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에 들어간 후, 조유진은 그의 휴대전화를 쥐고 잠금을 풀려고 했다.하지만 배현수 휴대전화의 비밀번호를 모르는 그녀는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선유에게 자신의 핸드폰으로 배달을 시키자고 말하려 했다.그때 옆에 있던 배현수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비밀번호, 네 생일이야. 19980606.”순간 조유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녀의 생일날은 결코 기념할 만한 날이 아닙니다.7년 전 6월 6일, 배현수는 그녀와 함께 가장 아름다운 생일을 보냈지만 그녀는 그가 그날 밤에 교통사고를 낸 가해자라고 모함했다.그의 비밀번호를 들은 조유진은 휴대전화를 잡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그녀는 진작에 그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7년 전 법정에서 증언하는 순간부터 자격은 이미 박탈되었다.조유진이 멍하니 서 있자 선유가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엄마, 밀크티 주문할래!”조유진은 그제야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배달 앱을 켜 밀크티를 검색했다.“어떤 거 마실 거야?”“이거, 푸딩 밀크티. 코코넛과 펄 넣어줘!”선유는 밀크티 안에 이것저것 많이 넣는 것을 좋아했다.조유진이 주문을 하고 보니 밀크티 가게가 근처가 아니어서 배달 범위를 한참 벗어났다. 퀵 서비스를 불러 갖고 와야 하는데 퀵 서비스 비용이 밀크티보다 더 비쌌다.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었다. 주문을 마친 조유진은 배현수에게 휴대전화를 건네며 비밀번호를 입력해 비용을 내라고 했다.그러자 배현수는 휴대전화를 건네받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비밀번호를 불렀다.“980606.”순간 조유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결제 비밀번호까지 그녀의 생일로?심지어 비밀번호를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알려준다고? 그러다가 그녀가 거액을 챙겨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밀크티를 주문한 뒤 조유진은 배현수를 보며 한마디 했다.“현수 씨... 결제 비밀번호 변경해요.”“왜?”“내가 비밀번호를 이미 알았고 그러다가 누가 현수 씨 돈을 훔쳐 가기라도 하면 내가 제일 먼저 의심받을 거 아니에요.
귓가에 전해지는 뜨거운 숨결에 조유진은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손에 있는 약병을 더 꽉 움켜쥐었다. 배현수는 처음에 무슨 약인지 못 알아챈 듯했으나 왼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은 그는 그녀의 손에 작은 약병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약병에 시선을 돌리는 대신 그녀의 귀에 키스하며 물었다. “무슨 약이야?”“그런 약...”순간 배현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응?”조유진은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돌아서서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껴안고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깊은 밤, 산성 별장 거실에는 무드등 하나만 남아 있었다.장은숙은 이미 메이드룸에서 쉬고 있었고 장 셰프도 저녁 식사 후 집으로 돌아갔다.선유도 이미 방에서 자고 있었다.커다란 별장 거실에는 배현수와 조유진 그리고 우리에서 자고 있는 예삐만 있었다. 부쩍 대담해진 조유진은 하고 싶은 일은 꼭 해내고 마는 성격이었다.달빛만 비치는 어두운 거실에서 그녀는 배현수의 까만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성.욕.촉.진.제.”사실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파록세틴은 지금의 그녀에게는 어느 정도 ‘성욕촉진제'인 셈이다. 먹지 않으면 어쨌든 바로 흥을 깨기 마련이니까...이 다섯 글자를 들은 배현수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언제 이렇게 안 좋은 것까지 다 배웠어?”조유진은 속으로 흠칫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현수는 왼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쉰 목소리에 농담 섞인 웃음을 띠며 말했다.“약을 먹어야만 나와 관계를 가지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거야?”그의 웃음은 기쁜 내색이 아니라 오히려 실망한 듯 차가움이 감돌고 있었다.배현수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남자들은 원래 이런 여러 가지 작업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낮에 배현수도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남자들이 야한 생각을 하는 것은 정상이라고. 그 또한 정상적인 남자라고. 그런데 지금은 왜... 다시 금욕이라도 시작한 걸까?배현수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을
배현수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하고 씻어도 돼요.”오늘 밤, 조유진은 정말 이상한 것 같다.배현수는 그녀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와 관계하려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일은 그저 그때 상황에 맞게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이지 굳이 시간을 정해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조유진은 마치 그와 무슨 거래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오늘 조유진을 처음 만난 것도 아니고 그녀와 알고 지낸 지 벌써 13년이다. 조유진이 자신에게 진심인지 아닌 자쯤은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예를 들어 지금처럼 조유진은 분명 그런 마음이 없고 심지어 본능적으로 그를 거부하면서도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배현수와 관계를 가지려 하고 있다. 배현수는 얼굴을 찌푸리며 자기 허리에 감긴 그녀의 손을 떼며 돌아서서는 까맣고 맑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내가 너 때문에 칼을 맞은 것 때문에 고마워서 그래?”고마워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 않나?조유진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배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한마디 했다.“고마운 거면 이런 식으로 하지 마.”“원하잖아요.”순간 말문이 막힌 배현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고 최대한 기분 나쁜 기색을 감추려 했지만 그래도 참지 못하고 화가 나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래! 하고 싶어! 너를 아예 내 침대에 가두고 아무 데도 못 가게 하고 싶어! 유진아 그래도 괜찮다고 할 거야?”사실 그건 좀 너무한 게 아닌가...“오늘 너 대신 칼을 맞은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엄창민이나 신준우였다면? 그래도 이런 식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생각이야?”나긋하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배현수의 모습에 조유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배현수는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이 엄창민이나 신준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이고 어쩌면 그들보다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엄창민은 그녀의 오빠라는 신분으로 그녀를 많이 신경 쓰고 전화도 가끔 걸어 그녀더러 성남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신
안개가 자욱한 욕실에서 배현수는 그녀의 입술까지 깨물 정도로 진하게 키스했고 서로의 입안에는 희미한 피비린내까지 퍼졌다.조유진은 그가 어떻게 ‘공격’해도 저항하지 않았고 마치 그가 무엇을 하든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분명히 아픔을 느꼈을 텐데도 그녀는 눈살만 찌푸릴 뿐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이 키스에서 배현수는 그녀의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는데 무슨 사랑을 논할 수 있겠는가?심지어 조유진은 또렷한 말투로 한 마디 물었다.“침대로 가면 안 돼요?”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배현수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큰 손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더 꽉 움켜쥐었다.“내가 너를 어떻게 해도 그냥 다 덤덤히 받아들이기로 한 거야?”약속한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상 배현수는 채권자이고 그녀는 빚쟁이이다.“빚을 갚는 동안은 현수 씨가 갑이니까...”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현수는 그녀를 조였던 팔을 풀며 말했다. “나가.”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 안개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부드러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의 주위에는 한기가 맴돌고 있었다.조유진은 아무 말 없이 욕실을 나갔고 욕실 문을 나서기 전에 심지어 배현수에게 당부의 말까지 했다.“너무 오래 담그지 마세요. 의사가 뜨거운 물로 목욕하면 혈액순환이 빨라져 상처 회복에 좋지 않다고 했어요.”이런 그녀의 관심은 배현수의 귀에 오히려 다른 뜻으로 들렸다.하... 조유진은 배현수가 상처가 악화된 걸 핑계로 그녀가 성남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걸까?만약 이 상처가 평생 낫지 않으면 이 여자를 계속 옆에 둘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치없는 생각이 순간 배현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욕실을 나온 조유진은 엄창민의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창민 오빠?”“요즘 대제주시에서 어떻게 지내? 배현수가 괴롭히지는 않아? 지난번에 전화했을 때 휴대전화가 꺼져있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엄창민은 전화에서 그녀 걱정만 잔뜩 늘어놓았다.조유진은 걱정을 끼치기 싫
약속한 시간이 다 되면 그녀는 냉정한 마음으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다.배현수는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내가 왜 깜빡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내가 너를 강요하고 있었는데...”“현수 씨와 싸우고 싶지 않아요. 오늘은 몸도 성치 않은 데 빨리 쉬세요.”그녀는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아무런 감정 기복이 없었다. 배현수는 그런 잔잔함을 당장이라도 깨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평화로운 얼굴이 싫었다. 배현수가 조유진더러 선유 방에서 자라고 하자 그녀는 진짜로 베개를 들고 방을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방문을 닫으면서 인사까지 했다.“잘 자요.”문이 닫히자 배현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억누르고는 긴 다리를 들어 올려 방 안의 나무 책상을 힘껏 걷어찼다.그가 침대 옆에 앉아 한창 열을 식히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에는 ‘송지연’이라는 세글자가 떠 있었다.그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통화버튼을 눌렀다.전화기 너머 송지연이 물었다.“요즘 기분은 어때?”“그냥 그래.”대충 내뱉은 딱딱한 네 글자에 그의 기분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확실히 많이 언짢은 게 분명했다.“유진 씨와 또 싸웠어?”“시리 알아?”“시리?”배현수는 피식 웃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시리는 물으면 바로 대답하잖아. 동문서답할 때도 많은데 어쨌든 대답은 하잖아. 조유진이 지금 딱 시리 같아. 내가 물으면 바로 대답하는 시리.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해.”그녀는 정말 기계같이 딱 하라는 만큼만 하고 있었다.배현수가 주동적이면 그녀는 그에게 맞게 행동했고 배현수가 그러지 않으면 그녀도 별 움직임이 없었다.송지연은 몇 초 동안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했다.“그게 바로 가짜 친밀성이야. 네가 멈추면 이 관계는 끝나.”하... 가짜 친밀성.확실히 그들은 지금 친한 척만 하고 있었다.그가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그녀도 확실히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했지만 이런 접근은 단지 육체적인
결과가 보이지 않는 관계...전화기 너머의 송지연은 더 확실한 말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너와 조유진의 관계는 너만 계속 헌신하고 있어. 유진 씨가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너는 계속 붙잡고 놓지 않아. 하지만 너도 그런 상황에 지쳐서 이미 점점 네 화를 못 이기고 있어. 이런 나쁜 관계 심지어 최악인 감정에 오래 머물다 보면 너나 유진 씨 두 사람에게 모두 안 좋아.”“PTSD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 거야?”“극한의 스트레스나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복잡한 심리적 반응이야. 극도로 강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서 이러한 반응이 지속해서 나타나. 그로 인해 짧게 혹은 장기적인 트라우마가 생겨. 만성 환자의 3분의 1은 평생 치유되지 않아.”평생 치유되지 않는다...이 한마디는 마치 거대한 돌덩이처럼 배현수의 심장을 짓눌렀고 순간 그는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아팠다.사실 예전의 조유진은 피를 봐도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피를 보는 것을 이토록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안정희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일 가능성이 크다.하지만 조유진이 정말 배현수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다면 왜 이런 스트레스 반응이 생기게 된 것일까?배현수가 전에 복수한 것 때문에?“진짜로 PTSD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평소 유진 씨 반응을 관찰하고 또 평소에 먹는 약은 없는지 한 번 봐. 만약 너에 대한 스트레스 반응이 이미 호흡곤란을 일으킬 정도로 심각하다면 유진 씨도 자기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치료를 받으러 갔는지 안 갔는지는 모르지. 왜냐면 국내에서는 심리 질환에 대해 별로 중시를 안 하거든.”겉으로는 아주 정상인 것처럼 혹은 정서가 매우 안정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단지 기분 나쁜 감정으로 간주하고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물론 어떤 사람은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심각한 상태라 치료하지
지금도 집에는 그녀가 생전에 쓰던 바이올린이 놓여 있었다.엄준은 조유진과 정말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엄창민 역시 신희수의 사진을 보고 조유진의 모습이 왠지 신희수와 비슷하다고 느꼈고 머릿속으로 과감한 추측을 했지만 이내 곧 부정했다.얼마 전 자기가 친딸이라고 찾아온 백소미 친자 확인 검사를 엄창민이 직접 가서 했고 그녀가 바로 엄준의 친딸이었다.“아버지, 지난번에 소미 신분을 공개할 거라고 하신 건 언제쯤 하실 예정이세요?”“급하지 않아. 일단 다음 주에 소미를 집에 데리고 와서 적응할 수 있는지 봐야지.”그 말에 엄창민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엄준은 걱정이 태산인 얼굴을 한 엄창민을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조유진을 찾으러 대제주시에 가고 싶은 거야?”“최근 인터넷에 뜬 기사를 보니 유진이에게 많은 일이 생긴 것 같아서요. 사실 많이 걱정돼요.”“지금 대제주시의 업무는 명월이가 담당하고 있어. 만약 사적인 일로 간다면 너를 단속할 사람은 없어.”순간 엄창민의 눈이 살짝 빛났고 그 모습을 본 엄준은 그에게 몇 마디 당부했다.“가 봐, 너 같은 애가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쉽지 않은데 모처럼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으니 적극적으로 한번 다가가 봐. 늘 그렇게 벙어리처럼 있으니 유진 씨가 어떻게 네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알겠니?”“네, 하던 일 마치면 바로 비행기 티켓 예매할게요.”...밤의 원주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조윤미는 심미경을 위층으로 끌고 가더니 방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너 여기 가만히 있어.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강이찬, 이 자식이 진심으로 너와 결혼하고 싶은지 한번 보고 싶네!”말을 마친 조윤미는 대문까지 걸어 잠그고 강이찬이 들어올 틈조차 주지 않았다.밖에는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졌고 심미경은 2층 창가에 서서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우산을 쓰지 않은 그의 몸은 이미 흠뻑 젖었다.조윤미는 딸을 힐끗 쳐다보고는 무정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그놈이 네 배를 불리고도 책임지
마당에는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조윤미는 한 손에 우산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강이찬의 발 옆에 검은 우산을 놓고 당당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이만 가봐요. 미경이는 이찬 씨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는 강이찬의 시야마저 흐릿하게 했다.그는 커튼이 닫힌 2층을 천천히 올려다보며 힘이 다 빠진 쉰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미경 씨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제 아이예요. 미경이 혼자 어떻게 아이를 키울 수 있어요? 어머님, 제가 꼭 미경 씨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어떻게 책임질 건데요? 미경이에게 양육비를 줄 거예요? 아니면 계속 대제주시로 데려가 이찬 씨 가사도우미로 쓸 거예요?”조윤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가사도우미라는 단어에 강이찬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저 한 번도 미경 씨를 가사도우미로 생각한 적이 없어요.”그러자 조윤미는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계속 말했다.“그러면 우리 미경이 사랑해요? 미경이에게 듣기로는 이찬 씨가 먼저 고백했다고 들었어요. 맞나요?”“네.”먼저 고백한 건 사실이다.처음에 강이찬이 심미경을 따라다녔고 지금 그녀에게 미안한 사람도 강이찬이었다. “이찬 씨 집이 잘산다는 거 알아요. 대제주시에서 일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리가 사는 이곳은 대제주시에 비하면 한없이 작아요. 미경이 아버지도 돌아갔고 우리 집안 형편도 그냥 그렇죠. 하지만 미경이도 우리 집안의 귀한 딸이에요! 우리가 아껴 먹고 아껴 써서 겨우 대학까지 보낸 이유가 갖은 수모를 견디며 누구 뒷바라지나 하라고 그런 게 아니에요. 우리 미경이 바보 같아서 그저 잠시 데리고 노는 거라면 여기서 이럴 필요 없어요. 배 속의 아이를 없앨지 아니면 그냥 나을지는 이제 이찬 씨와 상관없는 일이에요!”조윤미가 독설을 퍼붓고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강이찬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왔다.그 모습을 본 조윤미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이찬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