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초윤은 귓가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눈을 반짝였다.“예뻐요? 난 항상 예뻤는걸요?”“...”남초윤의 뻔뻔한 나르시시즘에 육지율은 피식 가볍게 웃었다.“왜 웃어요?”“그냥 당신이 여기에 끼어있는 모습이 깍두기 같아서요.”“...”육지율은 더 이상의 말을 아끼고 남초윤을 그대로 끌고 자리를 떴다....눈팅족들이 이제 모두 떠나고 그 자리에는 배현수와 조유진만이 남아 서로 대치 중이다.“너도 잘 알다시피 우리 사이에 딸이 있다고 하여도 너는 절대 신분세탁을 할 수 없어.”조유진은 배현수의 질의에 입술을 달싹였다.“그럼 배 대표님은 어찌할 계획이신가요? 저를 버리고 선유만 데려가실 건가요? 아니라면 배 대표님께 있어서는 선유도 아무것도 아닌가요? 그렇다면 제가 지금 선유를 데리고 집으로 가겠으니 계속하여 예전처럼...”조유진은 계속하여 말을 이으며 몸을 돌려 선유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려 했다.그렇다. 조유진은 자신의 결정이 후회되었다. 그녀는 결코 선유를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그러자 배현수가 다급히 조유진의 가녀린 손목을 덥석 잡아채고는 싸늘하고 검은 눈빛으로 조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네가 선유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애초에 오늘 강이진이 선유를 왜 데려갈 수 있었던 건데?”배현수의 질타는 정확히 조유진의 정곡을 찔렀고 조유진은 배현수의 공격에 안색마저 창백해졌다.“내가 조선유와 처음 만나게 된 곳은 병원이었어. 그때 선유는 자신의 엄마가 돈 벌러 나갔기 때문에 병원에 혼자 남겨졌었지. 만약 그때 마주친 사람이 내가 아니라 인신매매 납치범이었다면? 조유진, 너 혼자 그 후과를 감당할 수는 있기나 해?”배현수가 내뱉는 매 한 글자, 한마디가 정확히 조유진의 가슴에 박혀 끊임없이 그녀의 마음을 찢어놓았다.조유진은 힘겹게 목을 가다듬고 간절한 눈빛으로 배현수를 바라보았다.“저도 제가 당신을 이길 수 없고 양육권도 제가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는 조건이 있어요.”“말해.”“당신이 선유를 데
차 안.조선유는 계속하여 숨이 넘어갈 듯 울더니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배현수는 문득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급히 선유를 안아 들어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선유야, 왜 그래?”“아빠... 나...”선유는 가슴을 힘껏 누르며 작은 입을 벌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기 시작했는데 너무나도 숨이 가빠 보였다.“빨리 병원으로 방향 꺾어!”...99가9999 차 번호를 가진 검은색 마이바흐가 점점 조유진의 눈앞에서 멀어졌다.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조유진의 시야를 자꾸 흐리게 하였다.조유진이 모든 희망을 놓으려던 찰나-그 검은 색의 마이바흐가 다시금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마이바흐가 달리는 방향은 다름 아닌 병원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설마 선유에게 문제가 생긴 건가?’이를 보자마자 조유진도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안, 조선유는 곧장 응급실로 실려 갔다.조유진은 다급히 달려와 곧바로 의사를 붙잡고 말을 건넸다.“의사 선생님, 조선유는 항상 동맥 카테터가 닫히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애가 이렇게도 컸는데 그런 문제가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지금까지 수술하지 않은 겁니까?”“그게...”말문이 막힌 조유진이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 순간, 배현수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 당장 수술을 진행 시켜주세요.”“오늘은 힘들 것 같은데...”곧이어 서 부원장이 도착했고 그는 먼저 배현수에게 인사를 건넸다.“배 대표님, 안녕하십니까.”“안녕하십니까, 서 부원장님.”배현수는 방금 병원에 오는 길에 이미 서 부원장에게 전화를 걸었었다.서 부원장은 자초지종을 들은 뒤 곧이어 입을 열었다.“조 선생, 여긴 SY 그룹에 배 대표님일세. 안에 있는 아이는 이분의 따님이시고. 그러니까 지금 바로 수술 가능한가?”원장까지 얼굴을 비춘 마당에 조 의사도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비록 그는 배 대표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서 원장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수술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알겠습니다. 지금
배현수는 무섭도록 싸늘한 저기압을 풍겼다.분위기가 싸늘해지고 몇 초 동안 서로 아무 말 없이 대치한 뒤 결국 배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선유가 퇴원하기 전 우리의 사이를 선유가 잘 받아드릴 수 있도록 선유에게 잘 설명해놓아야 할 것이야.”“네. 약속드리죠.”“또 바라는 게 있나?”배현수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싸늘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한걸음 양보하였다.조유진은 배현수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비록 선유는 밝고 활발한 아이지만 갑자기 환경이 바뀐다면 잘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해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대표님께서 될수록 시간을 내셔서 선유와 많은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선유가 자기 전 책도 읽어주고요. 대표님도 보셨다시피 선유는 대표님을 정말 좋아해요. 그리고 항상 자신의 아빠가 학부모 회의에 참석했으면 했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선유의 학부모 회의는 될수록 불참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심호흡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그게... 대표님께서는 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선유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저와 선유는 지난 6년 동안 서로를 의지한 채 살아왔어요. 이렇게 갑자기 저더러 선유를 떼어내라고 하면 도무지 떼어낼 자신이 없습니다.”“일주일에 한 번은 너무 빈번해. 그렇다면 선유가 너한테 더 의지하게 될 거야.”“그럼 보름에 한 번이요.”“그래.”참 흔쾌히도 승낙했다.조유진은 여전히 붉은 눈시울을 한 채 배현수의 대답을 듣자 그녀의 얼굴에 드리웠던 무거운 감정도 한결 가벼워졌다.조유진에게는 아직 약 반년가량의 시간이 남아있다.이 반년 동안 조유진은 최선을 다하여 선유에게 사상작업을 하여 선유가 엄마가 없는 생활에 점차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다.수술실의 빨간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배현수와 조유진은 수술실 밖에 놓여있는 벤치에 앉아있었고 둘 사이에는 두 자리나 띄워져 있었다.그들에게는 분
“나와 송인아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 약혼녀도 아니고.”이유는 모르겠지만 배현수가 웬일로 이 일에 대하여 해명을 했다.사실 배현수는 조유진에게 이를 해명할 의무는 없었다.배현수의 대답에 조유진은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편애하거나 하는 문제는 없겠네요. 저는 대표님께서 좋은 아버지가 되실 수 있으리라고 믿어요.”어디 좋은 아버지뿐이겠는가. 예전에 배현수는 좋은 남자친구이기도 했었다. 단지 조유진이 그 소중함을 몰랐을 뿐이다.그로부터 더는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개입 수술은 큰 수술이 아니었지만, 수술시간이 짧지만은 않았다.조유진 왼쪽 가슴의 상처는 오래도록 줄곧 회복되지 않았고 아까 차를 뒤쫓으며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상처가 다시 찢어져 뒤늦게 몰려오는 통증에 가슴이 파일 것만 같았다.서정호는 조유진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발견하고 다정하게 다가가 물었다.“아가씨, 혹시 상처가 아프신 겁니까?”“아까 너무 빨리 뛰어서 그런지 조금 건드렸나 봐요. 전 괜찮습니다.”조유진은 손을 뻗어 상처를 힘껏 꾹 누르며 상처의 통증이 뚜렷하게 전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그때 옆에 앉아있던 배현수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의사한테 가서 보여줘 봐.”“괜찮아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유진의 몸이 붕 뜨더니 그대로 배현수의 품에 안겼다.조유진은 배현수를 바라보며 잠시 몇 초 동안 넋을 잃었다.배현수의 행동은 조유진에게 있어서 매우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심지어 이건 배현수의 총애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으니...“내려놓아 주세요. 저 절로 걸을 수 있어요.”“난 분명 말했어. 신세 지기 싫다고.”배현수는 준수한 얼굴을 자랑하며 여전히 차가운 말들은 내던졌다.하지만 조유진을 안아 드는 동작에는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내심 느껴졌다.배현수는 조유진을 안아 든 채 흉부외과로 향했다.서정호는 배현수와 조유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입과 몸이 따로 노시는 분이라니까.”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선유는 병실로 실려 갔고 그 곁은 조유진이 지키고 있었다.배현수도 한편에 서 있었지 지금만큼은 그의 존재가 아무런 쓸모도 없게 느껴졌다.“대표님, 여기는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업무상의 일이 있으시다면 먼저 가보셔도 됩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서 비서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조유진은 배현수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자리를 뜨리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배현수는 다른 한편에 놓여 있는 소파 위에 풀썩 앉더니 나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선유는 내 딸이야. 책임감 없게 혼자 병실에 남겨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이 말은, 지금 조유진을 대놓고 면박주는 건가?조유진은 입술을 깨물더니 그래도 해명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곧바로 입을 열었다.“당시 대표님께서 제 밥줄을 끊여놓았으니 저를 채용하려는 회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야간아르바이트를 다녀야 했고요... 생활에 쫓기지만 않았다면 선유를 혼자 병원에 남겨두고 갔을 리는 없겠죠.”“그러니까 지금 내가 네 밥줄을 끊여놓았다고 탓하는 거야?”“아니요. 그저 변명하기 싫어서 상황을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허, 오히려 내 잘못이 되어버린 거네.’두 어른 모두 병실에 남아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아이의 곁을 지켰다.이 두 사람은 아직도 서로에게 쌀쌀맞게 대하며 30분 동안 누구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서정호는 이 분위기가 너무나도 괴상하여 어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울며 겨자 먹기로 얼어붙은 뚫고 정적을 깨트렸다.“대표님, 아가씨, 두 분 모두 점심 식사도 못하셨잖습니까. 이제 벌써 오후가 되었는데 슬슬 배고프시죠? 제가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오겠습니다.”조유진은 서정호가 자리를 뜨면 이 공간에 배현수와 단둘이 남을까 봐 무서웠다. 단둘이 남게 되면 분위기는 더 얼어붙어 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여 조유진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전 배고프지 않아요.”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요동쳤다.“.
“대표님 손, 혹시 담배 피우시다가 다치신 건가요?”배현수의 검지와 엄지손가락 옆면에는 깊은 화상 자국이 박혀 있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새로운 상처와 오래된 상처가 겹겹이 쌓여 남은 흔적 같았다.전에도 조유진은 이를 보았지만, 당시 재회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지라 둘 사이의 관계가 너무 긴장되어 있던 탓에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었다.비록 여전히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래도 덤덤하게 얘기는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아니야.”배현수는 무심하게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조유진도 배현수가 그녀에게 그 이유를 알려주고 싶지 않아 하는듯한 눈치에 더는 묻지 않았다.눈치껏 행동하는 것, 현재의 조유진이 운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능이었다.저녁이 되자 배현수가 밖에 나가 밥을 사 왔다.조유진은 그러한 배현수에게 화상 연고를 건네주었다.“방금 의사 선생님께 가서 처방받아온 거예요. 사용하고 싶으시면 사용하시고 싫으시면 그냥 버리세요.”“밥.”정말 간결한 답변이었다. 아마 그녀와 단 한마디도 더 나누고 싶지 않다는 의미인듯하다.조유진이 마침 그 연고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배현수가 건네는 밥을 받으려고 하자 배현수가 갑자기 조유진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연고를 낚아채 갔다.배현수가 받아들였다.조유진은 밥을 건네받으며 계속하여 물었다.“밥은 드셨어요?”“응.”배현수는 간단하게 응하고는 말을 꺼냈다.“담배 좀 피우고 올게.”...배현수와 조유진은 하룻밤 내내 조선유의 곁을 지켰다.이튿날 오전, 선유가 깨어날 때 두 사람이 보내오는 관심 어린 눈빛에 창백한 입술이 움찔거리더니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조유진은 손을 뻗어 선유의 이마를 어루만져주며 물었다.“선유야,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선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고는 금방 깨어났는지라 아직 갈라져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아빠, 안 헤어지면 안 돼요?”눈을 뜨자마자 어른들의 일을 걱정하다니. 조유진은 선유의 말에 죄책감이 몰려왔다.“선유야, 너 방금 개입 수술 끝났으니
녀석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감정이 격해져 자신의 침에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해댔다.조유진은 다급히 선유의 등을 도닥여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선유를 달랬다.“엄마는 너 두고 안 가. 엄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널 어떻게 버리고 떠나겠어? 선유야, 엄마가 미안해. 다시는 이런 말 안 할게. 응?”그때 배현수가 병실 밖에서 걸어들어오며 입을 열었다.“네 엄마와 나는 영원히 네 곁에 있어 줄 거야.”배현수의 여유로운 목소리는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워 마치 안정제 같았다.아빠의 대답을 듣자 선유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고 선유의 흘러나온 콧물이 방울 모양으로 부풀어 올랐다.“아빠, 정말이에요?”“응, 정말이야.”그러자 선유는 배현수를 향해 작은 손을 붕붕 흔들었다.“아빠, 그럼 이리로 와보세요!”배현수가 선유의 부름에 병상 쪽으로 걸어왔다.그러자 조선유는 조유진과 배현수의 손을 꼭 쥐고 함께 겹쳐놓고는 애어른의 말투로 그들에게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그럼 지금 빨리 화해해요. 앞으로 싸우면 안 돼요, 알겠죠?”“선유야...”조유진은 말문이 턱 막혀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러자 그때 배현수가 도리어 조유진의 손을 잡으며 선유에게 말을 건넸다.“지금 우리 화해했으니까 너도 이제 울지 마.”선유는 부풀어 오른 콧물 방울을 퐁 터뜨리며 바로 울음을 뚝 그쳤다.조유진은 자신과 배현수의 꼭 잡힌 두 손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이는 그저 배현수가 선유를 달래기 위한 수법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지금에야 달래는 데에 성공했지만 앞으로 며칠 후면 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얼마 뒤, 의사가 병실로 들어와 선유에게 간단하게 몇 가지 진찰을 하였다.“별다른 문제는 없어요. 수술 뒤에는 가볍고 영양이 균형적인 식사를 하셔야 하고요. 일주일 뒤쯤이면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퇴원한 뒤 격렬한 운동 하지 마시고요. 큰 수술은 아니지만 그래도 심장 수술이기에 수술 뒤에는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감정이 격해지면 절대 안
선유는 말을 마치고는 곧바로 얼굴을 찡그렸다.그러자 조유진은 다급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선유를 달랬다.“아니야. 엄마 지금 웃고 있잖아. 빨리 찍어. 방금은 어떻게 웃을지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야.”그러자 선유는 금세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세 식구 모두 카메라 안에 담겨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고 화목해 보였다.아빠는 잘생겼고 엄마는 자애롭고 아이는 귀여웠다.여러 장을 찍은 뒤 선유는 사진첩을 이리저리 뒤지며 한참을 바라보았다.이 아이는 정말이지...두 어른의 명줄을 꽉 붙잡고 있기라도 하듯이 두 사람은 선유가 하라는 대로 모두 척척 협조해주었다.그렇게 세 사람은 오후 내내 사진 소동을 일으켰다.저녁이 되자 조유진은 선유에게 계란찜과 죽을 떠먹여 주었다.아직 영양 수액을 맞고 있어서 선유도 배고프지 않아 많이 먹지는 못했다.다 먹고 난 뒤 선유는 병상의 다른 한쪽을 작은 손으로 팡팡 치며 배현수에게 눈짓했다.“아빠, 아빠도 이리로 와요. 저 이제 졸리니까 아빠가 잠자기 전 이야기 해주세요!”배현수는 선유 곁으로 다가와 앉았고 선유는 배현수의 품에 기댔다.“뭐 듣고 싶어?”그러자 선유는 연신 주접을 떨었다.“아빠가 해주는 이야기면 다 좋아!”선유의 귀여운 아양에 배현수는 가볍게 피식 웃었다.“그럼 웃긴 개그 이야기 해줄게.”선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빠가 웃긴 이야기도 할 줄 알아요?”배현수는 겉보기에는 무척 싸늘하고 엄숙하여 마치 높은 벼랑 끝에서 피어난 꽃 같아 적어도 우스갯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어느 날, 공주가 대마왕한테 잡혀갔어. 그리고 대마왕이 공주한테 아무리 목이 터지라 외쳐도 아무도 구하러 와주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 그러자 공주가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어. ‘목이 터지라, 목이 터지라...’ 하지만 아무도 ‘공주님, 구하러 왔어요’라고 말해주지 않았어.”말을 마치고 배현수가 고개를 숙여 그대로 굳어버린 선유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뭐야? 안 웃겨?”배현수가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