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수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하고 씻어도 돼요.”오늘 밤, 조유진은 정말 이상한 것 같다.배현수는 그녀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와 관계하려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일은 그저 그때 상황에 맞게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이지 굳이 시간을 정해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조유진은 마치 그와 무슨 거래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오늘 조유진을 처음 만난 것도 아니고 그녀와 알고 지낸 지 벌써 13년이다. 조유진이 자신에게 진심인지 아닌 자쯤은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예를 들어 지금처럼 조유진은 분명 그런 마음이 없고 심지어 본능적으로 그를 거부하면서도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배현수와 관계를 가지려 하고 있다. 배현수는 얼굴을 찌푸리며 자기 허리에 감긴 그녀의 손을 떼며 돌아서서는 까맣고 맑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내가 너 때문에 칼을 맞은 것 때문에 고마워서 그래?”고마워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 않나?조유진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배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한마디 했다.“고마운 거면 이런 식으로 하지 마.”“원하잖아요.”순간 말문이 막힌 배현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고 최대한 기분 나쁜 기색을 감추려 했지만 그래도 참지 못하고 화가 나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래! 하고 싶어! 너를 아예 내 침대에 가두고 아무 데도 못 가게 하고 싶어! 유진아 그래도 괜찮다고 할 거야?”사실 그건 좀 너무한 게 아닌가...“오늘 너 대신 칼을 맞은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엄창민이나 신준우였다면? 그래도 이런 식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생각이야?”나긋하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배현수의 모습에 조유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배현수는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이 엄창민이나 신준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이고 어쩌면 그들보다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엄창민은 그녀의 오빠라는 신분으로 그녀를 많이 신경 쓰고 전화도 가끔 걸어 그녀더러 성남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신
안개가 자욱한 욕실에서 배현수는 그녀의 입술까지 깨물 정도로 진하게 키스했고 서로의 입안에는 희미한 피비린내까지 퍼졌다.조유진은 그가 어떻게 ‘공격’해도 저항하지 않았고 마치 그가 무엇을 하든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분명히 아픔을 느꼈을 텐데도 그녀는 눈살만 찌푸릴 뿐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이 키스에서 배현수는 그녀의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는데 무슨 사랑을 논할 수 있겠는가?심지어 조유진은 또렷한 말투로 한 마디 물었다.“침대로 가면 안 돼요?”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배현수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큰 손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더 꽉 움켜쥐었다.“내가 너를 어떻게 해도 그냥 다 덤덤히 받아들이기로 한 거야?”약속한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상 배현수는 채권자이고 그녀는 빚쟁이이다.“빚을 갚는 동안은 현수 씨가 갑이니까...”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현수는 그녀를 조였던 팔을 풀며 말했다. “나가.”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 안개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부드러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의 주위에는 한기가 맴돌고 있었다.조유진은 아무 말 없이 욕실을 나갔고 욕실 문을 나서기 전에 심지어 배현수에게 당부의 말까지 했다.“너무 오래 담그지 마세요. 의사가 뜨거운 물로 목욕하면 혈액순환이 빨라져 상처 회복에 좋지 않다고 했어요.”이런 그녀의 관심은 배현수의 귀에 오히려 다른 뜻으로 들렸다.하... 조유진은 배현수가 상처가 악화된 걸 핑계로 그녀가 성남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걸까?만약 이 상처가 평생 낫지 않으면 이 여자를 계속 옆에 둘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치없는 생각이 순간 배현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욕실을 나온 조유진은 엄창민의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창민 오빠?”“요즘 대제주시에서 어떻게 지내? 배현수가 괴롭히지는 않아? 지난번에 전화했을 때 휴대전화가 꺼져있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엄창민은 전화에서 그녀 걱정만 잔뜩 늘어놓았다.조유진은 걱정을 끼치기 싫
약속한 시간이 다 되면 그녀는 냉정한 마음으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다.배현수는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내가 왜 깜빡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내가 너를 강요하고 있었는데...”“현수 씨와 싸우고 싶지 않아요. 오늘은 몸도 성치 않은 데 빨리 쉬세요.”그녀는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아무런 감정 기복이 없었다. 배현수는 그런 잔잔함을 당장이라도 깨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평화로운 얼굴이 싫었다. 배현수가 조유진더러 선유 방에서 자라고 하자 그녀는 진짜로 베개를 들고 방을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방문을 닫으면서 인사까지 했다.“잘 자요.”문이 닫히자 배현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억누르고는 긴 다리를 들어 올려 방 안의 나무 책상을 힘껏 걷어찼다.그가 침대 옆에 앉아 한창 열을 식히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에는 ‘송지연’이라는 세글자가 떠 있었다.그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통화버튼을 눌렀다.전화기 너머 송지연이 물었다.“요즘 기분은 어때?”“그냥 그래.”대충 내뱉은 딱딱한 네 글자에 그의 기분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확실히 많이 언짢은 게 분명했다.“유진 씨와 또 싸웠어?”“시리 알아?”“시리?”배현수는 피식 웃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시리는 물으면 바로 대답하잖아. 동문서답할 때도 많은데 어쨌든 대답은 하잖아. 조유진이 지금 딱 시리 같아. 내가 물으면 바로 대답하는 시리.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해.”그녀는 정말 기계같이 딱 하라는 만큼만 하고 있었다.배현수가 주동적이면 그녀는 그에게 맞게 행동했고 배현수가 그러지 않으면 그녀도 별 움직임이 없었다.송지연은 몇 초 동안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했다.“그게 바로 가짜 친밀성이야. 네가 멈추면 이 관계는 끝나.”하... 가짜 친밀성.확실히 그들은 지금 친한 척만 하고 있었다.그가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그녀도 확실히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했지만 이런 접근은 단지 육체적인
결과가 보이지 않는 관계...전화기 너머의 송지연은 더 확실한 말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너와 조유진의 관계는 너만 계속 헌신하고 있어. 유진 씨가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너는 계속 붙잡고 놓지 않아. 하지만 너도 그런 상황에 지쳐서 이미 점점 네 화를 못 이기고 있어. 이런 나쁜 관계 심지어 최악인 감정에 오래 머물다 보면 너나 유진 씨 두 사람에게 모두 안 좋아.”“PTSD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 거야?”“극한의 스트레스나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복잡한 심리적 반응이야. 극도로 강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서 이러한 반응이 지속해서 나타나. 그로 인해 짧게 혹은 장기적인 트라우마가 생겨. 만성 환자의 3분의 1은 평생 치유되지 않아.”평생 치유되지 않는다...이 한마디는 마치 거대한 돌덩이처럼 배현수의 심장을 짓눌렀고 순간 그는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아팠다.사실 예전의 조유진은 피를 봐도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피를 보는 것을 이토록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안정희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일 가능성이 크다.하지만 조유진이 정말 배현수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다면 왜 이런 스트레스 반응이 생기게 된 것일까?배현수가 전에 복수한 것 때문에?“진짜로 PTSD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평소 유진 씨 반응을 관찰하고 또 평소에 먹는 약은 없는지 한 번 봐. 만약 너에 대한 스트레스 반응이 이미 호흡곤란을 일으킬 정도로 심각하다면 유진 씨도 자기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치료를 받으러 갔는지 안 갔는지는 모르지. 왜냐면 국내에서는 심리 질환에 대해 별로 중시를 안 하거든.”겉으로는 아주 정상인 것처럼 혹은 정서가 매우 안정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단지 기분 나쁜 감정으로 간주하고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물론 어떤 사람은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심각한 상태라 치료하지
지금도 집에는 그녀가 생전에 쓰던 바이올린이 놓여 있었다.엄준은 조유진과 정말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엄창민 역시 신희수의 사진을 보고 조유진의 모습이 왠지 신희수와 비슷하다고 느꼈고 머릿속으로 과감한 추측을 했지만 이내 곧 부정했다.얼마 전 자기가 친딸이라고 찾아온 백소미 친자 확인 검사를 엄창민이 직접 가서 했고 그녀가 바로 엄준의 친딸이었다.“아버지, 지난번에 소미 신분을 공개할 거라고 하신 건 언제쯤 하실 예정이세요?”“급하지 않아. 일단 다음 주에 소미를 집에 데리고 와서 적응할 수 있는지 봐야지.”그 말에 엄창민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엄준은 걱정이 태산인 얼굴을 한 엄창민을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조유진을 찾으러 대제주시에 가고 싶은 거야?”“최근 인터넷에 뜬 기사를 보니 유진이에게 많은 일이 생긴 것 같아서요. 사실 많이 걱정돼요.”“지금 대제주시의 업무는 명월이가 담당하고 있어. 만약 사적인 일로 간다면 너를 단속할 사람은 없어.”순간 엄창민의 눈이 살짝 빛났고 그 모습을 본 엄준은 그에게 몇 마디 당부했다.“가 봐, 너 같은 애가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쉽지 않은데 모처럼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으니 적극적으로 한번 다가가 봐. 늘 그렇게 벙어리처럼 있으니 유진 씨가 어떻게 네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알겠니?”“네, 하던 일 마치면 바로 비행기 티켓 예매할게요.”...밤의 원주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조윤미는 심미경을 위층으로 끌고 가더니 방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너 여기 가만히 있어.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강이찬, 이 자식이 진심으로 너와 결혼하고 싶은지 한번 보고 싶네!”말을 마친 조윤미는 대문까지 걸어 잠그고 강이찬이 들어올 틈조차 주지 않았다.밖에는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졌고 심미경은 2층 창가에 서서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우산을 쓰지 않은 그의 몸은 이미 흠뻑 젖었다.조윤미는 딸을 힐끗 쳐다보고는 무정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그놈이 네 배를 불리고도 책임지
마당에는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조윤미는 한 손에 우산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강이찬의 발 옆에 검은 우산을 놓고 당당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이만 가봐요. 미경이는 이찬 씨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는 강이찬의 시야마저 흐릿하게 했다.그는 커튼이 닫힌 2층을 천천히 올려다보며 힘이 다 빠진 쉰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미경 씨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제 아이예요. 미경이 혼자 어떻게 아이를 키울 수 있어요? 어머님, 제가 꼭 미경 씨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어떻게 책임질 건데요? 미경이에게 양육비를 줄 거예요? 아니면 계속 대제주시로 데려가 이찬 씨 가사도우미로 쓸 거예요?”조윤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가사도우미라는 단어에 강이찬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저 한 번도 미경 씨를 가사도우미로 생각한 적이 없어요.”그러자 조윤미는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계속 말했다.“그러면 우리 미경이 사랑해요? 미경이에게 듣기로는 이찬 씨가 먼저 고백했다고 들었어요. 맞나요?”“네.”먼저 고백한 건 사실이다.처음에 강이찬이 심미경을 따라다녔고 지금 그녀에게 미안한 사람도 강이찬이었다. “이찬 씨 집이 잘산다는 거 알아요. 대제주시에서 일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리가 사는 이곳은 대제주시에 비하면 한없이 작아요. 미경이 아버지도 돌아갔고 우리 집안 형편도 그냥 그렇죠. 하지만 미경이도 우리 집안의 귀한 딸이에요! 우리가 아껴 먹고 아껴 써서 겨우 대학까지 보낸 이유가 갖은 수모를 견디며 누구 뒷바라지나 하라고 그런 게 아니에요. 우리 미경이 바보 같아서 그저 잠시 데리고 노는 거라면 여기서 이럴 필요 없어요. 배 속의 아이를 없앨지 아니면 그냥 나을지는 이제 이찬 씨와 상관없는 일이에요!”조윤미가 독설을 퍼붓고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강이찬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왔다.그 모습을 본 조윤미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이찬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은 서로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헤어지는 것은 한 사람의 일이에요. 상대방의 동의 같은 건 필요 없어요.”“그런데 임신한 건 왜 일부러 계속 숨겼어요?”“아이를 핑계로 억지로 이찬 씨 발목 잡고 싶지 않아요. 나도 한때는 이찬 씨와 정말 결혼하고 싶었죠. 순진하기도 하지... 이찬 씨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줄 알았으니까... 이찬 씨 마음속에 조유진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도 모르고. 이찬 씨, 그거 알아요? 당신은 자면서까지 조유진 이름 부른다는 거? 이런 것까지 신경이 안 쓰이지는 않아요. 나는 이찬 씨 옆에만 있으면 만족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에요. 나도 생각보다 꽤 욕심이 있더라고요. 나 혼자 좋아하는 거 이제 못하겠어요.”욕심이 많은 그녀는 사랑받기를 바랐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랐다.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바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침대 머리맡에 앉아있는 심미경은 얼굴을 살짝 숙인 채 자기 기분을 최대한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서 어느새 그녀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울고 싶지 않았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억울해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녀 혼자 강이찬을 좋아한 것일 뿐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강이찬은 그 자리에 선 채 그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몸을 굽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미경 씨, 우리 결혼해요. 진짜로 결혼해요. 날짜는 변함없이 월말 그대로 해요. 나 꼭 아이와 미경 씨에게 좋은 가정 만들어 주고 싶어요. 나를... 나를 한 번만 더 믿어주면 안 될까요?”그의 눈빛은 깊고 진지했다.심미경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이찬 씨, 나와 결혼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그냥 내가 임신했기 때문에 그저 나 책임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결혼하는 거예요?”‘그것도 아니면 그는 조유진의 그림자와 결혼하고 싶은 거예요?’하지만 이 말을 그녀는 차마 물어볼
심미경의 눈물이 그의 손등에 닿았다.강이찬이 또 말했다.“미경 씨, 이제부터 미경 씨 차갑게 대하지 않을 테니 우리 다시 시작해요. 이번에는 잘해드릴게요.”이성적으로는 그를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가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자, 슬프기만 했다.“이찬 씨, 한 번 더 믿어도 되는 거예요?”강이찬은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더니 말했다.“미경 씨, 저랑 결혼해 줄래요?”이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반지는 그가 직접 고른 것이었다.강이찬은 반지를 그녀의 약지에 끼워주면서 말했다.“만약 이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대제주시로 돌아가서 다시 골라도 돼요.”심미경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약지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바라보았다.예전에는 그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프러포즈하는 장면을 꿈꿔왔는데 정작 프러포즈를 받으니 어째서인지 전혀 기쁘지 않았다.아마도 강이찬이 자신과 결혼하려는 이유가 임신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강이찬은 흔들리는 그녀를 보더니 말했다.“이진이 독립시키려고요. 이제부터 미경 씨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동시통역하고 싶다면서요? 이미 온라인에 접수 신청했어요. 아직은 임신 중이라 급히 일할 필요도 없으니 먼저 동시통역 자격증을 취득하고, 출산하고 몸조리도 끝내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해도 돼요. 말리지 않을게요.”‘동생을 끔찍이 사랑하던 사람이 동생을 독립시키겠다고?’“쫓아내면 이진이가 이찬 씨를 미워하지 않을까요?”“너무 오냐오냐 키웠더니 고생도 좀 맛보게 해야 하겠어요.”심미경은 어두워진 그의 눈빛 속으로 점점 깊이 빠지게 되었다.“이찬 씨, 이번이... 마지막 기회에요.”강이찬을 위한, 그리고 자신을 위한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했다.“그래요. 여전히 마음이 안 놓인다면 대제주시로 돌아가자마자 혼인신고부터 해요.”‘혼인신고?’심미경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둘 사이의 관계가 아직 안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혼인신고는 나중에 해요.”“그래요. 저랑 대제주시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요.”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