴생각하지 말고 요 며칠 푹 쉬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잖니.”‘그래,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다.’배현수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니, 조유진은 앞날이 까마득했다.예전에 두 사람은 서로 떨어져 있어도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돌고 돌아 만나게 되어있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도 욕심을 부린 적이 없었다. 그저 그가 살아있기만을 바랐다. 함께 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멀리서 그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하늘은 마치 계속 그녀를 놀리는듯했고 이제는 두 사람을 서로 다른 세상에 갈라놓았다. 별장을 떠난 후 차 안에서 육지율과 남초윤은 서로
남초윤은 순간 이해가 안 되는 듯 되물었다.“내가 뭐요?”“남자들은 모두 사랑꾼인 척 연기하고, 여자는 일편단심이지만 티를 내지 않을 뿐이라며. 그러면 당신도 그런 여자예요?”육지율은 문득 그녀가 김성혁에게 어느 정도의 감정인지 궁금해졌다.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나는 유진이랑 달라요. 나도 당신들처럼 입에 발린 말을 잘하죠.”다 남자들한테서 배운 것이다.육지율은 건조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남자들이 좋아하겠군.”남초윤은 순간 그가 비웃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헷갈렸다. “지금 같은 세상에 유진 같은 여자도 흔치 않아요. 만약 현수 씨가 안 돌아온다면, 정말로 그를 따라가고도 남을 여자예요. 요 며칠 내가 매일 전화해 줘야겠어요. 아니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정말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아마 첫사랑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김성혁도 남초윤의 첫사랑이었다. 만약 김성혁이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봤지만 아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좀 정이 없는 편인가?’남초윤은 대학교 때부터 조유진하고 배현수 두 사람이 유별나다고 생각했었다. 배현수는 조유진하고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 했으며 어쩌다 그녀가 조유진과 같이 영화 보러 가려고 해도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녀가 한창 회상에 젖어 있는데 육지율이 문득 입을 열었다.“그래서, 만약에 좋아하는 사람이 죽으면 당신도 따라 같이 죽을 거예요?”“내가 미쳤어요? 이 세상에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내가 죽으면 그 명품 백들은 어떡해요. 아까워서 못 죽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끝까지 행복하게 살 거예요.”남자가 죽으면 또 찾지 뭐. 세상에 널린 게 남자인데 뭐가 아쉬워서.그런 그녀를 보면서 육지율은 큰 소리로 웃고 있었지만,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임무 중에 죽기라도 한다면 이 여자는 아마 그날로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날 것이다. 육지율은 이해 안 되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않던
그도 혹시 슬픔을 못 견디고 유진이처럼 그러지는 않을까?남초윤은 육지율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좋은 남자는 아직 많으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이후에도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예요.”“...”‘젠장,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육지율은 얼굴이 잿빛이 된 채로 앞만 노려봤다. 차가 길가에 급정거하더니 그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내려요.”“왜요? 가는 길에 나 잡지사에 데려준다고 하지 않았어요?”“지금은 아니에요.”“나 오늘 하이힐 신었다 말이에요.”육지율은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남초윤은 그를 노려보다 할 수 없이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내리자마자 차는 쌩하고 출발해 버렸다. 남초윤은 한쪽 하이힐을 벗어 질주하는 차를 향해 던지며 소리쳤다.“개자식! 하여튼 부부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만약 그가 죽으면 이튿날 바로 남자 꼬시러 갈 거라고 그녀는 이를 갈며 다짐했다. “절친이 죽었다고 같이 슬퍼해 주고 위로해 줬더니. 양심은 진짜 개나 줘버려!”그녀는 깡충거리며 다시 하이힐을 주워 왔다. ‘근데 절친이 행방불명됐는데 왜 저렇게 담담하지. 평소랑 별반 다르지 않잖아. 역시 남자들의 의리란. 쯧.”배현수가 사고를 당한 후 회사 일은 육지율이 그를 대신해 임시로 처리하고 있었고 서정호는 비서로서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지만, 배현수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피를 말리는 일주일이 지나가고 조유진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딸은 계속 그녀에게 아빠가 어디 갔냐고 보챘다.조유진은 더는 숨길 수가 없어 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얘기했다.“선유야, 아빠 아마 돌아오지 않을 거야.”조선유는 이해가 안 되는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왜? 아빠가 다른 이모랑 같이 떠난 거야? 아빠가 밖에 다른 이모랑 아기와 같이 살고 있는 거야?”딸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면서 조유진의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엄마, 울지마. 아빠 지금 어디 있
“우리 방마다 불 다 켜놓고 있자. 그러면 아빠가 불빛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어.”“진짜야?”“응.”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사실 그녀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싶었다. 길을 잃은 배현수가 불빛을 따라 집에 돌아올 수 있기를.조유진은 딸과 같이 소파에 가만히 기대어 앉아있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와 그녀의 머리를 간지럽혔다. 조선유는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엄마, 나 조금 무서워, 아빠가 귀신으로 변하면 어떡해?”조유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딸을 달랬다.“걱정하지 마. 아빠가 귀신이 되어도 우리 선유는 해치지 않을 거야.”아직 어린 딸은 죽음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뭔지 몰랐다. 어른처럼 심장이 찢기는 아픔을 아직 몰라서 다행이었다.조선유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아빠 오늘 밤에 집에 올 수 있어? 나 아빠한테 할 얘기가 있는데. 지난번에 내가 받아쓰기 시험에서 꼴찌를 했는데 100점 맞았다고 거짓말했어. 이따 아빠를 만나면 사실대로 말할 거야. 아빠 하늘나라 가서 걱정하지 않게.”조유진은 귀여운 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내 눈물이 눈앞을 가로막았다.그녀는 딸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선유야, 졸리면 자도 돼. 아빠가 오면 엄마가 꼭 깨워줄게.” 조선유는 그렇게 그녀의 품에서 잠들었다. 조유진은 창밖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 세상에 귀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배현수가 귀신의 모습을 해서라도 그녀 앞에 나타나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조유진은 소파에 앉아서 날밤을 새웠다.조유진은 조용히 딸을 안아서 침대에 눕히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육지율은 아침 일찍 그녀에게 전화했다. “오전 열 시에 주주총회가 있어. 준비됐어?”“네. 사실 준비할 것도 없네요.”조유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주주들과 임원들, 말이 거칠어질 수도 있어. 마음의 준비는 하고 가는 게 좋을 거야.”“네.”전화를 끊고 조유진은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하얀색 정장으로 갈아입은 후,연한 화
“그러니까요. 이게 어디 회사 정관에 맞는 일입니까? 아이가 성인이 된 거라면 몰라도, 아직 쥐방울만 한 아이한테 지분을 넘겨주면, 앞으로 회사의 결정 사항은 누구 말을 들어야 하겠어요?”“우리야 당연히 회사가 점점 더 발전하고 성장하면 좋지요. 한데, 지금 배 대표가 생사 확인이 안 되는 마당에 애를 데려오면 어쩌자는 거요! 진짜로 회사 지분 저 애한테 넘기면 나는 모든 지분을 팔고 나갈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소.”“육 변호사님, 내가 보기엔 배 대표님 지분을 우리 주주가 사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래도 안 된다면 일부를 외부인에게 팔면 되잖아요. 그러면 회사에 영향도 안 주고 배 대표 유가족들도 그 돈으로 앞으로 걱정 없이 살 수도 있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요.”“그리고 말이 나와 말이지, 딸이라며. 지금은 그렇다 치지만 나중에 커서 후계자로 양성한다고 해도 이 큰 회사를 관리해야 되는데 누가 여자아이의 말을 따르겠습니까.”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조유진은 이내 비웃으며 맞받아쳤다. “아니 지금 어떤 시대인데, 지금 그 뜻은 배 대표님이 하나뿐인 자식이, 딸이라는 이유로 지분을 상속하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그러면 아들이면 가능하고?”“조유진 씨,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조유진은 그의 말을 끊고 계속 쏘아붙였다. “조선유는 배 대표님의 하나뿐인 핏줄이에요. 절대적인 상속권을 갖고 있다는 뜻이죠. 딸이 뭐 어때서요? 딸은 자식 아닌가요? 배 대표님이 살아있다면 아마 그도 선유 양을 SY그룹의 후계자로 키워냈을 겁니다. 하지만 저도 주주 여러분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투표로 결정하죠.”그녀의 가냘픈 몸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나왔다. 조선유는 고개를 들어 조유진을 올려다보면서 눈빛을 반짝였다. 어른들이 뭐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조선유의 눈에는 엄마가 멋져 보였다. 주주들은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각자의 속내는 달랐지만, 최종 목적은 일치했다. 그들은 배현수의 지분을 나눠 가지려 꿍꿍이를 하고 있었다. 아직
유언장 낭독이 끝나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하였다.“아니 이게 무슨 뜻이야? SY 그룹을 남의 손에 맡긴다고?”“육 변, 배 대표 지분을 딸이 상속받는 데까지는 우리가 어떻게든 이해하겠소, 배 대표의 딸이니까. 근데 지금 이거는 너무 한 거 아니오?”“내 말이. 이 유서 아무래도 가짜 같은데!”“육 변, 아무리 배 대표님이랑 친하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육지율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이 유서는 진짜입니다. 여러분들이 못 믿으시겠다면 법무팀에 의뢰해서 감정을 진행하시죠.”“진짜든 아니든, 글쎄 우리는 회사를 한낱 외부인에게 맡길 수 없다니까?”그중 나이가 많은 주주가 벌떡 일어서서는 조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니. 저 여자가 뭔데 회사를 관리한다고 나대고 있어? 그리고, 7년 전에 저 여자가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바람에 배 대표가 감옥에 들어간 거 아니오! 배 대표가 제정신이면 저 여자를 자리에 앉힐 수가 없지!”“설령 배 대표의 부인이라고 해도 대표이사 자리는 안 되죠!”“조유진 씨가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건, 배 대표님 하나뿐인 딸의 친모라서 가능한 거요. 누울 자리를 봐 가면서 발을 뻗으라고!”“그래요. 여러분들 말이 다 맞습니다. 제가 여기에 참석해 발언할 자격도 없고 대표 자리에 앉을 자격은 더더욱 없습니다. 근데 만약에 이 모든 게 배현수 씨의 유언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저는 반드시 그의 유언대로 따를 예정입니다.”“회사 관리가 무슨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아나? 아니 어디서 뭐 하다 온 사람인지도 모르는 여자가 덜컥 나타나서 SY를 경영하겠다 그러는데, 당신이 생각해도 너무 웃기지 않아?”“조유진 씨라고 했죠? 그냥 집에 가서 애나 보지. 여기가 어디라고!”“잠깐, 나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조햇살인가 인플루언서인지 뭔지였잖아. 육 변호사님, 이건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주주들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조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유서가 진짜라면 지금부터 효력이 발생하게 되는데 여러분들이
육지율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아마 드래곤 파가 엮인 게 틀림없어. 배 대표가 공해에서 그들을 쳤으니 가만있지 않을 거야.”서정호는 불길한 예감에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누군가 이 틈을 타서 풀매수하지는 않겠죠?”“그럴 수도 있어.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봐야지. ”“그런데 육 변호사님, 이 유서 진짜 현수 씨가 쓴 건가요?”조유진이 물었다. “당연하지. 직접 보면 알 거야. 현수 필체를 잘 알잖아.”필체가 날카롭고 대범한 것이 확실히 배현수의 필체였다. 기재한 날짜는 그녀가 납치되던 날이었다. 조유진의 마음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는 살아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유서를 보기 전까지 그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배현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육지율이 이어서 말했다.“공해에 나가기 전에 배 대표가 이 유서를 주고 갔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너를 도와 회사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지. 회사 일 아직 익숙하지 않을 거야. 나랑 서 비서한테 물어보면 돼. 아니면 전문 경영인 불러서 해도 되고.”“그이의 마지막 유언인데, 아무리 힘들어도 할 거예요. 다만 배울 시간이 좀 필요해요.”전에 성남에 있을 때 그녀는 기업경영과 관리를 배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이론에 불과했으며 이 회사에서의 앞날이 얼마나 고될지 그녀 자신조차도 상상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내 딸한테 머물렀다. 차갑던 눈빛은 부드럽고 단단하게 변했다.이제는 배현수가 없으니,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강해져서 딸의 보호막이 되어야 했다. 회사에서 출발하기 전, 조유진은 다시 한번 서정호에게 확인했다.“서 비서님, 현수 씨를 아직도 못 찾은 건가요?”시신 잔해라도?“네.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폭발하면서 시신이...”서정호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자신이 없어서 말끝을 흐렸다. 주먹 쥔 조유진의 손톱이 살에 박혔지만, 그녀는 아픈 줄 몰랐다. 그저 가슴이 욱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